스노볼

"강이가 죽을 것 같아."
나의 귀가시간이 늦어질 때마다 엄마는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 거짓말인 걸 알면서도 허겁지겁 집에 달려갔다. 강이는 현관까지 뛰어와 엉덩이가 실룩거릴 정도로 꼬리를 흔들었다. 엄마의 말이 거짓말이어서 좋았다. - P9

꺼진 텔레비전 앞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있었다. 나의 미래처럼 캄캄했다. 나는 미래를 예측해본 적이 없었다. 미래를 다짐해볼 때는 많았다. 언젠가 먼 곳까지 가볼 것이다. 먼 곳에서 더 먼 곳을 향해 가며 살 것이다. 이불속에서 얌전하게 죽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종류의 다짐이었다. 다짐으로 점철된 미래를 펼쳐놓았다. 미래를 알 수 있는 유일한 예언이 내게는 다짐뿐이었다.
엄마는 크기가 다른 냄비를 써도 라면 물의 양을 정확히 예측했다. 반장은 중간고사에 어떤 문제가 나올지 정확히 예측했다.
선생은 무슨 말을 해야 아이들이 웃을지 예측했고, 아이들은 어떤 말을 해야 선생이 화를 낼지 예측했다. 그렇지만 나는 예측할수 있는 게 없었다. 읍내동에서 쌓아왔던 예측의 기술은 전민중학교에서 번번이 빗나갔다. 읍내동 중학교의 영어시간에는 유창한 발음으로 영어 교과서를 읽는 아이가 놀림의 대상이 되었지만, 전민중학교의 영어시간에는 모두가 원어민이 되었다. 내가읍내동에서 선행학습반에 뽑혀 한 학년 위의 수학 문제를 풀고있을 때, 전민동 아이들은 미분이니 적분이니 하는 두세 학년 위의 수학 문제를 풀었다. 이해받을 거라는 예측으로 던진 말에 선생들은 화를 냈고, 화낼 거라는 예측으로 던진 말에 친구들은 옷음을 터뜨렸다. 읍내동에서 그나마 똑똑한 아이로 취급받던 나는 전민동에 오자 멍청한 아이가 되었다. 달라지는 상황 앞에서도 예측이 정확한 사람은 대단한 사람처럼 보였다. 얼마나 많은냄비를 써봐야 어느 냄비를 쓰든 라면 물을 정확히 맞출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이 문제를 풀어봐야 어떤 선생이든 무슨 문제를 낼지 알아맞힐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이 꽃을 키워봐야 얼마나 많이 꽃을 죽여봐야 다짐을 더 자주 다지는 것밖에는 내가 나의 미래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나는 다짐에 골몰했다.
소영의 예측 방식은 달랐다. 내 방식이 먼 곳에 놓인 돌멩이를보려는 거라면, 다른 사람들의 방식이 쥐고 있는 돌멩이를 꾸준히 쥐고 있는 거라면, 소영은 돌멩이들의 위치를 파악하고 바둑을 두는 방식이었다. 현실에 두는 돌 하나로 미래의 돌의 위치를바꿔놓았다. 소영의 곁에서 나는 까마득하게 느껴졌던 미래가 현실을 향해 마구 달려오는 것을 보고는 했다. 막연한 단어로만 꺼내보았던 미래가 현실 속에서 펼쳐지는 것을 목격했다. 소영은 현실이라는 그물로 미래를 포획하는 유일한 아이였다. 제 마음대로 꽃을 피우고 죽일 수 있는 유일한 아이였다.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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