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사범학교에서는 1학년부터 5학년까지 국어 과목을 가르쳤지요. 물론 일제시대 국어는 일본말이었는데, 가서 부임을 해보니까 제가 최초의 국어과 교유였습니다. 일제시대에는 조선어를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각급 학교 차이가 없고 거의 다 한글을 몰랐어요. 그러니까 학년 차이 학교 차이도 없이 우선 한글을 가르쳐야 했고맞춤법을 가르쳐야 했습니다.
춘천사범학교에서는 5학년 학생들이 "선생님, <용비어천가>를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희망을 해요. 그래서 가르치겠다고 했습니다. 당시 나이가 어리니까 용감했지요, 제가 〈용비어천가〉를 어디서 배웠겠어요? 중세어를 알기나 해요? 그런데 ‘그래 그거 공부하자‘ 탁 아주 그냥 즉석에서 쾌하게 답을 하고서 <용비어천가>를 가르쳤던겁니다.
저는 그냥 아는 대로 가르쳤는데 사실 그 <용비어천가> 가사의 내용이 역사적인 배경이 많거든요. 그걸 모르면 가사의 의미가 이해가 안 돼요. 이해가 안 되니까 자꾸 질문을 해요. 그런데 제가 알아야지그걸. 그래서 인제 대답을 못 하고 모르겠다고 그러고 가만히 생각을해봤죠. ‘이래가지고는 내가 안 되겠다. 아무래도 국어학 전공을 해야되겠다‘ 그래서 국어학을 전공하기로 결정했습니다. - P63

◆◆◆ 조선어학회는 1921년에 조선어연구회라는 명칭으로 창립됐습니다. 그 후 1931년 1월에 이 학회가 개편되면서 고루 이극로 선생이 직접 조선어학회를 주도해서 여러 가지 사업이 시작됩니다. 조선어학회의 활동으로 이루어진 결실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말 표기의 통일입니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한글 맞춤법통일안》이 1933년 10월에 학회 안으로 제정된 것이지요. 1941년 1월에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을 제정한 것도 우리말 표기 통일의 한 요소였습니다. 둘째는 언어의 통일입니다. 이것은 바로 사정査定한 조선어, <조선어 표준말 모음>이죠. 1936년 10월에 발표됐죠. 셋째는 언어규범의 종합입니다. 이것은 <조선어 대사전>을 1942년 10월에 편찬한 것을 가리킵니다. 이 세 가지로 민족어 확립은 일단 역사적으로 완결되었다고 평가해야 되겠습니다.

●●● 조선어학회 활동과 그 의미를 큰 틀에서 말씀해주셨습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1942년 10월에 《조선어 대사전>을 편찬한 것은 민족어 규범화 사업이 일단락되었다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물론 1942년 10월에 일어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조선어 대사전>의 원고가 일본경찰에 압수되며 출판되지 못했지만, 해방 후인 1947년 《조선말 큰사전)이라는 이름으로 첫째 권이 나오고, 1957년 <큰사전>이라는 이름으로 여섯째 권이 나오면서 사전 출판이 완결되었죠. - P67

◇◇◇ 일제강점기에 조선어사전, 우리 국어사전 상황을 보면 1880년대까지 올라가요. 1880년대에는 주로 선교사들이 사전을 편찬했는데,1920년에 오면 조선총독부, 즉 식민지 당국에서 <조선어사전)을 냈어요. 이런 편찬사업들이 계속되고 그 후에는 문세영이 (조선어사전)을편찬했어요. 그런데 이 사진들은 어휘의 의미를 설명하는 정도지 우리말 규범에 대한 전제가 없었어요. 규범이라고 하면 맞춤법과 표준어이고, 그다음에 발음에서는 장단 문제, 된소리 발음 문제 등이 있는데, 이런 것들에 대한 규범이 없으니까 사전에서의 기술이 들쭉날쭉이고 또 믿을 수가 없는 거예요. 이처럼 규범적으로 확실치가 않으니까 그때까지 국어사전은 어휘의 의미를 찾아보는 것으로 끝났지요.
그래서 조선어학회의 조선어 대사전, 즉 <조선말 큰사전>은 국어규범을 전제로 편찬했다는 면에서 역사적 가치가 있는 것인데, 실제로 이것이 출판된 게 1957년이었어요. 6권으로 완간된 때가. 그러니까 1957년 전까지는 국어 규범을 제시하는 사전이 없었던 거예요. 그런 목적에 소용되는 사전이 없으니까 너도나도 사전을 편찬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 거죠. 6.25사변 전에 박문출판사에서 시작한 일석(이희승)의 국어사전도 그러한 목적에서 편찬했던 겁니다.
일석의 국어사전처럼 해방 후에 편찬한 국어사전은 <한글 맞춤법통일안>의 수정 부분을 반영할 목적이 컸죠. 해방 직후에 맞춤법 일부를 수정했었으니까, 맞춤법을 포함해서 국어 규범을 사전에 반영하는문제가 있었어요. 표제어뿐만 아니라 그 주석의 풀이말도 개정 맞춤법에 따라 써야 했던 거지요.
맞춤법 다음에 중요한 게 표준말을 보여주는 거였어요. 조선어학회에서 정한 표준말은 사실 7,000개가 안 됐기 때문에, 그 외의 단어들이 표준어인지는 판단할 수가 없었어요. 더군다나 일반인들은 더 몰라요. 그러면 사전을 편찬할 적에 그걸 다 해결해놔야 해요. 그래서 사전 편찬에서 표제어의 표준어 여부를 판단하는 업무가 부가된 거예요. 표준말에 없는 것은 어떤 것이 표준말이냐를 정해야 했지요. 그러면 편찬자는 조선어 표준말 모음>에서의 표준말 기준을 보고 "이기준으로 봐서 이 단어는 표준어로 삼았을 거다", "그래야 앞뒤가 맞다"등과 같은 판단을 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이전의 국어사전 편찬원처럼 어휘 풀이에 그치는 게 아니라 규범의 종합적인 판단까지도 하는것이라고 할 수가 있지요. - P77

해방 직후 조선어학회가 중심이 된 국어 정책은 크게 ‘ 한자 폐지, 한글 전용화‘와 ‘일제 잔재를 일소하는 국어 정화‘의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해방 후 모든 교육에서 한글만 쓰는 것이 원칙이 되었고 미군정 문교부에서는 <한자 안 쓰기의 이론>(1948)을 출간했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법률 제6호로 <한글 전용법>(1948.10)을선포하며 한글 전용을 시행했다. 일본식 용어의 철폐와 우리말 도로찾기를 목표로 이루어진 국어 정화 운동은 국어 정화의 지침으로서<우리말 도로 찾기>(1948.6)를 펴내며 본격화했다. 그러나 실제 언어생활에서는 여전히 한자 병용의 글쓰기가 계속되고 있었고, 국어 정화지침 역시 성글게 이루어지면서 정확하지 않은 정보를 퍼뜨리는 문제가 남아 있었다.
해방 직후 조선어학회 중심의 국어 정책은 일제 치하부터 이어진 군국주의 혹은 국수주의의 영향 아래 이루어진 측면도 있었다. 정부수립과 함께 좀 더 깊이 있는 국어 정책이 가능했음에도, 민족 혹은민족의 순수성이 지나치게 강조되면서 한글 전용이나 순우리말 쓰기등과 같은 정책이 맹목적으로 시행된 것이다. 한편 <한글 맞춤법 통일안》은 해방 후에도 일제강점기에 제정된 내용에서 큰 수정 없이 자리를 잡았지만, 어법에 맞춰 적도록 하는 형태주의 표기법이 일반 대중에게는 매우 어렵다는 문제의식이 팽배했고, 이는 한국전쟁 이후 한글 간소화 정책이라는 강력한 반작용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러한 문제들은 한글 맞춤법이나 표준어 규정이 국가의 권위가 아닌 조선어학회의 권위에 기대어 어문 규범의 역할을 해온 데 따른 것이었다. 한편 조선어학회는 규범화를 주도하면서 한글 풀어쓰기와 같은 조선어학회 일부 연구자 특유의 주장을 규범화하려고 했다. 이처럼 일방적인 행태는 합리적이고 체계적으로 국어 규범을 정립하고자했던 연구자들이나 일반 대중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고 해방 직후 국어 정책을 펼쳐나가는 데 커다란 갈등 요인이 되었다.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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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G는 스웨덴의 법률체계에 몰두하다가 잠시 머리를 식히거나 자막 없이 잉마르 베리만 영화를 볼 때면, 현지에서 벌어지는 사회적 논쟁의 면면을 존경어린 눈빛으로 지켜보았다" 여성을 위한 또 다른 세상, 즉 얼마든지 일할 수 있고 투쟁을 통해 불공평한 조건을 없앨 수 있으며 필요하면 임신상태를 중단할 수 있는 세상이 현실에서 가능하다는 사실을 어떤 미국인이알았겠는가? 사회운동가들의 압력으로 정부가 남성과 여성을 기존의 성역할로부터 해방시키는 작업에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이는 세상이라니! RBG개인에게도 가히 혁명적인 세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스웨덴에 도착해서 혼자 지내기 시작한 지 6주 만에 이곳에 정말 잘 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 P61

대법관들은 여전히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RBG는 말을 이었다. "성별은인종과 마찬가지로 눈에 띄지만 바꿀 수는 없는, 개인의 능력과 필연적 상관관계가 전혀 없는 특징입니다." 이 직유는 헌법적 맥락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사건이 촉발시킨 일련의 소송에서 대법원은인종에 근거해 차별을 규정한 거의 모든 법률에 대해 그것이 헌법에 위배되거나 "엄격심사"를 면할 수 없다는 관점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법원은 리드사건에서 엄격심사를 적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지만, 이후로는 어떤 식으로는 엄격심사가 필요하다는 태도를 취했다. 성별을 사유로 차별을 규정한 법률이 인종을 사유로 차별을 규정한 법률과 다를 바가 있을까? RBG는같은 맥락에서 성차별을 규정하는 법률 또한 위헌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촉구했다.
주어진 시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 RBG는 대법관들을 바라보면서 임신중절 옹호와 여성참정권을 부르짖었던 세라 그림케를 인용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우아한 방식은 아니었지만, 오해의 여지를 조금도 주지 않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내 성별을 근거로 나를 우대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결코 아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바라는 것은 하나다. 당신들의 발로 우리 여성들의 목을 더 이상 짓누르지 말라. 이것이 전부다."
#12 - P66

RBG보다 열 살도 더 어린 여성 법학도들은 불평을 하는 데 그치지 않고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요구 사항을 내걸었다. 상당수가 미시시피 출신이자 학생비폭력실천위원회 Student Nonviolent Cordinating Counciltee 소속으로 여성의시민권 확보를 위해 투쟁하는 학생들이었다. 이들은 변호사가 사회운동에앞장서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로스쿨에 진학했고, 여성들 자신도 사회 변혁에 앞장서야 한다고 믿었다. 특히 1968년 이후로는 대학들도 여성에게 문호를 더 활짝 열어야 했다. 존슨 행정부가 연방정부의 예산 지원 철회 대상 목록에 성차별을 추가했기 때문이다.
RBG는 이렇게 활동적인 여학생들을 존경어린 눈빛으로 지켜보았다. 주위를 시끄럽게 만들면 큰일이라도 나는 줄 알았던 자기 세대와 그들은 자못달랐다. 1970년에는 몇몇 학생이 RBG를 찾아와 럿거스대 최초로 ‘여성과법‘ 과목을 개설해달라고 요청했다. RBG는 흔쾌히 수락했다. 여성의 지위와 관련해 내린 연방정부의 결정 및 관련 논문을 모조리 읽는 데는 고작한 달 정도가 소요됐다. 사실 분량이 많지 않았다. 널리 쓰이는 한 교재에서는 다음과 같은 구절도 눈에 띄었다. "토지란, 여성과 마찬가지로 소유의 대상이다."(이 책은 토지 소유에 관한 책이었고, 여성은 비유 대상에 불과했다.) RBG는 도서관을 나서면서 굳게 다짐했다. 말없이 받아들이기만 하던세월은 이제 막을 내렸다고 한때 럿거스대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봉급을 깎아도 어쩌지 못했던 RBG는 그길로 다른 여성 교수들과 힘을 모아 대학을상대로 성차별적 급여체계에 관한 집단소송을 제기했고, 대법원까지 끌고간 끝에 마침내 승소했다. - P71

이 시기에 RBG는 평생 간직할 교훈을 배웠다. 그는 대법관들을 일깨우려했다. 어렵기는 했지만,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훗날 그가 밝혔듯이, "사람은하루아침에 깨우침을 얻지 못한다. 우리 사회는 대개 점진적으로 변화한다.
진정한 변화란 한 번에 한 계단씩 일궈나감으로써 이룰 수 있다." 그는 참고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전략을 세워야 했다. 귀가 안 들리는 것처럼 굴라는 말이 적절하게 다가온 건 이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동료 페미니스트들은 세상을 바꾸려는 열정에 불타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RBG는 자신의 방식대로 세상을 바라보도록 이들을 설득했다. ACLU동료 변호사 캐슬린은 훗날 이렇게 말했다. "그는 법의 진보를 이루려면 한 번에 한 단계씩 밟아 올라가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법원에 ‘논리적 후속 단계‘를선사해야 한다면서 말입니다. 그는 한 단계 올라서면그다음 단계를 이어서 또 다음 단계를 차근차근 밟아나갈 것을 촉구했습니다. ‘그들에게 너무 빨리, 너무멀리 가라고 재촉하지 마라. 그러면 이미 얻은 것도잃게 된다‘면서 수시로 당부했습니다. ‘그 문제는 아직 다뤄질 때가 아니다. 우리는 대개 RBG의 충고를따랐습니다. 그러지 않았을 땐 예외 없이 패배했습니다. "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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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섬 이름들은 자은에게도 익숙했다. 항로에 놓인 기착지들이었다. 물이 떨어지거나 태풍을 만나거나 배를 갑자기 고쳐야 할 때 들렀다. 제물을 바치기도 하고 죽은 자를 묻기도하는 바다 위의 물수제비 흔적 같은 점들. 육지가 그리워 그 섬들이라도 보면 속이 트일 것 같았다. - P23

셋째는 죽은 다섯째의 시신 너머로 그렇게 말했다.
"우리가 글을 배울 때 스승님은 너는 그만 배워도 된다고방에서 내보냈지. 그런데 너는 떠나지 않고 창밖에서 귀로 배웠다. 나중에 스승님이 너를 혼내려 불러 모질게 시험해보았을 때 네가 써낸 것이 내가 써낸 것보다 나았다. 나는 그 일을잊지 않았다. 우리가 진짜 칼을 받았을 때 너는 나무칼을 쥔채, 네가 쓰이지 않으면 신라가 잃는 것이라고 했지. 자, 내가 네게 쓰일 기회를 주겠다. 너는 이제 어쩔 것이냐?"
셋째의 특징은 도발이었다. 여섯째는 태어나서 셋째를 한번도 이겨본 적이 없었다. 자신과 꼭 닮은, 그러나 죽음의 색이 짙어져가는 다섯째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긴 한숨을 쉬었다. 창밖에서 귀로 공부를 쫓아갈 때 몰래 책을 베껴줬던 것은 다섯째였다. 너와 나는 거의 같지, 하고 속삭이면서.. 다섯째에게 빚이 있었다. 다섯째로 살면 다섯째를 살린 것 같을까? - P29

꿈속에서 부르던 노래가 깨어나는 순간에도 입술에 남아 이어질 때가 있다. 어쩌면 그 노래를 놓치지 않기 위해 잠이 물러난 걸지도 모르지만, 그날 새벽 자은이 깨어날 때가 그랬다.
단번에 눈을 떴고, 입술은 가사를 기억하며 달싹이고 있었다.
"달 같은 진주를 네 머리에 꽂았다 내 머리에 꽂았다•••••"
그러자 먼저 일어난 인곤이 바로 뒷부분을 받아 불렀다.
"삼백 궁녀의 머리에 보름달이 떴다 졌다 하였네."
"자네는 노래 전체를 아는가? 나는 한두 구절밖에 알지 못하네."
백제인에게 그 쓸쓸한 노래에 대해 묻는 것은 편한 일이 아니었다. 자은은 인곤의 얼굴에 그림자가 스치는지 보고 싶었지만 새벽빛이 어두웠다. - P41

병사 하나하나로는 보잘것없을지 몰라도 독군 어른 아래에서우리는 뛰어났습니다. 가장 복잡한 작전, 장수부터 어린 병사까지 모두 이해해야 해낼 수 있는 작전이 우리에게 떨어졌습니다. 독군 어른이 만약 장군이 되어 우리를 두고 가셨더라면, 우리도 그 뛰어남을 곧바로 잃고 말았을 겁니다. 우리는 일흔명 남짓이었지만 신라군에 꼭 필요한 존재였습니다. 우리가있어 군 전체가 강의 신이 돕고 바람의 신이 돕는 것처럼 싸울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어찌 가능했습니까?"
자은의 물음에 중봉은 답을 찾으려 기억에 잠겼다.
"지킬 것을 주셨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지킬 것요?"
"집이 없는 자에게는 집을. 밭이 없는 자에게는 밭을, 이름이 없는 자에게는 이름을 주셨고, 가족이 노비가 되어버린 자는 그 주인에게서 되찾아주셨고••••• 그 나눔이 아무 불만도일으키지 않도록 세세한 균형을 살피며 주고 또 주셨습니다.
처음에는 식읍 출신으로 정발된 자들이 모여 있으니 싸우긴 싸우면서도 왜 싸우는지 모르는 이들이 태반이었으나 점점 변해갔습니다. 독군님은 매번 우리 싸움터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얻기 위해 싸우는지, 전체에 비추어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 이기고 진다면 결과는 어떠할지 일러주시곤 했어요. 글자하나 모르는 자가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말들로요."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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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자은은 오래 머물렀던 장안을 사신단과 함께 떠나. 육로로 등주까지 왔다. 유학생으로 처음 당나라 땅을 밟았던 곳에서 다시 떠나게 되다니 한 생이 끝난 듯한 감회가 일었다. 뜻밖의 전쟁으로 사신단이 오가지 않은 기간이 길었고, 덕분에 수학 기간이 배가 되어 지원 없이 고립되고 말았다. 지니고 왔던 것을 다 팔아야 했으며 스승과 친우들이 따로 일거리를 주지 않았다면 굶어죽은 몸이 가는 뼈로 흩어진 지도 한참이었을 것이다. 두 나라의 사이가 드디어 회복되어 신라 왕경에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사흘 먹지 않아도 허기를 느끼지 않게 된 다음이었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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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의견 낭독을 이어가며 RBG의 목소리는 점점 더 갈라지고 희미해졌다. 하지만 열정만큼은 낭랑하게 빛났다. 굳은 얼굴로 옆에 앉아 있던 얼리토는 주먹을 말아 쥐어 뺨에 괴고 있었다. RBG는 투표권법의 고귀한 목적은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 취지는 점점 더 교묘해져가는 유권자 탄압에 맞서 싸우는 데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고는 보수 대법관들이 규제를 좋아하고 의회의 결정을 존중하는 사람들인 줄 알았건만, 이번에는 선을 넘고야 말았다고 덧붙였다. RBG는 소수의견에서 "오늘날 투표권법 파괴에 앞장서는 자들에게 가장 어울리는 단어는 오만"이라고 썼다. 투표권법이 훌륭하게 작동한다는 이유로 그것을 폐기하는 행위는 "이 정도 비에는 옷이 젖을 것 같지 않다고 우산을 내동댕이치는 격이라면서 "
RBG는 이 자리에서 "한때 꿈으로만 여겼던 미국 내 모든 구성원의 평등・시민적 지위, 인종을 빌미로 희석되지 않는 민주주의 체제, 그 안에서 모든 유권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발언권이 위기에 처했다고 일갈했다. 이표현은 마틴 루서 킹의 저 유명한 연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를 참고한것이 분명했다. 여기서 평등한 시민적 지위는 RBG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는대목이었다.
RBG는 40년 전 대법관들 앞에 서서 여성도 헌법상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 따라서 남성과 마찬가지로 평등한 시민적 지위를 누려 마땅하다는 사실, 나아가 시민으로서 권리는 물론 의무까지도 당당하게 진다는 사실을 재확인시킨 사람이다. 그는 킹 목사가 주도한 사회운동의 흐름 속에서 세상에 눈을 떴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문전박대를 당하던 처지에서 제힘으로 벗어났으며, 여성의 권리에 관한 여러 사건을 대법원으로 가져가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 누구도 특히 아이 딸린 젊은 여성이라며 손사래를 쳤던 로펌과 판사들, 임신했다는 이유로 조직에서 내쫓거나 여성이라고 급여를 깎은 상사들은 긴즈버그가 대법관이라는 그 높은 자리에 올라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 P17

딸은 어머니의 가르침을 마음 깊이 새겼다. 루스는 숙녀다운 태도를 한시도 잃지 않았다. RBG는 훗날 이렇게 설명했다. "숙녀다운 행실이란 늘 예의바르게 행동하라는 의미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분노나 질투 같은 감정을 드러내지 말라는 뜻이었지요. 훌륭한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신념과 자존감을 확고하게 지킬 줄 알아야 했습니다. 분노에 차서 펄펄 뛰는 건 절대 금물이었고, 노여움과 분노에 휩싸이거나 충동적으로 맞대응을 하는 것은 시간 낭비요, 기력 낭비라고 배웠죠. 하지만 그 시절 셀리아가 그랬던 것처럼 딸에게 또 다른 가르침을 준 어머니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것은 언제나 독립적으로 살라는 가르침이었다.
그 말은 철학적이면서도 실질적인 경고였다. 셀리아는 어렵사리 모은8000달러 정도의 학자금을 딸의 앞으로 남겼다.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키키 역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그 사실을 알았다. 셀리아는 외상으로 물건을 구입하면 큰일 난다는 사실을 가르쳐준 대공황의 기억을 떠올리며, 자신이 모은 돈을 2000달러 안으로 쪼개어 다섯 군데 은행에 분할 예치했다. RBG는 이렇게 회상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힘겨운 시절이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내게 바랐던 게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거두어 사회에서 성공하는 것 말이다. 나는 그분의 뜻을 그대로 따랐다. " - P44

 그래서 그는 공무원 시험을 치렀다." 연방정부에서 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공무원들은 일반직 분류표를기준으로 업무와 급여가 결정되었는데, 당시 RBG는 5급에 해당되어 민원심사관 자격을 획득했다. RBG는 순진하게도 자신이 취직한 사회보장사무소에 임신 3개월째임을 털어놓고 말았다. 그러자 볼티모어에 가서 연수를 받기 어렵겠다는 말이 돌아왔다. 급수도 최하 등급인 2급으로 떨어졌다. 급여도, 업무 중요도도 낮아진다는 뜻이었다. 같은 사무소에서 일하던 또 다른군인 아내도 5급을 받았지만, 임신 사실을 숨긴 덕분에 볼티모어로 갈 수 있었다. 루스는 이런 이야기를 귀띔 받은 일이 전혀 없었고, 심지어는 출산 전에 퇴직하라는 압력까지 받아야 했다.
RBG는 사회보장사무소에서 특정 계층 사람들이 좀스러운 관료주의의 부조리 탓에 고통받는 모습을 몇 주에 걸쳐 목격했다. 온갖 풍파에 찌든, 비슷비슷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사무소를 찾아와 사회보장 혜택을 받기 위해 대상자로 등록하려 했지만 서류가 미비하다는 이유로 퇴짜를 맞곤했다. 출생증명서가 없었던 것이다. 아메리카 원주민이 아기를 낳았을 때, 그들을 기록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여긴 공무원이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RBG는 잘못된 관행을 조금씩 바로잡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65세정도로 보이는 방문자에게 사냥. 낚시 면허를 말없이 발급해주기도 했다.
오클라호마에서 그렇게 2년을 보낸 뒤, RBG는 하버드대 재입학 허가를받아냈다. 사실 군사기지에서 젊은 엄마로 살아간다는 것은 놀라울 정도로 안락했다. 장교들을 위한 보육시설은 생후 두 달부터 원생을 받았고, 자정까지 운영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여건이 좋다고 해도 어떻게 젖먹이를 둔 엄마가 로스쿨을 소화할 수 있겠는가?
시어머니는 수시로 루스를 안심시켰다. 시아버지도 걱정하지 말라며 한마디 거들었다. "루스, 네가 로스쿨에 못 간다고 해도 너를 나무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하지만 정말 로스쿨에 가고 싶다면 더 이상 스스로의 처지를 한탄하지 말거라. 분명 방도가 있을 거다." 루스는 진심으로 로스쿨에 가고 싶었다.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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