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섬 이름들은 자은에게도 익숙했다. 항로에 놓인 기착지들이었다. 물이 떨어지거나 태풍을 만나거나 배를 갑자기 고쳐야 할 때 들렀다. 제물을 바치기도 하고 죽은 자를 묻기도하는 바다 위의 물수제비 흔적 같은 점들. 육지가 그리워 그 섬들이라도 보면 속이 트일 것 같았다. - P23

셋째는 죽은 다섯째의 시신 너머로 그렇게 말했다.
"우리가 글을 배울 때 스승님은 너는 그만 배워도 된다고방에서 내보냈지. 그런데 너는 떠나지 않고 창밖에서 귀로 배웠다. 나중에 스승님이 너를 혼내려 불러 모질게 시험해보았을 때 네가 써낸 것이 내가 써낸 것보다 나았다. 나는 그 일을잊지 않았다. 우리가 진짜 칼을 받았을 때 너는 나무칼을 쥔채, 네가 쓰이지 않으면 신라가 잃는 것이라고 했지. 자, 내가 네게 쓰일 기회를 주겠다. 너는 이제 어쩔 것이냐?"
셋째의 특징은 도발이었다. 여섯째는 태어나서 셋째를 한번도 이겨본 적이 없었다. 자신과 꼭 닮은, 그러나 죽음의 색이 짙어져가는 다섯째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긴 한숨을 쉬었다. 창밖에서 귀로 공부를 쫓아갈 때 몰래 책을 베껴줬던 것은 다섯째였다. 너와 나는 거의 같지, 하고 속삭이면서.. 다섯째에게 빚이 있었다. 다섯째로 살면 다섯째를 살린 것 같을까? - P29

꿈속에서 부르던 노래가 깨어나는 순간에도 입술에 남아 이어질 때가 있다. 어쩌면 그 노래를 놓치지 않기 위해 잠이 물러난 걸지도 모르지만, 그날 새벽 자은이 깨어날 때가 그랬다.
단번에 눈을 떴고, 입술은 가사를 기억하며 달싹이고 있었다.
"달 같은 진주를 네 머리에 꽂았다 내 머리에 꽂았다•••••"
그러자 먼저 일어난 인곤이 바로 뒷부분을 받아 불렀다.
"삼백 궁녀의 머리에 보름달이 떴다 졌다 하였네."
"자네는 노래 전체를 아는가? 나는 한두 구절밖에 알지 못하네."
백제인에게 그 쓸쓸한 노래에 대해 묻는 것은 편한 일이 아니었다. 자은은 인곤의 얼굴에 그림자가 스치는지 보고 싶었지만 새벽빛이 어두웠다. - P41

병사 하나하나로는 보잘것없을지 몰라도 독군 어른 아래에서우리는 뛰어났습니다. 가장 복잡한 작전, 장수부터 어린 병사까지 모두 이해해야 해낼 수 있는 작전이 우리에게 떨어졌습니다. 독군 어른이 만약 장군이 되어 우리를 두고 가셨더라면, 우리도 그 뛰어남을 곧바로 잃고 말았을 겁니다. 우리는 일흔명 남짓이었지만 신라군에 꼭 필요한 존재였습니다. 우리가있어 군 전체가 강의 신이 돕고 바람의 신이 돕는 것처럼 싸울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어찌 가능했습니까?"
자은의 물음에 중봉은 답을 찾으려 기억에 잠겼다.
"지킬 것을 주셨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지킬 것요?"
"집이 없는 자에게는 집을. 밭이 없는 자에게는 밭을, 이름이 없는 자에게는 이름을 주셨고, 가족이 노비가 되어버린 자는 그 주인에게서 되찾아주셨고••••• 그 나눔이 아무 불만도일으키지 않도록 세세한 균형을 살피며 주고 또 주셨습니다.
처음에는 식읍 출신으로 정발된 자들이 모여 있으니 싸우긴 싸우면서도 왜 싸우는지 모르는 이들이 태반이었으나 점점 변해갔습니다. 독군님은 매번 우리 싸움터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얻기 위해 싸우는지, 전체에 비추어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 이기고 진다면 결과는 어떠할지 일러주시곤 했어요. 글자하나 모르는 자가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말들로요." - P9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