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사범학교에서는 1학년부터 5학년까지 국어 과목을 가르쳤지요. 물론 일제시대 국어는 일본말이었는데, 가서 부임을 해보니까 제가 최초의 국어과 교유였습니다. 일제시대에는 조선어를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각급 학교 차이가 없고 거의 다 한글을 몰랐어요. 그러니까 학년 차이 학교 차이도 없이 우선 한글을 가르쳐야 했고맞춤법을 가르쳐야 했습니다.
춘천사범학교에서는 5학년 학생들이 "선생님, <용비어천가>를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희망을 해요. 그래서 가르치겠다고 했습니다. 당시 나이가 어리니까 용감했지요, 제가 〈용비어천가〉를 어디서 배웠겠어요? 중세어를 알기나 해요? 그런데 ‘그래 그거 공부하자‘ 탁 아주 그냥 즉석에서 쾌하게 답을 하고서 <용비어천가>를 가르쳤던겁니다.
저는 그냥 아는 대로 가르쳤는데 사실 그 <용비어천가> 가사의 내용이 역사적인 배경이 많거든요. 그걸 모르면 가사의 의미가 이해가 안 돼요. 이해가 안 되니까 자꾸 질문을 해요. 그런데 제가 알아야지그걸. 그래서 인제 대답을 못 하고 모르겠다고 그러고 가만히 생각을해봤죠. ‘이래가지고는 내가 안 되겠다. 아무래도 국어학 전공을 해야되겠다‘ 그래서 국어학을 전공하기로 결정했습니다. - P63

◆◆◆ 조선어학회는 1921년에 조선어연구회라는 명칭으로 창립됐습니다. 그 후 1931년 1월에 이 학회가 개편되면서 고루 이극로 선생이 직접 조선어학회를 주도해서 여러 가지 사업이 시작됩니다. 조선어학회의 활동으로 이루어진 결실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말 표기의 통일입니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한글 맞춤법통일안》이 1933년 10월에 학회 안으로 제정된 것이지요. 1941년 1월에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을 제정한 것도 우리말 표기 통일의 한 요소였습니다. 둘째는 언어의 통일입니다. 이것은 바로 사정査定한 조선어, <조선어 표준말 모음>이죠. 1936년 10월에 발표됐죠. 셋째는 언어규범의 종합입니다. 이것은 <조선어 대사전>을 1942년 10월에 편찬한 것을 가리킵니다. 이 세 가지로 민족어 확립은 일단 역사적으로 완결되었다고 평가해야 되겠습니다.

●●● 조선어학회 활동과 그 의미를 큰 틀에서 말씀해주셨습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1942년 10월에 《조선어 대사전>을 편찬한 것은 민족어 규범화 사업이 일단락되었다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물론 1942년 10월에 일어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조선어 대사전>의 원고가 일본경찰에 압수되며 출판되지 못했지만, 해방 후인 1947년 《조선말 큰사전)이라는 이름으로 첫째 권이 나오고, 1957년 <큰사전>이라는 이름으로 여섯째 권이 나오면서 사전 출판이 완결되었죠. - P67

◇◇◇ 일제강점기에 조선어사전, 우리 국어사전 상황을 보면 1880년대까지 올라가요. 1880년대에는 주로 선교사들이 사전을 편찬했는데,1920년에 오면 조선총독부, 즉 식민지 당국에서 <조선어사전)을 냈어요. 이런 편찬사업들이 계속되고 그 후에는 문세영이 (조선어사전)을편찬했어요. 그런데 이 사진들은 어휘의 의미를 설명하는 정도지 우리말 규범에 대한 전제가 없었어요. 규범이라고 하면 맞춤법과 표준어이고, 그다음에 발음에서는 장단 문제, 된소리 발음 문제 등이 있는데, 이런 것들에 대한 규범이 없으니까 사전에서의 기술이 들쭉날쭉이고 또 믿을 수가 없는 거예요. 이처럼 규범적으로 확실치가 않으니까 그때까지 국어사전은 어휘의 의미를 찾아보는 것으로 끝났지요.
그래서 조선어학회의 조선어 대사전, 즉 <조선말 큰사전>은 국어규범을 전제로 편찬했다는 면에서 역사적 가치가 있는 것인데, 실제로 이것이 출판된 게 1957년이었어요. 6권으로 완간된 때가. 그러니까 1957년 전까지는 국어 규범을 제시하는 사전이 없었던 거예요. 그런 목적에 소용되는 사전이 없으니까 너도나도 사전을 편찬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 거죠. 6.25사변 전에 박문출판사에서 시작한 일석(이희승)의 국어사전도 그러한 목적에서 편찬했던 겁니다.
일석의 국어사전처럼 해방 후에 편찬한 국어사전은 <한글 맞춤법통일안>의 수정 부분을 반영할 목적이 컸죠. 해방 직후에 맞춤법 일부를 수정했었으니까, 맞춤법을 포함해서 국어 규범을 사전에 반영하는문제가 있었어요. 표제어뿐만 아니라 그 주석의 풀이말도 개정 맞춤법에 따라 써야 했던 거지요.
맞춤법 다음에 중요한 게 표준말을 보여주는 거였어요. 조선어학회에서 정한 표준말은 사실 7,000개가 안 됐기 때문에, 그 외의 단어들이 표준어인지는 판단할 수가 없었어요. 더군다나 일반인들은 더 몰라요. 그러면 사전을 편찬할 적에 그걸 다 해결해놔야 해요. 그래서 사전 편찬에서 표제어의 표준어 여부를 판단하는 업무가 부가된 거예요. 표준말에 없는 것은 어떤 것이 표준말이냐를 정해야 했지요. 그러면 편찬자는 조선어 표준말 모음>에서의 표준말 기준을 보고 "이기준으로 봐서 이 단어는 표준어로 삼았을 거다", "그래야 앞뒤가 맞다"등과 같은 판단을 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이전의 국어사전 편찬원처럼 어휘 풀이에 그치는 게 아니라 규범의 종합적인 판단까지도 하는것이라고 할 수가 있지요. - P77

해방 직후 조선어학회가 중심이 된 국어 정책은 크게 ‘ 한자 폐지, 한글 전용화‘와 ‘일제 잔재를 일소하는 국어 정화‘의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해방 후 모든 교육에서 한글만 쓰는 것이 원칙이 되었고 미군정 문교부에서는 <한자 안 쓰기의 이론>(1948)을 출간했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법률 제6호로 <한글 전용법>(1948.10)을선포하며 한글 전용을 시행했다. 일본식 용어의 철폐와 우리말 도로찾기를 목표로 이루어진 국어 정화 운동은 국어 정화의 지침으로서<우리말 도로 찾기>(1948.6)를 펴내며 본격화했다. 그러나 실제 언어생활에서는 여전히 한자 병용의 글쓰기가 계속되고 있었고, 국어 정화지침 역시 성글게 이루어지면서 정확하지 않은 정보를 퍼뜨리는 문제가 남아 있었다.
해방 직후 조선어학회 중심의 국어 정책은 일제 치하부터 이어진 군국주의 혹은 국수주의의 영향 아래 이루어진 측면도 있었다. 정부수립과 함께 좀 더 깊이 있는 국어 정책이 가능했음에도, 민족 혹은민족의 순수성이 지나치게 강조되면서 한글 전용이나 순우리말 쓰기등과 같은 정책이 맹목적으로 시행된 것이다. 한편 <한글 맞춤법 통일안》은 해방 후에도 일제강점기에 제정된 내용에서 큰 수정 없이 자리를 잡았지만, 어법에 맞춰 적도록 하는 형태주의 표기법이 일반 대중에게는 매우 어렵다는 문제의식이 팽배했고, 이는 한국전쟁 이후 한글 간소화 정책이라는 강력한 반작용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러한 문제들은 한글 맞춤법이나 표준어 규정이 국가의 권위가 아닌 조선어학회의 권위에 기대어 어문 규범의 역할을 해온 데 따른 것이었다. 한편 조선어학회는 규범화를 주도하면서 한글 풀어쓰기와 같은 조선어학회 일부 연구자 특유의 주장을 규범화하려고 했다. 이처럼 일방적인 행태는 합리적이고 체계적으로 국어 규범을 정립하고자했던 연구자들이나 일반 대중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고 해방 직후 국어 정책을 펼쳐나가는 데 커다란 갈등 요인이 되었다.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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