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축들은 야생 동물의 삶을 단축시켰던 많은 위협으로부터 인위적으로 보호된다. 순종 젖소는 굉장한 양의 우유를 생산하지만, 거치적거리게 디룽디룽 매달린 녀석의 젖통은 사자를 앞질러 달릴라치면 심각한 방해물이 될 것이다. 서러브레드 경주마는 뛰어난 달리기 주자이자 높이뛰기 선수지만, 녀석의 다리는 경주중에, 특히 점프를 하다가 부상을 입기 쉽다. 인위선택은 자연선택이라면 결코용인하지 않았을 영역으로까지 녀석을 밀어붙인 것이다.  - P104

우리 인간은 지나친 위험 회피의 문제를 쉽게 간과한다. 얼룩말이나 영양들이 사자가 시야에 뻔히 들어오는데도 기껏 경계를 늦추지않을 뿐 태연자약하게 풀을 뜯는 광경을 보면, 우리는 혼란스럽다.
우리는 수킬로미터 내에 사자 코빼기도 보이지 않을 때라도 스스로(혹은 사파리 안내인)의 위험 회피 성향을 좇아 랜드로버 안에 들어앉아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공포를 저울질할 다른 대상이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파리 오두막으로 돌아가서 푸짐하게 식사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우리의 야생 선조들은 위험을 감수하는 얼룩말들에게 더 크게 공감했을 것이다. 얼룩말처럼 그들도 잡아먹힐 위험과 아무것도 못 먹을 위험을 저울질해야 했을 테니 말이다. 물론 사자가 공격해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속한 무리의 규모를 감안할 때, 사자가 나 아닌 다른 구성원을 잡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풀밭으로 진출하지 않는다면, 혹은 물가로 내려가지 않는다면, 어차피 굶주림이나 갈증으로 죽을 것이다. 우리가 앞서 두 번이나 언급한 바로 그 경제적 대가교환의 교훈이다.‘
여담이 길어졌지만, 요는 야생 늑대에게도 다른 동물들처럼 최적의 도주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너무 대담한 거리와 너무 소심한 거리의 중간쯤에 적당히 놓인, 그리고 아마도 유연하게 바뀔 수 있는거리일 것이다. 진화적으로 긴 시간에 걸쳐 환경이 바뀌면, 자연선택은 도주거리를 조절해 연속선상에서 이쪽 아니면 저쪽으로 이동시킬 것이다.  - P107

마을 변두리의 쓰레기더미를 뒤지는 야생 늑대들을 상상해보자.
녀석들 대부분은 돌과 창을 던지는 사람들이 무서워서 도주거리가아주 길 것이다. 사람의 모습이 저 멀리 나타났다 싶으면 당장 안전한 숲으로 내뺄 것이다. 하지만 몇몇 개체가, 유전적 우연에 의해,
평균보다 살짝 짧은 도주거리를 갖게 되었다. 녀석들은 위험을 약간더 감수하는 (용감하되 무모하지는 않은) 태도 때문에 위험을 회피하는 경쟁자들보다 더 많이 먹는다. 세대가 갈수록, 자연선택은 점점 더도주거리가 짧은 개체들을 선호할 것이고, 결국 녀석들은 인간이 던진 돌에 맞을 만큼 도주거리가 짧아질 것이다. 새롭게 수중에 들어온 식량원 때문에 늑대들의 최적 도주거리가 변한 것이다.
코핀저의 견해는 이런 식의 진화적 도주거리 단축이 개의 가축화 첫 단계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위선택이 아니라 자연선택이 낳은결과였다. 짧은 도주거리는 더 유순한 행동의 척도이기도 하다. 이초기 단계에서는 사람들이 일부러 유순한 개체들을 택해서 사육한게 아니었다. 이 단계에서 사람과 최초의 개들 사이의 상호작용은오직 적대적일 뿐이었다. 늑대들이 길들여진 것은 자발적 가축화였지, 사람에 의한 의도적 사육이 아니었다. 의도적 가축화는 나중에 이루어졌다. - P108

그런데 더욱 흥미로운 현상이 있었다. 유순함을 선택적으로 육성하다 보니 예상치 못한 부가적 효과들이 뒤따랐는데, 그야말로 환상적이고 전혀 예측하지 못한 현상이었다. 개를 사랑했던 다윈이 이 사실을 일있다면 아마도 넋을 잃었으리라.
길든 여우들은 행동만 개 같아진 것이 아니라 모습도 개 같아졌다. 그들은 여우다운 털가죽을 잃었고, 웰시콜리 같은 흑백 얼룩무늬가 나타났다. 여우답게 쫑긋 섰던 귀는 개처럼 펄럭거렸다. 꼬리끝도 여우답게 아래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개처럼 위로 섰다. 원래암여으는 1년에 한 번 발정하지만, 녀석들은 암캐처럼 반년마다 발정했다. 벨랴예프에 따르면, 녀석들은 짖는 소리도 개를 닮았다.
개를 닮은 이런 특징들은 그야말로 곁다리 효과였다. 벨랴예프의 연구진은 그런 특징들을 일부러 노린 적이 없다. 그들이 의도한 것은 유순함뿐이었다. 개를 닮은 다른 특징들은 유순함을 낳는 유전자에 진화적으로 편승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유전학자들에게는 놀라운 현상이 아니다. 하나의 유전자가 겉보기에 서로 무관한 듯한 여러 효과를 초래하는 ‘다형질 발현‘ 현상은 널리 알려져 있다. 여기에서 ‘겉보기에‘ 라는 단어가 중요하다. 발생학적 발달은 복잡한 사업이다. 우리가 그 복잡한 내용을 속속들이 알고 보면, "겉보기에서로 무관한 듯했던 것들이 "우리가 예전에는 몰랐지만 지금은 이해하게 된 어떤 경로에 의해 연결된" 것들로 바뀐다.
-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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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질 수는 있지만 정에 빠지기는 어렵고, 정이 들 수는 있지만 사랑이 들 수는 없다. 이 같은 호응어의 차이는 두 단어의 상이성을 함축적으로 보여 준다. 곧 사랑은 순식간에 빠르고 뜨겁게 일어나므로 늪에 빠지듯 빠질 수밖에 없고, 정은 오랜 시간에 걸쳐 은근하게 일어나므로 과실에 맛이 들듯 혹은 잎에 단풍이 들듯 시나브로 들 수밖에 없다. 사랑은 불붙기도 하고 사랑에 눈멀 수 있는 반면, 정은 불붙어 눈멀 수는 없지만 오래도록 쌓아 가면서 깊어지고 두터워질 수 있다. 이렇듯 사랑과 정은 진행 속도와 열정의 강도에서 상이한 양상을 보인다고 할 수 있다.

바) 그날 밤 두 사람은 격정적인 사랑을 나누었다.
사) 그날 밤 두 사람은 은밀히 정을 통했다.
- P303

‘정열‘은 내면에 끄기 어려운 불을 가지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 불은 매우 뜨겁고 강력한 에너지, 곧 무언가를 위해 온몸을 사를 수 있는 저돌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정열은 맹목적일 수도 있고 통제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말하자면 안에서 맹렬히 솟구쳐 나오는 감정의 자발적 유로같은 것이다. 내면의 불길은 원천적으로 혹은 생래적으로지니기 마련인데 주변 여건이나 상황에 따라 더 활활 타오르기도 한다.
‘열정‘도 정열처럼 내면에 불을 가진 상태다. 물론 그불의 열기도 정열의 것과 다를 바 없다. 다만 그 불길은 맹목적이기보다 잘 통제되어 있고, 무언가를 위해 의도적 집중이 잘 이루어져 있다. 내면의 불길이 반드시 원천적이거나 생래적일 필요는 없다. 목표가 분명하고 의지가 확고하면 열정은 언제든 샘솟을 수 있다.
- P306

방학을 맞거나 폐교가 되어 아이들의 활기찬 웃음소리를 잃어버린 교정을 관찰자나 서술자는 적막이 가득하다고 여길 수 있는데 이때의 적막은 쓸쓸함을 품고 있다. 곧 ‘적막‘은 고요하고 쓸쓸함‘을 나타낸다. 홀로 임을 기다리는 적막 산중‘도 고요하고 쓸쓸한 산중을 가리킨다. 적막과 달리 ‘정적‘에는 쓸쓸함보다는 긴장이나 불안 등의 정조가 담기는 경우가 많다. 두 나라가 극도의 대립 상태로 치달아 전쟁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상황에있을 때 국경에는 정적이 감돌게 되는데, 이때의 정적은 긴장감을 품고 있다. - P311

지성인‘은 높은 지적 수준과 함께 도덕성을 갖춘 사람을 뜻한다. 그들의 지식은 기능적 관념적 차원에 머물지않으며 실존적 삶과 유리되어 있지 않다. 그들은 늘 자신을 성찰하고 앎과 삶,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고자 노력한다. 지성인이 지식인일 수는 있지만, 지식인이 항상 지성인인 것은 아니다. 예컨대 석·박사 학위를 가진 자가 지식인일 수는 있지만 반드시 지성인인 것은 아니며, 제도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이 지식인이기는 어렵지만 독학과 수양을 통해 지성인이 될 수는 있다.
지식인은 중립적인 말이다. 그 때문에 긍정적·부정적인 말이 모두 앞에 수식어로 올 수 있다. 양심적 지식인행동적 지식인/어용 지식인 친일 지식인‘ 등이 그렇다. 지성인은 긍정적인 의미를 갖는 말이다. 따라서 ‘양심적 지성인/행동적 지성인‘은 가능할지라도(지성인은 이미 양심적이고 행동적이므로 이런 말은 불필요한 첨언일 수 있다)
‘어용 지성인/친일 지성인‘은 형용 모순에 해당한다.
- P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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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달맞이꽃(외노테라, Denothera)은 우리에게 무늬 없는 노란색으로 보이지만, 자외선 필터를 걸고 찍은 사진을 보면 벌들을 위한 무늬가 드러난다. 물론 인간의 정상 시각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컬러화보 5쪽을 보라), 사진에서는 무늬가 붉은색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사진 처리 과정에서 임의로 선택한 ‘가짜‘ 색깔이지, 벌들도 붉은색으로 본다는 뜻은 아니다. 벌에게 자외선이 어떻게 보이는지 (노란색인지 다른 어떤 색인지)는 아무도 모른다(나는 붉은색이 독자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도 모른다. 알다시피 이것은 해묵은 철학적 논점이다).
꽃들이 가득한 초원은 자연의 타임스 스퀘어이자 자연의 피카딜리 서커스 광장이다. 슬로모션으로 점멸하는 네온사인들처럼, 계절에 따라 서로 다른 꽃들이 피어나면서 매주 광경이 달라진다. 꽃들은 낮 길이의 변화 같은 단서들에 민감하게 반응함으로써 같은 종의다른 꽃들과 동시에 피어난다. 초원의 녹색 캔버스에 호화롭게 흩뿌려진 색색의 꽃들은, 동물들의 눈에 의한 선택에 따라 그 모양과 색깔이 정해지고, 그 크기와 맵시가 단장되어온 것이다. 벌의 눈, 나비의 눈, 꽃등에의 눈에 의해서, 신대륙의 숲이라면 벌새의 눈, 아프리카의 숲이라면 태양새의 눈도 추가하자.
- P79

물론 곤충과 꽃의 관계는 쌍방통행이므로, 우리는 양방향을 다 살펴보아야 한다. 곤충이 꽃을 ‘길들여 더욱 아름답게 만들긴 했지만, 아름다움을 감상하려고 그런 것은 아니다. 차라리 꽃이 곤충에게 매력적으로 보임으로써 득을 본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곤충은가장 매력적인 꽃을 방문함으로써 무의식중에 꽃의 아름다움을 ‘육성하고‘, 동시에 꽃은 곤충의 수분 능력을 육성한다.
그리고 낙농업자가 거대한 젖통의 프리지안 젖소를 길러내듯이,
곤충은 꿀을 많이 생산하는 꽃을 길러낸다. 그런데 꽃의 입장에서는 꿀을 적절히 배급하는 것도 하나의 관심사다. 곤충의 배를 너무 불려주면 녀석이 다음 꽃을 찾아가지 않을 것이고, 이것은 첫 번째 꽃에게는 나쁜 일이기 때문이다. 곤충이 수분을 위해 두 번째 꽃을 방문하는 것이야말로 이 모든 사업의 핵심이다. 꽃으로서는 꿀을 지나치게 많이 제공하는 것(곤충이 두 번째 꽃을 방문하지 않는다)과 지나치게조금 제공하는 것(곤충이 첫 번째 꽃을 방문하지 않는다) 사이에서 세심하게 균형을 잡아야 한다.
- P81

자, 지금 우리는 진정한 자연선택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고, 단계적 유인인 이 장의 이야기도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 유인 단계들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 사람은 매력적인 장미나 해바라기, 기타 등등을 의도적으로 선택해 육종한다. 그럼으로써 매력적인 속성을 만드는 유전자들을 보존한다. 이것이 인위선택이고, 다윈이 등장하기 한참 전부터 사람들이 잘 알고 있던 내용이다. 이것이 늑대를 치와와로 바꾸고, 옥수수 속대의 길이를 수십 센티미터에서 수 미터로 늘릴 만큼 강력하다는 것을 모두 인정한다.
2. 암컷 공작은 매력적인 수컷을 선택해 번식시킴으로써, 역시 매력적인 유전자들을 보존한다(의식적이고 의도적인 행위인지는 알 수없지만, 일단 그렇지 않다고 가정하자), 이것이 성선택이고, 다윈이 이것을 발견했다. 혹은 명료하게 인식하고 이름 지었다.
3. 작은 먹이 물고기는 가장 매력적인 아귀에게 제 몸을 먹임으로써, 매력적인 아귀가 생존하도록 선택한다 단연코 의도적인 행위가아니다). 그 아귀가 존속하고 번식하도록 무의식중에 선택한 셈이고, 그럼으로써 아귀가 매력적인 속성을 만드는 유전자들을보존하도록 선택한 셈이다. 이것이 자연선택이고(그렇다. 우리는 마침내 도달했다), 이것이 다윈의 가장 위대한 발견이다.
- P93

4. 선택 행위자가 없어도, 우연히 유리한 생존 도구를 갖췄다는사실 때문에 ‘선택된‘ 개체들이 가장 잘 번식할 것이고, 따라서 유리한 도구의 유전자를 물려줄 것이다. 따라서 모든 종의 유전자풀은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도구를 만드는 유전자로 가득 차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 P95

자연선택은 매일매일 시시각각 전 세계를, 모든 변이를, 아무리 사소한 것까지 모두 점검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자연선택은 나쁜 것을 기각하고, 좋은 것을 보존하고 다 더한다. 자연선택은 기적도 없이 조용하게 작동하며, 언제 어디서든 기회가 될 때마다, 각 유기체를 그 생명이 처한 유기적, 무기적 조건들에 맞추어 개량한다. 우리는 이런 느린 변화들이 진행하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없다. 시간의 바늘이 아주기나긴 시대를 다 거친 후에야 우리가 깨달을 수 있지만, 그렇더라도과거 기나긴 지질학적 시대에 대한 우리의 시각은 너무나 불완전하기때문에, 오직 예전의 생명 형태들이 지금과 다르다는 점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 「종의 기원」 중에서 - P96

무작위적인 유전자 변이들의 무작위적이지 않은 생존이 진화적결과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게 우리의 가설이라면, 그것을 실험적으로 시험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우리가 교묘하게 개입해보는 것이다. 어떤 변이는 생존하고 어떤 변이는 생존하지 못하도록 우리가조작하는 것이다. 어떤 종류의 개체들을 번식시킬지를 사육가로서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인위선택이다. 인위선택은 자연선택의 비유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인위선택은 선택이 진화적 변화를 일으킨다는 가설에 대한 진정한 실험적 확인이다. 관찰을 통한 확인과는 대조되는 것이다.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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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사르는 길고 낮은 슬픈 울음소리를 뱉어냈다. 모든 비극이 한꺼번에 닥쳐와 정신이 탈탈 털린 거니 다름없었다. 엄마는 아프기 전까지도 그의 셔츠를 다려주었는데. 이 세상이 온통 슬픔으로 가득 차버렸다. 아스팔트 틈새 사이로 노란 잡초가 조그맣게 피어난 걸 보자 울고 싶어졌다. 아침 하늘에 뜬 달은 창백한 종잇조각 같아서 마음이 울컥해졌다.
- P297

"아니, 내가 물어보는 거야. 진짜 록이 뭔지 아는 사람이냐고. 록 좋아하냐고."
"아! 그럼, 물론이지."
"하드록? 아니면 계집애들 록?"
"계집애들 록이라니?"
"징그럽게 머리 짧게 하고 나오는 놈들이 부르는 거. 케케묵은 록. 돈에 영혼을 판 놈들."
‘고놈 참 마음에 드는군‘이라고 리틀 엔젤은 생각했다.
"아, 알겠어. 난 하드록이 좋아. 모터헤드도 좋아하지."
그러자 젊은 아이는 점잔을 빼며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더없이 찬란한 대화였다. 리틀 엔젤은 행복했다. 헤비메탈을 듣는 삼촌이 이 호르몬이 질풍노도로 분비되는 놈을 진지하게 받아주고 있군. 삼촌은 이러라고 있는 거지.
그는 조카의 내면에 있는 헤비메탈 파일에 접근하며 말했다.
"뭐, 신은 우리 모두를 미워하니까."
그는 이 나이대 애들에게 미끼를 던지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 삼촌?"
"피로 다스리는 분이지."
"삼촌! 신은 개자식이야! 살인마야!"
몬스터 같은 조카가 울부짖었다.
그들은 태양을 향해 악마의 뿔 모양을 손으로 만들어 보였다.
- P307

"날 용서해주겠니?"
"뭘요?"
그는 허공에 손을 저었다.
"미안하다."
"그러니까 뭐가요, 아빠?"
"다 미안해."
그는 눈을 뜨고 딸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네가 아기였을 적에, 내가 널 씻겨주었는데."
미니는 눈이 따갑지 않은 베이비 샴푸를 짜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는 네 아버지였어. 그런데 지금은 네 아기가 되었구나."
빅 엔젤은 훌쩍였다. 물론 딱 한 번뿐이었다.
그녀는 눈을 빠르게 깜박이고는 손바닥에 샴푸를 짰다.
"괜찮아요. 모두 다 괜찮다고요."
그는 눈을 감고 딸의 손에 머리카락을 맡겼다.
- P311

갑자기 이상한 침묵이 파티 분위기에 내려앉았다. 사람들은 조용히 앉아서 서로 이야기하거나 생각에 잠겼다. 웃고 떠드는 분위기가 음악 소리에 흡수되어 사그라져버린 듯하달까. 그날의 밀도가 모두에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탁자에 모여 앉은 사람들은 저마다 개인적인 감상을 중얼댔다. 갑자기 이 남자, 빅 엔젤과 있었던 과거의 일들을 떠올리며, 언제가 되었든 앞으로 분명히 닥치게 될 그 순간을 애도하면서. 모두는 보았다. 모두는 알고 있었다.
- P375

"나는 떠났어. 나 자신을 뭔가 대단한 존재로 만들고 싶어서.
내가 세상을 바꿀 거라 생각했지."
"그래서 어떻게 됐냐, 아우야?"
"아무것도 안 바뀌었어."
"아 왜이래."
리틀 엔젤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내가 떠나서 미웠겠지. 알아 내가 형을 비롯해서 모두를 깔보고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도 알아. 뭐, 어쩌면 그랬을지도, 난 평생 살아남기 위해서 탈출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어쩌면 형에게서조차 탈출해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라. 그런데 이제 형이 날 떠나려 하고, 나는 형 없는 세상은 상상도 할 수가 없어. 난 언제나 생각했어. 내가 원했던 아버지를 가졌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그리고 이제껏 내가 원했던 아버지는 사실 형이었어."
- P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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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는 그 유발 원인이 발신자에게 있을 수도 있고수신자에게 있을 수도 있다. 발신자의 모호한 표현이나 태도가 오해를 일으키기도 하고, 수신자의 과잉 해석에 의해서 오해가 일어날 수도 있다.
••••••
수신자의 판단 오류는 ‘곡해‘의 핵심적 의미이기도 하다. 곡해‘란 어떤 말이나 행동, 사물의 내용 등을 그릇되거나 좋지 않게 해석하는 것을 가리킨다.  - P258

두 단어의 이 같은 차이는 사물에 대한 판단 또는 해석의 성격에 기인한다. 곧 오해는 판단이나 해석이 즉각적이고 직관적으로 이루어지는 반면, 곡해는 의도적이고 논리적으로 이루어진다. 머리 모양을 보고 여자라고 판단하는것은 논리가 아닌 직관에 의한 것이며, 성경 말씀을 다르게 판단하는 것은 직관이 아닌 논리에 의한 것이다.
- P260

‘플롯은 이야기나 스토리보다 훨씬 복잡하고 정교한 개념을 가진 말이다. 스토리가 단순히 사건의 진행을 시간 순서에 따라 배열한 것이라면, 플롯은 사건을 개연성있게 이끌면서 원인과 결과를 긴밀하고 극적으로 서술한것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곧 스토리는 서사 장르의 단순한 이야기 재료이거나 간추린 줄거리이고, 플롯은 독자나 관객이 매료될 수 있도록 다양한 장치와 기법을 도입하여 예술적으로 재구성한 이야기이다. 시간을 거슬러 과거의 회상 장면을 보여 주는 플래시백flashback, 이야기 전개에 불안감과 긴박감을 부여하는 서스펜스suspense, 의외의 결말에서 오는 서프라이즈surprise 등이 플롯의 중요 기법이다.
- P275

 ‘이유‘는 어떤 행동이나 현상이 일어나게 된 사정 · 곡절 · 동기를 가리키고, ‘원인‘은 어떤 현상이나 사태, 사건을 일어나게 만드는 요소 • 원천 • 조건을 가리킨다. ‘늦은 이유‘는 늦게 된 사정이나 곡절을 의미하고, 지진의 원인‘은 지진 현상을 일으키는 지질학적 요소나 조건을 의미한다.  - P277

둘 사이의 결정적 차이는 시선의 향방에 있다.
자존심의 시선은 자신의 밖을 향하고 있고, 자존감의 시선은 자신의 안을 향하고 있다. 자존심은 남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민감하지만, 자존감은 내가 스스로를 어떻게 바라보는지가 중요하다. 자기 긍정이 타인의 평가에 기대어 이루어지는 것이 자존심이라면, 오로지 스스로에 대한 평가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자존감이다. 이런 차이 때문에 자존심이 센 것(남의 평가에 예민하게 구는 것)은 오히려 자존감이 낮은 것일 수 있고, 자존심을 죽이는 것(남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는 것)이 자존감을 살리는 것일 수있다. 진정한 자존감이란 남의 평가와 상관없이 자신을 가치 있고 소중한 존재라고 믿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 P292

‘전쟁 戰爭‘은 서로 대립하는 집단 사이에서 무력을 써서 행하는 싸움을 뜻하나, 엄밀히는 둘 이상의 국가나 교전 단체가 서로 무기를 이용하여 싸우는 일을 가리킨다. 교전 단체는 국제법에서 교전권이 있다고 인정받은 정치 단체로, 내란을 일으킨 정치 단체라 할지라도 국제법상 교전 단체로 인정되면 전쟁의 주체가 될 수 있다. 오늘날에는 한 국가의 선전 포고만으로 전쟁 상태에 돌입한 것으로 간주된다.
‘전투 戰鬪‘는 서로를 적으로 하는 두 편의 군대가 조직적으로 무장하여 싸우는 일을 가리킨다. 전쟁이 국가와 국가 사이의 무력 충돌을 가리키는 데 반해, 전투는 특정한 시간과장소에서 군대와 군대가 충돌하는 것을 가리킨다. 곧 전자는 장기적이고 큰 규모의 싸움을 뜻하고, 후자는 상대적으로 단기적이고 작은 규모의 싸움을 뜻한다.

- P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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