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빠질 수는 있지만 정에 빠지기는 어렵고, 정이 들 수는 있지만 사랑이 들 수는 없다. 이 같은 호응어의 차이는 두 단어의 상이성을 함축적으로 보여 준다. 곧 사랑은 순식간에 빠르고 뜨겁게 일어나므로 늪에 빠지듯 빠질 수밖에 없고, 정은 오랜 시간에 걸쳐 은근하게 일어나므로 과실에 맛이 들듯 혹은 잎에 단풍이 들듯 시나브로 들 수밖에 없다. 사랑은 불붙기도 하고 사랑에 눈멀 수 있는 반면, 정은 불붙어 눈멀 수는 없지만 오래도록 쌓아 가면서 깊어지고 두터워질 수 있다. 이렇듯 사랑과 정은 진행 속도와 열정의 강도에서 상이한 양상을 보인다고 할 수 있다.

바) 그날 밤 두 사람은 격정적인 사랑을 나누었다.
사) 그날 밤 두 사람은 은밀히 정을 통했다.
- P303

‘정열‘은 내면에 끄기 어려운 불을 가지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 불은 매우 뜨겁고 강력한 에너지, 곧 무언가를 위해 온몸을 사를 수 있는 저돌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정열은 맹목적일 수도 있고 통제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말하자면 안에서 맹렬히 솟구쳐 나오는 감정의 자발적 유로같은 것이다. 내면의 불길은 원천적으로 혹은 생래적으로지니기 마련인데 주변 여건이나 상황에 따라 더 활활 타오르기도 한다.
‘열정‘도 정열처럼 내면에 불을 가진 상태다. 물론 그불의 열기도 정열의 것과 다를 바 없다. 다만 그 불길은 맹목적이기보다 잘 통제되어 있고, 무언가를 위해 의도적 집중이 잘 이루어져 있다. 내면의 불길이 반드시 원천적이거나 생래적일 필요는 없다. 목표가 분명하고 의지가 확고하면 열정은 언제든 샘솟을 수 있다.
- P306

방학을 맞거나 폐교가 되어 아이들의 활기찬 웃음소리를 잃어버린 교정을 관찰자나 서술자는 적막이 가득하다고 여길 수 있는데 이때의 적막은 쓸쓸함을 품고 있다. 곧 ‘적막‘은 고요하고 쓸쓸함‘을 나타낸다. 홀로 임을 기다리는 적막 산중‘도 고요하고 쓸쓸한 산중을 가리킨다. 적막과 달리 ‘정적‘에는 쓸쓸함보다는 긴장이나 불안 등의 정조가 담기는 경우가 많다. 두 나라가 극도의 대립 상태로 치달아 전쟁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상황에있을 때 국경에는 정적이 감돌게 되는데, 이때의 정적은 긴장감을 품고 있다. - P311

지성인‘은 높은 지적 수준과 함께 도덕성을 갖춘 사람을 뜻한다. 그들의 지식은 기능적 관념적 차원에 머물지않으며 실존적 삶과 유리되어 있지 않다. 그들은 늘 자신을 성찰하고 앎과 삶,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고자 노력한다. 지성인이 지식인일 수는 있지만, 지식인이 항상 지성인인 것은 아니다. 예컨대 석·박사 학위를 가진 자가 지식인일 수는 있지만 반드시 지성인인 것은 아니며, 제도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이 지식인이기는 어렵지만 독학과 수양을 통해 지성인이 될 수는 있다.
지식인은 중립적인 말이다. 그 때문에 긍정적·부정적인 말이 모두 앞에 수식어로 올 수 있다. 양심적 지식인행동적 지식인/어용 지식인 친일 지식인‘ 등이 그렇다. 지성인은 긍정적인 의미를 갖는 말이다. 따라서 ‘양심적 지성인/행동적 지성인‘은 가능할지라도(지성인은 이미 양심적이고 행동적이므로 이런 말은 불필요한 첨언일 수 있다)
‘어용 지성인/친일 지성인‘은 형용 모순에 해당한다.
- P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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