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히틀러는 민주주의국가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수단을 동원했다. 도로 건설과 토지 개량, 대규모 병영과 비행장 건설등의 토목건설 사업에 중장비 대신 인력을 쓰게 했다. 군대와 경찰을 대폭 증원했고 친위대도 5만 명 넘게 채용했다. 감옥과 수용소를 지어 정치적 반대자를 가뒀다. 유대인의 상점을 폐쇄하고직장에서 쫓아냈다. 미혼 여성에게 자금을 대출해주어 혼인을 장려하고 직장의 기혼 여성을 가정으로 돌려보냈다." 그렇게 해서만든 모든 일자리는 ‘게르만 남자‘에게 줬다. ‘출신성분‘을 따지지 않고 충성심과 능력을 기준으로 젊은이를 등용했다. 노동자와 빈곤층 남자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 P189

유럽의 유대인은 세상에 섞일 수 없는 ‘천민‘이었다. 담장으로 격리한 ‘게토(ghetto)‘에 거주하면서 특별한 표식을 한 옷을 입어야 했다.
시민권이 없어서 교육을 받을 수도 취직할 수도 없었기에 가정에서 아이들을 교육했고 고리대금업이나 전당포처럼 기독교도가 기피하던 일을 했다. 유대인에 대한 사적 폭력을 처벌하지 않았기 때문에 크고 작은 학살이 끊이지 않았다.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나고 계몽사상이 퍼지자 유대인에 대한 법적 차별을 폐지하는 나라가 늘어났다. 유대인은 언론·출판·법률·금융 등 지식과 정보를 다루는 새로운 산업에 진출했다. 그러자 귀족과 지주 등 전통적인 보수파뿐만 아니라 소상인 · 농민·노동자들까지 해묵은 불신과 혐오감을 드러냈다. 중세 공동체가 해체되면서 자본주의사회의 개인으로 고립당한 그들은 자기네 신앙과 생활방식과 공동체 문화를 굳건히 지키는 유대인들을 부러워하고 무서워했다.  - P195

독일 국민의 책임을 더 강력하게 추궁하는 견해는 1996년에 나왔다. 하버드대학 교수 대니얼 골드하겐(Daniel Goldhagen)이 쓴「히틀러의 자발적 사형집행자들(Hitler‘s Willing Executioners)』이라는책이다. 골드하겐은 대학 신입생 때 홀로코스트 강의를 들으면서이런 의문을 품었다. 왜 누가 명령을 내렸는지만 이야기할까? 독일인이 왜 히틀러의 명령을 집행했는지 밝혀야 하는 것 아닌가?
골드하겐은 전범재판 기록부터 친위대의 개인 서신에 이르기까지 홀로코스트에 관한 모든 기록을 검토한 끝에 아렌트보다 한걸음 나아간 결론을 내렸다. 독일의 보통 시민 대부분이 여러 세기 동안 형성한 독일 특유의 ‘절멸주의적 반유대주의‘를 내면화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홀로코스트 명령을 집행했다는것이었다.
독일 정부와 국민은 나치시대의 국가범죄에 대한 책임을 인정한다. 연방 총리와 주요 정치인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거듭사과했고 피해자를 확인할 때마다 배상했으며 홀로코스트 관련자를 추적하고 체포하고 재판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통일수도 베를린에 거대한 홀로코스트 기억 시설을 조성했고 학교교육과 미디어를 활용해 나치의 범죄에 관한 기억을 끝없이 되살린다.
집단적 책임을 후세대가 상속해야 하는지 여부를 두고 학자와 언론인들은 종종 논쟁을 벌이지만, 독일 정부는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그 책임을 이어받았다.
다시 말하지만 나치즘은 ‘모든 악의 연대‘였다. 나치의 범죄에 대한 기억을 흐리게 하는 행위는 개별적인 악을 강화하고 ‘모든 악의 연대‘를 되살릴 위험이 있다. 독일 정치 지도자와 시민들이 나치 시대의 기억을 나날이 새롭게 되새기는 까닭은 그 위험을 알기 때문이다. - P203

영국 정부는 1915년 7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이집트 주재외교관 헨리 맥마흔(Henry McMahon)을 통해 아랍의 정치·종교 지도자 ‘메카의 샤리프‘ 후사인 빈 알리(Husain bin Ali)에게 열 통의서한을 전달했다. 아랍인이 영국과 함께 오스만제국과 싸우면 전쟁이 끝난 뒤에 아랍 독립국가 수립을 지원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것을 ‘후사인-맥마흔 서한‘이라고 한다. 그런데 영국 정부는1916년 5월 러시아의 승인을 받고 오스만제국의 아랍 영토를 프랑스와 나누어 가지는 비밀협정을 체결했다. 오늘의 국경을 기준으로 보면 시리아, 레바논, 터키 남부, 이라크 북부는 프랑스가이라크의 나머지 지역과 팔레스타인 요르단은 영국이, 보스포루스해협 주변과 흑해 연안은 러시아가 차지하는 방안이었다. 영국의 중동 전문가 마크 사이크스(Mark Sykes)와 프랑스 외교관 프랑수아 조르주 피코(François Georges-Picot)가 초안을 만들었기 때문에 ‘사이크스-피코 협정‘이라고 한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1917년 11월에는 외교장관 밸푸어가 유대인의 협력을 얻어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일 목적으로 팔레스타인에 유대 국가를 수립하게끔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이른바 ‘밸푸어선언‘인데, 영국 정부의 속임수 외교는 단순한 배신행위로 끝나지 않고 팔레스타인의 비극을 불렀다.
- P216

 반면 나치가 동유럽 수용소에서 저지른 대학살의 참상을 확인한 시온주의자들은 더욱전투적인 태도로 국가 건설 계획을 밀고 나갔다. 급진파 무장 세력은 유대인의 이주를 규제한 영국 정부에 전쟁을 선포했다. 관공서, 외국 영사관, 민간 호텔 등 대상을 가리지 않고 테러 공격을 했다. 영국 정부는 자기네가 일으킨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유엔에 떠넘겼다. 유엔은 1947년 11월 29일 팔레스타인을 둘로나눠 두 개의 국가를 만드는 ‘총회결의 181호‘를 채택했다. 영국군이 철수할 시점이 다가오자 아랍 게릴라와 시온주의 민병대는 땅을 한 뼘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 P217

이스라엘 건국은 곧 팔레스타인에 대한 침략이었다. 유럽 유대인은 2천 년 동안 혹독한 차별과 박해를 받았다.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본 유럽·미국의 기독교인과 정부가 시오니즘운동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인 사정도 이해할 만하다. 자신의 국가를 세워 안전한 삶을 도모하려 한 유대 민족의 동기도 정당하다. 그러나 그들에게 팔레스타인 땅을 빼앗고 거기에 살던 사람들을 내쫓을 권리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만약 모든 민족이 수천 년 전 조상이 한때 살았다는 이유로 남이 사는 땅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며폭력을 행사한다면 세계는 당장 전쟁터가 되고 말 것이다. 팔레스타인은 그곳에서 땅을 경작하고 자손을 낳고 나름의 역사와 문화를 일군 아랍인의 것이었다.
시온주의자들은 호소하고 설득하고 협력을 구한 것이 아니라 폭력으로 원주민을 내쫓았다. 부당한 박해를 받으면서도 자신의 종교와 문화를 지킨 유대인의 역사가 아무리 눈물겨워도, 유대인이 과학과 예술 발전에 기여한 바가 아무리 컸다 해도, 네게브사막의 황무지를 옥토로 바꾼 기술과 의지가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그에 견주어 팔레스타인 아랍인의 능력이 아무리 뒤떨어졌다 해도, 제국주의 시대가 저물고 아랍 민중이 민족 정체성과 자주성에 눈을 뜬 그 시기에 시온주의자들이 저지른 학살과 파괴행위를 정당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시온주의는 다른 민족 집단을 폭력으로 내쫓고 자기 나라를 세운 침략적 민족주의였다. 그들이 한 일은 수천년동안 유대인을 부당하게 차별하고 박해하고 학살한 유럽 기독교인의 행위와 다르지 않았다. - P221

1974년 11월 13일, 유엔총회가 ‘팔레스타인 문제‘를 놓고 토론을열었다. 아라파트는 머리에 두건을 두른 게릴라 차림으로 뉴욕유엔본부에 나타났다. 그가 회의장에 들어서자 미국 대표를 제외한 참석자 전원이 기립해 박수를 쳤다. 연단에 선 아라파트는 팔레스타인에 과도적으로 유대인 기독교인·무슬림의 국가를 각각 수립한 다음 하나의 민주국가로 나아가자는 PLO의 기본 견해를 밝히고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우리는 꿈을 꿀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과 재산, 민족의 모든 권리를 되찾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존재를직시하는 현실적인 사람으로서 나는 꿈이 언제나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민주국가건설에 동참한다는 의사를 자유롭게 결정할 때까지 우리는 조그만국토에 만족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나는 한 손에 올리브가지를, 다른 한 손에 자유를 위한 전사(戰士)의 무기를 들고 왔습니다. 내 손의 올리브 가지를 던져버리지 않게 해주십시오. 우리는유대교와 시온주의를 구별합니다. 시온주의 침략 책동에는 반대하지만 유대인의 신앙은 존중합니다. 이 위대한 유엔 본부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적대적이고 호전적인 데모가 과연 미국의 진정한 의견인지 나는 묻습니다. 팔레스타인 민중이 미국 국민에게 무슨 범죄를 저질렀습니까? 무엇 때문에 당신들은 우리와 싸우려 하는 것입니까? 정당화할 수 없는 적대감은 당신들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않습니다. 미국과 아랍 세계 전체가 더 새롭고 차원 높은 우호관계를 수립해야 한다는 사실을 미국인이 알아주기 바랄 뿐입니다."

유엔총회는 팔레스타인 민중의 자결권과 주권을 인정하는 결의 3236조를 채택하고 PLO를 옵서버 단체로 받아들였다. - P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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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날 위선자, 거짓말쟁이로 만들었어요. 날 자신들의 미적지근한 생활 속에 질식시켰던 거예요. 어떻게 해서 내 혈관에 아직도 피가 남아 있는지 알 수 없군요. 난 눈을 내리깔고 그들처럼 맥없고 어리석은 낯짝을 하고 있었죠. 난 그들과 똑같이 죽은 생활을 했어요. 당신이 날 만났을때 난 바보같았어요. 그렇지 않았나요? 침울하고 기운이 빠지고 정신이 나가 있었어요. 난아무 희망이 없어서 언젠가는 센 강에 투신할 생각이었죠. 그런데 그렇게 되기까지 내가 얼마나 많은 증오의 밤을 새웠는지 아세요? 저 시골 베르농에 살 때 싸늘한 방에서 나는 베개를 물어뜯으며 울음을 참았어요. 나는 속을 부글부글 끓이며, 나 자신이 비겁하다고 생각했어요. 피가 전신을 태우는 바람에 사지가 찢어지는 것 같았어요. 나는 두 번이나 도망쳐 곧장 햇빛 속을 뚫고 어딘가로 가려 했어요. 그러나 용기가 부족했던 나는 맥없는 그들의 친절과 구역질나는 그들의 애정에 붙잡혀 온순한 바보가되고 말았지요. 그래서 나는 거짓말을 했어요. 아니 늘 거짓말을 한 셈이죠. 나는 그들에게 순종하며 조용히 지내면서도 무언가를 때리고 물어뜯을 꿈을 꾸고 있었지요." - P72

"그러니까 당신은 경찰이 무력하다는 걸 인정하는군요! 대낮에도 버젓이 돌아다니는 살인자들이 있으니까!"
"흥! 딱한 노릇이지만 그렇달 수밖에" 하고 퇴직 경관이 대답했다.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에요."
그리베가 결론을 내렸다.
이런 대화가 오고 가는 동안 테레즈와 로랑은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그리베의 어리석음에 미소조차 보이지 않았다. 둘다 식탁에 팔꿈치를 대고 다소 창백한 얼굴에 흐리멍덩한 눈을하고 그저 듣고만 있었다. 잠시 그들의 검고 뜨거운 시선이 서로만났다. 조그마한 땀방울이 테레즈의 머리카락 속에 방울져 있었고, 불어오는 찬바람에 로랑의 피부는 보이지 않는 전율을 일으키고 있었다. -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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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심리학 저널』에 실린 실험 결과는 고대 그리스인의 생각이 옳았음을 입증한다. 걷는 사람의 창의성 수준이 앉아 있는 사람보다 "일관되고 유의미하게" 높았다. 흥미롭게도 야외에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걷든, 빈 벽을 바라보며 러닝머신 위에서 걷든 차이가 없었다. 둘 다 앉아 있던 집단에 비해 창의적 답변을 두 배 많이생각해냈다. 많이 걸을 필요도 없었다. 5~16분이면 충분했다.
옛날에는 러닝머신이 없었으므로 고대 그리스인들은 나가서 걸었다. 모든 일을 밖에서 했다. 집은 보금자리라기보다는 잠자리였다. 깨어 있는 시간 중 집에서는 약 30분 정도 보낼 뿐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내에게 해줘야 하는 일을 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죠"라고 말하는 사이 아크로폴리스 관문에 거의 다 왔다. 고대그리스인들은 하루의 나머지 시간을 시장인 아고라에서 보내거나,
김나지움이나 레슬링 연습장 팔라이스트라에서 운동하거나, 도시주변의 완만한 언덕을 거닐었다. 가외의 활동은 하나도 없었다. 그리스인들은 우리와 달리 신체활동과 정신활동을 구분짓지 않았기때문이다. 현대 대학의 전신인 플라톤의 아카데미아는 지성과 더불어 신체를 단련하는 곳이었다. 그리스인들은 몸과 마음이 어우러져 전체를 이루며 둘을 뗄 수 없다고 생각했다. - P43

이후 전개된 이론에서는 내적 동기와 외적 동기의 접목을 이상적으로 본다. 이를테면 처음에는 외적 보상(돈, 지위 등등)의 약속이 동기 부여가 되지만 일에 빠져들면 ‘몰입flow‘ 이라는 심리 상태에이르는데, 그러면 외부의 압박을 잊고 심지어 시간 가는 줄도 모른다. 왓슨과 크릭도 이를 경험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노벨상을 간절히 바랐지만, 일단 연구에 빠져들자 노벨상은 안중에도 없었다.
중요한 질문은 누군가가 경쟁력을 갖췄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무엇을 놓고(아니면 누구와) 경쟁하느냐다. 고대 아테네에서는 그답이 분명했다. 도시였다.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지만 고대 아테네인들은 자신의 도시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이런정서에는 ‘시민의 의무civic duty‘라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지만, 여기에는 어쩔 수 없이 한다는 뉘앙스가 있고 즐거운 느낌이 전혀 없다. 아테네인들의 정서는 그보다는 ‘시민의 기쁨civic joy‘ 에 가까웠다. 이 단어들을 나란히 놓는게 어색해 보인다는 사실로 우리와 고대인의 간극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 P49

알아가다보니, 천재의 장소가 낙원과 비슷하리라는 생각이야말로 무엇보다 큰 오해다. 결코 그렇지 않다. 낙원은 천재와 상극이다. 낙원에서는 아무것도 요구되지 않는 데 반해 창조적 천재는 새롭고 기발한 방식으로 요구를 충족하는 데 그 뿌리를 두기 때문이다. 니체는 "아테네인들이 성숙한 것은 사방에서 도전을 받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나를 죽이지 않는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라는 그의 유명한 금언과 같은 맥락이다. 창의성은 환경에 대한 대처다. 그리스 회화는 복합광에 대처한 결과였고(그리스의 화가 아폴로도로스는 깊이의 착시를 만들어내는 기법을 처음으로 개발했다) 그리스 건축은 복잡한 지형에 대처한 결과였으며, 그리스 철학은 복잡하고 불확실한 시대에 대처한 결과였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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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쑨원이 암으로 세상을 떠나자 소련 군사고문단은 장제스를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 앉혔다. 국민혁명군은 1926년 북부의 군벌을 소탕하는 ‘북벌(北伐)‘에 나섰고 도시의 공산당원과 농민들은 혁명군을 열렬히 환영했다. 그런데 국민혁명군이 양쯔강 하류 지역을 평정한 직후인 1927년 4월 12일 장제스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볼셰비키의 조직과 전술을 잘 알았던 그는 국민정부군 병력을 동원해 상하이 일대에서 공산당원을 닥치는대로 죽였다. 6만 명에 이르던 공산당원 가운데 생존자는 만 명도 되지 않았다. 저우언라이가 겨우 목숨을 건졌을 정도로 장제스의 쿠데타는 주도면밀했다. 장제스는 1928년 베이징을 점령해 군벌시대를 끝내고 난징에 새 정부를 세웠다. 그것을 ‘국민정부‘라고한다. - P140

마오쩌둥이 1938년 5월 강연에서 말한 대로 홍군은 군사적 열세를 정치로 극복했다.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다. 전쟁이 바로 정치이며 전쟁 자체가 정치성을 띤 행위라는 뜻이다. 그러나 전쟁은 일반 정치가 아니라 정치적 특수 수단의 연장이다. 전쟁은 특수하기 때문에 군대와 전략 전술, 공격과 방어 같은 특수한 조직과 방법과 과정을 지닌다. 전쟁에서 이기려면 심층적 정치동원을 이루어야 한다. 전쟁의 정치적목적을 군인과 인민에게 알리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정치 강령을 명확하게 세워 말, 전단, 포고문, 신문, 책, 연극,
영화, 학교, 민중단체, 간부 요원을 통해 전국의 민중을 심층 동원하면 무기의 열세를 비롯한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승리를 쟁취할수 있다. - P152

1936년 12월 7일 장제스는 전용기를 타고 장쉐량의 동북군사령부가 있는 시안에 갔다. 닷새가 지난 12월 12일 새벽, 무장한 동북군 병사들이 장제스가 머무르던 온천장을 덮쳤다. 장제스는 잠옷 바람에 맨발로 도망쳤다. 병사들은 뒷산 바위틈에 웅크린 총통을 업고 내려와 사령부로 이송했다. 동북군군악대가 국민당가를 연주하는 가운데 사령관 장쉐량이 장제스를 맞았다. 그는 총통의 각성을 위해 시안 체류를 요청하고 안전을 보장한다는 성명을 발표했으며 국민정부가 모든 정치세력과 손잡고 일본과 싸울 것을 요청하는 ‘구국의 요구‘ 8개 항을 제시했다.
- P158

장제스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동북군과 홍군의 급진파 장교들은 총통을 처형하자고 주장했다. 난징 정부의 국방부 장관을비롯한 야심가들은 시안 공격계획을 검토함으로써 장제스의 빈자리를 차지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쑨원의 처제이자 장제스의 아내인 쑹메이링(宋美齡)은 장군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군사행동을 보류시키고 시안으로 날아갔다. 스탈린은 장쉐량의 쿠데타에 중국공산당이 개입했는지 추궁하며 장제스를 죽이지 말라고 지시했다. 쑹메이링은 남편과 장쉐량을 한자리에 불러 화해를 주선하고 구명을 호소했다. 그러나 장제스는 항일연합전선을 구축하자는 요구를 완강히 거부했다. 그때 스탈린이 소련에 억류하고 있던 아들 장징궈(蔣經國)의 귀국을 허용할 수 있다는 신호를 보냈다. 저우언라이가 그것을 협상카드로 삼아 장제스를 설득했다. - P160

1945년 5월 독일이 항복해 유럽 전선이 소멸하자 마오쩌둥은 장제스에게 연립정부 수립을 제안했다. 그러나 8월 15일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면서 국공합작은 명분을 잃었다. 북부 지배권을두고 대결 분위기가 고조되던 1946년 4월 연립정부 수립 협상이 결렬되자 국민당과 공산당은 생사를 건 전면전을 시작했다. 객관적 전력은 국민정부가 단연 우세했다. 병력은 430만으로 127만의 흥군을 압도했고 무기와 장비도 월등했으며 미국에서 30억달러의 원조까지 받았다. 그러나 홍군도 정규군 이외에 수백만명의 민간 협력자를 확보했고 비행기·전차·대포·기관총 등 일본군의 신무기를 노획했으며 소련의 무기도 지원받아 화력을 대폭증강했다.
공산당은 군대의 명칭을 인민해방군으로 통일했다. 인민해방군은 북부와 서부의 근거지를 방어하는 데 성공했고 1947년 5월 산둥성 전투에서 크게 이겨 내전의 주도권을 잡았다. 그들은 이제쫓기는 군대가 아니었다. 서북 내륙을 나와 중원까지 진출한 인민해방군은 1948년 가을 만주에서 벌인 일련의 전투에서 결정적인승리를 거두었다. 1949년 1월 22일 선발대가 베이징을 점령했고,
2월 3일 본대가 입성했으며, 3월 2일 마오쩌둥과 공산당 수뇌부가 옛 황제의 별장 이화원에 중앙정치국을 설치했다. 5월 중순 인민해방군은 국민정부군의 마지막 보루인 상하이를 점령했다. 장제스 총통은 소수의 병력을 끌고 대만으로 달아났다. 1949년 10월 1일,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마오쩌둥 주석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 P165

중국공산당이 지배한 중화인민공화국이 청, 군벌정권, 장제스의 국민정부 시대보다 나은 사회였다는 것은 반박할 여지가 없다. 중국공산당은 인민을 먹여 살렸고 봉건적 폐습을 일소했으며 제국주의의 간섭과 수탈을 뿌리쳤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신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중국공산당도 소련공산당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공산당 일당독재체제를 구축해 사상과 이념의 다양성을 봉쇄하고 입법·행정·사법권을 하나로 묶어 권력을 집중했으며 권력자의 임기를 실효성 있게 제한하지도 않았다. 스탈린이 ‘사회주의 차르‘가 된것처럼 마오쩌둥도 ‘사회주의 황제‘가 됐다. 국가경제와 인민의 생활을 만족스러운 수준으로 개선하지도 못했다.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하는 일은 낡은 체제를 무너뜨리고 내전에서 이기는 것과는 다른 사업이었다. 마오쩌둥은 그 사업을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으며 다른 사람에게 권한을 넘기지도 않았다. - P168

그러나 정치체제만큼은 마오쩌둥이 ‘신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설계한 그대로다. 현대 중국의 정치는 플라톤이 말한 철인정치(哲人政治)의 ‘집단주의 버전‘이다. 공산당은 무엇이 선인지 아는 ‘철인‘ 또는 ‘현자(賢者)의 역할을 한다. 공산당은 조직 내부의 ‘민주주의‘ 또는 지도자 양성 시스템을 통해 국가 지도자를세우고, 그 지도자가 전권을 행사하며 국가를 운영한다. 권력분산·상호견제·복수정당제·언론자유 따위는 서구식 ‘대중민주주의‘에나 필요하다고 여긴다. 마오쩌둥은 여전히 중국을 지배하고있다. 중국 지식인들은 대부분 서구식 ‘대중민주주의‘를 거부하며 ‘신민주주의‘를 중국 실정에 맞는 정치체제라고 옹호한다. 통일 왕조가 무너질 때마다 혹독한 내전의 고통을 겪은 중국 민중은 적어도 당분간은 공산당의 지배를 용인할 듯하다. 영원하지는 않겠지만. - P171

하지만 괴팍한 몽상 같았던 그의 생각은 아래와 같은 나치당의 조직 원리를 국가에 적용하자 그대로 현실이 됐다.

나치당의 정치 개혁운동은 본질과 내부조직 모두 의회주의를 부정하며 다수결 원리를 거부한다. 일의 크고 작음을 불문하고 최고 책임을 진 지도자는 무조건적 권위를 가져야 한다. 지구 그룹의 책임자는 상급 지도자가 임명한다. 그는 지구 그룹의 책임을 가진 지도자이며 모든 위원회를 지배한다. 상급 조직인 소관구, 중구 대관구도 같은 원칙을 적용한다. 언제나 지도자는 위에서 임명하며 무제한의 권력과 권위를 부여한다. 오로지 당 전체의 지도자만 당규에 따라 전당대회에서 선출한다. 그는 이 운동의 독점적 지도자로서 모든 결정을 내리며 책임을 진다. 그가 운동의 원칙을 어기거나 제대로 일하지 않을 경우 지위를 빼앗고 똑같은 권위와 책임을가지는 더 유능한 인물을 새로 뽑는 것은 지지자의 자유다. 이 원리를 국가에 적용하는 것은 이 운동의 최고 과제에 속한다. 책임을지지 않으려는 자는 지도자 자격이 없다. 영웅만이 지도자가 되는데 적합하다. 인류의 진보와 문화는 다수결의 산물이 아니라 개인의 독창성과 행동력에서 비롯했다. 이 운동이 의회제도에 참가하는 것은 오로지 인류의 가장 심각한 퇴폐현상의 하나인 의회제도를 없애기 위한 활동으로서만 의미가 있다. - P183

히틀러에게는 여러 얼굴이 있었다. 인정받지 못한 화가, 몸을 사리지 않은 전투원, 청중에게 집단 최면을 건 선동가, 합법적으로 집권한 정치인, 무한 권력을 장악한 독재자, 전쟁광, 살인마.
그는 혼자 악을 저지르지 않았다. 인종주의·군국주의·제국주의·반유대주의 · 가부장주의 등 ‘모든 낡고 악한 이념의 연대‘가 그에게 무한 권력을 안겨줬다. 히틀러는 대중을 속이지 않았다. 연설과 책에서 자신의 사상과 목표와 방법을 명확하게 밝혔다. 독일국민은 알면서 그를 지지했다. 필연적이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 또한 아니었다. 그런 일은 언제 어디서든 또 벌어질 수 있다. - P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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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테레즈는 상점으로 내려가려고 애쓰지 않았다. 그녀는 손님들과 함께 열한시까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로랑과 시선이 부딪히는 걸 피하면서 같이 도미노 놀이를 하고 이야기를나누었다. 하기야 로랑도 그녀에게 마음을 쓰진 않았다. 그러나 이 남자의 다혈질적인 천성과 큰 음성, 기름진 웃음, 그리고 몸에서 풍겨나오는 거칠고도 달콤한 냄새에 마음이 쏠려서 그녀는 초조하고 괴로운 기분에 빠져 있었다.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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