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시 맑게 갠 계곡의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막다른 길로 들어가 진입로에 차를 세웠다. 현관문은 열려 있었다. 앤이 양팔로 잭을 안고 햇살 아래 서 있었다. 앤의 얼굴은 밤새 한숨도 못 잔 표정이었다. 그러나 앤은 화를 내지 않았다. 언성을 높이지도 않았다. 아니, 사실,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앤은 그저 나에게 지친 미소만, 지친 어깻짓만 해보였을 뿐이다. 그 미소, 그 어깻짓은 이렇게 말했다.
‘다 이해해. 다 이해해...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그러다가 잭이 나를 보고 양팔을 흔들었다.
"아빠, 아빠."
잭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끝> - P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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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기에 앞서
- 유럽의 한 장면


"살았어, 이젠 살았어!" 고픈 배를 움켜잡고 을씨년스러운 거리를, 황량한 들판을 비틀비틀 헤매고 다니던 소년은 이렇게 외쳤다. 소년의 눈에 들어온 먹을거리. 그러나 그것은 환상일뿐이었다. 들판의 밀은 남김없이 징발된 뒤였다. 그 무자비한 물자 징발은 유럽의 집단학살시대를 여는 것이었다. 때는 1933년, 이오시프 스탈린은 우크라이나를 의도적으로 기아의 늪에 빠뜨리는 중이었다. 그 소년은 결국 죽었다. 우크라이나 동포 300만 명과 마찬가지로 "나는 지하에서 그녀를다시 만날 거야." 어느 소련 젊은이는 자기 아내를 생각하며 이렇게말했다. 그 말은 들어맞았다. 그는 그녀 다음 순서로 총살되었고, 그녀와 함께 묻혔다. 스탈린의 1937~1938년 대숙청 기간에 다른 70만명과 함께였다. "그놈들은 내 결혼반지를 내놓으라고 했다. 나는.....…." 어느 폴란드 장교의 일기는 이렇게 중단되는데, 1940년에 그가 소련비밀경찰의 손에 처형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무렵, 폴란드를 동시 침공한 소련군과 나치 독일군에게 희생된 20만 폴란드인의 한 사람이었다. 1941년 말, 러시아의 레닌그라드에서 어느 열한 살짜리 러시아 소녀는 낡은 일기장에 마지막 말을 이렇게 썼다. "이제 타나만 남았어." 히틀러가 스탈린을 배신하고, 그 도시를 포위했다. 그리고 그녀의 가족은 농성 끝에 굶어 죽은 400만 명의 소련인에 포함되었다. 이듬해 여름, 이번에는 열두 살짜리 유대인 소녀가 벨라루스에서 아빠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를 썼다. "죽기 전에 인사해. 나 무서워. 그들이 아이들을 구덩이에 산 채로 집어던지고 있어."
그녀 외에도 독일군이 가스나 총탄으로 죽인 유대인은 500만 명이상이었다. - P5

 모두 블러드랜드의 도시들로, 독일의 유대인 대량학살은 점령된 폴란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소련땅에서 이뤄졌고 독일 본토에서는 진행되지 않았다. 히틀러가 수상으로 집권한 1933년 당시 독일의 유대인 인구는 1퍼센트도 되지 않았으며, 독일이 팽창한 뒤인)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시점에도 4분의 1이하였다. 히틀러가 집권하고 첫 6년 동안, 독일의 유대인들은 이민을 허락받았다(굴욕과 박해의 와중에서). 1933년 히틀러의 집권을 지켜봤던 독일계 유대인 대부분은 천수를 누렸다. 독일계 유대인 16만5000명을 학살한 일은 분명 끔찍한 범죄이지만, 유럽 유대인 전체가겪은 비극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홀로코스트 전체 희생자의 3퍼센트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치 독일이 1939년 폴란드를, 1941년 소련을 침공했을 때에야 ‘유럽에서 유대인을 몰아낸다‘는 히틀러의 비전이 유럽 유대인의 가장 큰 두 분파와 연결되었다. 그의 유럽 유대인박멸의 꿈은 유대인이 살고 있는 유럽 땅에서만 실현될 수 있었다. - P8

이 책은 한 정치적 대량학살의 이야기다. 1400만 명의 희생자는 모두 소련 또는 나치의 살육 정책으로 생명을 잃었으며, 그 둘 사이의 전쟁으로 숨진 것이 아니다. 심지어 그들의 4분의 1은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도 전에 죽어갔다. 또 20만 명은 1939년에서 1941년사이, 즉 독일과 소련이 ‘동맹국‘으로서 유럽 지도를 다시 그리던 시기에 죽었다. 1400만 명의 학살은 때로 경제 계획의 일환이었거나 혹은 경제 문제 때문에 가속이 붙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엄격하게 따지자면 결코 경제적 필요성 때문에 빚어진 일은 아니다. 스탈린은 1933년 배고픈 농민들에게서 식량을 강제 징발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었다. 히틀러도 그보다 8년 뒤, 소련 전쟁포로들의 식량 배급을 끊으면 어떻게 될지 알고 있었다. 두 경우 모두 300만 명 이상이 죽었다. 1937년과 1938년의 대숙청 시기에 숨져간 수십만 명의 소련 농민과 노동자는 스탈린의 명확한 지시에 따른 희생자였으며, 그것은 1941년과 1945년 사이에 히틀러의 명확한 지시대로 수백만 명의 유대인이 총과 가스에 희생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 P10

유럽의 대량학살 하면 보통 홀로코스트가 떠오르며, 홀로코스트는 빠르게 진행된 ‘살인 공정‘이었다고 여겨진다. 그런 이미지는 지나치게 단순하고, 명쾌하다. 독일과 소련의 살육 현장에서, 그 살육 방법은 오히려 원시적인 것이었다. 1933년에서 1945년까지 블러드랜드서 살육된 1400만 명의 민간인과 전쟁포로 중 절반 이상은 식량을 배급받지 못해 죽었다. 20세기 중반, 유럽인들은 같은 유럽인을 무지무지하게 많이 굶겨 죽였다. 홀로코스트 다음가는 두 가지 최대 대량학살, 1930년대에 스탈린이 시행한 의도적 굶주림과 1940년대 초히틀러의 소련 전쟁포로 굶기기는 이런 식의 학살이었다. 그건 사실 계획상으로는 더 큰 규모였다. "기아 계획"에서 나치는 1941년과1942년에 걸친 겨울에 수천만 명의 슬라브인과 유대인을 굶겨 죽이려 했다. 굶겨 죽이기 다음에는 총살이 집행되었고, 그다음은 가스실이었다. - P15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사실은 이 전쟁이 하나로 통합되어 있던 세계 경제를 조각내버렸다는 사실이다. 1914년에 살아 있던 유럽의 성인은 생전에 두번 다시 그만큼의 자유무역이 복구되는 일을 보지 못했다. 또 그런 유럽인의 대부분은 그 전 시대 수준의 번영을 다시는 누려보지 못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간단히 말해서 두 진영의 무력 충돌이었다. 한쪽 진영에는 독일 제국, 합스부르크 왕실,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동맹 제국)가 반대 진영에는 프랑스, 러시아 제국, 영국, 이탈리아, 세르비아, 미국(협상 제국)이 있었다. 1918년 협상 제국의 승리는 3대 유럽 대륙 제국인 합스부르크, 독일, 오스만의 종말을 가져왔다. 전후강화 조약인 베르사유 조약, 생제르맹 조약, 세브르 조약, 트리아농 조약의 결과 다민족 제국은 국민국가들로 바뀌고, 군주국들은 민주공화정으로 바뀌었다. 이 전쟁에서 무너지지 않은 유럽 강대국들도, 가령 영국 그리고 특히 프랑스는 크게 약화되었다. 승리자들 사이에는1918년의 승리로 전쟁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환상이있었다. 패전국들에서는 나라의 주도권을 쥐려던 혁명가들이 더 급진적인 변혁을 위한 유혈은 정당하다고 여기는 믿음이 있었다. 그런 변혁이야말로 참혹했던 전쟁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피해를 위로하리라는 믿음도,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정치적 비전은 공산주의 유토피아였다. 전쟁이 끝나던 때는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한 유명한말,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고 한 지 70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 P28

구러시아 제국의 붕괴와 구독일 제국의 패배는 동유럽에 힘의 공백 상태를 만들어냈고, 이는 볼셰비키들이 채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레닌과 트로츠키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내전에 그들의새로운 붉은 군대를 투입했지만, 발트해 연안의 다섯 지역(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폴란드)은 독립 공화국이 되었다. 이들지역을 잃고, 볼셰비키 러시아는 러시아 제국 때보다 더 동쪽으로 밀려난 모양새가 되었다. 이 신생 독립국들 가운데 폴란드는 다른 모든나라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인구를 보유했으며,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전후에 생겨난 다른 어떤 국가보다, 폴란드는동유럽의 세력 판도를 바꿔놓았다. 강대국이 되기에는 모자랐지만, 그 어떤 강대국의 팽창 정책이라도 펴기에 걸림돌이 될 만큼의 큰 영토는 갖고 있었다. 100여 년 이래 처음으로 러시아와 독일을 분리하는 나라였던 것이다. 폴란드의 존재 자체가 러시아와 독일 세력 사이에서 완충 역할을 했고, 따라서 모스크바와 베를린 모두 이 나라를 눈엣가시로 여겼다. - P31

레닌의 유산에 대한 스탈린의 해석은 결정적이었다. 스탈린이 1924년 "일국사회주의"를 언급했을 때, 그는 소련이 노동자의 천국이 될 것이라고, 그러나 단결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 만국의 노동자들의 도움은 별로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 셈이었다. 농업 우선 정책에 대해서는 일부 공산주의자의 반대가 있을 뿐이었지만, 소련의 지방에곧 자멸이 예약돼 있다는 데는 모두 의견 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거친 이행을 시작하는 데 쓸 초기 자본은 어디서 얻을 것인가? 한 가지 방법은 농민에게서 "잉여 농산물을 빼앗아, 외국에 팔아 벌어들인 외화로 기계류를 수입하는 한편 증가하고있는 노동계급의 배를 채워주는 것이었다. 1927년, 국가의 투자가 결정적으로 공업 위주로 바뀌던 해, 이 문제는 결정적 시기에 들어갔다.
근대화에 대한 논쟁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트로츠키(세계혁명론)와 스탈린사이의 대결이었다.  - P43

소련의 정책을 주무르는 데 능수능란함을 보여준 그는 앞서의 약속을 지켜야 했다. 1928년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스탈린은 농지를 몰수하고, 농민들을 국가 통제하에서 일하게 하며, 곡물을 국가 재산으로 삼는다는 "집단화" 정책을 내놓았다. 토지, 장비, 사람은 모두 집단농장에 소속되고, 대단위 작업을 통해 더 효율적으로 농작물을 생산할 것이었다(그렇게 믿어졌다). 집단농장은 농기계센터를 중심으로 구성되며, 이 센터는 현대식 장비와 주택을 현장 정치국원들에게 배분한다. 집단화는 국가가 농산물을 통제할 수있도록 했고, 그리하여 노동자들을 잘 대우하고 그들의 지지를 유지하는 한편 해외 수출을 해서 얻은 외화로 공업에 투자할 수 있도록했다. - P44

 그리고 대공황이 닥쳤는데, 이는 스탈린에게도 기회였지만 히틀러에게는 더 큰 기회가 되었다. 독일 경제의 파탄은 공산혁명의 가능성을 점치게 했으며, 이 역시 히틀러의 집권에 도움이 되었다. 국제 경제 위기는 과격한 변화를 정당화하는 듯 보였다. 규모가 컸던 독일 공산당이 혁명에 나설 가능성은 공포를 불러일으켰으며, 그 공포는 히틀러의 손에 의해 민족주의로 연결되었다. 1930년 9월 선거에서 나치는 득표율 18퍼센트와 107개 의석을 얻었다. 그리고 1932년 7월 선거에서는 압승을 거뒀다. 득표율은 37퍼센트 이상이었다.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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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매 순간 두려움이 나를 지배하겠지. ‘오늘, 모든 일이 만천하에 드러날 거야‘ 라는 생각으로 늘 고통 받겠지. 가령, 사소한 범죄와 비행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내뱉는 작은 거짓말들을 저질렀다고 치자. 정말 두려운 건 범죄와 비행 자체는 아닐 것이다. 자신이 무능하고 무책임하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들키는 게 더욱 두려울 것이다. 그 두려움은 절대로 떨쳐버릴 수 없다.
문명과 야만 사이의 가느다란 선을 넘어가면 혹시 그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있을까? 그 선을 정말 쉽게 넘어갈 수 있다는 걸, 10억분의1초에도 넘어갈 수 있다는 걸, 그저 손만 내밀면 그만이라는 걸 누구나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선을 겁낸다.
그 선을 넘은 다음에는? - P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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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해군대장 출신 사이토 마코토는 1919년 8월 조선총독부 제3대 총독으로 부임했다. 3·1운동으로 촉발된 일제의 조선 식민통치 위기를 수습해 지배체제를 안정시키라는 특명을 받은 터였다. 그는 취임 즉시 민심 수습책의 하나로 전임 총독들이 펼친 강압적 ‘무단정치‘를 종식하고 새로운 ‘문화정치‘를 표방했다. 그는 총독을 문관에 개방하고, 조선인 차별대우 철폐, 지방분임주의, 조선 재래 문화와 습관 존중, 언어 집회와 출판의 자유, 경찰 기관의 정비, 인재 등용, 문호 개방 등을 새로운 시정방침으로 발표했다.
이에 따라 조선합병 후 헌병이 주로 담당하던 치안 업무를 보통경찰이 맡도록 했다. 또 제복을 입고 칼을 차고 근무하던 관리와 교사들도 조선 민중의 반감을 불러일으킨다는 판단에 따라 민간인 복장으로 전환했다. 총독부 관리나 보통학교 교장, 경찰관 등에 조선인을 임용하기 시작했고, <조선일보>, <동아일보>, <시대일보> 등 조선어 신문의 발행도 허용했다. 무단통치 시절에 비해 민주주의적 권리가 대폭 신장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런 통치 형태의 변화는 어디까지나 식민지 지배를 공고하게 다지기 위한 고도의 정치공학적 술책에 지나지 않았다. 겉으로는 자유가 대폭 허용된 것 같지만 실제로는 교묘한 방식으로 지배체제를 강화한 것이었다. - P62

반면 이런 기만적인 문화통치는 조선인 사회를 빠르게 분열시켰다. 문화통치 시기에 많은 지식인이 변절했고, 위장된 자치론으로 독립운동에 혼선이 빚어졌다. 일제 총독부 관료와 경찰, 교원등으로 채용된 조선인은 ‘친일파‘로 성장해 1930, 40년대 일제 식민통치의 적극적인 협조자 노릇을 했다. 온건파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문화통치의 개량 공간에서 활동하면서 점점 친일파로 전향하는 자들이 속출했다. 결국 문화통치를 통해 조선 식민통치 기반을 강화하겠다는 일제의 속셈이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둔 셈이다.
김상옥은 그런 문화통치의 기만성을 폭로하고, 3·1만세운동이후 침체에 빠진 국내외 독립운동에 자극제 역할을 하고자 사이토를 암살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된다. - P64

이튿날 장규동의 사망소식을 듣고 이시영, 조소앙, 윤기섭, 조완구, 신익희 등 임시정부 동지들이 달려와 3일장을 지내기로 하고 장례를 준비했다. 장례비가 없어 고민하던 차에 때마침 백범김구가 부음을 듣고 장례비조로 중국 돈 100원을 보내왔다.
실의에 빠져 있던 상옥은 그 돈을 보자 관을 사겠다며 혼자 시내로 나갔다. 하지만 그는 관을 사오지 않았다. 그 대신 비장한 표정으로 품속에서 모제르 7연발 권총을 꺼냈다. 관 대신 총을 산것이다. 장례를 준비하던 임정 동지들은 그런 상옥의 행동을 어이없어 했다.
그러나 그는 동지들에게 결연한 어조로 "사랑하는 내 동지 장규동을 죽인 것은 병마도 아니고 귀신도 아니다. 내 동지를 죽인것은 바로 일제의 경관이다. 이 총으로 그놈들을 죽여 동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말했다. - P108

바깥에서 "투항하라"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하지만 상옥은 조용히 눈을 감고 머리에 권총을 갖다 댔다. 그의 눈에 살짝 물기가 맺혔다.
배고픈 어린 시절 낮에는 첫불공장과 대장간에서 일하면서 밤에는 야학을 다니며 공부하던 일부터 동생 춘원과 함께 영덕철물상회를 운영했던 일, 3·1만세운동 후 <혁신공보>를 제작해 경성시내에 뿌렸던 일, 암살단을 조직해 사이토 총독을 죽이려고 한일, 상하이 시절 연인 장규동의 죽음, 임시정부 인사들을 만나고 의열단에 가입해 원대한 조국광복의 꿈을 키웠던 일 등 34년의짧은 생애가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스쳐갔다.
김상옥은 모제르 7연발총의 방아쇠를 힘껏 당겼다.
‘탕!‘ - P141

경찰 수뇌부는 물론이고 특별수사대장 미와도 이런 반론에 대해 뚜렷한 증거로 반박하지 못했다. 마침내 경찰 수뇌부는 의열단의 본거지인 중국 톈진과 베이징, 상하이 등에 수사요원을 보내상옥의 경성 잠입 목적과 종로서 사건과의 연관성 등에 대한 자세한 내막을 추적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경기도 경찰부에서 가장뛰어난 조선인 출신 고등계 형사 한 명을 중국으로 출장 수사를보냈다.
그러나 식민지 경찰의 이런 노력은 역설적으로 또 다른 거대한의열단 폭탄 사건의 시발점이 되고 말았다. - P151

놀랍게도 그가 바로 이태준이 소개해주겠다던 마자르였다. 혼자서 약산을 찾아 몽골에서 베이징까지 온 것이다. 마자르는 약산에게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해줬다. 그는 이태준과 함께 고륜을 떠나 베이징으로 오던 길에 러시아 백군을 만났는데, 이태준은 일본군 장교들의 농간으로 끝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외국인인 그는다행히 생명만은 건질 수 있었다. 친구 이태준은 비록 죽었지만 그와의 약속만큼은 꼭 지키고 싶어 혼자서 약산을 찾아 베이징까지 오게 됐다는 것이다.
헝가리 출신인 마자르는 이태준이 설명한 대로 지금까지 약산과 의열단이 접할 수 없었던 뛰어난 폭탄 제조 전문가였다. 또한 조선을 비롯한 약소민족의 독립운동을 열렬히 지지했다.  - P197

그로부터 한 달 정도 지난 1923년 1월 하순, 신채호는 마침내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를 없이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 생존의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였다."로 시작되는 6400 여 자 분량의 ‘조선혁명선언‘을 탈고했다.

"우리는 혁명수단으로 우리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을 죽여 없이곧 우리의 정당한 수단임을 선언하노라・・・・・・ 우리는 우리의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과 타협하려는 자(내정독립 · 자치 · 참정권 등을 주장하는 자)나 강도정치하에서 기생하려는 주의를 가진 자(문화운동자)나 다 우리의 적임을 선언하노라.…… 우리는 끊임없는 폭력, 암살, 파괴, 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여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 · 암살 · 파괴 · 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박탈치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 중에서 - P205

하지만 두 조직이 국내에서 함께 움직이면서 예상치 못한 보안상 허점이 노출됐다. 의열단은 원래 경찰과 밀정의 감시를 피하기위해 놀라울 정도로 보안에 철저한 조직이었다. 일본 경찰과 헌병이 김원봉을 체포하고 의열단 조직을 와해시키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했지만 번번이 허탕을 쳤던 이유도 의열단의 보안능력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 작전에는 고려공산당 당원들의 대대적으로 가담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고려공산당 당원은 의열단원과 달리 비밀작전에 대한 훈련을 받아본 경험이 전혀 없었다.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와 해박한 지식을 이용해 작전을 도울 수는 있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아마추어리즘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조동근은 김시현의 부탁을 받아 자기 집에 폭탄을 보관키로 했지만 발각될 것이 두려워 이번 작전과는 별 관계가 없는 3자인 홍우룡에게 폭탄을 맡기는 우를 범했다. 결국 홍우룡의 신고로 신의주 경찰의 수사가 시작됐다.
허점은 의열단 내부에도 있었다. 특히 중국에서 비밀 훈련을 받은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이번 거사를 위해 국내에서 충원된 의열단원들이 문제였다. 황옥이 경성에서 폭탄을 맡겼던 조황이 대표적이다. 조황 역시 경찰에 발각될 것이 두려워 평소에 알고 지내던 ‘김두형‘에게 폭탄 보관을 의뢰했다. 경찰의 끄나풀이던 김두형은 즉각 경기도 경찰부에 이 사실을 알렸고, 경찰은 황옥과 조황을 연이어 체포했다. 국내 작전의 총책임자인 김시현이 체포된것도 내부의 밀고 때문이었다. - P268

하지만 김원봉은 훗날 이 사건과 관련, 황옥이 자신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범행을 부인했던 것이라고 증언했다. 김원봉은 황옥이 톈진에서 경성으로 출발할 때 "우리의 혁명운동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오. 혹시 이번의 우리 계획이 불행히 패를 보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황공은 결코 우리가 이번에 취한수단 방법에 관하여는 일체, 발설을 마오. 한 번 드러나고 보면 같은 방책을 두 번 쓸 수는 없는 일 아니겠소?"라고 당부했다.
만약 황옥이 독립투사로서 기개를 보여주며 거사 가담을 시인하면 일제는 반드시 끝까지 추궁할 것이고, 그러면 이번 계획과 관련된 모든 비밀이 드러나면서 피해가 엄청나게 커질 게 불 보듯뻔했다. 그래서 황옥은 ‘친일 주구‘, ‘밀정‘ 또는 ‘변절자‘니 하면서온 세상이 자기를 조롱하고 비웃더라도 자기 하나 수모를 감수하면 조직이 안전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재판정에서 그렇게 행동했다는 것이다.
- P274

의열투사들의 고난스런 해방 후 삶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우리의 망각이다. 이 책을 집어든 독자 가운데는 거의 처음으로 김상옥과 황옥, 김시현, 김원봉의 이름을 접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것이다.
과거사를 대하는 프랑스의 한 사례는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준다. 프랑스의 모든 고등학교에서는 2008년부터 해마다 10월이면 제2차 세계대전당시 독일 나치에게 처형된 17세 레지스탕스 소년을 추모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2007년 5월 대통령 취임식을 마친 후 곧바로파리 외곽의 레지스탕스 추모장을 방문, 나치 독일과 싸우다 숨진레지스탕스가 프랑스 청년의 귀감이 되도록 교육하라고 지시한데 따른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쓰라린 경험을 안고 있는 우리는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조국독립을 위해 싸우다 쓰러져간 투사들의 삶을 조명하여 정당하게 평가하고 대우해주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이 책이 그런 우리의 노력에 조금이나 도움이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 P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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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여자를 그렇게 비인간적으로 대우하던 시대는 지났다. 우리는더 이상 여자들을 가두거나 뇌의 일부를 잘라내지 않는다. 그 대신 약을 준다. 여자에게 항우울제가 처방될 확률은 남자의 2.5배다. 항우울제를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정신 건강 문제가 있는 사람들의 인생을 바꿔놓을 수도 있다. 그러나 왜 그렇게 여자에게 많이 처방되는지를 질문해볼 가치는 있다. 단순히 여자가 도움을 더 많이 청하기 때문은 아니다. 2017년 스웨덴의 연구에 따르면 실제로 우울증 때문에 병원을더 많이 찾는 쪽은 남자였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여자에게 항우울제가 많이 처방되는가? 단순히 여자들이 "마음이 약하기" 때문인가? 자신에게 맞지 않는 세상에서 사는 것이 우리 여자들의 정신 건강에 영향을 미치나? 아니면 항우울제는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여자들을 위한 새로운 그리고 확실히 선호되는 전전두엽절개술인가? - P282

우리는 여자들이 하는 무급 노동이, 여자 개인이 자신의 개인적 이익을 위해 자기 가족을 개인적으로 돌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사회는 여자들의 무급 노동에 의존할뿐 아니라 그로 인한 혜택을 입는다. 우리 모두가 낸 세금으로 운영하는공공서비스 예산을 정부가 삭감한다고 해서 그 서비스의 수요가 갑자기 사라지지는 않는다. 단지 여자들에게 노동이 떠넘겨질 뿐이다. 그것이 여성의 유급 노동력 참여율과 GDP에 미치는 모든 부정적 영향과 함께. 그래서 여자들이 하는 무급 노동은 단순한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만든 제도 속에 포함되어 있으며 집어넣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쉽게 뺄 수도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데이터를 수집한 다음에 남성 편향적 허구가 아니라 현실을 중심으로 경제를 다시 설계할 의지뿐이다. - P311

 위협은 공포에서 비롯되는데 사실 그 공포는 젠더 데이터 공백에 의해 생긴 것이다. 남자의 목소리와 남자의 얼굴로 가득한 문화 속에서 자란 어떤 남자들은 그들이 당연히 남자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권력이나 공간을 여자들이 빼앗아 갈까 봐 두려워한다. 그 공포는 우리가 문화적 젠더 데이터 공백을 메워서 남자아이들이 더 이상 공공영역을 자기들 것이라고 생각하며 자라지 않게될 때까지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 P345

그러나 복구 계획자들은 여자들에게 필요한 것을 묻지 않음으로써 여성정책연구소가 (1차 허리케인, 2차 홍수에 이은) "3차 재난"이라고 부른 것을 일으켰다. 이 3차 재난은 "제방붕괴와 마찬가지로 인재"였다.
뉴올리언스 시 공공주택에 살았던 임차인 대부분은 청소만 마치면원래 살던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고 돌아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 (공공주택 대단지 4곳의 별명인) "더 브릭스the bricks"는 무너지지 않은 데다 주택도시개발부에 따르면, 골조가 온전해서 청소 후에 다시 살아도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다. "뉴올리언스에 집세가 저렴하고골조가 온전한 집이 대단히 부족한데도" 이 집들을 철거하기 위한 자금지원 계획이 발표됐다. 그 대신 중저소득자를 위한 집이 들어설 예정이었는데 기존의 4534채에 한참 못 미치는 706 채밖에 안 됐다.
마이애미의 "우리가 다시 지을 것이다" 처럼 뉴올리언스 재건 계획자들은 "이제 영원히 살 곳을 잃은 전부 저소득자이고 대부분이 흑인여성인 수천 명"에게 필요한 것보다 사업 이익을 더 중요시한 듯하다. - P356

성별/젠더 데이터 공백에 대한 해법은 분명하다. 여성 진출 공백을 메우면 된다. 의사결정과정에, 연구에, 지식 생산에 참여한 여자들은 여자를 잊지 않는다. 여성의 삶과 관점이 빛 속으로 나오게 된다. 이는 세계 곳곳의 여자들에게도 이롭지만, 코바늘뜨기하는 수학과 교수 타이미나의 이야기가 보여주듯이, 인류 전체에게 이로운 경우도 많다. 그래서 다시 프로이트의 "여성성이라는 수수께끼"로 돌아가보면 해답은 처음부터 우리 눈앞에 있었다. 여자들에게 물어보기만 했으면 됐던 것이다. - P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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