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기에 앞서
- 유럽의 한 장면


"살았어, 이젠 살았어!" 고픈 배를 움켜잡고 을씨년스러운 거리를, 황량한 들판을 비틀비틀 헤매고 다니던 소년은 이렇게 외쳤다. 소년의 눈에 들어온 먹을거리. 그러나 그것은 환상일뿐이었다. 들판의 밀은 남김없이 징발된 뒤였다. 그 무자비한 물자 징발은 유럽의 집단학살시대를 여는 것이었다. 때는 1933년, 이오시프 스탈린은 우크라이나를 의도적으로 기아의 늪에 빠뜨리는 중이었다. 그 소년은 결국 죽었다. 우크라이나 동포 300만 명과 마찬가지로 "나는 지하에서 그녀를다시 만날 거야." 어느 소련 젊은이는 자기 아내를 생각하며 이렇게말했다. 그 말은 들어맞았다. 그는 그녀 다음 순서로 총살되었고, 그녀와 함께 묻혔다. 스탈린의 1937~1938년 대숙청 기간에 다른 70만명과 함께였다. "그놈들은 내 결혼반지를 내놓으라고 했다. 나는.....…." 어느 폴란드 장교의 일기는 이렇게 중단되는데, 1940년에 그가 소련비밀경찰의 손에 처형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무렵, 폴란드를 동시 침공한 소련군과 나치 독일군에게 희생된 20만 폴란드인의 한 사람이었다. 1941년 말, 러시아의 레닌그라드에서 어느 열한 살짜리 러시아 소녀는 낡은 일기장에 마지막 말을 이렇게 썼다. "이제 타나만 남았어." 히틀러가 스탈린을 배신하고, 그 도시를 포위했다. 그리고 그녀의 가족은 농성 끝에 굶어 죽은 400만 명의 소련인에 포함되었다. 이듬해 여름, 이번에는 열두 살짜리 유대인 소녀가 벨라루스에서 아빠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를 썼다. "죽기 전에 인사해. 나 무서워. 그들이 아이들을 구덩이에 산 채로 집어던지고 있어."
그녀 외에도 독일군이 가스나 총탄으로 죽인 유대인은 500만 명이상이었다. - P5

 모두 블러드랜드의 도시들로, 독일의 유대인 대량학살은 점령된 폴란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소련땅에서 이뤄졌고 독일 본토에서는 진행되지 않았다. 히틀러가 수상으로 집권한 1933년 당시 독일의 유대인 인구는 1퍼센트도 되지 않았으며, 독일이 팽창한 뒤인)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시점에도 4분의 1이하였다. 히틀러가 집권하고 첫 6년 동안, 독일의 유대인들은 이민을 허락받았다(굴욕과 박해의 와중에서). 1933년 히틀러의 집권을 지켜봤던 독일계 유대인 대부분은 천수를 누렸다. 독일계 유대인 16만5000명을 학살한 일은 분명 끔찍한 범죄이지만, 유럽 유대인 전체가겪은 비극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홀로코스트 전체 희생자의 3퍼센트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치 독일이 1939년 폴란드를, 1941년 소련을 침공했을 때에야 ‘유럽에서 유대인을 몰아낸다‘는 히틀러의 비전이 유럽 유대인의 가장 큰 두 분파와 연결되었다. 그의 유럽 유대인박멸의 꿈은 유대인이 살고 있는 유럽 땅에서만 실현될 수 있었다. - P8

이 책은 한 정치적 대량학살의 이야기다. 1400만 명의 희생자는 모두 소련 또는 나치의 살육 정책으로 생명을 잃었으며, 그 둘 사이의 전쟁으로 숨진 것이 아니다. 심지어 그들의 4분의 1은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도 전에 죽어갔다. 또 20만 명은 1939년에서 1941년사이, 즉 독일과 소련이 ‘동맹국‘으로서 유럽 지도를 다시 그리던 시기에 죽었다. 1400만 명의 학살은 때로 경제 계획의 일환이었거나 혹은 경제 문제 때문에 가속이 붙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엄격하게 따지자면 결코 경제적 필요성 때문에 빚어진 일은 아니다. 스탈린은 1933년 배고픈 농민들에게서 식량을 강제 징발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었다. 히틀러도 그보다 8년 뒤, 소련 전쟁포로들의 식량 배급을 끊으면 어떻게 될지 알고 있었다. 두 경우 모두 300만 명 이상이 죽었다. 1937년과 1938년의 대숙청 시기에 숨져간 수십만 명의 소련 농민과 노동자는 스탈린의 명확한 지시에 따른 희생자였으며, 그것은 1941년과 1945년 사이에 히틀러의 명확한 지시대로 수백만 명의 유대인이 총과 가스에 희생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 P10

유럽의 대량학살 하면 보통 홀로코스트가 떠오르며, 홀로코스트는 빠르게 진행된 ‘살인 공정‘이었다고 여겨진다. 그런 이미지는 지나치게 단순하고, 명쾌하다. 독일과 소련의 살육 현장에서, 그 살육 방법은 오히려 원시적인 것이었다. 1933년에서 1945년까지 블러드랜드서 살육된 1400만 명의 민간인과 전쟁포로 중 절반 이상은 식량을 배급받지 못해 죽었다. 20세기 중반, 유럽인들은 같은 유럽인을 무지무지하게 많이 굶겨 죽였다. 홀로코스트 다음가는 두 가지 최대 대량학살, 1930년대에 스탈린이 시행한 의도적 굶주림과 1940년대 초히틀러의 소련 전쟁포로 굶기기는 이런 식의 학살이었다. 그건 사실 계획상으로는 더 큰 규모였다. "기아 계획"에서 나치는 1941년과1942년에 걸친 겨울에 수천만 명의 슬라브인과 유대인을 굶겨 죽이려 했다. 굶겨 죽이기 다음에는 총살이 집행되었고, 그다음은 가스실이었다. - P15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사실은 이 전쟁이 하나로 통합되어 있던 세계 경제를 조각내버렸다는 사실이다. 1914년에 살아 있던 유럽의 성인은 생전에 두번 다시 그만큼의 자유무역이 복구되는 일을 보지 못했다. 또 그런 유럽인의 대부분은 그 전 시대 수준의 번영을 다시는 누려보지 못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간단히 말해서 두 진영의 무력 충돌이었다. 한쪽 진영에는 독일 제국, 합스부르크 왕실,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동맹 제국)가 반대 진영에는 프랑스, 러시아 제국, 영국, 이탈리아, 세르비아, 미국(협상 제국)이 있었다. 1918년 협상 제국의 승리는 3대 유럽 대륙 제국인 합스부르크, 독일, 오스만의 종말을 가져왔다. 전후강화 조약인 베르사유 조약, 생제르맹 조약, 세브르 조약, 트리아농 조약의 결과 다민족 제국은 국민국가들로 바뀌고, 군주국들은 민주공화정으로 바뀌었다. 이 전쟁에서 무너지지 않은 유럽 강대국들도, 가령 영국 그리고 특히 프랑스는 크게 약화되었다. 승리자들 사이에는1918년의 승리로 전쟁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환상이있었다. 패전국들에서는 나라의 주도권을 쥐려던 혁명가들이 더 급진적인 변혁을 위한 유혈은 정당하다고 여기는 믿음이 있었다. 그런 변혁이야말로 참혹했던 전쟁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피해를 위로하리라는 믿음도,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정치적 비전은 공산주의 유토피아였다. 전쟁이 끝나던 때는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한 유명한말,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고 한 지 70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 P28

구러시아 제국의 붕괴와 구독일 제국의 패배는 동유럽에 힘의 공백 상태를 만들어냈고, 이는 볼셰비키들이 채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레닌과 트로츠키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내전에 그들의새로운 붉은 군대를 투입했지만, 발트해 연안의 다섯 지역(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폴란드)은 독립 공화국이 되었다. 이들지역을 잃고, 볼셰비키 러시아는 러시아 제국 때보다 더 동쪽으로 밀려난 모양새가 되었다. 이 신생 독립국들 가운데 폴란드는 다른 모든나라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인구를 보유했으며,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전후에 생겨난 다른 어떤 국가보다, 폴란드는동유럽의 세력 판도를 바꿔놓았다. 강대국이 되기에는 모자랐지만, 그 어떤 강대국의 팽창 정책이라도 펴기에 걸림돌이 될 만큼의 큰 영토는 갖고 있었다. 100여 년 이래 처음으로 러시아와 독일을 분리하는 나라였던 것이다. 폴란드의 존재 자체가 러시아와 독일 세력 사이에서 완충 역할을 했고, 따라서 모스크바와 베를린 모두 이 나라를 눈엣가시로 여겼다. - P31

레닌의 유산에 대한 스탈린의 해석은 결정적이었다. 스탈린이 1924년 "일국사회주의"를 언급했을 때, 그는 소련이 노동자의 천국이 될 것이라고, 그러나 단결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 만국의 노동자들의 도움은 별로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 셈이었다. 농업 우선 정책에 대해서는 일부 공산주의자의 반대가 있을 뿐이었지만, 소련의 지방에곧 자멸이 예약돼 있다는 데는 모두 의견 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거친 이행을 시작하는 데 쓸 초기 자본은 어디서 얻을 것인가? 한 가지 방법은 농민에게서 "잉여 농산물을 빼앗아, 외국에 팔아 벌어들인 외화로 기계류를 수입하는 한편 증가하고있는 노동계급의 배를 채워주는 것이었다. 1927년, 국가의 투자가 결정적으로 공업 위주로 바뀌던 해, 이 문제는 결정적 시기에 들어갔다.
근대화에 대한 논쟁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트로츠키(세계혁명론)와 스탈린사이의 대결이었다.  - P43

소련의 정책을 주무르는 데 능수능란함을 보여준 그는 앞서의 약속을 지켜야 했다. 1928년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스탈린은 농지를 몰수하고, 농민들을 국가 통제하에서 일하게 하며, 곡물을 국가 재산으로 삼는다는 "집단화" 정책을 내놓았다. 토지, 장비, 사람은 모두 집단농장에 소속되고, 대단위 작업을 통해 더 효율적으로 농작물을 생산할 것이었다(그렇게 믿어졌다). 집단농장은 농기계센터를 중심으로 구성되며, 이 센터는 현대식 장비와 주택을 현장 정치국원들에게 배분한다. 집단화는 국가가 농산물을 통제할 수있도록 했고, 그리하여 노동자들을 잘 대우하고 그들의 지지를 유지하는 한편 해외 수출을 해서 얻은 외화로 공업에 투자할 수 있도록했다. - P44

 그리고 대공황이 닥쳤는데, 이는 스탈린에게도 기회였지만 히틀러에게는 더 큰 기회가 되었다. 독일 경제의 파탄은 공산혁명의 가능성을 점치게 했으며, 이 역시 히틀러의 집권에 도움이 되었다. 국제 경제 위기는 과격한 변화를 정당화하는 듯 보였다. 규모가 컸던 독일 공산당이 혁명에 나설 가능성은 공포를 불러일으켰으며, 그 공포는 히틀러의 손에 의해 민족주의로 연결되었다. 1930년 9월 선거에서 나치는 득표율 18퍼센트와 107개 의석을 얻었다. 그리고 1932년 7월 선거에서는 압승을 거뒀다. 득표율은 37퍼센트 이상이었다.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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