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임포스터는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다

《메타인지 학습법》을 집필하고 난 뒤, 나는 메타인지의 특성 중 어떤 부분이 한국 문화에 잘 들어맞고 중요할지 깊이 생각해보았다.
뿐만 아니라 메타인지 강연 후 학부모들과 가졌던 대화 시간에, 나도내 내면의 거울을 통해 나를 더 깊이 관찰할 수 있었다.
<메타인지 학습법>에서도 밝혔듯 나도 나를 인정하는 용기가 많이 부족했었다. 남보다 느리거나 남과 다르다는 생각에 창피함을 느꼈고, 힘든데도 괜찮은 척했으며, 실수를 저지를까 봐 입을다물곤 했다. 과거의 나는 내 진짜 모습을 가리기 위해 가면 뒤에 숨었던 적이 많다.
우리는 대체 언제부터 가면을 쓰게 될까? - P12

나는 메타인지를 용기라고 정의한다. 학습이 이뤄지려면 포기하지 않는 용기, 도전하는 용기, 실수를 극복하는 용기, 창피함을 무릅쓰는 용기, 모르는 것을 인정하는 용기,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는 용기 등 정말로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메타인지를 정의하는 데필요한 또 하나의 키워드는 바로 믿음이다. 용기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 P7

자신을 무능한 가짜라고 믿는 임포스터들은 두 가지 두드러진 행동양상을 보인다. 바로 ‘과도한 노력‘과 ‘미루기‘다. ‘과도한 노력‘은 자신이 가짜란 사실이 탄로나는 것을 막기 위해 남보다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고 믿는 데서 오는 근면함이다. 그 밑에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다.
이와 반대로 ‘미루기‘는 시험공부나 면접준비 등 해야 할 일을 앞두고 일부러 하지 않는 것이다. 미루기는 일종의 자기불구화 self-handicapping 현상으로, 자기가 뻔히 실패할 것 같은 일을 앞두고 일을 미룸으로써 미리 실패의 이유를 만들어놓는 심리다. 실패했을때 그 원인을 자신이 아닌 다른 것으로 돌리기 위해서 일부러 성과를 내기 어려운 상황을 만드는 것이다.
‘과도한 노력‘과 ‘미루기‘는 임포스터가 자신의 능력을 신뢰하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특징적 행동이다.  -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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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퍼드대학의 웹페이지를 살펴보더라도 살인의 가능성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제인 스탠퍼드의 죽음은 사인이 "확실하게 규명되지 않았다"라고만 나와 있다. 그리고 "조던 학장을 만나보자"라는 페이지에서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긴 프로필을 한참 훑어 내려가다 보면 제인 스탠퍼드의 죽음에 그가연루되었을 가능성이 담긴 한 문장을 발견할 수 있다. "1905년 2월에 제인 스탠퍼드가 불가사의한 상황에서 사망했을 때, 조던은서둘러 하와이로 달려갔다. 이는 시체를 찾아오기 위함이었고, 일부 사람들의 생각에 따르면 제인이 독살되었다는 보도가 나오는걸 막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런데 이런 짐작도 최근에야 추가된것이다. 거의 한 세기가 가깝도록 제인은 자연사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고, 더 흉악한 사인에 대한 소문은 확실히 무시되어왔기때문에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 P167

화이트는 독살이 누구의 소행이든 데이비드가 독살을 은폐하려 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점점 더 확신했다. 그의 학생들은 제인의 죽음 이후 데이비드가 벌인 수상한 행동들을 계속해서 밝혀냈다. 데이비드의 지인이 그에게 음식을 너무 많이 먹는 것으로도 죽는 게 가능하다고 확인해주는 편지, 데이비드가 범죄를 은폐한 것에 대해 "사후 세계에서 심판받을" 것이라고 말한 발신자 미상의 편지, 제인의 스파이가 데이비드에게 "돈으로 내 입을 막을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한 편지 등. 또한 누구도 다른 의견을 제시하지 않은 채 몇십 년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데이비드가 계속해서 "제인이 자연적 원인으로 사망했다"고 주장한 점도 이상했다. 데이비드의 그런 주장은 그가 나이 들어갈수록 연설, 신문 기고문,
편지 등 엉뚱한 곳에서 툭툭 튀어나왔다. 화이트는 데이비드가 이버전의 사건 이야기를 그렇게까지 고집스럽게 계속 주장한 이유가 뭔지 궁금했다. 그는 제인의 죽음에 관한 뭔가가 데이비드를 죽을 때까지 줄곧 괴롭혀온 것 같다고 여겼다. - P170

나는 빈손으로 집에 돌아왔다. 언제나처럼 길을 잃은 채로.
내 목덜미로 뜨거운 열을 치솟게 만든 그것을 우연히 발견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두어 달 뒤의 일이다. 데이비드가 쓴 물고기수집 안내서 중 하나인 《물고기 연구를 위한 안내》에서 답을 찾고있을 때였다. 나는 미소를 머금고 그의 친절한 서문을 읽었다. 거기서 그는 독자들에게 물고기는 어디서든 찾을 수 있다고 큰소리쳤다. 이를테면 "물고기들이 ‘수영하는 구멍‘, 즉 강가의 오래된 나무뿌리가 물속으로 드러난 부분, 그 사이 물살이 빙빙 도는 웅덩이"에서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나는 그가 그린 물고기의 턱뼈, 가슴지느러미, 부레 등의 그림을 휙휙 넘겼다.
그러다가 430 페이지에서, 나는 그것을 보았다. "물고기를 확보하는 방법"이라는 섹션에서, 그는 거기까지 자신을 따라온 대담한 독자들에게 한 가지 비밀을 누설했다. 조수웅덩이 틈새로 쏜살같이 들어가버리는 탓에 좀처럼 잡히지 않는 가장 성가신 물고기를 잡을 때 그가 가장 즐겨 쓰는 방법은 뭘까? 바로 독이다. 구체적으로 그가 추천한 종류는? 언젠가 그가 "세상에서 가장 쓴 것"이라고 묘사했던 위험하고 강력한 물질, 바로 스트리크닌이다.
- P175

전 세계에서 인류의 "쇠퇴"를 예방할 유일한 방법은 이 "백치들"을 몰살하는 것이라고 권고하는 책, 겨우 몇십 년 전에 처음 생겨난 한 단어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책이었다. ‘그 단어‘는 그가 처음쓰기 시작했을 때는 미국에서 그리 인기가 없는 단어였지만, 그가 지극한 열성과 과학적 권위를 갖고 옹호했던, 그리하여 그의 도움에 힘입어 미국 땅에 널리 보급된 단어, 바로 우생학eugenics 이다. - P181

이런 글들에서 데이비드는 자신이 지구상에서제거해버리고 싶은 종류의 사람들―빈민들과 술꾼들, "백치들"과 "천치들", "바보들", 도덕적 타락자들―을 모두 모아, 적격자와 반대되는 "부적합자"라는 한 범주에 몰아넣었다. 부적합자! 단박에 귀를 사로잡으며 매우 암시적이고 너무나 깔끔한 단어. 그것은 어떤 사람들이 살 자격이 있는가에 관한 그의 의견에 과학의 망토를둘러줄 수 있는 단어였다. 부적합자! 그냥 한 남자의 판단이 아니라, 자연에 존재하는 현실 자체. - P183

내가 받은 전체 교육과정 가운데 이 나라가 우생학 운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해왔다는 사실을 전혀 배우지 못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그러나 우생학은 미국식 신여성과 포드 모델 못지않게 미국 문화의 두드러진 한 부분이었던 것 같다. 그것은 비주류가 아니었고, 당파를 가리지 않았으며, 20세기의 첫 다섯 대통령이 모두 우생학의 밝은 전망을 찬양했고, 하버드부터 스탠퍼드, 예일, 캘리포니아 버클리, 프린스턴까지 전국의 모든 명망 있는 대학들에서 우생학을 가르쳤다. 우생학 잡지, 우생학 화장품, 심지어 우생학 경진 대회도 있었다. 주 박람회의 축제 분위기 물씬 나는 흰 천막 아래서 가장 적합한 가족과 최고의 아기를 뽑는 콘테스트가 종종 열렸다. 호박의 크기와 무게를 재듯 아기들의 무게와 치수를 쟀다. 흰 피부, 둥근 두상, 가장 대칭이 잘 이뤄진 이목구비에 파란 리본이 주어졌다. - P185

무엇보다 이견의 핵심은 《종의 기원》에 있었다. 어째선지 데이비드와 프랜시스 골턴은 둘 다 그 결정적인 사실을 흘려버렸다.
한 종을 강력하게 만들고, 그 종이 미래까지 지속하게 해주며, 혼돈이 홍수, 가뭄, 해수면 상승, 기온 급변, 경쟁자, 약탈자, 해충의침략 등 가장 강력한 형태의 타격을 가해올 때도 그 종이 버틸 수있게 해주는 것으로 다윈은 무엇을 꼽았을까? 바로 변이다. 행동과 신체의 특징에 변화를 일으키는 유전자에 생긴 변이 말이다.
동질성은 사형선고와 같다. 한 종에서 돌연변이와 특이한 존재들을 모두 제거하는 것은 그 종이 자연의 힘에 취약하게 노출되도록 만들어 위험을 초래한다. - P188

이것이 바로 다윈이 예언했던 그런 상황이다. 그가지구의 수많은 생명들의 순위를 정하지 말라고 그토록 뚜렷이 경고한 이유는 "어느 무리가 승리하게 될지 인간은 결코 예측할 수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지력으로 도저히 다 이해할 수 없는 생태의 복잡성에대한 이러한 조심스러움과 겸손함, 공경하는 마음은 사실 대단히오래된 것이다. 이는 때로 "민들레 원칙"이라고도 불리는 철학적개념이다. 민들레는 어떤 상황에서는 추려내야 할 잡초로 여겨지지만, 다른 상황에서는 경작해야 하는 가치 있는 약초로 여겨지기도 한다. -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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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해방이 되어도 해방은 오지 않았다

이러면 안 된다. 여기는 중국도 아니고, 일본도 아니다. 해방된 내나라다. 좌우로 갈라져버렸다고 해도 이래서는 안 된다. 좌익단체를 표적으로 삼은 백색테러가 그칠 줄 모른다. 나 또한 암살 시도도 몇 번 넘기고, 테러도 여러 번 피했다. 민족혁명당 청년대가 앞뒤 좌우를 둘러싸고 호위하지 않는다면 여운형 동지나 장덕수 동지처럼 누가시켰는지 밝힐 수도 없는 총탄에 벌써 쓰러졌을 몸이다.
테러를 저지르는 단체는 백의사다. 누구나 안다. 백의사 뒤에는 이승만이 있고, 이승만 뒤에는 미군이 있다는 사실 또한 모르는 사람이없다. 누구나 쉬쉬하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하지만 미군정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 P14

"관리는 관리대로 양반은 양반대로 높으나 낮으나 백성 피만 빨았다. 왜놈 세상이든, 중국놈 세상이든, 조선 양반 세상보다 못하랴 싶은 마음이라 그럴 게다."
정수리에 화살이라도 맞은 듯, 할아버지 말이 뇌리에 깊이 박혔다.
"일본이 우리나라 이름을 대한제국에서 조선으로 바꾸었지만,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을 세우기 전에도 조선이었으니 똑같은 조선이라고 여겨 큰일 아닌 걸로 생각하는 거다. 임금도 황제에서 왕으로 호칭이 바뀌었지만 백성에게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처럼 보이고, 또 일본이 직접 우리나라를 다스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잖니. 그러니 별일 아니라고 여기는 마음인 거지. 그래서 더 큰일인 거야."
- P23

의분으로 일어선 의병이 아니라 일본 군대보다 힘이 더 센 군대가있어야 한다. 지금 세계에서 일본보다 더 센 군대는 독일 군대뿐이니 독일로 가야 한다는 결론에 닿았다. 독일로 가려면 우선 독일어를 배워야 한다. 독일어를 배우려면 독일과 중국이 같이 세운 학교인 덕화학당에 들어가야 한다. 독일을 중국에서는 덕국이라고도 부르는데, 덕국에서 ‘덕‘을 따고 중국이 중심이라는 중화사상에서 ‘화‘를 따서 이름이 덕화학당이었다. 중국 천진에 있다.  - P30

"살날 얼마 안남은 할아비한테 무슨 불효냐?"
내가 금릉대학에서 공부하고 독일로 가려면 방학이 되어도 돌아오지 못할 거라고 하자, 할아버지는 웃는 얼굴로 가볍게 호통을 쳤다. 하지만 남자는 집을 나가면 뜻을 이루기 전에 돌아오지 않는 법이라며 입꼬리를 쭉 올렸다.
"왜놈이 쫓겨 가는 꼴을 꼭 보고 싶구나. 독일 군대든 중국 군대든 네 손으로 이끌고 오너라."
할아버지는 어느 나라 군대라도 우리 손에 있으면 우리 군대라고했다.
-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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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릴같이 이렇게 푹신한 낙엽 위에서 몸부림치고 낙엽은 하루하루 두텁게 쌓여 나를 포근히 안았다.
어머니는 내 간호 없이도 차츰 회복되어 가는 눈치였다. 정확히 말해 어머니 신체의 기능이 과거의 습관을 되찾기 시작한 것이었다.
문득 걸레질을 하고 문득 설음질을 했다. 여전히 아무런 뜻도 담기지 않은 부연 눈을 한 채 간단히 묻는 말에 대답도 했다. 어머니를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좀 말수 적고 멍청할 뿐 정상적인 노인으로여길 만했다. 어머니가 얼마나 발랄하고 적극적으로 살았는지를 모르는 이에게는 말이다. - P305

헛소리처럼 웅얼거리는 말 속에 가끔 여보라든가 욱아, 혁아라든가 하는 낱말을 골라 들을 수 있었다.
그런 어머니의 표정은 그녀가 아주 즐겁던 날의 표정을 닮아가고있었다. 어머니는 지금 꿈속에서 고인들과 더불어 있는 것일까.
어쩌면 어머니는 회복돼가고 있는 것도 같았다.
나는 문득 어머니가 회복돼가고 있다는 게 두려웠다. 어머니는지금 행복한데, 깨어날 것이, 어머니의 정신과 육체가 유명을 달리할 것이 두려웠다.
의사의 말은 틀린 것일까? 그녀는 분명히 살려는 의지 없이도 회복돼가고 있고, 나는 죽음보다도 살려는 의지 없는 삶이 더 두려웠다. - P341

나무 좌우에 걸린 그림들을 제쳐놓고 빨려들 듯이 곧장 나무 앞으로 다가갔다.
나무 옆을 두 여인이 아이를 업은 한 여인은 서성대고 짐을 인 한여인은 총총히 지나가고 있었다.
내가 지난날, 어두운 단칸방에서 본 한발 속의 고목枯木, 그러나 지금의 나에겐 웬일인지 그게 고목이 아니라 나목이었다. 그것은 비슷하면서도 아주 달랐다.
김장철 소스리 바람에 떠는 나목, 이제 막 마지막 낙엽을 끝낸 김 장철 나목이기에 봄은 아직 멀건만 그의 수심엔 봄에의 향기가 애닳도록 절실하다.
그러나 보채지 않고 늠름하게, 여러 가지들이 빈틈없이 완전한 조화를 이룬 채 서 있는 나목, 그 옆을 지나는 춥디추운 김장철 여인들.
여인들의 눈앞엔 겨울이 있고, 나목에겐 아직 멀지만 봄에의 믿음이 있다.
봄에의 믿음. 나목을 저리도 의연하게 함이 바로 봄에의 믿음이리라. - P376

나무들의 그림자가 길어지고 우수수 바람이 온다.
이미 낙엽을 끝낸 분수가의 어린 나무들이 벌거숭이 몸을 애처롭게 떨며 서로의 가지를 비빈다.
그러나 그뿐, 어린 나무들은 서로의 거리를 조금도 좁히지 못한채 바람이 간 후에도 마냥 떨고 있었다. - P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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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한 것은 분류학자들도 명명이라는 일에 대해 다소 미신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사실이다. 하나의 종을 최초로 명명할 때 그들은 그 최초의 표본을 특별한 명예를 부여한 매우 특별한 유리단지에 넣어둔다. 그 표본은 공식적인 과학의 기록부에 오를 때 그종의 유일한 구성원으로 기재된다. 분류학 용어로 모든 표본을 "모식模式, type"이라고 하는데, 최초의 신성한holy 모식은 영광스럽게도
"완모식完模式, holotype"이라 부른다.
그리고 모든 성스러운 유물이 그러하듯이 완모식 표본들도 안전한 장소에, 그러니까 전 세계의 박물관이나 학술기관들에 보관된다. - P95

완모식 표본에 관해서는 아주 중요한 규칙이 하나 있다. 만약 완모식 표본이 소실되어도 새로운 표본을 그 성스러운 유리단지에 대체해서 넣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안 될 말이다. 그러한 상실에 대해서는 경의를 표하고 애도하고 상실되었다는 표시를 남긴다.
이제 이 종의 계통은 영원히 순수성이 훼손된 채, 그 종을 만든 최초의 존재가 없는 상태로 남겨져야 한다. 그 종을 물리적으로 대표할 새로운 표본이 선택될 테지만, 이 표본은 "신모식neotype"이라는더 낮은 지위를 부여받는다. 신모식 표본은 최초의 완모식 표본이 상실되었거나 파괴된 후에 그 종을 대표하는 표본 역할을 하도록 선택된 표본을 말한다. - P96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파괴의 잔해들은 스나이더 교수와 스타크스 교수가 낮이나 밤이나 호스로 물을 뿌린 덕분에 젖은 상태를 유지했다." 내가 읽은 가장 아름다운 문장 중 하나인 이 문장은 아름다운 문장을 발견할 가능성이 무척 낮은 출처에서 가져온것이다. 그 출처는 바로 제임스 뵐케가 쓰고 《스탠퍼드 어류학 편람》 5권에 실린 <스탠퍼드대학 자연사박물관에 있는 최근 어류의 모식 표본 카탈로그〉다.
"낮이나 밤이나 호스로 물을 뿌려. 낮이나 밤이나."
해는 뜨고 지고, 뜨고 지고, 데이비드의 동료 두 사람은 고무덧신을 신고서 물고기들의 살덩이를 향해 호스로 물을 뿌렸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불굴의 기개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까? 창밖에는 그들의 선지자가 머리를 거꾸로 처박고 있고, 공기 중에는 먼지가 희부옇게 드리워 있으며, 이 난장판을 어떻게 다시 수습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차가운 물과 불확실성을 정면으로 고스란히 받아내며 적어도 당장은 이것들을 마르지않게 하겠다는 단호한 의지. - P114

데이비드는 바늘에 실을 꿴 다음 바늘 끝을 파나마 망둥이의 목살에 찔러 넣어 반대쪽으로 뽑아냈을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이름표를 망둥이의 살갗에 곧바로 매달았을 것이고, 그렇게 망둥이는 짠 하고 다시 존재하는 상태로 되돌려졌을 것이다. 에베르만니아 파나멘시스! 혼돈의 그 작은 덩굴손 하나가 데이비드의 가차없는 끈기 덕분에 다시 질서 속으로 돌아온 것이다. - P118

오랫동안 사회의 도덕적 권위자들은 그렇다고 말해왔다. 내가알기로 성서는 자기기만을 경멸하고, 오만을 대죄라 부르고, 오만을 부리지 않는다면 가장 좋은 것을 얻게 될 거라면서, 온유한 자가 땅을 상속받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고대 그리스인들도 오만에 반대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카로스는 태양에 밀랍으로 만든 날개깃털이 녹는 바람에 하늘에서 떨어졌다. 계몽주의 시대에 볼테르는 낙관주의가 고통을 직시하지 못하게 만드는 음흉한 해악이라고 비난했다. 20세기에는 의학 전문가들이 일치된 의견을 내놓았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에이브러햄 매슬로, 에릭 에릭슨 같은 영향력 있는 심리학자들은 자기기만을 정신적 결함이자 시각에 생긴 문제여서 치료로 교정해야 한다고 보았다. 반면 정확한 시각은
"정신의 건강을 보여주는 표지"라고 여겼다.
그러나 20세기가 기운차게 달려가는 동안, 임상심리학자들은 이상한 일들을 목격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볼 때 더 건강한 환자들, 인생을 더 쉽게 살아가는 사람들, 좌절을 겪은 뒤에도 재빨리 회복하는 사람들, 직업과 친구, 연인을 얻고 인생이라는 회전목마에서 황금기를 달리고 있는 사람들은 장밋빛 자기기만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 P138

심리학자들은 인간으로 산다는 건 가혹한 운명이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우리는 세상이 기본적으로 냉담한 곳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성공은 보장되지 않고, 수십만 명을 상대로 경쟁해야 하며, 자연 앞에서 무방비 상태이고,
우리가 사랑한 모든 것이 결국에는 파괴될 것임을 알면서도 이렇게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작은 거짓말 하나가 그 날카로운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낼 수도 있고, 인생의 시련 속에서 계속 밀고 나아가도록 도와줄 수도 있으며, 그 시련 속에서 가끔 우리는 우연한 승리를 거두기도 한다. -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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