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한 것은 분류학자들도 명명이라는 일에 대해 다소 미신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사실이다. 하나의 종을 최초로 명명할 때 그들은 그 최초의 표본을 특별한 명예를 부여한 매우 특별한 유리단지에 넣어둔다. 그 표본은 공식적인 과학의 기록부에 오를 때 그종의 유일한 구성원으로 기재된다. 분류학 용어로 모든 표본을 "모식模式, type"이라고 하는데, 최초의 신성한holy 모식은 영광스럽게도 "완모식完模式, holotype"이라 부른다. 그리고 모든 성스러운 유물이 그러하듯이 완모식 표본들도 안전한 장소에, 그러니까 전 세계의 박물관이나 학술기관들에 보관된다. - P95
완모식 표본에 관해서는 아주 중요한 규칙이 하나 있다. 만약 완모식 표본이 소실되어도 새로운 표본을 그 성스러운 유리단지에 대체해서 넣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안 될 말이다. 그러한 상실에 대해서는 경의를 표하고 애도하고 상실되었다는 표시를 남긴다. 이제 이 종의 계통은 영원히 순수성이 훼손된 채, 그 종을 만든 최초의 존재가 없는 상태로 남겨져야 한다. 그 종을 물리적으로 대표할 새로운 표본이 선택될 테지만, 이 표본은 "신모식neotype"이라는더 낮은 지위를 부여받는다. 신모식 표본은 최초의 완모식 표본이 상실되었거나 파괴된 후에 그 종을 대표하는 표본 역할을 하도록 선택된 표본을 말한다. - P96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파괴의 잔해들은 스나이더 교수와 스타크스 교수가 낮이나 밤이나 호스로 물을 뿌린 덕분에 젖은 상태를 유지했다." 내가 읽은 가장 아름다운 문장 중 하나인 이 문장은 아름다운 문장을 발견할 가능성이 무척 낮은 출처에서 가져온것이다. 그 출처는 바로 제임스 뵐케가 쓰고 《스탠퍼드 어류학 편람》 5권에 실린 <스탠퍼드대학 자연사박물관에 있는 최근 어류의 모식 표본 카탈로그〉다. "낮이나 밤이나 호스로 물을 뿌려. 낮이나 밤이나." 해는 뜨고 지고, 뜨고 지고, 데이비드의 동료 두 사람은 고무덧신을 신고서 물고기들의 살덩이를 향해 호스로 물을 뿌렸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불굴의 기개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까? 창밖에는 그들의 선지자가 머리를 거꾸로 처박고 있고, 공기 중에는 먼지가 희부옇게 드리워 있으며, 이 난장판을 어떻게 다시 수습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차가운 물과 불확실성을 정면으로 고스란히 받아내며 적어도 당장은 이것들을 마르지않게 하겠다는 단호한 의지. - P114
데이비드는 바늘에 실을 꿴 다음 바늘 끝을 파나마 망둥이의 목살에 찔러 넣어 반대쪽으로 뽑아냈을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이름표를 망둥이의 살갗에 곧바로 매달았을 것이고, 그렇게 망둥이는 짠 하고 다시 존재하는 상태로 되돌려졌을 것이다. 에베르만니아 파나멘시스! 혼돈의 그 작은 덩굴손 하나가 데이비드의 가차없는 끈기 덕분에 다시 질서 속으로 돌아온 것이다. - P118
오랫동안 사회의 도덕적 권위자들은 그렇다고 말해왔다. 내가알기로 성서는 자기기만을 경멸하고, 오만을 대죄라 부르고, 오만을 부리지 않는다면 가장 좋은 것을 얻게 될 거라면서, 온유한 자가 땅을 상속받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고대 그리스인들도 오만에 반대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카로스는 태양에 밀랍으로 만든 날개깃털이 녹는 바람에 하늘에서 떨어졌다. 계몽주의 시대에 볼테르는 낙관주의가 고통을 직시하지 못하게 만드는 음흉한 해악이라고 비난했다. 20세기에는 의학 전문가들이 일치된 의견을 내놓았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에이브러햄 매슬로, 에릭 에릭슨 같은 영향력 있는 심리학자들은 자기기만을 정신적 결함이자 시각에 생긴 문제여서 치료로 교정해야 한다고 보았다. 반면 정확한 시각은 "정신의 건강을 보여주는 표지"라고 여겼다. 그러나 20세기가 기운차게 달려가는 동안, 임상심리학자들은 이상한 일들을 목격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볼 때 더 건강한 환자들, 인생을 더 쉽게 살아가는 사람들, 좌절을 겪은 뒤에도 재빨리 회복하는 사람들, 직업과 친구, 연인을 얻고 인생이라는 회전목마에서 황금기를 달리고 있는 사람들은 장밋빛 자기기만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 P138
심리학자들은 인간으로 산다는 건 가혹한 운명이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우리는 세상이 기본적으로 냉담한 곳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성공은 보장되지 않고, 수십만 명을 상대로 경쟁해야 하며, 자연 앞에서 무방비 상태이고, 우리가 사랑한 모든 것이 결국에는 파괴될 것임을 알면서도 이렇게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작은 거짓말 하나가 그 날카로운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낼 수도 있고, 인생의 시련 속에서 계속 밀고 나아가도록 도와줄 수도 있으며, 그 시련 속에서 가끔 우리는 우연한 승리를 거두기도 한다. -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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