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매릴같이 이렇게 푹신한 낙엽 위에서 몸부림치고 낙엽은 하루하루 두텁게 쌓여 나를 포근히 안았다.
어머니는 내 간호 없이도 차츰 회복되어 가는 눈치였다. 정확히 말해 어머니 신체의 기능이 과거의 습관을 되찾기 시작한 것이었다.
문득 걸레질을 하고 문득 설음질을 했다. 여전히 아무런 뜻도 담기지 않은 부연 눈을 한 채 간단히 묻는 말에 대답도 했다. 어머니를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좀 말수 적고 멍청할 뿐 정상적인 노인으로여길 만했다. 어머니가 얼마나 발랄하고 적극적으로 살았는지를 모르는 이에게는 말이다. - P305

헛소리처럼 웅얼거리는 말 속에 가끔 여보라든가 욱아, 혁아라든가 하는 낱말을 골라 들을 수 있었다.
그런 어머니의 표정은 그녀가 아주 즐겁던 날의 표정을 닮아가고있었다. 어머니는 지금 꿈속에서 고인들과 더불어 있는 것일까.
어쩌면 어머니는 회복돼가고 있는 것도 같았다.
나는 문득 어머니가 회복돼가고 있다는 게 두려웠다. 어머니는지금 행복한데, 깨어날 것이, 어머니의 정신과 육체가 유명을 달리할 것이 두려웠다.
의사의 말은 틀린 것일까? 그녀는 분명히 살려는 의지 없이도 회복돼가고 있고, 나는 죽음보다도 살려는 의지 없는 삶이 더 두려웠다. - P341

나무 좌우에 걸린 그림들을 제쳐놓고 빨려들 듯이 곧장 나무 앞으로 다가갔다.
나무 옆을 두 여인이 아이를 업은 한 여인은 서성대고 짐을 인 한여인은 총총히 지나가고 있었다.
내가 지난날, 어두운 단칸방에서 본 한발 속의 고목枯木, 그러나 지금의 나에겐 웬일인지 그게 고목이 아니라 나목이었다. 그것은 비슷하면서도 아주 달랐다.
김장철 소스리 바람에 떠는 나목, 이제 막 마지막 낙엽을 끝낸 김 장철 나목이기에 봄은 아직 멀건만 그의 수심엔 봄에의 향기가 애닳도록 절실하다.
그러나 보채지 않고 늠름하게, 여러 가지들이 빈틈없이 완전한 조화를 이룬 채 서 있는 나목, 그 옆을 지나는 춥디추운 김장철 여인들.
여인들의 눈앞엔 겨울이 있고, 나목에겐 아직 멀지만 봄에의 믿음이 있다.
봄에의 믿음. 나목을 저리도 의연하게 함이 바로 봄에의 믿음이리라. - P376

나무들의 그림자가 길어지고 우수수 바람이 온다.
이미 낙엽을 끝낸 분수가의 어린 나무들이 벌거숭이 몸을 애처롭게 떨며 서로의 가지를 비빈다.
그러나 그뿐, 어린 나무들은 서로의 거리를 조금도 좁히지 못한채 바람이 간 후에도 마냥 떨고 있었다. - P37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