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행동하곤 한다. 내 고통이나 슬픔을 친구와 나누면 친구가 부담을 느낄까 봐, 가능하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서 어려움을해결하려 한다. 부모님이 걱정할까 봐 자신의 실패를 숨기는 아이들도 있다.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당하고도 아이는철든 모습을 하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행동한다. 엄마가 알면 너무 슬퍼할 테니 혼자 묵묵히 견뎌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힘들어하는 자신을 숨기는 것이야말로 ‘가면 쓰기‘ 연습의 시작이다. 가면을 쓸 일이 점점 더 많아지는 세상에서, 부모 앞에서만큼은 가면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아이들이 알고 있는 것은너무나 중요하다. - P59

가면을 꼭 실수, 실패, 고통 같은 부정적 단어와 연관지을 필요는 없다. 모자란 내 모습을 숨기는 것도 가면을 쓰는 중요한 이유지만, 가면 쓰기의 일차적 목적은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내모습을 보여주는 데 있다. 뻔히 다 아는 상황에서도 상대를 기분좋게 해주기 위해 일부러 못난이 가면을 쓰기도 한다.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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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몇 개 떠 있었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가 분홍색 쓰레기더미로 만들어버린 하늘 저 너머에서 분명 눈을 깜빡거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탈출하려고 그토록 애써온 지구로 다시 돌아왔다. 무슨 일을 하든, 자신의 사명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강하든, 얼마나 열심히 뉘우치는 어떤 피난처도 약속도 주지 않는 황량한 지구로.
나는 살면서 내 인생의 많은 좋은 것들을 망쳐버렸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나 자신을 속이지 않으려 한다. 그 곱슬머리 남자는 결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나를 아름답고 새로운 경험으로 인도해주지 않을 것이다. 혼돈을 이길 방법은없고, 결국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거라고 보장해주는 안내자도, 지름길도, 마법의 주문 따위도 없다.
자, 이렇게 희망을 놓아버린 다음에는 무슨 일을 해야 하지?
어디로 가야 할까? - P208

나는 그에게 통쾌하게 반박해줄 말이 있었으면 싶었다. 현란하게, 당신이 틀렸다고 말해줄 방법이 우리는 중요하다고, 우리는 사실 아주 중요하다고 말해줄 방법. 그러나 주먹이 올라가는 게 느꺼지자마자 내 뇌가 주먹을 다시 잡아당겼다. 왜냐하면 당연히, 우리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중요하지 않다. 이것이 우주의 냉엄한 진실이다. 우리는 작은 티끌들, 깜빡거리듯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우주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존재들이다. 정말 이상한일이지만, 이 진실을 무시하는 것은 정확히 데이비드 스타 조던과똑같이 행동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우월성에 대한 터무니없는믿음 때문에 자신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폭력을 저질러도 괜찮다고생각하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 그럴 순 없다. 명민하고 선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호흡, 모든 걸음마다 우리의 사소함을 인정해야 한다. 그와 다르게 말하는 것은 죄를 짓고, 거짓을 말하고, 기만과 광기로, 그보다 더 나쁜 것으로 자신을 이끌고 가는 일이다.
아, 그것은 엉킨 실타래였다.
제 꼬리를 먹는 우로보로스
복수를 하겠다고 나무로 기어 올라갔지만 높이 뜬 독수리라는 진실에 얻어맞아 나가떨어진 파란 꼬리의 스킹크.
나는 오도가도 못하게 된 심정이었다. - P222

이렇게 세월이 흐른 뒤에도 애나는 여전히 메리를 보살피고있다. 내게 문을 열어준 사람도 애나였고, 메리에게 마실 것을 가져다준 사람도, 화초에 물을 주는 사람도 애나였다. 메리가 무릎이아파 잘 서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메리와 현재 남자친구인 마이크를 맺어준 사람도 애나였다. 지금은 애나가 체격도 더 작고 겁도더 많지만, 메리가 이뤄낸 여러 성공들(자식, 손자, 민첩한 유머 감각끝없이 이어진 로맨스)을 애나는 갖지 못했지만, 여전히 애나는 메리의 보호자다. 말하자면 지금도 애나는 메리의 그네를 밀어주고있는 셈이다. 이 지구에서 자신이 뽑아낼 수 있는 소박한 기쁨들―중력, 아이스티, 햄스터-로 메리에게 설렘과 기쁨을 안겨주려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메리는 또 어떤가. 거의 모든 말과 반응에서 메리가 얼마나 애나를 고마워하고 있는지가 보인다. 메리는 인형을 사랑하는 친구에게 판단의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다. 오히려 그 사랑을 지지해준다. 메리는 인형의 목에 걸린 색색 가지 구슬로 된 목걸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거 내가 만들었어!" 나는 자기 방에 혼자 앉아 조용히 나일론 실에 구슬을 하나하나 꿰며, 친구를 위한 깜짝 선물을 정성스럽게 준비하는 메리의 모습을 그려본다. 메리가 수용소에서 자신을 보호해준 애나에게 영원히 은혜를 갚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그리고 보답하는 그 행위에서 진짜 의미를 발견했다는것을.
- P224

그리고 인간들, 우리도 분명 그럴 것이다. 별이나 무한의 관점, 완벽함에 대한 우생학적 비전의 관점에서는 한 사람의 생명이 중요하지 않아 보일지도 모른다. 금세 사라질 점 위의 점 위의 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무한히 많은 관점 중 단 하나의 관점일 뿐이다. 버지니아주 린치버그에 있는 한 아파트의 관점에서 보면, 바로 그 한 사람은 훨씬 더 많은 의미일 수 있다. 어머니를 대신해주는 존재, 웃음의 원천, 한 사람이 가장 어두운 세월에서 살아남게 해주는 근원.
이것이 바로 다윈이 독자들에게 그토록 열심히 인식시키고자 애썼던 관점이다. 자연에서 생물의 지위를 매기는 단 하나의 방법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하나의 계층구조에 매달리는 것은 더 큰 그림을, 자연의, "생명의 전체 조직"의 복잡다단한 진실을 놓치는 일이다. 좋은 과학이 할 일은 우리가 자연에 "편리하게" 그어놓은 선들 너머를 보려고 노력하는 것, 당신이 응시하는 모든생물에게는 당신이 결코 이해하지 못할 복잡성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 P227

 그런데 이유가 뭘까? 그는 왜 평화주의라는 인기 없는 대의에 그토록 전념했을까? 데이비드가 판단하기에 전쟁은 한 국가의 가장 훌륭하고 똑똑한 인재를 고갈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형 루퍼스의 죽음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가장 좋은 자질을지닌 남자들이 싸우러 나가 죽으면 "부적합한" 자들이 남아서 번식을 이어간다는 것이다. 그는 필라델피아에서 수백 명의 관중을 앞에 두고 말했다. "한 국가가 낳은 최고의 인재들을 파괴하는 일에 내보내면, 차선의 사람들이 그들의 빈자리를 메울 것입니다. 약한 자들, 악한 자들, 낭비하는 자들이 번식하고 나라를 다 차지해버릴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자신의 우생학적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평화주의자가 된 것이다. - P283

분기학자들은 모든 생물이 진화의 나무에서 어느 가지에 속하는지를 밝혀내는 일에 사생결단하듯 매달린다. 그들의 제1원칙은 단순하다. 타당한 하나의 진화적 집단은 특정한 한 조상의 모든 자손을 포함해야 하며, 다른 것은 하나도 포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당신이 하나의 집단을 구성하려 한다면 진화의 나무에서 당신이 원하는 만큼 높이 올라갈 수도 있고 원하는 만큼 아래로 내려갈 수도 있다. 척추동물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 좋다. 척추동물에는 척추가 있는 모든 생물이 포함된다. 뱀은? 포함. 지렁이는? 제외, 포유동물에 대해 말하고 싶은가? 괜찮다. 단, 그러려면 젖을 만들 수 있는 최초의 생물의 모든 후손을 아울러야 한다. 고양이, 개,
고래, 다 좋다. 파충류는 하나도 넣으면 안 된다! 이제 무슨 말인지이해했을 것이다. - P237

분기학자들은 공통의 진화적 참신함을 찾는 일에 초점을 맞출 것을 상기시킨다. 한순간이라도 비늘이라는 외피에 시선을 다 빼앗기지만 않는다면, 더 많은 걸 밝혀주는 다른 유사점들을 알아차리기 시작할 거라고. 예를들어 페어와 소는 둘 다 호흡을 하게해주는 폐와 유사한 기관이 있지만 연어에게는 없다. 페어와 소는 둘다 후두개(기관을 덮는 작은 덮개 모양의 피부)가 있다. 연어는?
유감스럽게도 후두개가 없다. 그리고 페어의 심장은 연어의 심장보다는 소의 심장과 구조가 더 비슷하다. 이런 설명들이 계속 이어지며, 마침내 페어는 연어보다는 소와 더 가깝다는 결론으로 학생들을 이끌어간다.
그들이 생명의 나무를 베는 톱질 속도를 본격적으로 높이는건 이때부터다. 윤에 따르면, 분기학자들은 사람들이 일단 이 사실-물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생긴 생물들 중 다수가 자기들끼리보다는 포유류와 더 가까운 관계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나면 이상한 진실이 눈앞에 펼쳐지는 게 보이기 시작할 거라고 했다. "어류"가 견고한 진화적 범주라는 말은 실제로 완전히 헛소리라는 진실 말이다. 윤의 설명을 빌리면, 그것은 마치 "빨간 점이 있는 모든 동물"이 한 범주에 속한다는 말이거나 "시끄러운 모든 포유동물은 한 범주"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 P239

그러다가 물고기에 관해 생각한다.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은빛 물고기 한 마리가 내 머릿속에서 녹아 사라지는 모습을 그려본다.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이 세계에 관해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은 또 뭐가 있을까? 우리가 자연 위에그은 선들 너머에 또 어떤 진실이 기다리고 있을까? 또 어떤 범주들이 무너질 참일까? 구름도 생명이 있는 존재일 수 있을까? 누가알겠는가. 해왕성에서는 다이아몬드가 비로 내린다는데 그건 정말이다. 바로 몇 년전에 과학자들이 그 사실을 알아냈다. 우리가세상을 더 오래 검토할수록 세상은 더 이상한 곳으로 밝혀질 것이다.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은 사람 안에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잡초 안에 약이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이 얕잡아봤던 사람 속에 구원이 있을지도 모른다. - P263

침대 위 내 옆에서 아내의 움직임이 느껴진다. 내 어깨를 찰싹 때린다. "진정해, 뒤척쟁이" 그녀가 우물우물 말한다. 내가 계속 뒤척이고 있다는, 들썩거리고 돌아누우며 잠들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녀는 내가 자기와 함께 평화로움 속으로, 깊은 잠 속으로, 우리의 연한 파란색 이불의 부드러운 솜 파도 속으로 들어가기를 바랄뿐이다.
나는 따스함이 넘쳐나는 그녀의 허벅지를 움켜잡고 생각한다. 가장 희망적이었던 순간에조차, 나의 하찮은 뇌는 그녀만큼 한없이 도취시키는 존재를 꿈에도 결코 상상해내지 못할 거라고. - P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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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만 건너면 신의주에서 김시현 조직이 폭탄을 넘겨 받기로했다. 서울로 가져가는 문제는 국내 조직이 감당하기로 정했다.
"외백도 해방조국에서 큰일을 할 인재고, 나도 견마지로를 아끼지않으려 하오."
황옥은 다카키가 계속 의열단을 감시할 거라고 알려주었다.
"나와 같이 가는 의열단을 국내 조직과 연결되는 순간 모조리 체포하는 줄 알고 있소."
때를 맞추어서 여기서도 의열단을 체포하려들 테니 그 전에 다카키를 적당히 처리하라고 했다. 하지만 적당한 처리란 없다. 사느냐 죽느냐가 있을 뿐이다. 죽음이 가장 적당할 뿐이다.
유석현과 김시현, 김상윤, 김재진을 비롯한 여섯 명이 황옥 경부를수행하는 일행으로 꾸며서 기차를 타기로 정했다. 마자르는 단원 모두와 뜨겁게 포옹을 했다. 북경을 거쳐 헝가리로 돌아가게 된 그는 혁명이 성공하기를 진심으로 빌어주었다. 현계옥도 현정건에게 돌려보냈다. 마자르가 포옹하자고 할 때는 머뭇거리더니, 마자르 옆에 서서마자르가 포옹한 사람을 현계옥이 이어서 포옹하자 우르르 마자르앞으로 몰려들었다.
- P149

지난 1923년 1월 12일에 의열단원 김상옥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일본 경찰을 죽이고 거사를 성공시켰다. 그 후 피신을 다니다22일 5백여 명이나 되는 일본 경찰에 둘러싸였다. 일본 경찰 수십 명을 죽거나 다치게 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번 거사는 김상옥에 대한 복수도 겸하고 있다. 모든 준비는 완벽하다. 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 전국 경찰서에서 동시에 폭탄이 터지고 왜적과 친일파를 처단할 날이 눈앞에 왔다. 이번에야말로 불발탄과 시간 끌기도 없이 일사불란하게 해치울 조건이 다 갖추어졌다. 김상옥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북경에 왔다는 황옥이 오히려 의열단과 합심하고 복수에 앞장서게 되었으니 김상옥 동지가 주고 간 숙제를 풀어간다는 희열이 차올라 가슴이 두근거렸다. - P150

"너무 어이가 없소"
사흘 뒤에 혼자 돌아온 김지섭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좀처럼 풀지 않았다. 김재진이 밀고한 것도 맞는데, 사회주의 청년조직이 허술했기 때문이기도 했다며 아쉬워했다. 아직 실전 투쟁 경험이 없고, 노련한 투쟁 단위로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에 비밀 유지가 철저하게 되지 않은 탓이라고 했다. 하지만 유자명은 사회주의 청년조직 잘못이라고는 하지 말자고 했다.
"국내에서 창당 준비도 변변히 못하고 있는 조직입니다. 아직 의욕만 넘치는 단계이니 체계가 단단할 리 없고, 투쟁 강령이 확고하게 자리 잡혔을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어쩔 수 없는 한계라고 해야 합니다."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떠맡긴 우리 잘못이 더 크다며, 거사 실패가국내에서 사회주의 조직을 세우는 데에 방해만 되었으니 도리어 미안하게 여겨야 한다고 정리했다. 나는 일제가 지나치게 분투해 민중을 옭아매고 있으니 제대로 된 조직이 생기나기도 어렵고, 생겨도 제대로 활동하기 어렵다며 현실을 직시하자고 다독였다. 상대를 비난하는 만큼 연대는 멀어지고,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만큼 소통도 멀어진다는 걱정도 덧붙였다.
"우리는 완벽한데 상대가 모자란다는 논리는 절대로 펼치면 안 되오."
- P155

김산은 내무대신 미즈노가 3.1만세운동 때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었고, 경시총감 아카이케는 3.1만세운동 때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을 지냈다는 말을 덧붙였다.
"이 두 놈이 일본 민중에게 조선 사람을 죽이고 스스로를 지키라고 부추겼습니다."
김산은 그 두 사람이 철저하게 계산해서 저지른 일이라고 했다.
일본 입장에서 3.1만세운동은 폭동이다. 사무라이 나라인 일본에서는 폭동이란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니 3.1만세운동은 일본이 한번도 겪어본 적 없는 민중봉기였다. 무자비한 폭력 진압은 전 세계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불러왔고, 조선 강점에 대한 비판까지 뒤집어써야 했다.
미즈노도 아카이케도 조선에서 폭력으로 진압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 일본으로 왔는데 일본에서도 폭동이 일어난다면 자국민을 상대로폭력 진압을 할 수 없으니 막을 방법도 없다. 군인이나 경찰이 총이나 칼로 조선 사람을 죽이면 또 엄청난 문제가 일어날 게 뻔하다. 그래서 민간인 조직인 자경단이 집에 숨겨둔 일본도나 죽창, 쇠꼬챙이나 곤봉으로 직접 조선 사람을 죽이도록 유도했다. 사회가 불안할 때 일어난 대지진, 거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용광로처럼 끓어오른 분노를 엉뚱한 대상인 조선 사람에게 풀게 만들었다.  - P159

1926년 12월 어느 날, 나석주가 단독 면담을 청했다.
"먹고살기 어려운 원인을 게으름과 흉년 때문이라고 일본이 벌이는 거짓 선전에 조선 민중이 속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는 민중을 자각시키겠다며 조선으로 보내달라고 청했다.
"적을 목베기 위해서는 왼팔 정도는 내줄 결심이 있어야 합니다.
잃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며 살아 돌아오지 못해도 한 점 부끄러움도 후회도 없다고 각오를 밝혔다.
나석주는 중국어 실력이 좋았다. 중국 사람에게는 조금 어설프게 들려도 일본 사람에게 유창하게 들릴 정도는 되었다. 서른다섯 살 먹은 마중덕이라는 신분증을 만들고 중국 노동자처럼 변장해 인천행배에 올랐다.
12월 28일 나석주는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에 폭탄을던지고 권총을 난사했다. 직원과 경기도 경찰부 경부보를 사살한 뒤일본 경찰로부터 추격을 받자 모여든 군중을 향해 ‘나는 조국과 조선민중이 자유를 누리게 만들기 위해 투쟁했다. 2천만 민중아, 분투하여 쉬지 말라!‘고 외친 후 권총을 스스로에게 겨누어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섰다.
나석주거사가 있은 뒤 두 해가 지난 어느 날, 백운학이라는 소년이 의열단에 가입하겠다며 찾아왔다. 열서너 살밖에 안 되어 보이는지라 의열단원이 되기에는 너무 어리다고 생각했다. 소년은 자기 이름이 나용섭인데, 오는 동안 신분이 탄로날까 봐 백운학이라는 가명을썼다고 했다. 그 순간 나는 처음 보는데도 얼굴이 낯익은 까닭을 금세 알아차렸다.
"가친은 함자가 석 자 주 자이십니다." - P168

손문은 만나자마자 아픈 곳을 찔렀다.
"언제까지 돌아오지 않는 화살을 쏘려 하시오."
의열단원이 거사를 성공시켜도 공을 치하받을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원수 손에 무참히 꺾여버리는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이라고 이해했다. 조선과 일본으로 동지 수백 명을 보냈으나 돌아온 사람은 겨우 손에 꼽을 정도인 사정을 손문도 잘 알고 있었다. 돌아올 화살을 쏘고, 돌아오게 해서 또 쏘아야 한다는 손문 말에 가슴이 꽉 옥죄어졌다.
지난달 임시정부에서 일하는 백범 김구도 의열단 본부로 격려차 방문한 자리에서 해방조국에서 나라를 이끌어가야 할 인재를 낭비하는 것 같아 너무 참담하다며 안타까워했다. 의열단 거사를 낮추어 평가하려는 뜻은 없다고 했으나 뼈에 사무친 아픔을 의열단 밖 사람에게 듣기는 더 민망했다. - P173

목숨을 건 혁명투쟁만큼이나 생업이 때로는 더 가까이에서 목을조이는 현실을 나 또한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내 주위에는 임시정부에서 일하며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면서 의열단원으로 활동한 청년이 많았다. 하지만 임시정부가 창조파와 개조파로 갈리며 분열해버린뒤로는 뿔뿔이 흩어졌다. 누구는 막노동으로, 다른 이는 가게 점원으로, 농장 인부로, 누군가는 장사로 그렇게 먹고사는 길을 열어가고 있지만, 각자도생이라는 개인 목표와 혁명이라는 공동 목표는 그 거리가 너무 멀면 안 된다. 지도부가 자신을 버려둔다고 여기게 해서도 안된다.
나는 생각을 거듭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 의열단 근거지를 광주로옮기고 황포군관학교에 입교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유자명은 외세에 기댄 결과는 좋은 적이 없었다며 끝내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지만 아무리 토론을 해도 완전히 하나로 결론이 나기는 참 어렵다.
나는 최상은 아니라 해도 이 길이 최선이니 의열단을 꼭 지켜내자는 결론으로 논쟁을 마무리했다. 대신 유자명이 상해에 남아서 의열단 본부를 지키기로 했다. 말은 그럴듯하게 ‘상해에 남는다‘로 포장했지만 사실상 낙오다. 유자명을 두고 가는 걸음이 결코 가볍지 않았다. - P179

 의열단이 볼셰비키 혁명에서 영향을 받았느냐는 소련 대표단 질문에는 고개를 끄덕이지않았다.
"폭력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투쟁 방식이오."
의열단도 볼셰비키 혁명처럼 민중을 억압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아름다운 폭력을 쓰기는 해도 공산주의를 꿈꾸지는 않는다고 했다. 오성륜이나 김산처럼 의열단원 가운데 공산주의를 꿈꾸는 사람이 많기는 해도 의열단 공식 입장이 공산주의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조지 쇼우가 영국 식민지인 아일랜드 사람으로서 일본 지배를 받는 조선 사람이 벌이는 의열투쟁을 공감하고 지원했으니 아일랜드폭력조직과 의열단이 직접 연결될 수도 있다. 그동안 의열단이 벌인투쟁 소식을 듣고 아일랜드 사람이 스스로 만들었을 수도 있다. 어떤방식이든 아일랜드 폭력조직이 의열단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짐작에도 소련 대표단은 동의했다. - P191

예상한대로 올 것이 왔다. 이미 예견된 일이라 크게 놀라진 않았다. 김산과 오성륜 등을 비롯한 공산당원들이 무사히 몸을 피했는지 알아보게 했다.
장개석이 일으킨 쿠데타는 무한에 자리 잡은 국민당 좌파가 공산당과 손을 잡으면서 시작된 국공합작이 무너지는 신호였다. 장개석은 국민당 안에 자리 잡은 공산당을 처단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한총탄으로 두 새를 떨어뜨리는 전략이다. 국민당 안에서 좌파를 몰아낸다는 구호를 통해 국민당과 손잡은 공산당까지 쓸어내려는 전략이다. 어제까지 동지로 모인 국민당과 공산당은 이제 이념으로 갈라선 적이 되어버렸다. -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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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2월에 최수봉이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거사 소식이들려왔다. 밀양은 우리 의열단 혁명동지에게는 본거지나 다름없다.
1차 거사 때엔 폭탄 던질 대상으로 밀양경찰서를 가장 먼저 정하기도 했다. 마침 월요일 조회시간이라 서장이 여러 경찰을 늘여 세우고조회를 하는 가운데에 폭탄을 던져서 유리창이 깨지고 아수라장이 되었지만 아무도 죽이지 못했다. 최수봉은 칼로 목을 찔러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해 체포당했다. 이번에는 폭탄이 문제였다. 정교하게 만들지 못한 폭탄이라 소리만 요란하고 비산 파편이 생기지 않았던 모양이다.
목적을 달성했다면 내 손으로 자결을 하려 했는데, 원수에게 붙잡혀 이런 욕을 당하니 통분할 뿐이라고 법정에서 당당히 외친 최수봉은 사형 선고를 받고 28세로 대구형무소에서 짧지만 당당하게 삶을 마감했다. 첫 번째 거사 때도, 두 번째와 이번에도 성패와 관계없이 동지를 잃었다. 살점이 뜯겨 나가는 아픔이다.  - P102

김산은 독립운동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의열투쟁을 혁명이라고불렀다.
"일제를 몰아낸다고 해도 조선을 되살릴 것도 아니고요."
의열투쟁이 조선왕조를 되살리려는 활동이 아니라, 일제 섬멸을 비롯해 일체 불의를 몰아내 세계 평화를 지키고, 정의를 세우며, 민중을 자각시키는 운동이니까 혁명이라고 불러야 한단다. 김산이 펼치는 견고한 논리에 흐뭇한 미소를 숨길 수가 없었다.
"왜놈 하나를 죽이고 못 죽이고를 떠나서 폭탄 하나는 커다란 메시지를 던지는 일입니다."
드러나게 보이지 않아도 내 몸속에 생명을 이끄는 심장이 뛰듯이,
단지 폭탄 하나를 던지는 일이지만 세상에도 불의에 항거하는 심장이 뛰고 있음을, 그래서 평화와 자유라는 생명은 결코 죽지 않는다는희망을 던지는 일이라는 주장과 논리에 막힘이 없다. 꼭 내 속에 들어와 내 생각을 낱낱이 읽는 것 같았다. - P129

그 무렵 소비에트 혁명정부는 약소국을 돕는 자금으로 임시정부에 백만 루블 지원을 결정했다. 그 가운데에서 40만 루블을 넘겨받기로했으나 일제 감시를 피해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가지고 갈 방법이없어 애를 태웠다. 그러던 차에 이태준이 몽골 왕으로부터 도움을 받아 몽골 땅을 거쳐서 돈을 운반해 왔다. 이태준이 아니었다면 코민테른이 자금을 지원하기로 결정했음에도 전달이 안 되어서 받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코민테른 지금 가운데에서 많은 액수가 의열단 활동비가 되었다.
이태준이 돈을 가지고 온 목적은 자금 운반 하나만이 아니었다. 의열단 가입을 위한 걸음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태준은 의열단이 폭탄 전문가를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마자르를 찾아낸 모양이었다. 마자르는 헝가리군으로 러시아 내전에 참전했으나 포로가 되었다가 풀려났다. 그러나 여비가 없어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팔 무기조차 없는 빈손이었다. 그렇게 마자르는 돈이 없어서 타향을 떠도는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피할 데도 없는 사막 한가운데에서 세미요노프 부대와 만나버렸지뭐요."
세미요노프는 러시아혁명에 반대하는 한 부대를 이끄는 장군이다.
그 부대에 하필이면 요시다라는 일본인이 참모로 있었단다. 마자르와 함께 의열단 본부를 향해 오고 있던 이태준은 코민테른 자금을 운반한 게 빌미가 되어 결국 요시다 손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 P131

조선혁명선언은 강도 일본이 우리 국호를 없이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의 생존적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였다‘로 시작했다.
‘인류로서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서 사회를 박삭치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로 끝나는 6천4백여 자에 이르는 거대 선언이었다. 그야말로 깊고 넓고 큰 혁명 정신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며,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과 손잡고 끝없는 폭력, 암살, 파괴, 폭동으로 강도일본을 타도하고 불합리한 제도를 개선하여 조선을 이상국가로 건설할 것이다."
- P140

그나마 새로 생겨나는 사회주의 단체인 고려공산당 국내 지부가우리를 도울 유일한 조직이다. ‘일제와 자본으로부터 조선 민중을 해방시키고, 토지를 몰수해 무상으로 농민에게 균등하게 분배하며, 대공장과 광산, 기간산업은 국유화한다‘는 고려공산당 강령은 의열단공약과 일맥상통할 뿐만 아니라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라는 조선혁명선언에도 부합한다. 상대가 일본 편이 아니라면 손잡지 못할 까닭이 없다.
거사를 위해서 새로 조직을 꾸리려 했다가는 시간만 끌게 된다. 실패한 1차 거사가 되풀이될 뿐이다. 사회주의든 민족주의든 소련이든 중국이든, 혁명을 위해서라면 비록 일본이라도 누구라도 손을 잡아야 한다.
폭탄만 던지고 끝날 일도 아니다. 기미년 만세운동은 비폭력과 평화를 내세워서 아무 소득도 얻지 못했지만, 이번 거사는 일본 통치기관을 모두 부순 다음 국내 조직을 통해서 민중이 들고일어나는 순서다. 그래야 일본을 단번에 굴복시킬 수 있다. 다행히 고려공산당에서 임시정부에 파견한 이동휘 선생이 국내 지도자 김한과 김시현을 연결해주었다. 전국 주요 시설에서 폭탄이 터지고 나면 공산당 청년조식이 앞장서 전국에서 들고일어나기로 정했다. -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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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토지조사사업이라는 명목으로 조선 땅을 강제로 빼앗지 않았다면 일본 사람 그 누구도 우리 농토를 한 뼘도 차지하지 못했을거다. 자기 소유의 땅을 나라에 신고하라고 했지만, 백성들은 땅은 나라님 소유라며 신고하지 않았다. 뿐인가. 일본 사람 말은 무조건 듣기 싫다고 안 하고, 문중 땅이지 어떻게 내 땅이냐고 안 하고, 어렵다고 안 하고, 귀찮다고 안 했다. 그러나 일제는 임자없는 땅은 나라 소유라며 모두 빼앗아가버렸다. 그 다음에는 조선임야조사령을 내려서 주인 없는 산도 다 나라 땅이라며 빼앗아가버렸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으니 일본 땅이 되어버렸다. 일제는 빼앗은 땅과 산을 일본에서 건너온 일본 사람에게 싸게 팔아넘겼다. 우리 땅이 그대로 일본 사람차지가 되어버렸다. 그제야 너도나도 나라 빼앗긴 실감을 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도 너무 늦은 다음이었다. - P49

만세운동을 이끈 지도자 33명이 왜 비폭력을 선택했는지, 약수 형님 중학교 은사인 박중화 선생이 보내온 편지로 알게 되었다. 미국 대통령 윌슨이 발표한 민족자결주의를 믿은 탓이다.
"청나라를 믿고 그다음엔 러시아를 믿고 또 미국을 믿어 결국 일본한테 먹히더니, 이번에도 또다시 미국을 믿었다고?"
‘민족이 처한 문제는 민족 스스로 해결해야 하며 미국은 그 민족을돕겠다‘는 윌슨 말에 기대를 걸고는, 만세운동을 일으키면 미국이 일본한테 물러가라고 해줄 거라 믿었다는 말이다. 윌슨 대통령과 미리 약속한 일도 아니고 막연한 기대 하나만으로 온 나라와 백성을 죽음으로 몬 일은 무책임하다고밖에 할 수가 없다. 윌슨이 내세운 민족자결주의가 우리나라에도 해당된다면 파리평화회의에서 김규식이 연설할 때부터 미국은 우리를 돕겠다고 나섰겠지. 일본과 한 편인 미국에 기대를 걸다니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소리다. 파리평화회의에서 미국이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몰라서 벌인 일이 분명하다. 윌슨이 말하는 민족자결주의는 세계대전 패전국이 지배했던 식민지에 독립을 촉구해, 패전국이 식민지를 포기하게 만들려는 교활한 술책일 뿐이다. 조선은 승전국인 일본이 차지한 식민지니까 민족자결에 해당되지 않는다. - P52

"역시 의열투쟁뿐이에요."
내가 내린 결론은 열혈 지사가 앞장서 적을 암살하고 시설을 파괴
하면 조선 민중이 폭력 의거를 일으켜 강도 일본을 타도하고 광복을 이루는 길이다. 의열투쟁은 총을 수천 자루 구하지 않아도 되고을 수천수만 명 모으지 않아도 된다. - P57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세운 까닭은 임시정부를 세운 주축이 경기도와 황해도 출신에다 개신교 신자이기 때문이다. 지역주의와 개신교신자라는 종교 파벌이 적잖이 작용한 탓이다. 이승만을 추대한 세력이 내세운 명분은 미국과 박사였다. 이승만이 미국에서 박사 학위까지 받았으니 임시정부 요인 가운데 가장 많이 배운 사람이라고 여긴까닭도 크게 작용했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세우면 임시정부가 일본을 대적할 때 큰 나라인 미국으로부터 도움을받기가 수월하리라는 기대도 있었다. 3.1만세운동 때도 아무런 도움을 못 받았으면서 여전히 미국바라기를 버리지 못했다. 보이는 면과보이지 않는 면이 모두 작용해 가장 많은 사람이 추대해서 이승만은 대통령이 되었다.
하지만 이승만에게는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올 생각이 처음부터없었다. 독립운동가에게 위험 요소라고는 한 줌도 없는 미국에 머물면서 워싱턴에 구미위원회를 만들고 대통령 집무를 보았다. 결국 임시정부는 대통령이 함께하지 않는 껍데기 정부가 되어버렸다. 그뿐만이 아니라 이승만은 나랏일을 임시정부와 의논하지도 않고 마음대로 정했다. 워싱턴에서 제멋대로 국채를 발행했다. 나라가 빚을 지는 일을 혼자서 결정하고 마음대로 집행했다. 자신이 대통령이니 나랏돈을 어디에 쓸 것인지 직접 결정하겠다면서 임시정부가 가지고 있는 돈도 모두 자기에게 넘기라고 떼를 썼다. - P62

 왜놈을 몰아낸다는 ‘구축왜노驅逐倭奴‘와 더불어 ‘광복조국光復祖國‘, ‘타파계급打破階級‘을 비롯해 중국이 신해혁명에서 내세운 토지 소유를 균등하게 한다는 ‘평균지권平均地權‘을 혁명 목표로 정했다.
쳐부술 대상을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매일신보사, 각 경찰서, 기타 왜적 주요기관으로 정하고 ‘5파괴‘라 불렀다. 이어서 처단할 대상을 정했다. 조선 총독 이하 고관, 군부 수뇌, 매국노 친일파 거두, 밀정, 반민족 토호열신 그리고 대만 총독을 넣기로 했다.
"대만도 우리처럼 왜놈에게 빼앗긴 땅입니다. 우리가 중국 땅에서 활동하려면 중국으로부터 도움을 많이 받아야 하니, 대만 총독을 처단하는 일도 우리 활동에 넣읍시다."
내 말에 모두 찬성했다. 이렇게 처단할 일곱 대상을 ‘7가살‘이라 부르기로했다. - P73

조선이 일본에 잡아먹힌 게 아니라 헐값에 팔렸다는 박재혁 말을들으니 생각나는 게 있었다. 가뜩이나 탐관오리 착취와 수탈로 허약해진 농촌 경제가 강화도조약으로 서양 물건이 들어온 후 그것들을 사느라 쌀을 내다팔면서 완전히 무너졌다. 그런데 계몽을 한답시고 학교를 세우네 어쩌네 하면서 동양척식주식회사든 일본금융조합이든 빚 안진 사람이 없게 되었고, 나라에서도 근대화를 한다며 진 빚을 갚지 못하게 되었다.
"임금이 식산흥업 정책도 써보고 백성이 국채보상운동도 해보았지만, 이미 왜놈이 부린 농간으로 달콤한 자본주의 맛을 보았으니 높으나 낮으나 뭐라도 팔아먹을 궁리만 하게 되었습니다."
철도 부설권도 팔고 광산채굴권도 팔고 삼림채벌권도 팔았다. 팔다 팔다 나라까지 서슴없이 팔아먹었다. - P97

"거사는 성공했다는구나."
약수 형님이 내가 가장 궁금해할 소식을 알려주었다. 부산경찰서장은 그 자리에서 죽었고, 박재혁은 중상을 입었다고 했다. 부산경찰서가 크게 파손되었고 일본 경찰 두 명도 부상을 심하게 입었다고 했다. 폭탄을 던진 게 아니라 경찰서장과 마주 앉은 상태에서 터트렸다는 말에 왜 퇴로 확보를 사양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폭탄이 실패해 총을 쏘려면 최대한 가까이 붙어야 한다. 네댓 걸음만 떨어져도 몸을 비틀어 피하면 명중시키기가 어렵다.
박재혁은 폭탄을 손에 쥐고 터트려서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한 부상을 당했고, 치료가 되어도 어차피 사형을 받아 죽을 목숨이라며 식사를 거부한다고 했다. 가슴을 파고들어 심장을 도려내는 통증이 훅 밀려왔다.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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