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과찬이 아니다. 새뮤얼 존슨의 <영어사전>이 나오기 전까지, 모든 사전은 단어 목록에 지나지 않았다. 의미의 뉘앙스에 별 관심을두지 않았고, 오랜 시간에 걸쳐 단어의 의미가 어떻게 변해 왔는가에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존슨은 단어의 ‘맛‘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사랑했다. 그리고 단어의 뉘앙스를 알고 살아 있는 생물과 같은 언어가 어떻게 변해 왔는지를 인지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아카데미 프랑세즈도 사전 편찬을 준비하고 있었다. 목표는 영구히 모든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정하는 것이었다. 이와 달리, 존슨은 단어를 정의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그는 단어가 사용되는 모든 상황을 사전에 담고자 했다. 작가들이 그 단어를 사용한 구체적인 문맥을 예문으로 사용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Oxford English Dictionary)》은 이 방법에 따라 단어를 정의한다. - P9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1919년 어느 가을날, 조국을 빠져나오면서 나는 조국을 원망했다. 그리고 울음소리가 투쟁의 함성으로 바뀔 때까지는 절대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굳게 맹세했다. 조선은 평화를 원했으며, 그래서 평화를 얻었다. 저 ‘평화적 시위‘가 피를 뿌리며 산산이 부서져버리고 난 이후에………. 조선은 멍청하게도 세계일강을 향하여 ‘국제정의‘ 의 실현과 ‘민족자결주의‘
약속 이행을 애원하고 있는 어리석은 늙은 할망구였다. 결국 우리는 그 어리석음에 배반당하고 말았다. 하필이면 조선 땅에 태어나서 수치스럽게도 이와 같이 버림받은 신세가 되어버렸을까? 나는 분개했다. 러시아와 시베리아에서는 남자건 여자건 모두가 싸우고 있었고, 또한 이기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자유를 구걸하지 않았다. 그들은 치열한 투쟁이라는 권리를 행사하여 자유를 쟁취하였다.
나는 그곳에 가서 인간해방의 비책을 배우고 싶었다.  - P56

서울 근처에 아리랑고개라는 고개가 있다. 이 고개 꼭대기에는 커다란 소나무가 한 그루 우뚝 솟아 있었다. 조선왕조의 압정하에서 이 소나무는 수백 년 동안이나 사형대로 사용되었다. 수만 명의 죄수가 이 노송의 옹이진 가지에 목이 매여죽었다. 그리고 시체는 옆에 있는 벼랑으로 던져졌다. 그 중에는 산적도 있었고 일반 죄수도 있었다. 정부를 비판한 학자도있었고, 조선 왕족의 적들도 있었고, 반역자도 있었다. 하지만 대다수는 압제에 대항해 봉기한 빈농이거나 학정과 부정에 대항해 싸운 청년 반역자들이었다. 이런 젊은이 중의 한 명이 옥중에서 노래를 한 곡 만들어서는 무거운 발걸음을 끌고 천천히 아리랑고개를 올라가면서 이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가 민중에게 알려진 뒤부터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이면 누구나 이 노래를 부르면서 자신의 즐거움과 슬픔에 이별을 고하게되었다. 이 애끓는 노래가 조선의 모든 감옥에 메아리쳤다. 이윽고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최후의 권리는 누구도 감히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아리랑‘은 이 나라의 비극의 상징이 되었다.  - P60

내가 체험한 인생살이의 큰 윤곽을 그려볼 때, 거기에 보이는 것은 다만 뼈를 깎는 아픔 속에서 얻어낸 패배의 연속일 뿐이며, 앞길에는 험준한 산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다. 내 인생에서 행복했던 기억은 하나도 없다. 나는 역사에 밀착해서 살아왔다. 역사는 목동의 피리소리에 맞춰서 춤추는 것이 아니다.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부상자의 신음소리와 싸움하는 소리뿐이다. 투쟁하는 것이 바로 사는 것이다. 그 밖의 것은 모두 내세계에서는 하나도 의미가 없다. 바로 그 투쟁의 대립물 속에 나와 인간생활의 일치가 나와 인간역사의 통일이 존재하는것이다. - P67

학생들은 와! 하고 함성을 터뜨렸고 환희의 눈물을 흘렸다.
우리는 껑충껑충 뛰어올랐고 손에 손을 맞잡고 춤을 추었다.
그러고 나서 선생님 주위에 가까이 모여 선생님께서 무슨말씀을 더 하시는가 하고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국민 전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윌슨 대통령은 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을 위해 싸우고 있으며 또한 모든 나라와 모든 인민들을 위해 민주주의를 지키려고 분투하고 있다. 대통령 뒤에는 세계에서 가장 유력한 국민이 버티고 서 있다. 일본이 조선을 노예화하는것을 미국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단지 독립과 민주주의만을 요구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어느 민족이나 천부적으로 가지고 있는 권리이다. 우리는 무기를 든다거나 폭력을 써서 대항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정당한 요구는 거부될수가 없다. 조선독립 만세!"
"조선독립 만세! 만세! 만세!"
우리는 만세삼창을 외쳤다.
"정말로 파리평화회의에서 조선을 도와줄까요?" 하고 우리는 선생님께 물어보았다.
선생님은 강력하게 주장하셨다. - P87

사형당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법률상의 구실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위운동 참가자들이 "우리는 단지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싸웠을 뿐, 일본에 대항하여 싸운 것이 아니다"라고 공공연하고 강력하게 주장했으므로 조선의 법률로는 사형시킬 수가 없었던 것이다. 법에 의하면 살인죄에 대해서만 사형을 시킬 수 있었다. 그래서 놈들은 사람들을 체포하는 대신에 거리에서 학살하였던 것이다. 이 얼마나 뛰어난 일본인 특유의 전문수법인가! - P9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추천의 글 
『아리랑』과 나
리영희

나와 님 웨일즈의 『아리랑(Song of Ariran)』 과의 만남은 지금으로부터 꼭 30년 전인 1960년 봄이었다. 훗날 장지락(張志樂)으로 본명이 밝혀진 주인공, ‘어느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생애에 관한 기록을 처음 읽으면서 받은 감동은 그 후 나의 삶의 방향과 내용에 지울 수 없는 크고 깊은 흔적을 남겼다.
이 나라를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던 지난 30년의 지적 · 사상적 암흑 속에서 가끔 「아리랑」을 펼치는 것은 나에게는 큰 위안이었다. 모색하다 지치고 좌절 때문에 실의했을 때는 ‘김산(金山)‘을 찾았다. 그는 내가 감히 미칠 수 없는 높은 곳에서 나에게 빛이 되어 주고 힘이 되어 주곤 했다.
- P6

서장

내가 그를 만난 것은 옌안(延安)에서였다. 그곳에 머물러있던 1937년 초여름 어느 날, 나는 루쉰(魯迅)도서관에서 영문책자를 빌려간 사람들의 명단을 훑어보고 있었다. 불과 이러저러한 몇 권의 책만이 대출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한 사람의 이름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그 사람은 여름 내내 모든 종류의 책과 잡지를 수십권씩이나 빌려가고 있었다.
나는 갑자기 호기심이 생겨서 "이렇게 많은 책을 빌려가고있는 사람은 누군가요?" 하고 물어보았다. 당시 나로서는 영어로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몹시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 사람은 중화소비에트에 파견된 조선대표입니다. 지금군정대학(軍政大學)에서 일본 경제와 물리, 화학을 가르치고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요?" - P26

일본은 화려하기는 하지만 그림엽서류의 디자인처럼 약간은 인공적이다. 반면에 조선은 순수하고 자연적이다. 일본이 소리(音)의 나라 - 게다짝 소리, 토막토막 끊어지는 발음, 오가는 교통수단들의 소음, 미닫이 창이나 문을 끊임없이 여닫는소리, 조그마한 가구를 이리저리 옮겨놓는 소리 등등 - 라면 조선은 조용하고 부드럽게 움직인다. 끊임없이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거리거나 연신 허리를 굽실거리며 손님을 맞이하지도 않는다. 인간관계에 스스럼 없고 태평하다.  - P3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프롤로그

이것은 비범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그들은 18세기 런던에서 별처럼 빛났던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의 모임은 단순한 클럽으로 알려져있었다. 그렇게 불려도 별로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지나치기에는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그들의 기여가 너무 커 왠지 아쉬움도 남는다. 그래서 여전히 많은 이들이 그들을 기리고 있다. 이 클럽에 들어가려면, 중요한 하나의 요건을 충족시켜야 했다. 이것이 문화에 대한 기여보다 더 중요한 요건이었을지도 모른다. 바로 ‘좋은 벗‘이 되는 것이다. 선술집인 터크즈 헤드 태번(Turk‘s Head Taverm)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열리는 모임에서 밤늦도록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들면서 논쟁을 벌일 준비가 된 좋은 벗만이 이 클럽에 들어갈 수 있었다. 후에 생긴 다른 클럽들과 달리, 이 클럽은 클럽 소유의 아지트가 없었다. 그래서 클럽 회원들은 런던의 평범한 선술집에서 만났다. - P18

어느 날 존슨은 옥스퍼드에서 쾌활한 척 생활했던 나날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에서도 존슨만의 재치가 돋보였다. 이를 두고 보즈웰은 "마음속에 슬픔을 품은 그는 사람들 앞에서 명랑하게 행동했다.
그의 유쾌하고 떠들썩한 웃음은 부상당한 군인과 죽어가는 군인의 신음 소리가 들리지 않게 전쟁터에서 울려 퍼지는 드럼과 나팔 소리 같았다."고 했다. - P6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무한과 광주에서 청년당원이 상해로 속속 모여들었다. 국내에서 신간회가 만들어진 소식도 들려왔다. 1927년 2월 ‘민족유일당 민족협동전선‘이라는 표어 아래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제휴해 창립한 민족운동단체다. 드디어 이해관계와 이념에 따라 우후죽순처럼 갈라져 있는 모든 단체가 단일대오로 손을 잡았다. 폭력투쟁단체뿐만 아니라 민중을 계몽하고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단체도 포함되었다. 1896년 독립협회가, 1907년 13도창의군이, 1919년 임시정부도 줄기차게 시도한 단일대오가 드디어 신간회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졌다. 신간회가 세워졌다는 소식을 듣자 기적이라도 일어난 듯 가슴이 뛰었다. - P201

레닌주의정치학교 3기로 입학하겠다며 경상도 안동 사람 이육사가 찾아왔다.
"저 같은 사람이야 성리학을 공부했으니 이해하기가 힘들겠지만 성리학이나 공산주의학이나 백성을 편안케 하려는 길에서 서로 만나는 지점이 있겠지요?"
국외로는 처음 나온 이육사다. 장진홍 동지가 결행한 대구은행 폭침 거사 때 붙들려 받은 수인번호 64번을 호로 정했다. 퇴계 이황 후손임을 자부하는 꼿꼿하기가 대쪽같은 사람이다. - P231

1932년 4월 초, 임시정부에서 주석을 맡고 있는 백범이 보냈다는 윤봉길이 나를 찾아왔다. 지금은 임시정부를 백범 혼자서 지키고 있다고 해도 과한 말이 아니다. 양반 귀족 출신이 아닌 백범이 주석이다보니, 후원금도 거의 모이질 않는다고 한다. 이름만 거창하지 돈도 없고 조직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단체로 작아졌다.
의열단이 임시정부와 척을 진 사이는 아니지만 그동안 서로 무언가를 주고받을 일도 없었다. 그런데 임시정부에서 의열단에 처음으로 도와달라는 손길을 내밀었다. 백범이 쓴 편지도 없이 사람만 왔는데, 비공개로 대화하기를 원했다. 빈방에 둘만 마주 앉았다.
"주석께서는 애먼 의열단에 피해가 가지 않기를 바란다고 하십니다."
의열단이 나섰다고 하지 말라는 말이다. 의열단에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뜻이라고 했으나 그 뜻만 들어 있지는 않다는 눈치를 못 챌내가 아니다. 레닌주의정치학교를 연 뒤로 의열단 전체가 공산주의자로 몰리고 있으니, 의열단 도움을 받았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크게 들어 있다고 짐작했다.
하지만 독립이라는 대의 앞에서 파벌 따위는 있을 수 없다.  - P235

국민당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달마다 들어가는 고정 경비와 수시로 들어가는 비상 경비를 따로 정해놓았을 뿐만 아니라 의열단 운영비도 따로 정해서 달마다 지급해주었다. 또한 조학 졸업생을 위해서 중국군 간부수준으로 지낼 수 있는 충분한 생활비와 활동비도 지원해주기로 했다. 이는 당장 근무할 부대가 없는 조선군 장교로 임관되더라도 장교대우를 받고 활동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의열단을 세운 뒤로 한순간도 돈 걱정을 안 한 적이 없고, 일본에게 붙들릴 걱정을 하지 않은 순간이 없다. 처음으로 돈 걱정, 일본 걱정이 없다. 충분히 먹고 충분히 입고 충분히 훈련하는 풍족한 시간이다.
"역시 사람은 친구를 잘 만나야 한다니까요." 박차정이 감탄을 했다. 관대장과 황소미와 등걸과 간국훈까지 모두 황포군관학교에서 맺은 인연 덕분이다. - P248

1935년 7월 5일, 드디어 한국독립당, 신한독립당, 조선혁명당, 대한독립당, 의열단 등은 해체를 선포하고 하나로 모여 새로운 정당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중국이 한 국공합작처럼 좌우를 가리지 않고 민족유일당을 세웠다. 중앙집행위원 여섯 명으로 김원봉과 김두봉,
김규식, 이청천, 최동오를 임명한다는 선언으로 민족혁명당이 선포되었다. 줄여서 민혁당으로 부르기로 했다. 한 자리는 백범을 영입하기 위해 비워놓았다.
김규식은 중앙집행위원 수락 연설에서 1928년 5월에 만주에서 일어난 전민족유일당회의가 열리면서부터 시도된 민족유일당운동이드디어 결실을 보았다면서 감격해했다. 이청천은 임시정부가 함께하지 못한 아쉬움은 차차 대화와 타협으로 통합을 이루어내자며 희망에 부풀었다.
하지만 임시정부는 끝내 민혁당에 참여하지 않았다.
김종은 준비 단계에서부터 백범은 좌파와 손잡지 않는다며 기대를 보이지 않았다. 조학에서 공산주의자를 양성한다며 자기 생도를 떼어간 일을 잊지 말라는 김종 말대로 유일당에 관심조차 보이지 않은 잘임시정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 P259

또한 민혁당에 참여한 단체가 각자 해체하고 민혁당으로 모이기로 선언했으면서도 재정을 민혁당으로 합치지 않고 여전히 따로 조직을 유지하고 있다며 진심을 의심했다.
단일대오로 민혁당을 세워 조직까지 갖추고도 자기 세력을 버리지못하는 데 대한 반감이 참여 단체끼리도 커지고 있다.
유자명은 군대를 만들면 의열단 쪽으로 힘이 기운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아지는 현상은 결국 파벌주의 망령이라고 걱정했다. 나는 유자명이 하는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다른 나라에 제발 살려달라고 편지나 해대는 게 외교라면 굳이 유일당이 아니어도 됩니다."
결국 공식석상에서 이 말이 내 입에서 나오고 말았다. 기다렸다는듯이 민혁당을 부정하느냐는 비판이 여기저기서 들끓었다.
"빠져나갈 좋은 핑계를 찾았네. 김원봉은 피 흘리기만 좋아해서 무장투쟁만 고집하니까 같이 할 수 없다고도 하겠지."
김두봉은 대거 탈당이 멀지 않았음을 이렇게 예상했다.
몇 달이 되지 않아 조소앙이 민혁당을 나갔다. 다음해에 전당대회를 치르며 당을 정비하려 했으나 이번에는 이청천이 나가고 말았다. - P262

백범은 국민당이 연거푸 거절했지만 끈질기게 설득해, 장개석 개인이 돕는 조건과 중국군에 편입되는 조건으로 1940년 9월 17일에 광복군 창설을 이루어냈다. 그동안 국민당이 백범이 하는 부탁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까닭은 조선의용대로 지원을 집중하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개석은 윤봉길 의거 때 조선 청년을 찬양하면서 임시정부에 빚을 졌으니 백범 부탁을 끝내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공식 선포도 못한 광복군 창설식이 중국 측 인사 몇 명만 개인 자격으로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대원은 겨우 30명도 되지 않았다. 조선의용대는 초대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광복군은 일본을 향해 선전포고도 했다. 공중에 대고 지르는 주먹감자랑 뭐가 다르냐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가나라 이름으로 일본에 항전을 선포한 의미는 충분하다고 여기는 사람도 많았다. - P285

1942년 5월, 드디어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가 임시정부와한국광복군으로 합쳐졌다. 이렇게 되자 임시정부는 한국독립당 1당체제에서 여당인 한국독립당과 야당인 조선민족혁명당으로 양당체제가 되었다. 두 당을 한독당과 민혁당이라는 약칭으로 불렀다.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들어간다는 소문이 나자 많은 청년이 모여들었다. 조선의용대가 화북으로 갈 때는 공산당 군대라고 여겨서 들어가기를 꺼렸는데 광복군과 합친다고 하니 공산당이 아니라 여겨서 찾아왔다고 했다. 밖으로 보이는 조선의용대 모습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순간이다. - P291

멀어지는 남쪽 땅을 보며 내 마음속에 늘 하던 말이 떠오른다.
나는 언제나 실패했다.
번번이 실패했다.
하지만 또 실패를 향해 시도한다.
앞선 실패보다 조금만이라도 더 나은 방법으로 시도한다. - P30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