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과 광주에서 청년당원이 상해로 속속 모여들었다. 국내에서 신간회가 만들어진 소식도 들려왔다. 1927년 2월 ‘민족유일당 민족협동전선‘이라는 표어 아래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제휴해 창립한 민족운동단체다. 드디어 이해관계와 이념에 따라 우후죽순처럼 갈라져 있는 모든 단체가 단일대오로 손을 잡았다. 폭력투쟁단체뿐만 아니라 민중을 계몽하고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단체도 포함되었다. 1896년 독립협회가, 1907년 13도창의군이, 1919년 임시정부도 줄기차게 시도한 단일대오가 드디어 신간회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졌다. 신간회가 세워졌다는 소식을 듣자 기적이라도 일어난 듯 가슴이 뛰었다. - P201

레닌주의정치학교 3기로 입학하겠다며 경상도 안동 사람 이육사가 찾아왔다.
"저 같은 사람이야 성리학을 공부했으니 이해하기가 힘들겠지만 성리학이나 공산주의학이나 백성을 편안케 하려는 길에서 서로 만나는 지점이 있겠지요?"
국외로는 처음 나온 이육사다. 장진홍 동지가 결행한 대구은행 폭침 거사 때 붙들려 받은 수인번호 64번을 호로 정했다. 퇴계 이황 후손임을 자부하는 꼿꼿하기가 대쪽같은 사람이다. - P231

1932년 4월 초, 임시정부에서 주석을 맡고 있는 백범이 보냈다는 윤봉길이 나를 찾아왔다. 지금은 임시정부를 백범 혼자서 지키고 있다고 해도 과한 말이 아니다. 양반 귀족 출신이 아닌 백범이 주석이다보니, 후원금도 거의 모이질 않는다고 한다. 이름만 거창하지 돈도 없고 조직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단체로 작아졌다.
의열단이 임시정부와 척을 진 사이는 아니지만 그동안 서로 무언가를 주고받을 일도 없었다. 그런데 임시정부에서 의열단에 처음으로 도와달라는 손길을 내밀었다. 백범이 쓴 편지도 없이 사람만 왔는데, 비공개로 대화하기를 원했다. 빈방에 둘만 마주 앉았다.
"주석께서는 애먼 의열단에 피해가 가지 않기를 바란다고 하십니다."
의열단이 나섰다고 하지 말라는 말이다. 의열단에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뜻이라고 했으나 그 뜻만 들어 있지는 않다는 눈치를 못 챌내가 아니다. 레닌주의정치학교를 연 뒤로 의열단 전체가 공산주의자로 몰리고 있으니, 의열단 도움을 받았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크게 들어 있다고 짐작했다.
하지만 독립이라는 대의 앞에서 파벌 따위는 있을 수 없다.  - P235

국민당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달마다 들어가는 고정 경비와 수시로 들어가는 비상 경비를 따로 정해놓았을 뿐만 아니라 의열단 운영비도 따로 정해서 달마다 지급해주었다. 또한 조학 졸업생을 위해서 중국군 간부수준으로 지낼 수 있는 충분한 생활비와 활동비도 지원해주기로 했다. 이는 당장 근무할 부대가 없는 조선군 장교로 임관되더라도 장교대우를 받고 활동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의열단을 세운 뒤로 한순간도 돈 걱정을 안 한 적이 없고, 일본에게 붙들릴 걱정을 하지 않은 순간이 없다. 처음으로 돈 걱정, 일본 걱정이 없다. 충분히 먹고 충분히 입고 충분히 훈련하는 풍족한 시간이다.
"역시 사람은 친구를 잘 만나야 한다니까요." 박차정이 감탄을 했다. 관대장과 황소미와 등걸과 간국훈까지 모두 황포군관학교에서 맺은 인연 덕분이다. - P248

1935년 7월 5일, 드디어 한국독립당, 신한독립당, 조선혁명당, 대한독립당, 의열단 등은 해체를 선포하고 하나로 모여 새로운 정당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중국이 한 국공합작처럼 좌우를 가리지 않고 민족유일당을 세웠다. 중앙집행위원 여섯 명으로 김원봉과 김두봉,
김규식, 이청천, 최동오를 임명한다는 선언으로 민족혁명당이 선포되었다. 줄여서 민혁당으로 부르기로 했다. 한 자리는 백범을 영입하기 위해 비워놓았다.
김규식은 중앙집행위원 수락 연설에서 1928년 5월에 만주에서 일어난 전민족유일당회의가 열리면서부터 시도된 민족유일당운동이드디어 결실을 보았다면서 감격해했다. 이청천은 임시정부가 함께하지 못한 아쉬움은 차차 대화와 타협으로 통합을 이루어내자며 희망에 부풀었다.
하지만 임시정부는 끝내 민혁당에 참여하지 않았다.
김종은 준비 단계에서부터 백범은 좌파와 손잡지 않는다며 기대를 보이지 않았다. 조학에서 공산주의자를 양성한다며 자기 생도를 떼어간 일을 잊지 말라는 김종 말대로 유일당에 관심조차 보이지 않은 잘임시정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 P259

또한 민혁당에 참여한 단체가 각자 해체하고 민혁당으로 모이기로 선언했으면서도 재정을 민혁당으로 합치지 않고 여전히 따로 조직을 유지하고 있다며 진심을 의심했다.
단일대오로 민혁당을 세워 조직까지 갖추고도 자기 세력을 버리지못하는 데 대한 반감이 참여 단체끼리도 커지고 있다.
유자명은 군대를 만들면 의열단 쪽으로 힘이 기운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아지는 현상은 결국 파벌주의 망령이라고 걱정했다. 나는 유자명이 하는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다른 나라에 제발 살려달라고 편지나 해대는 게 외교라면 굳이 유일당이 아니어도 됩니다."
결국 공식석상에서 이 말이 내 입에서 나오고 말았다. 기다렸다는듯이 민혁당을 부정하느냐는 비판이 여기저기서 들끓었다.
"빠져나갈 좋은 핑계를 찾았네. 김원봉은 피 흘리기만 좋아해서 무장투쟁만 고집하니까 같이 할 수 없다고도 하겠지."
김두봉은 대거 탈당이 멀지 않았음을 이렇게 예상했다.
몇 달이 되지 않아 조소앙이 민혁당을 나갔다. 다음해에 전당대회를 치르며 당을 정비하려 했으나 이번에는 이청천이 나가고 말았다. - P262

백범은 국민당이 연거푸 거절했지만 끈질기게 설득해, 장개석 개인이 돕는 조건과 중국군에 편입되는 조건으로 1940년 9월 17일에 광복군 창설을 이루어냈다. 그동안 국민당이 백범이 하는 부탁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까닭은 조선의용대로 지원을 집중하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개석은 윤봉길 의거 때 조선 청년을 찬양하면서 임시정부에 빚을 졌으니 백범 부탁을 끝내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공식 선포도 못한 광복군 창설식이 중국 측 인사 몇 명만 개인 자격으로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대원은 겨우 30명도 되지 않았다. 조선의용대는 초대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광복군은 일본을 향해 선전포고도 했다. 공중에 대고 지르는 주먹감자랑 뭐가 다르냐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가나라 이름으로 일본에 항전을 선포한 의미는 충분하다고 여기는 사람도 많았다. - P285

1942년 5월, 드디어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가 임시정부와한국광복군으로 합쳐졌다. 이렇게 되자 임시정부는 한국독립당 1당체제에서 여당인 한국독립당과 야당인 조선민족혁명당으로 양당체제가 되었다. 두 당을 한독당과 민혁당이라는 약칭으로 불렀다.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들어간다는 소문이 나자 많은 청년이 모여들었다. 조선의용대가 화북으로 갈 때는 공산당 군대라고 여겨서 들어가기를 꺼렸는데 광복군과 합친다고 하니 공산당이 아니라 여겨서 찾아왔다고 했다. 밖으로 보이는 조선의용대 모습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순간이다. - P291

멀어지는 남쪽 땅을 보며 내 마음속에 늘 하던 말이 떠오른다.
나는 언제나 실패했다.
번번이 실패했다.
하지만 또 실패를 향해 시도한다.
앞선 실패보다 조금만이라도 더 나은 방법으로 시도한다. - P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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