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은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고, 그냥 스마트폰 혁명이라고 보면 돼요. 스마트폰, 즉 휴대용 인터넷 단말기 안에 세계 전체의 시장이 들어온 거예요. 나아가 스마트폰에 어울리는 시장마저 만들어졌죠. 이제 상품이나 서비스를 사려고 몸소 시장에 갈 필요가없어요. 가상의 시장에서 결제를 하면 어느 사이엔가 상품이나 사람이 문앞에 도착할 테니까요. 물론 과거 전통시장의 호객 행위도 사이버화돼요. 정치도 경제도 문화도 모두 자극적이고 선정적으로 변화하죠. 그래야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볼 테니까요. 그 자극적인 문자나 영상 사이사이에는 엄청난 광고가 붙죠. 광고의 유혹이 아니더라도 무언가를 구매하려면 다양한 상업 포털 사이트에 접속하는 것이 이미 대다수 사람들의 행동 아닌가요? 스마트폰으로 흡수되지 못한 시장이나 자본은 반대로 도태될 거예요. 스마트폰 사용자에게 검색되지 않는 것은 있어도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 P111

게임이라는 말의 어원 아세요? 파스칼의 《팡세》에는 무서운 이야기가 하나 나와요. 프랑스에서 근대사회가 발달하고 도시에 부르주아 귀족들이 많이 생기잖아요. 파스칼이 살던 17세기에 상류층 계급의 수가 늘면서, 지금 골프 치는 것과 비슷하게, 나는 귀족입네 하면서 여우 사냥을 즐겼어요. 그런데 여우가 한계가 있잖아요. 여우를 너무 많이 잡아서 거의 전멸하는 상황까지 갔어요. 그래서 어떻게 했냐면 여우 가죽 옷을 입힌 농노의 아이들을 들판에 풀어놓았어요. 그리고는 아이들을 사냥하는 거죠. 그것을 ‘게임‘이라고 한 거예요. ‘사냥감‘이라는 뜻으로요. 농노의 아이들을 출발시키고 개를 풀어서 사냥을 했어요. 그러면 아이의 피가 묻은 여우 가죽을 가지고오는 거예요. 피 흘리며 죽어간 아이를 데리고 올 수는 없잖아요. 사냥을 도와주는 농노들이 자기들과 같은 계급의 아이들을 근처 땅에 묻어주는 거죠. 그들의 가슴속에는 아마도 피눈물이 그치지 않았을거예요. - P119

앞에서 우리는 살펴봤어요. 전문가, 혹은 특정 스펙으로 취업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진보적으로 보여도 자신이 속한 체제에 대해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고요. 자신이 부품으로 들어가 있는 기계가 망가지면 자신도 버려진다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MZ세대도 자본주의 체제에 상당히 보수적이에요. 스마트폰이 외장형 심장이 되어버렸기에, 그들은 스마트폰으로 작동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저항하기 힘들어요. 저항하기는커녕 그들은 자본주의적 합리성에따라 움직이죠. 스마트폰으로 동일한 상품에 대한 가격도 합리적으로 비교하며 가성비를 따지는 것이 그 훌륭한 예가 될 것 같네요. 불행히도 그들에게 그 상품이 필수품인지 사치품인지 고민할 정치·경제학적 감각이 없어요. 자신의 쾌락과 불쾌, 혹은 이익과 불리를 계산하는 벤담적 자아, 이기적인 개인주의가 스마트폰에서 마침내 완성된 셈이죠. 어쩌면 제말을 반드시 들어야 할 독자들은 지금 MZ세대 아닌가 해요. 동시에 제 이야기를 듣고 불편함을 느낄 독자들도 아마 MZ 세대일 거예요. - P123

취업이 힘든 것도, 고용이 불안한 것도 모두 기성세대가 자리를 꿰차고 있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도 명예퇴직과 정리해고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걸 보지 못해요. 제코가 석자니까요. 자본이 노동계급을 착취하는 방법은 일정 정도의 실업률을 유지하고 고용불안 상태를 유지하는 거예요. 그래야 임금을 억제하고 노동계급을 통제할 수 있으니까요. 결국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에갖는 불만을 자본주의 체제에 돌려야 해요. 기성세대라는 인식보다는 늙은 노동자라고 보아야 한다는 이야기예요.
불행히도 젊은 세대, 즉 젊은 노동자들은 자본을 공격하기보다 늙은 노동자들을 적대시해요. 늙은 노동자들이 사라지면 자신들이그 자리에 들어갈 수 있다고 착각하는 거죠. 그러니까 젊은 사람들이 나이 든 사람들을 ‘꼰대 일반‘으로 놓고 바라보게 되는 거예요. 이런 시선은 나이 든 세대의 불행이라기보다는 젊은 세대의 불행이에요. 어떤 사람들의 경험을 간접체험할 수 있다는 것은 소중한 거예요. 그 경험을 통해서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어떻게해야 할지를 그려볼 수 있잖아요. 그 배움의 기회를 날리는 거예요. 사람은 일종의 텍스트란 말이에요. 좋은 텍스트도 있고 좋지 않은 텍스트도 있어요. 모든 책이 좋은 책이 아니듯이.  - P129

 내가 봤을 때 지금의 우리나 일제강점기 경성 시내를 싸돌아다녔던 ‘모던뽀이‘들이나 다 똑같아요. 초기 자본주의 시대 경성 지식인들이 북적대는 미쓰코시 백화점에서 물건 사고, 자기가 마치 진열된 상품처럼 번쩍대는 양 돌아다니고, 그리고 거기 옥상에서 이상李箱, 1910~1937 처럼 ‘날자 날자, 한번만 더 날자꾸나‘ 하고 탈주하는 놈도 있는 것처럼…………. 그때하고 지금하고 겉보기에 트렌디한 것은 좀 변했지만, 신상품을 강조했던 자본주의 메커니즘은 똑같아요. 자본주의는 매번 새롭게 변하는 것으로 유지되는 유일한 체제예요. 자본주의의 전대미문성은 거기에있어요. - P130

인간적인 가치가 스타라는 시스템이나 모델 형태로만 남아 있는거예요. 모든 동네 아이들이 축구를 했던 시절이 아니라 축구를 구경하는 흐름으로 가는 거고요. 대신 자본주의는 가능성만은 줘요.
부르주아사회의 특징은 이론적으로 모든 것이 가능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거예요. 누구나 대통령이 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되는 사람은 없어요. 억울하면 소송을 걸 수 있지만, 시간이 굉장히 많이 걸리고 해결도 힘들어요. 오히려 소송의 절차 자체가이길 수 없는 게임이기도 해요. 가난해서 유명 로펌을 쓰지 못하는사람들한테는 유리천장glass ceiling에 부딪히는 거죠. 옛날에는 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몰랐는데 지금은 보이기는 해요. 그런데 막상 올라가려고 하면 못 올라가요. 이게 자본주의사회예요. 모든게 가능해 보이는데, 정작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세계일주도 할 수있고, 많은 부를 축적할 수도 있고, 요트도 살 수 있어요. 돈과 시간만 있으면. 이론적으로는 가능한데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해요. 그게 모든 문화, 정치, 생활을 지배해요. - P137

우리에게 소중한 사람은 자유인으로 키웠으면 좋겠어요. 제가 불교를 많이 다루는 이유는 별게 아니에요. 종교의 형태지만, 중요한 것은 불교는 우리 자신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는 점이죠. 불교는 신이 인간을 지배하고, 인간이 신에게 복종하는 종교가 아니거든요. 오히려 내 자신의 욕망, 소유욕, 집요한 이기주의, 이런 것들을 이겨내려는 담론적 전통이 바로 불교예요. 물론 현실적으로 불교에서 모든 신도가 자유인, 즉 부처가 되는 것을 원하기 힘들어요.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되면, 그들이 사찰을 찾아 부처상이나 스님을 경배할 일도 없고 당연히 시주도 없을 테니까요.(웃음) 바로 이것이 불교라는 종교가 가진 위대한 아이러니죠. 부처가 되어야 해요. 그리고 자유인이 되어야 해요. 그래야 우리는 이기적 욕망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어요. 바로 이 순간 우리는 남에게 복종하거나 남을 지배하려는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요. 이제 타인은 존중의대상, 그리고 아낌의 대상이 돼요. 결국 내가 부처가 되면 타인도 부처로 보이게 되죠.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옛말이 떠오르네요. -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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숀은 귀엽고, 명랑하고, 구김 없는 조카를 봤다. 다샤는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입고 있었고, 자부심 가득한 표정이었다. 숀은 실라 이모가 무엇을 겪었는지, "모두 열광"하게 만들기 위해 무엇을 견디고 살아남았는지 다샤가 이해할지 궁금했다. 아이들도 가족 내력을 알고 있었지만 에이바가 세상을 떠났을 때, 실라 이모가 고통을 타인의 관심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배웠을 때, 함께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겪은 고통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일은 정의처럼 느껴졌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 대릴과 다샤도 물론 분개했지만, 그 아이들이 느끼는 건 물려받은, 추상적이고 견딜 수있는 종류의 분노였다. 그들의 분노는 마음이 새카맣게 타 버리지 않고도 느낄 수 있었다.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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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은 마지막 순간에 제일 화려하게 피어요. 그리고 이삼일 정도 지나서 바람 불고 비 오면 떨어지죠. 어르신들이 많은 강연에서 제가 끝날 때쯤 가끔 이런 말을 해요. 자기를 벚꽃 다 떨어진 나무라고 생각하고 다니시지 말라고, 지금이 벚꽃 마지막 단계라고 숨넘어가고 죽어갈 때 그때 꽃이 지는 거라고, 60~70 먹었다고 해서 꽃잎진 것처럼 살지 말라고 착각하지 말라고, 지금이 가장 예쁠 때라고 그렇게 말해요. 소비를 많이 안 하니까 자본주의체제에서 이미 죽은 것처럼 취급받는 것뿐이라고요. 당연하죠. 떨어지기 직전의 벚꽃만큼 아름다운 것이 어디 있나요. 바람에도 비에도 애닯게 꽃잎이 흔들리니, 그만큼 이제 타자의 움직임에도 민감하기만 해요. 자신의 고통과 쾌락에만 매몰되는 이기적 개인이 더 이상은 아니죠. 이제 성숙한 거예요. 타자의 고통에도 민감할 수 있으니까요. 곧 지려는 찬란한 벚꽃, 미세한 바람에도 떨리는 벚꽃이 노쇠함과 죽음이 아니라 성숙함과 삶을 살징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예요. - P72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시각적으로 보는 것만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를 오감을 통해서 만나는 거예요. 오감 중에 하나라도 빠지면, 그건 현실이 아니에요. 인간이 가진 최고의 감각이 촉감이에요.
어머니가 갑자기 병이 들어 누우면, 옆에 다가가서 얼굴도 만져보고 손도 잡아보는 거잖아요. 애완견 동영상 찍어놓고 재생해서 쳐다보는 게 행복인가요? 봐요. 코로나 상황에서 카카오나 네이버가 포스트 코로나, 새로운 시대를 얘기하는 것은 자기네 시장에 들어와서 자기네 콘텐츠를 구입하라는 얘기인 거예요. 사람들이 거기에 휘둘리고 따라가고 있는 거죠. 권력에 대해서, 자본주의체제에 대해서 문제를 삼아야 되고, 경고를 해야 할 지식인들도 마찬가지예요. - P84

서구권이 개인주의 문화가 강하다고 보는 것은 동아시아의 피상적인 시각이에요. 서구 사회가 개인주의적이기도 하지만, 지역성도 강해요. 그래서 지역을 기반으로 프로축구 리그가 발달한 거예요.
바이에른 뮌헨, 맨체스터, 바르셀로나, 굉장히 지역성이 강해요. 상대적으로 개인주의는 자본주의로 인해서 발달하게 된 거예요. 자본주의가 쾌락과 불쾌, 혹은 이익과 손해를 계산하는 기계적인 개인을양산했어요. 아직도 공동체와 지역성에 사로잡혀 있던 동아시아 사람들의 눈에는 서구인들의 개인주의가 부각되었던 거예요. 그러나그 개인주의는 자본주의의 산물이니, 동아시아 사람들이 본 것은 사실 서구에서 발달한 자본주의라는 생경한 체제였던 거죠. - P87

 그런 전통적 의미의 노동자들은 그대로 있는데, 스마트폰이라는 플랫폼에 들어오기 힘든 이런 노동들은 점점 우리 눈에 띄지 않아요.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자본은 더 노동을 착취하고, 그 결과가 잔혹한 산업재해 사고죠. 스마트폰이라는 단말기가 묘수예요. 생산 현장이나 노동 현장을 증발시키고 소비 현장만을 부각시킬 수 있으니까요. 극단적으로 말해서 스마트폰은 우리 몸에 이식된 체제의 칩chip과도 같아요. 이 칩을 거치지 않고는 세계와 접속할 수 없게 된 거예요. 결국 국가나 자본이 검열한 정보는 우리에게 들어오지 않죠. 이처럼 스마트폰은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우리에게 안겨주기보다는 체제가 보았으면 하는 검열된 세상만을 보여줘요.
무서운 일이죠. - P93

이기적 개인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교환하는 것이 자본주의적교환이라면, 이타적 개인 혹은 사랑에 빠진 개인이 타인의 행복을위해 교환하는 것이 사랑의 교환이자 공동체적 교환이에요. 그런데 어느 사이엔가 공동체가 거래 관계가 되어버리면 교환이 동등하지않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혼자 살 때보다 같이 살 때가 힘들고 이득이 안 된다고 생각되면 같이 살 필요가 없는 거죠. 아이가 생기면 생활이 더 힘들어지는데 아이를 낳을 필요가 없는 거죠. 그러니까자본주의가 가족공동체와 지역공동체를 와해시킨 거예요. 가족 구성원을 자본주의적 인간형으로 만들어버리니까 공동체를 유지하지못하는 거죠. 사랑의 관계를 맺게 되면 나한테 한 사람이 더해지고,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어 주게 되잖아요. 이것을 자신에게 손해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러니 취업도 힘든 요새 젊은이들은 결혼도 피하고, 결혼을 했어도 출산을 피하는 거예요. 자본주의적 인간으로 길러졌기 때문이죠. 자본주의가 발달한 국가일수록 사회가 고령화되는 것도 이 때문이에요. 자신만 생각하는 자본주의적 개인이 어떻게 가족이나 공동체를 만들려고 하겠어요. 우울하고 슬픈 일이죠.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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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쓴 책 중에서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가 그거예요. 손을 떼는 것이 힘든 이유는 절벽이라고 생각해서예요.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뗀다는 것은 굉장히 힘든 거예요. 그런데 손을 떼라는 이유는 그것만 잡고 살면 안 되니까,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것들이 있고, 이것도 저것도 잡을 수가 있어요. 빈손으로 살자는 것을 불교에서 공이라고 하잖아요. 우리가 어떤 사유를 비판한다고 해서 사유를 갖지 말라는 것은 아니에요. 어떤 사유든지 간에, 자기가 자유롭게 잡을 수 있다는 거예요. 여기서 철학과 종교의 차이가 나오는데, 종교는 끝까지 믿음을 가져가는 것이고, 철학은 일정 부분그 철학자와 같이 가다가 작별해야 하는 거예요. 잠시 동안 동반자인 거죠. 저도 대중들한테 당하거든요.(웃음) 자기가 성장한 만큼 관심이 바뀌면 다른 철학자로 옮겨갈 수 있어야 해요. 영원을 맹세하면 안 돼요. - P49

 평론가의 자리는 객관적인 자리예요. 객관이라는 말의 한자가 재밌잖아요. ‘손님의 시선‘, 제3자의 시선으로 보는 거예요. 그런데 대상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필요해요. 내가 주인이고 상대가 객이잖아요. 객관적인 것을 객관적으로 보면 안 돼요. 그러면 나와 무관한 평론이 되잖아요. 오히려 나를 볼 때는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대상을 볼 때는 주관적인 시선이 필요해요. 나인것처럼. 그러면 다르게 보이죠. - P55

스마트폰이 발달하면서 뉴스는 더 이상가치 덕목이 아니에요. 모든 것이 새롭잖아요. 지금 우리 시대의 진정한 언론은 ‘뉴스news‘가 아니라 ‘올드스olds‘에 있어요. 얼마만큼 회석되지 않고 시간을 견디는 한 노동자가 죽은 사건을 10년 이상 들여다보는 언론이 필요한 거예요. 세월호 참사를 20년, 30년 취재하는 언론이 필요해요. 그런데 조회 수에 의존하는 언론이 그게 가능할까요? 미디어가 발달하지 않았을 때, 19세기 자본주의적 조건에서는 뉴스가 중요하고 취재가 중요했어요. 지금은 취재를 하나요 SNS나 보도자료 가지고 기사를 쓰잖아요. 그러니까 기사가 제목도 똑같고 내용도 똑같아요. 2000~3000년 전에도 가능했고 앞으로도 지속 가능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을 얘기해야 돼요. 이제는 뉴스의 시대가 아니라 올드스의 시대니까요.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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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지승호
우리 모두 조금만 더 가난해졌으면

이 책의 머리말을 쓰기 위해 2013년에 발간되었던 《강신주의 맨얼굴의 철학 당당한 인문학》 프롤로그를 읽어보았습니다. 그때도 여전히 슬럼프였더군요. 12년을 해온 인터뷰 작업을 더 이상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절망감과 이 일을 계속하고 싶다는 간절함이 읽혔습니다. 인터뷰는 2012년 여름에 이루어졌습니다. 저녁에 시작해서 새벽 늦은 시간까지, 또는 아침 해가 뜰 때까지 다섯 번의 만남을 가졌습니다. 그 순간이 참 행복했었습니다. 50시간의 인터뷰, 4500매의 녹취를 푸는 과정까지 모두 행복한 시간이었죠. 강신주 선생님은 에필로그 제목으로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다웠다"라고 답변해주셨지요. 저는 그때 녹취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졌던 것 같습니다. 4500매를 풀어냈는데, 앞으로 뭘 못 하겠나 하면서요. - P5

개인이 시장과 한 몸이 되고, 자본주의에 물든 이 사회에 강신주라는 치료제 혹은 해독제가 필요한 시간이 아닌가 싶습니다. 강신주선생님은 "자본주의는 매번 새롭게 변하는 것으로 유지되는 유일한체제"이며, "자본주의의 전대미문성은 거기에 있다"고 진단합니다. 자본주의에서는 사치품이 필수품이 되고, 그 필수품이 또 필수품을낳고, 그 필수품이 새로운 사치품을 만들고, 이 새로운 사치품이 필수품이 되는 과정을 무한 반복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거기서 자연과 인간은 소외될 수밖에 없습니다. - P9

사랑에 빠지면, 자기가 꿈꾸는 것을 이루려 한다면 억압체제에저항하게 돼요. 왜냐하면 체제에서 하지 말라고 하니까요. 사랑과 자유는 항상 같이 가는 거예요. 인문학의 정신이 사랑과 자유가 아니면 뭐겠어요. 그 두 가지 내용을 가진 것이 인문주의고,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예요. 자유로운 사람만이 사랑을 할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만이 자유를 얻을 수 있어요. - P23

 그러니까 영원한 것이나 불변하는 것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라는 거예요. ‘나‘라는 사람은 독자적으로 있는존재가 아니라, 복잡한 ‘인연因緣‘ 관계로 생겨난 존재예요. 예를 들어 눈사람을 만들려면 눈과 온도와 습도와 아버지와 아들이 화합해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눈사람과 같은 존재인 거예요. 영원불변하지 않아요. 이미 만들어진 눈사람도 온도가 조금이라도 올라가면 곧 사라지죠. 눈사람이 녹는다고 해서 눈사람의 영혼이니 하면서 눈사람의 본질이나 실체에 집착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에요. 그렇게 우리 삶을 왜곡하고, 세상과 나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논의를 불교에서는 희론이라고 해요. 우리의 사유를 희롱해서 삶을 그릇된 길로 이끄는 논의라는 뜻이죠. 그래서 희론이 적멸寂滅해야 마음이 평안해지고,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는 거예요. - P26

벤담이 숙고하지 못했던 사랑과 연대의 힘이죠. 우리는 사랑과연대를 위해 자신의 불리함과 고통을 선택하는 존재였어요. 그런데 희론은, 벤담의 희론은 사랑과 연대의 가치를 가로막아요. 철학자의 역할은 그 희론을 비판하고, 고요하게 만드는 데 있어요. 원효의 《대승기신론소∙별기大乘起信論疏·別記》를 보면, 물이 고요할 때가 있고 요동칠 때가 있는 것처럼 마음도 그렇다는 거예요. 돌멩이를 던지거나 바람이 불거나 물속에서 기포가 올라오거나, 안에서든 밖에서든 동요가 되면 표면에 물결이 치잖아요. 그럼 세상을 있는 그대로 비추지 못해요. 희론이라는 것은 우리가 명징하게 바로보지 못하게 하는 물결과 같아요.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에 학습된 채 벤담적 자아가 된 거예요. 다시 물결을 고요하게 하면 옆에 서 있는 나무들,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들이 비치잖아요. 희론이 적멸해야 된다는 것이 모든 철학자들의 입장이에요. 있는 그대로 봤을 때 우리가 연대할 수도 있고, 공동체를 꿈꿀 수도 있어요. 살아간다는 것이 인연의 관계를 맺는 것이구나, 누가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착취하는 관계가 아니구나, 내가 누리는 것들이 수많은 노동으로 복잡하게 인연을 맺은 결과물이구나 하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거예요. - P27

그런데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가 생각하는 것은 부르주아사회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사회다‘라는 거예요. 굉장히 중요한 말이에요. 부르주아사회가 뭐냐면 부르주아가 지배하는 사회고, 귀족사회는 귀족이 지배하는 사회예요. 인간의 사회는 모두가지배하지도 지배당하지도 않는 사회고요. 내 철학이 지향하는 것은인간의 사회예요. 마르크스는 ‘인간의 사회‘, ‘사회적 인간‘이라는 표현을 써요. 사람들은 쉽게 읽고 지나치는데, 굉장히 강한 뜻인 거예요. 인간의 사회는 특정 소수가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라 다수가 스스로를 지배하는 사회라는 뜻이고, 사회적 인간이란 지배, 피지배가없는 같은 인간이라는 뜻이니까요.
마르크스의 철학은 ‘인간사회‘에 기초하고 있어요. ‘부르주아사회‘라고 말할 때 동시에 우리가 ‘노동자사회‘라는 표현을 쓰지 않아요. - P32

벽돌을 올리는 사람의 힘 자체가 얼마나 센 것인지를 알아야해요. 이삿짐 나르는 사람을 돈 주고 부릴 수 있지만, 그 사람들이 없다면 이사를 할 수 있겠어요? 고마워하고 미안해해야 하는 거죠. 우리는 냉장고 하나도 혼자서 못 들어요. 다른 사람들의 노동으로 내가 살아가고 있구나, 착취하는 구조에서 내가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자각이 있어야죠. ‘고생하셨어요‘라는 따뜻한 말 한마디 할 수 있는 감수성이 있어야 돼요. 내가 돈을 주고 배달을 시키니까 저 사람들이 월급을 받는 거 아니냐고 하면 답이 없는 거죠. 아무리 돈 가진사람, 땅 가진 사람이 편하게 살 수 있는 사회라고 해도 일하는 사람들의 가치를 부정하면 안 돼요. 나한테 돈을 그만큼 준다고 해도 절대로 해내지 못할 일인데, 그분들이 대신해주잖아요. 우리가 수치스러운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자기가 그렇게 살지는 않는다고 해도 수치스러움을 아는 게 중요한 거죠. 지금 사회를 정당화하거나 합리화하지 말고요. 그러면 조금씩 나아지지 않을까요? 사유가 바뀐다는 건 그 사유라는 색안경이 바뀐다는 거잖아요.
그래야 다른 사유를 구축할 수가 있거든요. 그런데 사유가 통념적으로 부르주아 체제에서 나오는 담론들, 엘리트적 담론으로 무장되면모든 것을 시장의 논리로 너무나 당연히 정당화해버려요. 이러면 사회는 변하지 않겠죠.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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