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은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고, 그냥 스마트폰 혁명이라고 보면 돼요. 스마트폰, 즉 휴대용 인터넷 단말기 안에 세계 전체의 시장이 들어온 거예요. 나아가 스마트폰에 어울리는 시장마저 만들어졌죠. 이제 상품이나 서비스를 사려고 몸소 시장에 갈 필요가없어요. 가상의 시장에서 결제를 하면 어느 사이엔가 상품이나 사람이 문앞에 도착할 테니까요. 물론 과거 전통시장의 호객 행위도 사이버화돼요. 정치도 경제도 문화도 모두 자극적이고 선정적으로 변화하죠. 그래야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볼 테니까요. 그 자극적인 문자나 영상 사이사이에는 엄청난 광고가 붙죠. 광고의 유혹이 아니더라도 무언가를 구매하려면 다양한 상업 포털 사이트에 접속하는 것이 이미 대다수 사람들의 행동 아닌가요? 스마트폰으로 흡수되지 못한 시장이나 자본은 반대로 도태될 거예요. 스마트폰 사용자에게 검색되지 않는 것은 있어도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 P111
게임이라는 말의 어원 아세요? 파스칼의 《팡세》에는 무서운 이야기가 하나 나와요. 프랑스에서 근대사회가 발달하고 도시에 부르주아 귀족들이 많이 생기잖아요. 파스칼이 살던 17세기에 상류층 계급의 수가 늘면서, 지금 골프 치는 것과 비슷하게, 나는 귀족입네 하면서 여우 사냥을 즐겼어요. 그런데 여우가 한계가 있잖아요. 여우를 너무 많이 잡아서 거의 전멸하는 상황까지 갔어요. 그래서 어떻게 했냐면 여우 가죽 옷을 입힌 농노의 아이들을 들판에 풀어놓았어요. 그리고는 아이들을 사냥하는 거죠. 그것을 ‘게임‘이라고 한 거예요. ‘사냥감‘이라는 뜻으로요. 농노의 아이들을 출발시키고 개를 풀어서 사냥을 했어요. 그러면 아이의 피가 묻은 여우 가죽을 가지고오는 거예요. 피 흘리며 죽어간 아이를 데리고 올 수는 없잖아요. 사냥을 도와주는 농노들이 자기들과 같은 계급의 아이들을 근처 땅에 묻어주는 거죠. 그들의 가슴속에는 아마도 피눈물이 그치지 않았을거예요. - P119
앞에서 우리는 살펴봤어요. 전문가, 혹은 특정 스펙으로 취업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진보적으로 보여도 자신이 속한 체제에 대해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고요. 자신이 부품으로 들어가 있는 기계가 망가지면 자신도 버려진다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MZ세대도 자본주의 체제에 상당히 보수적이에요. 스마트폰이 외장형 심장이 되어버렸기에, 그들은 스마트폰으로 작동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저항하기 힘들어요. 저항하기는커녕 그들은 자본주의적 합리성에따라 움직이죠. 스마트폰으로 동일한 상품에 대한 가격도 합리적으로 비교하며 가성비를 따지는 것이 그 훌륭한 예가 될 것 같네요. 불행히도 그들에게 그 상품이 필수품인지 사치품인지 고민할 정치·경제학적 감각이 없어요. 자신의 쾌락과 불쾌, 혹은 이익과 불리를 계산하는 벤담적 자아, 이기적인 개인주의가 스마트폰에서 마침내 완성된 셈이죠. 어쩌면 제말을 반드시 들어야 할 독자들은 지금 MZ세대 아닌가 해요. 동시에 제 이야기를 듣고 불편함을 느낄 독자들도 아마 MZ 세대일 거예요. - P123
취업이 힘든 것도, 고용이 불안한 것도 모두 기성세대가 자리를 꿰차고 있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도 명예퇴직과 정리해고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걸 보지 못해요. 제코가 석자니까요. 자본이 노동계급을 착취하는 방법은 일정 정도의 실업률을 유지하고 고용불안 상태를 유지하는 거예요. 그래야 임금을 억제하고 노동계급을 통제할 수 있으니까요. 결국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에갖는 불만을 자본주의 체제에 돌려야 해요. 기성세대라는 인식보다는 늙은 노동자라고 보아야 한다는 이야기예요. 불행히도 젊은 세대, 즉 젊은 노동자들은 자본을 공격하기보다 늙은 노동자들을 적대시해요. 늙은 노동자들이 사라지면 자신들이그 자리에 들어갈 수 있다고 착각하는 거죠. 그러니까 젊은 사람들이 나이 든 사람들을 ‘꼰대 일반‘으로 놓고 바라보게 되는 거예요. 이런 시선은 나이 든 세대의 불행이라기보다는 젊은 세대의 불행이에요. 어떤 사람들의 경험을 간접체험할 수 있다는 것은 소중한 거예요. 그 경험을 통해서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어떻게해야 할지를 그려볼 수 있잖아요. 그 배움의 기회를 날리는 거예요. 사람은 일종의 텍스트란 말이에요. 좋은 텍스트도 있고 좋지 않은 텍스트도 있어요. 모든 책이 좋은 책이 아니듯이. - P129
내가 봤을 때 지금의 우리나 일제강점기 경성 시내를 싸돌아다녔던 ‘모던뽀이‘들이나 다 똑같아요. 초기 자본주의 시대 경성 지식인들이 북적대는 미쓰코시 백화점에서 물건 사고, 자기가 마치 진열된 상품처럼 번쩍대는 양 돌아다니고, 그리고 거기 옥상에서 이상李箱, 1910~1937 처럼 ‘날자 날자, 한번만 더 날자꾸나‘ 하고 탈주하는 놈도 있는 것처럼…………. 그때하고 지금하고 겉보기에 트렌디한 것은 좀 변했지만, 신상품을 강조했던 자본주의 메커니즘은 똑같아요. 자본주의는 매번 새롭게 변하는 것으로 유지되는 유일한 체제예요. 자본주의의 전대미문성은 거기에있어요. - P130
인간적인 가치가 스타라는 시스템이나 모델 형태로만 남아 있는거예요. 모든 동네 아이들이 축구를 했던 시절이 아니라 축구를 구경하는 흐름으로 가는 거고요. 대신 자본주의는 가능성만은 줘요. 부르주아사회의 특징은 이론적으로 모든 것이 가능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거예요. 누구나 대통령이 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되는 사람은 없어요. 억울하면 소송을 걸 수 있지만, 시간이 굉장히 많이 걸리고 해결도 힘들어요. 오히려 소송의 절차 자체가이길 수 없는 게임이기도 해요. 가난해서 유명 로펌을 쓰지 못하는사람들한테는 유리천장glass ceiling에 부딪히는 거죠. 옛날에는 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몰랐는데 지금은 보이기는 해요. 그런데 막상 올라가려고 하면 못 올라가요. 이게 자본주의사회예요. 모든게 가능해 보이는데, 정작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세계일주도 할 수있고, 많은 부를 축적할 수도 있고, 요트도 살 수 있어요. 돈과 시간만 있으면. 이론적으로는 가능한데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해요. 그게 모든 문화, 정치, 생활을 지배해요. - P137
우리에게 소중한 사람은 자유인으로 키웠으면 좋겠어요. 제가 불교를 많이 다루는 이유는 별게 아니에요. 종교의 형태지만, 중요한 것은 불교는 우리 자신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는 점이죠. 불교는 신이 인간을 지배하고, 인간이 신에게 복종하는 종교가 아니거든요. 오히려 내 자신의 욕망, 소유욕, 집요한 이기주의, 이런 것들을 이겨내려는 담론적 전통이 바로 불교예요. 물론 현실적으로 불교에서 모든 신도가 자유인, 즉 부처가 되는 것을 원하기 힘들어요.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되면, 그들이 사찰을 찾아 부처상이나 스님을 경배할 일도 없고 당연히 시주도 없을 테니까요.(웃음) 바로 이것이 불교라는 종교가 가진 위대한 아이러니죠. 부처가 되어야 해요. 그리고 자유인이 되어야 해요. 그래야 우리는 이기적 욕망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어요. 바로 이 순간 우리는 남에게 복종하거나 남을 지배하려는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요. 이제 타인은 존중의대상, 그리고 아낌의 대상이 돼요. 결국 내가 부처가 되면 타인도 부처로 보이게 되죠.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옛말이 떠오르네요. -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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