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거나, 놀거나-나이 예순에도 우리들의 힘과 취향은 열일곱살 때나 마찬가지다. 고생스러웠던 옛날에는 노인들이 자포자기를하고, 은퇴하고, 종교에 의지하고, 독서를 하거나 사색하면서, 그렇다. 사색이라는 걸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는 했다!" - P104

"내 생각에 엡실론들은 자기가 엡실론이 되었다는 걸 조금도 개의치 않는 모양이에요." 그녀가 정신을 가다듬고 말했다.
"물론 개의치 않죠. 그럴 리가 있겠어요? 그들은 다른 신분이 되면어떻게 되는지 알지도 못하는데요. 우리들이라면 물론 못마땅해하겠지만요. 하지만 우리들은 다른 습성 훈련을 받았잖아요. 그뿐 아니라 우리들은 조상도 달라요."
"난 내가 엡실론이 아니어서 기뻐요." 레니나가 확신을 얻었다는듯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리고 만일 당신이 엡실론이라면 당신이 받은 조건반사 습성 훈련 때문에 자신이 베타나 알파가 아니라는 데 대해서 마찬가지로 감사하게 생각했을 거예요."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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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불교도 신들을 믿기는 한다. 다만 신들을 너무 높이 평가하지 않을 뿐이다. 그들이 믿는 신은 대문자가 아니라 소문자로 쓴다. 그 신들이 초자연적인 능력을 몇 가지 지니고 있고, 인간보다 훨씬 오래 살기는 한다. 하지만 그들 역시 삼사라, 즉 죽음과 환생의 영원한 반복 속에 묶여 있다. 불완전한 신이 되기보다는 깨달음을 얻은 인간이 되는 편이 낫다. 부처는 그런 인간에 대해 "신들조차 부러워한다"고 말했다. 이건 우리의 직관과 어긋나고, 언뜻 신성모독처럼 보이는 사고방식이다. 인간이 신들보다 더 높은 곳에 거한다니, 정말 흥미롭다. - P155

제임스의 자연스러운 측은지심이 인상적이다. 그는 남을 돕는 걸로 법석을 떨지 않고 그냥 돕는다. 불교가 없었더라도 제임스가 이런 선행을 해낼 수 있었을까? 아마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불교를 믿기 전에 제임스는 그러지 않았다. 측은지심은 지혜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것이라고 부처는 가르쳤다. 무릎이 아프면 손이 자동으로 무릎을 향해 다가간다. 모두 한 몸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모두 한 몸이라는 걸 깨닫는다면 굳이 머리로 생각하지 않아도 자신의 행위가 ‘도움‘이라는 생각조차 없이 남을 돕게 된다고 불교도들은 믿는다. 제임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지금 내 기분은 그저 이 사람들이 좀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긴장을 풀고 자기 애들을 두들겨 패는 짓을 그만뒀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난 진심으로 이 사람들이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누가 나한테 시켜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불교도가 되면 자연스레 이렇게 돼요. 이것이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의 일부니까." 불교도들은 측은지심이 너절한 감정이 아니라 피아노를 치거나 뜨개질을 하는 것 같은 기술이라고 믿는다.  - P166

 산스크리트어인 슌야타를 제대로 번역하면,
공허함이 아니라 ‘가능성을 잉태한‘이 된다고 한다.
이 편이 좀 더 매력적으로 들린다는 사실은 나도 인정할 수밖에없다. 순수한 가능성으로서의 공허함이라. 내 눈에 텅 빈 캔버스는 그냥 텅 빈 것으로 보일 뿐이지만 피카소는 거기서 수많은 가능성들을 보았다.  - P169

카를 융은 종교가 우리에게 "확신과 힘을 주어서 우리가 우주의괴물들에게 압도당하지 않게 해주는" 것이라고 보았다. 불교는 그런 괴물들을 피해 도망칠 피난처를 거의 제공해주지 않는다. 신학적으로 말해서, 기대어 울 수 있는 어깨를 전혀 제공해주지 않는다는얘기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어깨에 기대어 울 수밖에 없다. 그것이위안이 되면 얼마나 되겠는가? 종교를 뜻하는 ‘릴리전‘ (religion: 라틴어 렐리기오religio에서 유래했다)이라는 단어는 ‘묶다‘라는 뜻이다. 하지만 불교는 묶은 것을 푸는 듯한 행동을 오히려 장려한다. 불교는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 종교다. 영혼이라는 개념, 신이라는 개념,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자신이라는 개념까지도 내려놓아야 한다.  - P182

"난 수도사들이 착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요." 내가 말한다.
"우린 착하지 않습니다. 상냥할 뿐입니다." 착한 것과 상냥한 것은다르다고 그가 말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수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카트만두에서 린포체가
"지혜가 먼저고, 사랑은 나중"이라고 충고하던 것이 생각난다. 하지만 프란체스코회 수도사들은 그렇게 순서를 매길 필요가 없다. 사랑에 항상 지혜가 포함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사랑은 결코 어리석을 수 없다"고 말했다. 대개 우리는 사랑을 감정으로 생각한다. 그것도 엉엉 울어대는 감정. 하지만 그것은 사랑이라는 단어의 의미 중 하나에 불과하다. 사랑은 또한 존재의 한 방식이기도 하다. 올더스 헉슬리의 가정을 따른다면, 지식의 한 형태라고 할수도 있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만을 사랑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사랑하지 않는 것은 결코 완전히 알 수 없다." - P209

성 프란체스코는 신학자가 아니었다. 심지어 사제도 아니었다. 그는 시인이었다. 어쩌면 세계 유일의 행복한 시인이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주로 행동을 통해 자신을 표현한 시인이기도 했다.
그는 미소를 지을 줄 아는 최초의 성자였다. "수도사가 하느님의 즐거운 음유시인 말고 달리 무엇이 될 수 있겠는가." 그는 임종을 앞두고 이렇게 말했다. 그 즐거움은 오늘날 사우스브롱크스의 프란체스코회 수도사들 사이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그들은 항상 웃는다.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많이 웃는다. 나보다 많이 웃는 건 확실하다. 나는 가진 물건도 많고 ‘성취한 것도 많은데.
프란체스코에게 혹시 신학적 이론이 있었다면, 독일의 신비주의자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추상의 영성"이라고 표현했던 것이그것이다. 프란체스코는 우리가 반드시 자신을 비워야 한다고 믿었다. 소유물, 생각, 자부심 등을 모두 비워야 하느님이 우리 삶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이다. 프란체스코에게 가난은 예속이 아니라 자유를 의미했다. 우리에게 가진 것이 없으면, 지켜야 할 것도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식조차 하느님이 우리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데 방해가될 수 있다고 프란체스코는 믿었다. - P218

"그럼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는 영어에서 가장 거룩한 말이다.
폴 틸리히가 지적했듯이, 모든 종교적 질문에 대한 답에는 항상 ‘그럼에도 불구하고‘에 해당하는 요소가 들어 있다. 우리는 죄를 지었는데도 불구하고 용서받았다. 우리는 증거가 부족한데도 불구하고종교를 믿는다. 우리는 이웃들에게 결함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을 사랑한다. 좀 더 근본적인 차원으로 들어가 보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죽음이 다가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매일 아침 침대에서 일어난다(세상에 믿음에 의한 행동이라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그렇기 때문에(because of)‘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이에는 엄청난 틈이 있다. 그리고 그 틈이 바로 차갑고 이성적인 삶과 믿음의 삶을 갈라놓는다. 대개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모드로 살아간다.  - P221

동양 종교에 대해서는 "개인적이지 않다"고 쉽게 말할 수 있다. 월리엄 제임스의 말처럼 그 종교들은 소매가 아니라 도매 차원에서 움직인다. 그리스도교는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교는 확실히 소매에 빠져 있다. 그리스도교도에게 하느님은 모호하고 보편적이고 흐늘흐늘한 존재가 아니다. 윤곽이 확실치 않은 범신론적인 분위기는 여기에 없다. 그리스도교는 하느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약속한다. 이런 종교는 어디에도 없다. 수도사 한 명이 이런 말을 했다. "한 사람이다른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개인적인 관계는 없습니다. 그건 아주 심오하고, 아주 과격하죠."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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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런데 여기 트릭이 하나 있습니다. 머릿속에 있다고 모든 것들이 창의적으로 발현되는 것은 아닙니다. 머릿속에 있으되, 327번, 128번처럼 아주 정확한 셀에 새겨져 있어야 하는 겁니다. 흘러간 것들은 잡히지 않습니다. 깊이 새겨져 있는 것들만 잡을 수 있는 것이죠. 즉, 나는 간장게장을 흘려 봤던 것이고, 안도현 시인은 깊이 새겨본 겁니다. 넘어지는 아이를 일으켜 세운 게 살면서 처음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런데 계속 흘려 보다가 그때 한 번을 깊이 본 것이 아이디어가 된 것이죠. 이래서 볼 견(見)인 겁니다.
視而不見
聽而不聞
심부재언 시이불견 청이불문 식이부지기미(心不在焉 視而不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 마음에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그 맛을 모른다는 뜻으로 유교 경전 중 <대학>에 나오는 말입니다. 우리의 대부분의 행동은 시청을 하는 거죠. 간장게장을 먹을때 그저 흘려 보고 들은 겁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안도현은 간장게장을 견문을 한 거예요. 그 차이입니다. 흘려 보고 듣느냐, 깊이 보고 듣느냐의 차이. 결국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나의 경쟁력이 되어준 단어는 ‘見‘이었습니다.  - P110

존 러스킨이라는 영국의 시인은 "네가 창의적이 되고 싶다면 말로 그림을 그려라"라고 했습니다. 누군가가 "뭘 봤니?"라고 물었을 때 그저 "풀"이라고 대답하지 말고, 풀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었고, 잎이 몇 개 있었는데 길이는 어느 정도였고, 햇살은 어떻게 받고 있었으며 앞과 뒤의 색깔은 어땠고, 줄기와 잎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었는지 등 자세하고 소상히 그림 그리듯 말하라는 것이었죠. 이것은 즉, 들여다보라는 겁니다. 앙드레 지드도 지상의 양식에서 "시인의 재능은 자두를 보고도 감동할 줄 아는 재능이다"라고 했습니다. 시인의 재능은 자두를 보고도 감동하고, 간장게장을 보고도 감동하는 겁니다.  - P113

 "여행을 생활처럼하고 생활을 여행처럼 해봐"라고요. 다행히 이 이야기에는 눈을 빛내고 궁금해했어요. 그래서 설명했습니다.

"여행지에서 랜드마크만 찾아가서 보지 말고 내키면 동네 카페에서동네 사람들과 사는 이야기도 하고 벼룩시장에 가서 구경도 하면서 거기사는 사람처럼 여행하는 거야. 그게 더 멋져. 그리고 생활은 여행처럼 해. 이 도시를 네가 3일만 있다가 떠날 곳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갔다가 다신 안 돌아온다고 생각해봐. 파리가 아름다운 이유는 거기에서 3일밖에 못 머물기 때문이야. 마음의 문제야. 그러니까 생활할 때 여행처럼 해." - P125

저도 개를 길러봐서 아주 잘 압니다. 오랫동안 데리고 있다가 묻어준, 이제는 딸아이가 그린 초상화 한 장으로 기억하는 개가 있는데요. 그 개를 키울 때 퇴근해서 집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가방을 내려놓고, 안경과 모자를 벗고 침대에 눕는 거였습니다. 제가 집에 돌아오면 그 개는 반갑다고 5분 동안은 제 얼굴을 핥고 나서야 짖기를 멈췄기 때문이었는데요, 그때 보면 핥는 일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인 것처럼 최선을 다해요. 그리고 밥을 주면, 이 세상에서 밥을 처음 먹어보는 것처럼 먹죠. 잠잘 때도 보면, ‘아, 아까 주인이 왔을 때 꼬리쳤던 게 좀 아쉬운데 어쩌지?‘ 그런 고민은 추호도 없어요. 그냥 잡니다. 공놀이 할 때는 그 공이 우주예요. 하나하나를 온전하게 즐기면서 집중하죠.
밀란 쿤데라도 똑같은 걸 느꼈는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카레닌이라는 개를 이야기하면서 ‘개들은 원형의 시간을 살고 있다. 행복은 원형의 시간 속에 있다‘라는 말을 합니다.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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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사람들은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절망이 극에 달했을 때 마틴 가드너의 표현처럼 "천둥만큼 사람을 소스라치게 만드는" 갑작스러운 변화를 통해 개종이 시작된다고 상상한다. 하지만 보통 개종은 그렇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보다는 점진적인 과정이다. 카를 융은 제임스처럼 나이를 먹은 뒤에 종교를 발견한 사람들은 천둥 같은 변화를 경험할 가능성보다 명목상으로만품고 있던 믿음이 강화되는 현상을 경험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말한다.  - P118

개인적으로 나는 환생이라는 개념이 마음에 든다. 공짜로 커피를 리필해주는 것과 같다. 하지만 불교도들이 환생을 바라보는 관점은완전히 다르다. 그들에게 환생은 실패의 증거다(부처도 "가엾은 탄생"이라고 말했다). 그들에게 환생은 7학년에서 계속 유급하는 것과 같다. 또 한 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지난번 생을 제대로 살아내지못했다는 뜻이다. - P120

스스로 구루가 되는 길을 택했을 때의 문제는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조사해야 한다는 점이라고 제임스가 말한다. 다시 말해마음이 진짜로 자신을 조사해야 하기 때문에 까다로운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중요한 것은 "방석에 앉아 있을 때의 행동이 아니라 방석에서 일어난 뒤의 행동이에요"라고 제임스가 말한다.
"방석에서 일어난 뒤?"
제임스는 "방석에서 일어난 뒤"라는 말은 불교도가 명상하지 않을 때를 뜻한다고 설명한다. 명상실에 조용히 앉아 있을 때는 지각을 지닌 모든 생명체에게 측은지심을 느낄 수 있을지라도 러시아워의 꽉 막힌 도로에서 차를 몰고 있는데 누군가가 앞을 가로막고 들어올 때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나는 "방석에서 일어난 뒤"라는 말이 마음에 든다.  - P121

"애착을 끊는 것과 냉담해지는 것을 혼동하고 계시는 것 같네요."
제임스가 말한다.
"그 둘이 어떻게 다른데요?"
"냉담하다는 건 고양이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 겁니다. 애착을 끊는 건 감정에 매달리지 않는 거예요. 고양이를 얼마든지 사랑해도되지만, 그 감정에 매달리지 않는 겁니다. 그 둘은 달라요." - P123

불교의 수련에는 평범한 노동자의 생활 같은 측면이 있다. 불교는꾸준히 수련에 참가하는 것을 높이 평가한다. 매일 수련장에 나와서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거짓으로 그런 척하다 보면 정말로 그렇게 된다"가 그들의 모토다. 깨달음을 얻은 척하면서 깨달음을 그려보려고 애쓰다 보면 어느 날 정말로 깨닫게 된다는 뜻이다. 이건 마이클 조던이 3점 슛을 머리로 계속 그려보다가 어느날 휙 하고 슛에 성공하는 것과 같다. 영적으로 불꽃놀이가 벌어진 것처럼 화려하게 깨달음을 얻었다는 얘기에 불교도들은 수상쩍은 시선을 보낸다. 종교학자인 휴스턴 스미스(Huston Smith)가 선(禪)을 공부하는 서구인의 말을 인용한 적이 있는데, 나는 그 말이 불교도들의 생각을 잘 포착했다고 본다. "초과학적인 현상은 전혀 감지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침에 일어나면 세상이 견디기 힘들 만큼 아름답게 보인다." -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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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가 돌아가고, 돌아가고, 계속해서 영원히 돌아가야만 한다. 가만히 서 있으면 그것이 바로 죽음이다. 10억의 인간이 지구의 표면에서 바글바글 끓었다. 바퀴들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150년이 지나고 나자 인구는 20억이 되었다. 모든 바퀴들을 멈추어보라. 150주일이 지나면 1,000 곱하기 1,000 곱하기 1,000명의 남자들과 여자들이 굶어 죽어서 인구는 다시금 겨우 10억으로 줄어들 터였다.
바퀴들은 끊임없이 돌아가야 하지만 누가 돌보지 않으면 돌아가지 못한다. 바퀴들을 돌봐야 하는 사람들이, 축에 달린 바퀴들만큼이나 변함없이 꿋꿋한 사람들이 건전한 사람들이, 순종하는 사람들이 만족스러운 삶에서 안정을 찾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우리 아기, 우리 어머니, 오직 나만의 소유, 하나뿐인 사랑을 외치고, 내가 저지른 죄, 내가 섬기는 무서운 하나님을 부르며 신음하고,고통스러워서 비명을 지르고, 열병에 시달려 헛소리를 하고, 늙고가난한 신세를 한탄한다면, 그런 자들이 어찌 바퀴를 보살필 능력이있겠는가? 그리고 만일 그들이 바퀴를 돌보지 못한다면…. 1,000곱하기 1,000 곱하기 1,000명의 남자들과 여자들의 시체를 매장하거나 태워버리기는 힘든 일이리라.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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