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으로 미국의 이야기는 엄청난 악으로 여겨지는 부끄러운 인종분리의 역사가 어찌 보면 사소한 ‘불쾌한 감정‘에서 시작될 수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그 감정을 어떻게 다루는지에 따라 역사가 달라질 수 있다고 알려준다. 어떤 집단에 대한 혐오감을 어쩔 수 없다고 여기며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할 때 불평등은 더욱 깊어진다. 안타깝지만 법과 규범 없이 개인들의 자발적 합의를 통해 평등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불평등한 체제를 유지시키는 우리 감정의 힘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 P127

 한나 아렌트Hannah Arendi 는 아고라에서의정치적 평등이 사적 영역에서의 엄격한 위계와 지배를 전제로 했다고 말한다. 가장이 아고라에서 누리는 자유를 위해 사적 영역인가정은 희생되어야 했다.
현대사회가 지향하는 ‘모든‘ 사람의 평등이란 이 아고라에 모든사람이 입장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실현된다. 하지만 실제로 그럴까? 오늘날 누가 아고라에 입장할 자격을 가지며, 누가 사적 영역에 남도록 요구되는가? 성별, 장애, 나이,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국적, 출신 민족 등 개인의 특성들은 아고라에 입장하기 위한 기표로 작동한다. 불평등한 사회에서는 이 기표에 따라 입장 여부가 결정된다. 누군가는 그 기표 때문에 입장을 거절당한다. 그리고 사적영역에 남도록 돌려보내진다.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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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드리지 : 그렇죠. 그것은 미봉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화석기록이 불연속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그것이 불완전하기 때문이아니라 실제로 불연속적인 변화들, 다시 말해 격변들이 지질학적인 과거에 빈번히 발생했기 때문이죠. 고생물학자들이 다윈이후로 100년이 넘게 연구를 거듭했지만, 대부분의 화석기록은여전히 진화가 점진적으로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줄뿐입니다. 이런 현실을 직시하고, 저와 굴드는 1972년에 <단속평형 : 계통적 점진론에 대한 대안Punctuated equilibria: an alternative to phyletic gradualism이라는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생물 종들이 오랜정체기를 거친 후에 급격하게 진화한다는 내용이었죠.
- P174

도킨스 : 두 분께서 단속평형설을 부각하려고 짜놓은 위와 같은 문제 상황 자체가 잘못된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두 분께서는 진화의 템포에 대한 입장을《출애굽기》에 대한 첫 번째 해석인 ‘등속설same speedism‘과 ‘단속평형설‘로 이분해놓고 사람들에게 양자택일을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죠.
하지만 다윈 자신뿐만 아니라 저같이 극단적인 점진주의자도 등속설을 주장한 적이 없어요. 도대체 왜 허수아비를 세워놓고공격하시는 겁니까? 그리고 좀 전에 단속평형설의 증거를 말씀하셨는데, 오히려 그런 사례들보다는 점진론의 증거들이 더 많습니다. 예컨대 웨일스지방에서 발견된 오르도비스기의 삼엽충Ordovician trilobite 화석은 점진적 진화 양상을 보여줍니다.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이 마치 대단한 혁명가라도 된 듯이 말씀하시는데, 진상을 알고 있는 저로서는 불쾌하기 짝이 없네요. - P177

길버트 : 아뇨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이 바로 진화생물학자들의 편견입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 변이를 생산하는 발생 메커니즘은 마치 블랙박스처럼 취급되어 왔죠. 모두 근대적 종합의 영향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부터 사정이 확연히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예컨대 미국의 생물학자 에드워드 루이스가발견한 호메오박스의 경우, 초파리의 모든 세포 내에서 전사 과정의 스위치를 정교하게 작동시킴으로써 세포의 운명을 결정하는 마스터 스위치 역할을 담당하죠. 이후에 초파리와 쥐, 심지어 인간 배아의 발생 과정을 동일한 방식으로 통제하는 혹스 유전자들이 발견됩니다. 이 발견은 발생학이 진화론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음을 다시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됐죠. 혹스 유전자들에서 변이가 생기게 되면, 다른 유전자들에서 변이가 생기는 경우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발생 과정에서 엄청나게 큰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게다가 더 놀라운 사실은 초파리, 쥐, 인간의 경우처럼 계통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종들 간에도 이 혹스 유전자들이 거의 동일한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이에요. 가령 인간은 다른 동물에 비해 좀 더 많은 혹스 유전자가 있고 그 안에서 좀 더 다양한 변이를 가질 뿐입니다. 비유컨대 같은 종류의 레고들을 가지고 좀 더 복잡한 인간을 만들었을 뿐 기본 골격과 구조는 같다는 얘깁니다. 블랙박스가 풀리기 시작한 것이죠.
- P194

굴드: 하지만 문제는 건전한 상식도 종종 틀린 것으로 판명이난다는 점이겠죠. 복잡성complexity 이 증가하는 방향으로 생명이 진화해왔을 것이라는 상식적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윈 이후로도 많은 이들이 생명의 진보를 ‘복잡성의 증가‘에서 찾아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즉 생명의 진화는 복잡성이 점점 증가하는 추세trend 를 보이며, 이 복잡성의 증가라는 측면에서 생명의 진보를 이야기할 수 있다는 생각이죠. 하지만, 이건 환상에 지나지않습니다. 생명에는 그런 추세가 없거든요! 단지 변이의 폭만 증가했을 뿐입니다. - P213

굴드 : 사실 생명의 역사에서 절반 이상은 박테리아의 독무대였습니다. 화석기록으로 보존될 수 있었던 형태들만 고려한다면 박테리아는 최소 복잡성의 왼쪽 벽에 해당됩니다. 따라서 생명은 박테리아 형태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죠. 그런데 박테리아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같은 위치를 점하고 있어요. 즉 박테리아는 태초부터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으며 영원히 존재할 겁니다. 생명의 진화 역사에서 복잡성의 평균값은 증가했을 수 있지만 앞의 그래프처럼 몹시 기울어진 분포 곡선에서는 그 값이 중심 경향성을 대변해주지 못합니다.
이런 경우에는 오히려 최빈값이 더 적합한 척도가 되죠. 그값에 해당하는 박테리아는 언제나 생명의 성공을 잘 대변해주는 셈입니다. 따라서 진화 역사의 몸통에 해당하는 박테리아를 간과한 채 꼬리 끝에 붙은 한 움큼의 털에 불과한 인간만 보고 복잡성 증가를 진화의 추세로 삼는 것은 꼬리로 몸통을 흔들려는 잘못된 시도예요. 복잡성이 증가하는 방향으로 진화가 진행되었다는 믿음은 통계적인 환상일 뿐입니다. - P216

서트마리 : 아까 라우프 교수가 이리듐 양이 충돌 이론을 지지해주는 좋은 증거라고 하셨는데요, 그렇게 따지면 대규모의 화산 활동도 왜 이리튬이 특정한 지층에 많이 분포하는지를 잘 설명해줍니다. 이리듐은 외계에도 흔하지만 용암에도 적지 않게 함유되어 있다고 들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리듐 증거만으로는 화산 폭발이나 소행성 충돌 중에 어떤 것이 공룡을 멸종시킨 원인인지를 가려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현재 적지 않은 과학자들이 충돌설과 화산 폭발설을 동시에 받아들인다고 알고 있습니다. - P221

굴드 : 그래서 저는 생명의 역사와 미래를 이야기하면서 사람들에게 "지구 역사의 테이프를 되감아 다시 들어보면 어떻게 될까?"라고 묻곤 합니다. 저는 ‘인류와 같은 존재도 없었을 것이고, 전혀 다른 생물군이 나왔을 것‘이라고 답을 하죠. 생명의 역사에서 우발성은 핵심 중의 핵심입니다. 이 우발성이야말로 생명의 진보를 가로막는 가장 강력한 힘이지요. 피트니스fitness 센터에서 매일 몸을 만드는 사람이라도, 자동차 사고라는 우발적사건 앞에는 속절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굴드의 말장난이 또 한 번 작렬했다. 진화생물학에서는 적합도를 ‘피트니스fitness‘라고 한다. 굴드가 위에서 든 피트니스 센터사례는 ‘피트니스‘를 아무리 열심히 해봤자 큰 ‘사고‘ 한 번이면 끝난다는 얘긴데, 생명의 역사에서 ‘적응‘보다 더 중요하고 결정적인 것이 바로 ‘우연‘이라는 주장을 말장난으로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 P223

메이너드 스미스 : 분수령이 되는 사건들이 최소한 여덟 차례 발생했다고 주장해왔습니다. 자세한 것은 저와 서브마리 교수가 함께 쓴 《진화의 대전환The major transitions in evolution》(1995)에 나와 있는데요. 간단히 열거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자기 복제 분자 원시 세포 속의 분자군
2. 독립적 복제자→ 염색체
3. 유전자와 효소로서의 RNA → DNA와 단백질
4. 원핵세포→ 진핵세포
5. 무성생식적 클론→ 유성생식적 개체군
6. 원생생물→ 동식물과 균류
7. 고독한 개체→ 군체
8. 영장류 사회→ 인간사회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한 번 전환이 일어나면 거의 되돌릴 수없다는 사실입니다. 예컨대 다세포생물은 단세포 자손을 가질수 없으며 진핵생물은 원핵생물 자손을 낳을 수 없는 식이죠.
이런 의미에서 굴드 교수님이 아까 비유하신 술꾼 모형은 생명의 진화 모형으로 적절치 않아 보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체가 전환 문턱들을 넘기까지는 무작위적으로 비틀거릴 수 있다 하더라도 일단 그 문턱을 넘어서서 생명의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면 그 이전 과정으로 되돌아가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죠. - P226

도킨스 : 진화의 역사에서 생명의 무한한 변이 공간이 점점 채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곤란합니다. 생명의 미래는 그공간에 있습니다.
굴드 : 생명의 과거, 현재, 미래는 모두 박테리아의 세상일 뿐입니다. 진보는 착각이에요. 다양성만 늘었을 뿐입니다. - P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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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유머의 중요한 속성 중 하나는 청중의 반응에 의해 성패가 좌우된다는 점이다. 그러니 "누가 웃는가?"라는 질문만큼 "누가 웃지 않는가?"라는 질문도 중요하다. ‘웃찾사‘의 흑인 분장 사건처럼 웃지 않는 사람들이 나타났을 때 그 유머는 도태된다. 누군가를 비하하고 조롱하는 농담에 웃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런 행동이 괜찮지 않다"는 메시지를 준다. 웃자고 하는 얘기에 죽자고 달려들어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들어야 할 때가, 최소한 무표정으로 소심한 반대를 해야 할 때가 있다. - P99

모두에게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기만 하면 공정할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 차별이 된다. 법무사 시험에서 문제지. 답안지와 시험시간을 모두에게 똑같이 주면, 시각장애인에게 불리하다. 제과제빵실기시험에서 모든 참가자에게 똑같이 수어통역사를 제공하지 않으면, 청각장애인에게 불리하다. 공무원 필기시험에서 다른 수험생과 똑같이 메모 대필을 허용하지 않으면, 뇌병변장애인에게 불리하다. 모두에게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 도리어 누군가를불리하게 만드는 간접차별indirect discrimination의 예들이다.
내가 유학을 한 학교에는 비영어권에서 온 학생들에게 입학 후 일정 기간 동안 시험시간을 더 주는 정책이 있었다. 내 기억으로는 시험시간이 1.5배 더 길게 주어졌다. 로스쿨이니 당연히 언어가 중요하지만 시험에서 평가하고자 하는 것은 영어 실력이 아니라는 판단에서 마련된 정책이었다. 이 규칙 덕분에 비영어권 유학생이영어 때문에 일찌감치 시험을 포기하거나 늘 가장 낮은 성적을 받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렇듯 우리의 능력을 판단하는 많은 기준들이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유리하고 누군가에게는 불리하게 편향되어 있지 않은지 의심해봐야 한다. 취업에서 토익 점수의 요건은 어떤가? 청각장애인 외에는 문제없는 공정한 기준일까? 꼭 필요한 직무능력이 아닌데도 거의 대부분의 회사에서 높은 영어 성적을 요구함으로써, 영어 접
근성이 좋은 사회계층 혹은 특정한 학력이나 학벌을 가진 사람을 유리하게 하는 효과가 있지는 않은가? - P110

능력주의를 표방하는 사람이 더 불공정할 수 있다니 왜일까? 자신이 편향되지 않다고 여기는 착각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객관적이고 공정하다고 믿을 때 자기확신에 힘입어 더 편향되게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편견에 고삐가 풀리는 것이다. 브누아 모닌 Benoit Monin 과 데일 밀러 Dale Miller 의 실험에서도 성차별적인 발언에 문제 제기를 함으로써 자신이 성차별주의자가 아님을 보여줄 기회가 있었던 사람이 남성을 선호하는 행동을 더 거리낌없이 표출했다. 자신이 공정하다고 믿기에 더욱 편향되게 행동하는 이 현상을 카스티야와 버나드는 "능력주의의 역설"paradox of meritocracy 이라고부른다. - P112

그런데 노키즈존, 노스쿨존, 노장애인존으로 이 문제가 해결될까? ‘진상‘ 손님이 성인 남성이라면 과연 ‘성인 남성 금지‘라는 표지판을 내세울까? 이런 ‘진상‘ 손님이 인근의 대기업 직원이라면어떨까? ‘○○기업 금지‘라며 모든 사원의 입장을 거부할까? 이런상황은 쉽게 상상되지 않는다. 반면 외국인에 대해서는 ‘그냥‘ 싫다는 이유만으로도 ‘내국인 전용‘이라고 붙일 수 있다. 왜 어떤 집단은 특별히 잘못이 없어도 거부되는데, 어떤 집단은 개별적으로만 문제삼고 집단으로는 문제삼지 않을까?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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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어떤 소수자 집단은 낙인이 부착된 단어를 그들 스스로 전유 reappropriation 해버리기도 한다. 아예 적극적으로 스스로를 호명하는 단어로 사용하면서 긍정적 의미를 부여해버리는 전략이다. 대표적인 단어가 성소수자를 지칭하는 ‘퀴어queer‘ 다. 퀴어는 본래
‘기괴한‘이란 뜻으로, 성소수자를 조롱하는 용어였다. 그런데 성소수자 당사자들이 이 단어를 전유해버렸다. ‘기괴하다‘는 뜻은 그대로 가져가면서, 기괴함은 나쁜 것이 아니라 특별하고 독창적인 것이며 다양성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오히려 자랑스러운 특징이라고 선언해버렸다.
한국에서 성소수자 축제를 "퀴어문화축제"라고 부르는 것과 같이, 이제 퀴어라는 단어는 성소수자의 단어가 되었다. 퀴어라는 단어를 성소수자 당사자들이 전유함으로써 성소수자를 비하하는 용도로서의 효력은 사라져버렸다. 비성소수자들이 성소수자 집단을 마음대로 규정하고 부르던 무기를 하나 잃었다. "우리는 퀴어야.
적응해 We are queer, Get used to 와 같은 슬로건은 언어적 권력과 편견에 도전하며 의미를 전복시키는 운동이었다.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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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야마 : 저는 ‘발생 자원이 유전자나 환경이냐?‘라고 묻는 것부터가 잘못된 이분법에 근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형질은 수많은 발생 자원들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인해 산출되며 ‘유전자/환경의 이분법은 그런 상호작용자들을나누는 수많은 방식 중 하나이기 때문이지요. 흔히들 어떤 특성들이 자연선택에 의해 다음 세대로 전달된다고 알고 있지만, 엄격히 말하면 그런 특성들은 발생 과정에서 매번 재구성된다고 해야 옳습니다. 그래서 저는 《정보의 개체발생The Ontogeny ofInforrnation》이라는 책에서 진화의 단위가 유전자가 아니라 발생계developmental system라고 주장했습니다.
굴드 :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오야마 교수님의 주장을 오케스트라에 비유해 이야기해보면 어떨까요? 유전자는 발생의 지휘자라기보다는 일개 단원일 뿐이고, 오케스트라 자체는 매번 새로 생긴다?
오아먀 : 아, 그것 참 멋진 비유네요.
- P155

키처 : 저도 비유를 좀 들겠습니다. 50미터 높이의 빌딩에서 분필을떨어뜨린다고 해봅시다. 자유낙하하는 이 분필에는 실제로 중력 외에도 여러 힘들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가령 마찰력은 중력과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겠죠? 물리학자들은 여러 방향에서 여러 종류의 힘이 작용한다는 사실을 다 압니다. 하지만 분필의 낙하운동을 기술할 때는 중력만 고려하면 그만입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다른 종류의 힘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지구가 끌어당기는 힘이 강력하니까요. 오야마 교수처럼 발생계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유낙하의 사례에서 중력보다 마찰력이 더클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셈입니다. 일종의 억지죠.
도킨스 : 저도 키처 교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발생계 이론은 주류 생물학자들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이죠.
유전자와 표현형 간의 복잡한 관계는 유전자를 제외한 다른 발생 자원들의 개입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유전자 사이‘의 상호작용 때문이라고 봐야 합니다. 예컨대 우리는 이미 여러 유전자들이 상호작용하여 하나의 표현형을 산출한다는 ‘다인자 발현polygeny‘ 이나, 한 유전자가 여러 표현형의 발생에 관여한다는 ‘다면 발현pleiotropy‘과 같은 개념들을 발전시키지 않았습니까?  - P156

캐럴 : 이런 점에서 Pax6 유전자는 더욱 흥미롭습니다. 눈eyes 발생을조절하는 유전자는 척추동물에서는 Pax 이고 초파리의 경우에는 아이리스eyeless죠. 물론 곤충의 눈은 겹눈으로, 척추동물의 눈과는 구조, 구성 재료, 그리고 작동 방식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초파리의 아이리스 유전자를 생쥐의 배아에 이식시키거나 반대로 생쥐의 Pax6를 초파리의 배아에 이식시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요? 놀랍게도 두 경우에 모두 정상적인 눈이 발생합니다. 즉 생쥐의 배아에서는 생쥐의 눈이, 초파리의 배아에서는 초파리의 눈이 정상적으로 발생하지요. 심지어 사람의 Pax6 유전자를 거미의 배아에 삽입하면 그 배아는 거미의 정상적인 눈을 발생시킬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Pax6와 아이리스 유전자가 배아 발생의 꼭대기에서 미분화된 세포의 운명을 조절하는 스위치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Pax6 유전자를 발견하는 데큰 공헌을 한 스위스의 발생학자 윌리엄 게링william Gehring은 이런 유형의 유전자를 ‘마스터 조절 유전자 master control genes‘라고명명했지요. 곤충과 척추동물의 심장 발생을 동일한 방식으로관장하는 틴먼 유전자tinman gene도 그런 마스터 조절 유전자입니다.
이처럼 발생 과정에서 유전자의 역할, 즉 유전자 사이의 상호작용은 정말로 결정적입니다. 이것을 온전히 이해해야 생물학의 오래된 수수께끼인 ‘하나의 수정란에서 어떻게 복잡한 성체가 나오는가?‘를 풀겠죠. 혹스 유전자 같은 조절 유전자 regulatory gene의 발견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고무적입니다. 그러니 죄송합니다만, 발생의 오케스트라는 유전자가 지휘하는 게 맞습니다. - P158

오늘도 여전히 비유가 넘쳐났다. 하지만 유전자와 관련하여꼭 언급해야 할 비유들이 빠진 것 같아 아쉬웠다. 유전자 결정론과 그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할 때 자주 등장하는 비유가 있다. 가령 유전자 결정론은 유전자를 ‘청사진blue print‘에 빗댄다.
건물을 짓는 사람은 청사진대로만 지어야 한다. 일꾼들의 실수로 청사진과는 조금 다른 집이 지어질 수는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청사진은 건물의 모양과 특성을 결정한다. 하지만 이런 견해는 사실과 다르다. 다시 말해 유전자는 표현형을 결정하지 못한다.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표현형을 산출할 뿐이다. 유전자결정론을 거부하는 이유가, 이념적으로 나쁘기 때문이어서는안 된다.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거부해야 한다.
유전자가 발생 과정을 결정하지는 않지만 지대한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흥미로운 비유가 있다. 그것은 유전자를 청사진이 아닌 요리법 recipe 에 빗대는 방식이다. 요리사는 요리법대로 음식을 만들기는 하지만 어떤 재료를 어떤 방식으로 조합하는가에 따라서 똑같은 요리법에도 아주 다른 맛을 내는 음식을 내놓을 수 있다. 유전자를 이런 요리법에 빗대는 것은, 유전자가 기본적으로 발생 과정을 지시하기는 하지만 주변 환경과 어떻게 상호작용했느냐에 따라 최종 산물이 결정된다는 설명을 위해서다. 그러고 보니 요리법 비유는 오늘 나온 오케스트라 비유와 일맥상통 헌다. 유전자가 지휘자이긴 하지만, 단원들의 실력에 따라 연주하는 음악의 질이 달라진다고 할 수 있으니까. - P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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