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드리지 : 그렇죠. 그것은 미봉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화석기록이 불연속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그것이 불완전하기 때문이아니라 실제로 불연속적인 변화들, 다시 말해 격변들이 지질학적인 과거에 빈번히 발생했기 때문이죠. 고생물학자들이 다윈이후로 100년이 넘게 연구를 거듭했지만, 대부분의 화석기록은여전히 진화가 점진적으로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줄뿐입니다. 이런 현실을 직시하고, 저와 굴드는 1972년에 <단속평형 : 계통적 점진론에 대한 대안Punctuated equilibria: an alternative to phyletic gradualism이라는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생물 종들이 오랜정체기를 거친 후에 급격하게 진화한다는 내용이었죠.
- P174

도킨스 : 두 분께서 단속평형설을 부각하려고 짜놓은 위와 같은 문제 상황 자체가 잘못된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두 분께서는 진화의 템포에 대한 입장을《출애굽기》에 대한 첫 번째 해석인 ‘등속설same speedism‘과 ‘단속평형설‘로 이분해놓고 사람들에게 양자택일을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죠.
하지만 다윈 자신뿐만 아니라 저같이 극단적인 점진주의자도 등속설을 주장한 적이 없어요. 도대체 왜 허수아비를 세워놓고공격하시는 겁니까? 그리고 좀 전에 단속평형설의 증거를 말씀하셨는데, 오히려 그런 사례들보다는 점진론의 증거들이 더 많습니다. 예컨대 웨일스지방에서 발견된 오르도비스기의 삼엽충Ordovician trilobite 화석은 점진적 진화 양상을 보여줍니다.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이 마치 대단한 혁명가라도 된 듯이 말씀하시는데, 진상을 알고 있는 저로서는 불쾌하기 짝이 없네요. - P177

길버트 : 아뇨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이 바로 진화생물학자들의 편견입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 변이를 생산하는 발생 메커니즘은 마치 블랙박스처럼 취급되어 왔죠. 모두 근대적 종합의 영향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부터 사정이 확연히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예컨대 미국의 생물학자 에드워드 루이스가발견한 호메오박스의 경우, 초파리의 모든 세포 내에서 전사 과정의 스위치를 정교하게 작동시킴으로써 세포의 운명을 결정하는 마스터 스위치 역할을 담당하죠. 이후에 초파리와 쥐, 심지어 인간 배아의 발생 과정을 동일한 방식으로 통제하는 혹스 유전자들이 발견됩니다. 이 발견은 발생학이 진화론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음을 다시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됐죠. 혹스 유전자들에서 변이가 생기게 되면, 다른 유전자들에서 변이가 생기는 경우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발생 과정에서 엄청나게 큰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게다가 더 놀라운 사실은 초파리, 쥐, 인간의 경우처럼 계통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종들 간에도 이 혹스 유전자들이 거의 동일한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이에요. 가령 인간은 다른 동물에 비해 좀 더 많은 혹스 유전자가 있고 그 안에서 좀 더 다양한 변이를 가질 뿐입니다. 비유컨대 같은 종류의 레고들을 가지고 좀 더 복잡한 인간을 만들었을 뿐 기본 골격과 구조는 같다는 얘깁니다. 블랙박스가 풀리기 시작한 것이죠.
- P194

굴드: 하지만 문제는 건전한 상식도 종종 틀린 것으로 판명이난다는 점이겠죠. 복잡성complexity 이 증가하는 방향으로 생명이 진화해왔을 것이라는 상식적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윈 이후로도 많은 이들이 생명의 진보를 ‘복잡성의 증가‘에서 찾아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즉 생명의 진화는 복잡성이 점점 증가하는 추세trend 를 보이며, 이 복잡성의 증가라는 측면에서 생명의 진보를 이야기할 수 있다는 생각이죠. 하지만, 이건 환상에 지나지않습니다. 생명에는 그런 추세가 없거든요! 단지 변이의 폭만 증가했을 뿐입니다. - P213

굴드 : 사실 생명의 역사에서 절반 이상은 박테리아의 독무대였습니다. 화석기록으로 보존될 수 있었던 형태들만 고려한다면 박테리아는 최소 복잡성의 왼쪽 벽에 해당됩니다. 따라서 생명은 박테리아 형태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죠. 그런데 박테리아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같은 위치를 점하고 있어요. 즉 박테리아는 태초부터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으며 영원히 존재할 겁니다. 생명의 진화 역사에서 복잡성의 평균값은 증가했을 수 있지만 앞의 그래프처럼 몹시 기울어진 분포 곡선에서는 그 값이 중심 경향성을 대변해주지 못합니다.
이런 경우에는 오히려 최빈값이 더 적합한 척도가 되죠. 그값에 해당하는 박테리아는 언제나 생명의 성공을 잘 대변해주는 셈입니다. 따라서 진화 역사의 몸통에 해당하는 박테리아를 간과한 채 꼬리 끝에 붙은 한 움큼의 털에 불과한 인간만 보고 복잡성 증가를 진화의 추세로 삼는 것은 꼬리로 몸통을 흔들려는 잘못된 시도예요. 복잡성이 증가하는 방향으로 진화가 진행되었다는 믿음은 통계적인 환상일 뿐입니다. - P216

서트마리 : 아까 라우프 교수가 이리듐 양이 충돌 이론을 지지해주는 좋은 증거라고 하셨는데요, 그렇게 따지면 대규모의 화산 활동도 왜 이리튬이 특정한 지층에 많이 분포하는지를 잘 설명해줍니다. 이리듐은 외계에도 흔하지만 용암에도 적지 않게 함유되어 있다고 들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리듐 증거만으로는 화산 폭발이나 소행성 충돌 중에 어떤 것이 공룡을 멸종시킨 원인인지를 가려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현재 적지 않은 과학자들이 충돌설과 화산 폭발설을 동시에 받아들인다고 알고 있습니다. - P221

굴드 : 그래서 저는 생명의 역사와 미래를 이야기하면서 사람들에게 "지구 역사의 테이프를 되감아 다시 들어보면 어떻게 될까?"라고 묻곤 합니다. 저는 ‘인류와 같은 존재도 없었을 것이고, 전혀 다른 생물군이 나왔을 것‘이라고 답을 하죠. 생명의 역사에서 우발성은 핵심 중의 핵심입니다. 이 우발성이야말로 생명의 진보를 가로막는 가장 강력한 힘이지요. 피트니스fitness 센터에서 매일 몸을 만드는 사람이라도, 자동차 사고라는 우발적사건 앞에는 속절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굴드의 말장난이 또 한 번 작렬했다. 진화생물학에서는 적합도를 ‘피트니스fitness‘라고 한다. 굴드가 위에서 든 피트니스 센터사례는 ‘피트니스‘를 아무리 열심히 해봤자 큰 ‘사고‘ 한 번이면 끝난다는 얘긴데, 생명의 역사에서 ‘적응‘보다 더 중요하고 결정적인 것이 바로 ‘우연‘이라는 주장을 말장난으로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 P223

메이너드 스미스 : 분수령이 되는 사건들이 최소한 여덟 차례 발생했다고 주장해왔습니다. 자세한 것은 저와 서브마리 교수가 함께 쓴 《진화의 대전환The major transitions in evolution》(1995)에 나와 있는데요. 간단히 열거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자기 복제 분자 원시 세포 속의 분자군
2. 독립적 복제자→ 염색체
3. 유전자와 효소로서의 RNA → DNA와 단백질
4. 원핵세포→ 진핵세포
5. 무성생식적 클론→ 유성생식적 개체군
6. 원생생물→ 동식물과 균류
7. 고독한 개체→ 군체
8. 영장류 사회→ 인간사회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한 번 전환이 일어나면 거의 되돌릴 수없다는 사실입니다. 예컨대 다세포생물은 단세포 자손을 가질수 없으며 진핵생물은 원핵생물 자손을 낳을 수 없는 식이죠.
이런 의미에서 굴드 교수님이 아까 비유하신 술꾼 모형은 생명의 진화 모형으로 적절치 않아 보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체가 전환 문턱들을 넘기까지는 무작위적으로 비틀거릴 수 있다 하더라도 일단 그 문턱을 넘어서서 생명의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면 그 이전 과정으로 되돌아가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죠. - P226

도킨스 : 진화의 역사에서 생명의 무한한 변이 공간이 점점 채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곤란합니다. 생명의 미래는 그공간에 있습니다.
굴드 : 생명의 과거, 현재, 미래는 모두 박테리아의 세상일 뿐입니다. 진보는 착각이에요. 다양성만 늘었을 뿐입니다. - P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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