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나는 그를 재조립하는 일을 거의 다 끝냈다.
닉은 시간이 날 때마다 코코아버터로 내 배를 문지르고, 달려 나가 피클을 사 오면서, 좋은 예비 아빠가 하는 온갖 일을 하면서 몇 달을 보냈다. 나를 애지중지하면서, 그는 나를 무조건적으로, 나의 모든 조건에도불구하고 나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가족이 될 것이다. 나는 마침내 우리가 행복으로 가는 길 위에 있다고생각한다. 마침내 나는 그 길을 찾아냈다.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밝은 핵가족이 되기 하루 전날을 보내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닉은 아직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오늘 아침, 그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내게 더 해줄 수 있는 일이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말했다. "맙소사, 닉, 당신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는 거야?"
그는 이렇게 말해야 했다.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어. 당신을 사랑해.‘
하지만 그는 말했다. "당신이 불쌍해서."
"왜?"
"왜나하면 당신은 매일 아침 눈을 뜨고 당신이 되어야 하니까."

나는 정말로, 진정으로 그가 그 말을 하지 않았기를 바란다. 나는 계속해서 그 말을 생각하고 있다. 멈출 수가 없다.

다른 덧붙일 말은 없다. 단지 마지막 말을 하는 사람이 나라는 것을 확실히 하고 싶을 뿐이다. 나는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 P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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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철학자 키케로가 말했듯이 우리가 노화 탓으로 돌리는 많은 결점은 사실 인성의 문제다. 노화는 새로운 성격 특성을 만들어 낸다기보다는 기존의 특성을 더욱 증폭한다. 우리는 나이 들수록 더 강렬한 형태의 자기 자신이 된다. 이러한 변화는 보통 긍정적이지 않다. 돈 쓰는 데 신중한 청년은 늘 투덜대는 늙은 수전노가 된다. 감탄할 만큼 의지가 강한 젊은 여성은 짜증날 만큼 고집 센 할머니가 된다. 이런 성격의 강화는 늘 부정적인 쪽으로만 흘러가야 하는 걸까? 나이 들면서 그 궤도의 방향을 꺾을 수는 없는 걸까? 더 나은 모습의 나이 든 내가 될 수는 없을까?
- P439

"나이 드는 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어? 너라면 뭐라고 조언
"흐름에 맡겨야겠지. 뇌파에 혼란을 주지 말고."
"비유적으로 그렇다는 거예요, 할아버지. 비유적으로, 뇌에서
‘이봐, 우린 늙었어. 진정하자고‘라고 말하면 진정해야 하는 거야."
소냐의 말은 매우 스토아적이다. 스토아학파의 믿음처럼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것, 전자는 바꾸고 후자는 받아들이는 것이 지혜의 핵심이라면, 노년은 스토아철학의 지혜를 연습할 수 있는 완벽한 훈련장이다. 나이가 들면 통제에서 수용의 방향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한다. 수용은 체념과 다르다. 체념은 수용을 가장한 저항이다.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척하는 것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척하는 것과 같다.
‘수용‘은 보부아르의 작업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아니다.
우리의 비버는 무언가를 선택하고 무언가가 되고 열심히 기투하는 데 너무 바빠서 그저 존재할 시간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기투에는 여러 형태가 있다. 비버 같은 근면성실함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다. 받아들이는 법(체념이 아닌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진정한 수용)을 배우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기투이며, 어쩌면 가장 중요한 기투일지 모른다.
- P456

아니다, 미셸이 꾸짖는다. 내 말이 아니다. 너의 말이다. 개인적이지 않은 통찰은 존재하지 않는다. 빌려온 진실은 빌려온 속옷만큼이나 잘 맞지 않으며 그만큼 기분 나쁜 것이다. 진심으로 무언가를 알거나, 아예 모르거나 둘 중 하나다. 삶을 표준화된 시험처럼 살지 말고, 간디처럼 하나의 거대한 실험으로 여겨라. 이렇게 몸소 체험한 개인적 철학의 목표는 추상적 지식이 아니라 개인적 진실이다. 어떠한 사실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아는 것. 여기에는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다. 나는 사랑이 인간의 중요한 감정이며 여러 건강상의 이점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 나는 내가 딸아이를 사랑한다는 걸 안다.
몽테뉴 철학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자신을 믿을 것, 자신의 경험을 믿을 것, 자신의 의심도 믿을 것. 경험과 의심의 도움을 받아인생을 헤쳐 나가고 죽음의 문턱을 향해 다가갈 것. 타인과 스스로에게 놀라워하는 능력을 기를 것. 스스로를 간질일 것. 가능성의 가능성에 마음을 활짝 열 것. 그리고 몽테뉴는 동포인 시몬 베유와 손을 잡고 이렇게 말한다. 제발, 주의 좀 기울여.
- P501

걷는 동안 대답이 떠오른다. 짧은 두 단어다. 낯설지만 익숙하고, 터무니 없지만 타당하고,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말. 다카포.
처음부터 다시 한번. - P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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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고통을 좋은 삶의 구성요소로, 배움의 수단으로 여겼다. "오로지 고통만이 지식으로 이어진다." 니체는 말했다. 고통은 청하지 않았지만 반드시 답해야하는 부름이다. 우리는 자신을 마비시킴으로써 그 부름에 답하는가, 아니면 쇼펜하우어의 제안처럼 예술과 금욕으로 숨어드는가? 아니면 우리는 이 세상에 더욱 깊이, 심지어 맹목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고통에 답하는가? 니체는 이 마지막 선택지를 와인과 연극과 삶을 사랑한 그리스 신의 이름을 따서 디오니소스적 방식이라 칭했다. 니체는 말했다. "나는 반드시 필요한 것을 아름다운것으로 보는 법을 앞으로 더욱더 배우고 싶다. 그렇게 나는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이 될 것이다." 고통에도 불구하고 인생을 사랑하지 말라고, 바로 그 고통으로 말미암아 인생을 사랑하라고, 니체는 말한다.
- P385

 만약 우리의 삶이 (아니,온 우주가) 실제로 되풀이된다면 우리는 무엇을 통제할 수 있는가? 니체는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행동이 아니라 태도라고 생각했다. 니체 철학의 핵심에는 "완벽한 불확실성의 세계에서 자신의 방향성을 바꾸려는 시도"가 있었다. 보통 우리는 불확실성에서 도망쳐 확실성을 향해 달려간다. 니체는 그것이 불변의 사실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가치이며, 우리가 가치를 부여하는 모든 것은 재평가가 가능하다.
- P387

스토아철학은 미래의 고난을 상상하는 것은 미래의 고난에 대해 걱정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걱정은 모호하고 애매한것이다. 하지만 고난을 예상하는 것은 구체적인 행위이며, 더 구체적일수록 좋다. 나는 재정난을 겪는 모습을 상상한다‘ 보다. 집과 차, 그동안 모은 가방 전부를 잃고 다시 어머니 집에서 살게 되는 모습을 상상한다‘가 더 좋다. 에픽테토스는 큰 도움이 되는 또 다른 제안을 한다. 네가 말하고, 듣고, 걷고, 숨쉬고, 삼키는 능력을 잃었다고 상상해보라.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함으로써 우리는 미래의 고난이 가진 영향력을 빼앗고 지금 가진 것에 더욱 감사할 수 있다. 예상한 대로 대재앙이 닥쳤을 때 스토아주의자들은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열리거나 조타수가 맞바람을 만날 때처럼 태연하다고, 에픽테토스는 말한다. 예상된 고난은 힘을 잃는다. 구체적으로 표현된 두려움은 그 크기가 줄어든다. 최소한 스토아철학은 그렇다고 말한다.
- P417

스토아철학의 핵심에는 깊은 숙명론이 있다. 우주는 내가 쓰지않은 대본에 따라 움직인다. 언젠가는 직접 연출을 하고 싶겠지만, 포기하는 게 좋다. 우리는 연기자다. 자기 역할을 받아들여야한다. 에픽테토스는 "내가 나이팅게일이라면 나는 나이팅게일의역할을 연기할 것이다. 내가 백조라면 백조의 역할을 연기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다른 역할을 간절히 원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으며 우마차에 끌려가는 개처럼 불필요한 고통을 겪게 될 뿐이다. 스토아철학은
"지금 가진 것을 욕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 P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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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파산은 나의 정신에 완벽하게 부응했다. 수년간 나는 지루해하고 있었다. 징징거리고 산만한 아이의 지루함이 아닌 (내게 이런 모습이 없었다는건 아니지만, 밀도 높고 압도적인 무기력함, 새롭게 발견될 것은 다시는 없을 것처럼 보였다. 우리 사회는 완전히, 터무니없이 파생적이었다 (‘파생적‘이라는 말로 비평하는 것 역시 파생적이지만), 우리는 최초로 무언가를 보게되는 일이 결코 없는 최초의 인간이다. 우리는 세계의 경이로움을 흐리멍덩하고 무덤덤한 눈으로 바라본다. 모나리자, 피라미드,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사냥하는 정글의 동물, 붕괴하는 태곳적부터의 빙산, 분출하는화산, 나는 놀라운 것을 직접 볼 때면 늘 곧바로 어떤 영화나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떠올렸다. 당신도 형편없는 광고의 그 끔찍하고 싫증나는 노랫말을 알 것이다 봐아아아았어. 말 그대로 전부 다 봤다. 그리고 최악은,
내 뇌를 폭파시켜버리고 싶게 만드는 것은 언제나 간접 경험이 더 낫다는사실이다. 이미지는 더 선명하고 풍경은 더 멋지다. 카메라 앵글과 사운드트랙은 현실이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방식으로 나의 감성을 조종한다. 이제는 우리가 실제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지조차 모르겠다. TV와 영화와 인터넷과 함께 자란 우리는 대부분이 비슷하다. 우리는 배신을 당했을 때 뭐라고 말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사랑하는 이가 죽었을 때 뭐라고 말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색마나 건방진 놈이나 바보처럼 굴고 싶을 때 해야 할 말을 알고 있다. 우리는 모두 또깥은 낡은 대본을 이용하며 살고 있다. -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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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안 일본은 모든 예술을 높이 쳤지만 그중에서도 시가 가장 으뜸이었다. 인생의 모든 중요한 사건에는 늘 시가 있었다. 출생과 연애, 심지어 죽음까지도, 헤이안 시대의 존경받는 신사는 작별의 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훌륭한 시를 쓰는 사람은 사랑하는 이의 마음을 얻거나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시를 못 쓰는 사람은 무자비하게 조롱당했다.
아름다운 시를 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포장도 아름답게 해야 했다. 당신이 970년의 교토에 살고 있다고, 그리고 누군가에게 편지를 보내고 싶다고 상상해보자. 어떻게 하겠는가?
먼저 종이를 골라야 한다. 아무 종이나 골라선 안 된다. "전하고자 하는 정서뿐만 아니라 계절, 심지어 그날의 날씨와 잘 어울리는 적절한 두께와 크기, 디자인, 색깔" 의 종이여야 한다. 그다음에는 다양한 구성과 붓질을 실험하며 초안을 여러 번 써본다.
내용과 글씨가 마음에 든다면 널리 쓰이는 여러 방법 중 하나를 이용해 종이를 접고, 그에 어울리는 나뭇가지나 꽃잎을 동봉한다. 마지막으로 "똑똑하고 잘생긴 전달자"를 불러 올바른 주소로 보내고, 답장을 기다린다. 감사가 돌아올지 조롱이 돌아올지는 알 수 없다. 최악의 경우 무시당할 수도 있다. 읽씹은 21세기의 발명품이 아니다.
- P345

쇼나곤의 철학에 함축된 의미는 다음과 같다. 우리의 정체성은 자기 주위에 무엇을 두기로 선택하느냐에 크게 좌우된다. 주변에 무엇을 두느냐는 선택이다. 철학은 우리가 내리는 눈에 보이지않는 선택을 겉으로 드러내 보인다. 어떤 것이 자신의 선택임을깨닫는 것은 더 나은 선택으로 향하는 첫걸음이다. 독일 작가 헤르만 헤세가 말했듯, "일하는 동안 곁에 두기 위해 처음으로 작은꽃을 꺾은 사람은 인생의 기쁨에 한 발짝 다가간 것이다." - P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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