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철학자 키케로가 말했듯이 우리가 노화 탓으로 돌리는 많은 결점은 사실 인성의 문제다. 노화는 새로운 성격 특성을 만들어 낸다기보다는 기존의 특성을 더욱 증폭한다. 우리는 나이 들수록 더 강렬한 형태의 자기 자신이 된다. 이러한 변화는 보통 긍정적이지 않다. 돈 쓰는 데 신중한 청년은 늘 투덜대는 늙은 수전노가 된다. 감탄할 만큼 의지가 강한 젊은 여성은 짜증날 만큼 고집 센 할머니가 된다. 이런 성격의 강화는 늘 부정적인 쪽으로만 흘러가야 하는 걸까? 나이 들면서 그 궤도의 방향을 꺾을 수는 없는 걸까? 더 나은 모습의 나이 든 내가 될 수는 없을까? - P439
"나이 드는 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어? 너라면 뭐라고 조언 "흐름에 맡겨야겠지. 뇌파에 혼란을 주지 말고." "비유적으로 그렇다는 거예요, 할아버지. 비유적으로, 뇌에서 ‘이봐, 우린 늙었어. 진정하자고‘라고 말하면 진정해야 하는 거야." 소냐의 말은 매우 스토아적이다. 스토아학파의 믿음처럼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것, 전자는 바꾸고 후자는 받아들이는 것이 지혜의 핵심이라면, 노년은 스토아철학의 지혜를 연습할 수 있는 완벽한 훈련장이다. 나이가 들면 통제에서 수용의 방향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한다. 수용은 체념과 다르다. 체념은 수용을 가장한 저항이다.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척하는 것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척하는 것과 같다. ‘수용‘은 보부아르의 작업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아니다. 우리의 비버는 무언가를 선택하고 무언가가 되고 열심히 기투하는 데 너무 바빠서 그저 존재할 시간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기투에는 여러 형태가 있다. 비버 같은 근면성실함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다. 받아들이는 법(체념이 아닌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진정한 수용)을 배우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기투이며, 어쩌면 가장 중요한 기투일지 모른다. - P456
아니다, 미셸이 꾸짖는다. 내 말이 아니다. 너의 말이다. 개인적이지 않은 통찰은 존재하지 않는다. 빌려온 진실은 빌려온 속옷만큼이나 잘 맞지 않으며 그만큼 기분 나쁜 것이다. 진심으로 무언가를 알거나, 아예 모르거나 둘 중 하나다. 삶을 표준화된 시험처럼 살지 말고, 간디처럼 하나의 거대한 실험으로 여겨라. 이렇게 몸소 체험한 개인적 철학의 목표는 추상적 지식이 아니라 개인적 진실이다. 어떠한 사실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아는 것. 여기에는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다. 나는 사랑이 인간의 중요한 감정이며 여러 건강상의 이점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 나는 내가 딸아이를 사랑한다는 걸 안다. 몽테뉴 철학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자신을 믿을 것, 자신의 경험을 믿을 것, 자신의 의심도 믿을 것. 경험과 의심의 도움을 받아인생을 헤쳐 나가고 죽음의 문턱을 향해 다가갈 것. 타인과 스스로에게 놀라워하는 능력을 기를 것. 스스로를 간질일 것. 가능성의 가능성에 마음을 활짝 열 것. 그리고 몽테뉴는 동포인 시몬 베유와 손을 잡고 이렇게 말한다. 제발, 주의 좀 기울여. - P501
걷는 동안 대답이 떠오른다. 짧은 두 단어다. 낯설지만 익숙하고, 터무니 없지만 타당하고,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말. 다카포. 처음부터 다시 한번. - P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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