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이커하이츠 시에 사는 모든 이는 그해 여름 리처드슨 씨네 아이들 중 막내인 이저벨이 어쩌다 정신이 나가 집을 태워버렸는지에 대해 수군거렸다. 봄 내내 어린 미라벨 매컬러 혹은 메이 링 초우 - 어느 편이느냐에 따라 이름을 달리 불렀다 ㅡ에 관한 소문이 돌았다. 그리고 이제 드디어 새롭고 충격적인 토론거리가 생겼다. 5월 그날, 토요일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각 하이넨스 슈퍼마켓에서 식료품 카트를 밀며 장을 보던 사람들은 소방차 여러 대가 요란하게 사이렌을 울리며 쏜살같이 오리 연못 쪽으로 달려가는 소리를 들었다. 열두시 십오 분쯤 되자 파크랜드 드라이브에는 소방차 네 대가 아무렇게나 일렬로 주차되어 있었고 리처드슨 씨네 집의 침실 여섯 개는 모두 불타고 있었다.  - P5

부부와 딸이 안식 휴가에서 돌아왔을 때 펄은 햇볕에 그을린 피부에 말랐지만 탄탄한 몸매를 가진 이제 옷장 속에 있는 드레스를 입기에는 훌쩍 커버린 그 여자애를 쳐다볼 수 없었다. 다음 팔 개월 동안 머물게 될 라파예트로 가는 내내 펄은 엉엉 울었다. 수집품에서 훔쳐온, 앞발을 들고 펄쩍 뛰어오른 모습의 팔로미노(갈기와 꼬리는 흰색이고 몸은 크림색이나 황금색인 말) 조각상도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했다. 초조하게 기다려봐도 물건이 없어졌다는 항의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가진 게 너무 많아서 무엇이 없어졌는지도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의 물건을 훔치는 것보다 더 싱거운 일이 어디 있을까?  - P32

펄은 무디를 거의 노려보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빤히 바라보았다. 무디는 펄의 눈동자를 보았다. 적갈색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짙은 청록색이었다. 그 순간 갑자기 무디는 그날 아침에 벌어진 일을 명확히 이해하게 되었다. 무디의 인생은 그날 아침 이전과 이후로 나뉘었으며 무디는 늘 두 인생을 비교할 것이었다.
무디가 물었다.
"내일 뭐 해?"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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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케인 철이 곧 시작되겠군. 나는 생각했다. 나무들이 뿌리를 깊게 박고 태풍과 싸울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러나 무슨 소용이다. 태풍이 오면 그들은 다 휩쓸려 날아가버릴 것을, 그러나 대왕야자들은 굳건히 서서 버틴다고 한다. (앙투아네트가 말해 주었지.) 가지들을 모두 떨어뜨리고, 키큰 갈색의 기둥처럼 당당히 서 있다고 한다. 괜히 대왕야자라고 불리겠어? 대나무들은 쉬운 방법을 택한다. 그들은 땅으로 몸을 굽히고 끽끽 소리를 내며, 살려 달라고 신음하고 울면서 몸을 납작 엎드리고 눕는다. 오만방자한 바람은 이런 비천한것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간다.(살게 내버려 둬) 으르렁거리고, 소리치며, 웃어대면서, 거친 바람은 지나가 버린다.
그러나 그런 얘기는 다 몇 달 후의 일이다. 지금은 영국의 여름 날씨처럼 너무나 시원하고, 또 회색빛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복수와 허리케인을 연관지어 생각한다. 온갖 단어들이 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간다. 연민이라는 단어가 그중 하나다. 그 단어가 내 마음을 편치 못하게 한다. 돌풍 속을 걸어가는 발가숭이 갓난아이와 같은 연민.
- P231

나는 산들도 언덕들도 강들도 비도 증오하고, 그 색깔이 무엇이든 간에, 황혼도 증오한다. 나는 이곳의 아름다움도 마력도 그리고 내가 결코 알아낼 수 없는 비밀도 증오한다. 나는 이곳이 보여 주는 아름다움 속에 내재한 무관심도 잔인성도 증오한다. 무엇보다도, 나는 이 여자를 증오한다. 왜냐하면 이 여자는 그 마력과 아름다움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나를 목마른 상태로 남겨 놓았다. 내 온 인생은, 발견하기도 전에 이미 상실한 것을 그리워하고 목말라하는 그런 인생이 될것이다.  - P242

 그레이스에게는 이 말을 하지 않을 거다. 그녀의 이름이 그레이스여서는 안 돼, 이름이라는 건 중요하니까. 그 남자가 나를 앙투아네트라고 부르지 않자, 나는 앙투아네트가 창문을 통해 슬그머니 날아가 버리는 것을 보았어. 앙투아네트의 향기도, 옷도, 거울도 모두 사라져버리는 것을 나는 보았거든.
- P248

그레이스가 비웃었다.
바닥에 흐트러진 내 빨간 드레스를 보고 있자니 불이 바닥 여기저기로 퍼져 나가는 듯 느껴졌다. 그 모습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화염은 내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를 가르쳐주려는듯했다. 내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 나는 곧 기억하게 될 거야. 나는 생각했다.
- P257

 나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기다렸다. 그녀가 코를 고는 소리를 들은 후,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열쇠를 집어 들고 잠긴문을 열었다. 그리고 촛불을 들고 복도로 나왔다. 이제 드디어 나는 내가 왜 여기에 끌려왔는지를 알게 되었고,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도 알았다. 바람이 어디서 불어왔는지 촛불이 깜박거렸고, 나는 촛불이 꺼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손으로 바람을 막아주자 촛불은 다시 살아나 타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가는 이 캄캄한 길을 밝혀 주기 위하여.
- P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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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들은 병원체에 국한하지 않고 일반적으로 세포에 대해 촉촉하고 말랑말랑하며 대략 형태는 있으나 미묘하게 제각각인, 연약한 원형의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바이러스는 달랐다. 그것은 마치 M. C. 에셔(Maurits Cornelius Escher, 1898~1972,
네덜란드의 판화가 ― 옮긴이)의 작품처럼 훌륭한 기하학적 아름다움을 지녔다. 어떤 것은 정이십면체 같은 다각형이기도했고, 어떤 것은 누에고치처럼 개체가 나선 모양으로 켜켜이쌓인 구조체, 또 어떤 것은 무인 화성 탐사선 같은 기계 모양이었다. 그리고 같은 종류의 바이러스는 반드시 똑같은 모양이었다. 거기에는 크기나 개성 같은 차이가 존재하지 않았다.
왜 그럴까? 그것은 바이러스가 생물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물질에 가까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 P33

물론 에이버리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실험데이터가 나타내고 있는 사실은 유전자가 단백질이라는 예측과는 다른 것이었다. 에이버리도 S형 균에서 여러 가지 물질을 추출하여 어느 것이 R형 균을 S형 균으로 변화시키는지 면밀히 검토했다. 그 결과, 남은 후보는 S형 균체에 포함되어있던 산성 물질, 즉 DNA 였다.
핵산은 고분자이기는 하지만 단 네 개의 요소만으로 구성되어 있는, 어떤 의미에서는 단순한 물질이다. 그러므로 거기에 복잡한 정보가 담겨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는, 0과 1이라는 두 숫자만으로도 복잡한 정보를 기술할 수 있고 오히려 그 편이 컴퓨터를 고속으로 움직이기에 좋은 조건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생물학자 중에 정보의 코드(암호)화에 대해 이런 생각을 한 이는 없었다. 에이버리도 자신의 실험 결과에 반신반의했다. 몇번이고 실험을 반복하면서 다양한 각도에서 재검토했지만 결과는 단 한 가지 사실만을 말하고 있었다.
유전자의 본체는 DNA다.
- P43

지금까지는 잘 듣던 항생물질이 약효가 없어졌다는 것은 그 항생물질이 무력화되었다는 얘기다. 내성균은 항생물질을 분해하거나 다른 무해한 물질로 변화시켜 버린다. 즉 새로운 능력(=형질)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런 능력은 다른 세균 사이에서도 급속히 확대된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세균들끼리 DNA를 주고받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내성균에서 비내성균으로 DNA가 전달되면, 즉 유전자가 수평으로 이동하면 비내성균은 내성균이 된다. 이는 에이버리의 실험, 즉 병원형인 S형 세균의 DNA가 비병원형인 R형세균에 주입되면 R형이 S형의 형질을 획득하여 병원형이 되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에이버리의 실험은 자연계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현상인 것이다.
- P55

그러나 지급 중요한 것은 나선 구조 그 자체보다 DNA가 쌍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생물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질까? 답은 다름아닌 "정보의 안정화를 담보한다." 이다.
DNA가 상보적으로 대칭 구조를 취하고 있으면, 한쪽 문자열이 정해지면서 다른 쪽도 의무적으로 정해지게 된다. 혹은두 가닥의 DNA 사슬 가운데 어느 한쪽을 잃어버려도 다른한쪽을 모체 삼아 쉽게 복구가 가능하다.
DNA는 자외선이나 산화적 스트레스를 받으면 배열이 깨지는 경우가 있다. ATAA라는 부분 배열이 없어졌다 해도 상보적인 다른 한쪽의 사슬에 TATT라는 구조가 보존되어 있다면 자동적으로 구멍을 메울 수 있다. 사실 DNA는 일상적으로 손상되고 있으며 일상적으로 복구되고 있다. 이렇게 정보를 보유하고 유지하기 위해 생명은 일부러 DNA를 쌍으로 갖고 있는 것이다. 그 중 한 가닥은 예를 들면 this is a pen 이라는 정보가 그대로 배열된 사슬, 즉 센스(의미)사슬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한 가닥은 이 센스 사슬의 보디가드(혹은 반사경)사슬, 즉 안티센스사슬이다.
-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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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나는 다마 강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다. 종종 냇가로 산책을 나가는데, 하천 수면을 훑으며 불어오는 기분 좋은 바람을 느끼며 햇빛을 등지고 물속을 바라보면 거기에는 참으로 많은 생명체들이 살아 숨쉬고 있다. 수면 위로 작고 세모난 돌 같은 것이 나와있어 살펴보면 거북이의 코일 때도 있고, 물살을 따라 하늘거리는 실처럼 보였던 것이 치어 떼인경우도 있으며, 물풀에 엉켜있던 먼지 덩어리가 자세히 보면 잠자리의 유충일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나는 문득 대학에 갓 입학했을 때가 떠오른다.
생물학 시간에 교수님이 던졌던 질문, 사람들은 생물과 무생물을 구분 짓곤 하는데, 생물의 어떤 측면을 보고 그런 구분을 하는 것인가? 애초에 생물이란 무엇인가? 여러분은 정의를 내릴 수 있는가...
- P4

나도 처음에는 실망했다. 그리고 물론 지금도 절반은 그런상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실은 바로 이 부분에 생명의 본질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유전자 녹아웃 기술로 부품 한 종류, 한 조각을 완전히 제거하더라도 어떤 방법으로든 그 결함이 채워져 보완 작용이 일어나고 전체가 조화를 이루면 기능 부전 현상은 일어나지않는다. 생명에는 부품을 끼위 맞춰 만드는 조립식 장난감 같은 아날로지로는 설명할 수 없는 중요한 특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뭔가 다른 다이너미즘이 존재한다. 우리가 이세상에서 생물과 무생물을 식별할 수 있는 것은 이 다이너미즘을 느끼고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 ‘동(動)적인 것‘ 은 도대체 무엇일까?
- P8

어떤 미생물이 ‘원인‘ 이 되어 특정 질병이 발병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 관련성을 증명하기 위해 또 어떤 요건이 필요할까? 관찰은 자연과학에서 가장 중요한 수단이지만 아무리 환자를 관찰해도 연구에 진전이 없는경우가 있다. 관찰함으로써 상관 관계를 발견할 수는 있어도 인과관계를 입증할 수는 없다.
인과관계는 ‘개입(介人)‘ 실험을 통해 비로소 밝혀진다. 개입 실험이란 말 그대로 원인으로 생각되는 상황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예상되는 결과가 일어나는지를 테스트하는 것이다. 현미경 아래서 꿈틀대던 미생물을 가느다란 피펫으로 빨아올려 건강한 실험동물에게 접종하고 질병이 발생하는지의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다.
-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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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은 만월이었어요. 저는 오랫동안 달을 바라보았지요. 구름이 한 점도 없어서 달은 미동도 없이 제자리에서 내얼굴을 비추어주는 것 같았어요. 다음 날 아침 크리스토핀이 난리를 부렸어요. 만월 때 달빛을 받으며 잠드는 것은 아주 나쁜 거라고요."
"크리스토핀에게 쥐 얘기는 안 했소?"
"아니요. 이 얘기는 당신한테만 하는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제가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니거든요."
나는 그녀를 안심시키는 말이면 뭐든 해주고 싶었지만, 강가의 꽃이 뿜어내는 향기가 너무 짙어 어지럼증을 느낄 정도였다.
"당신도 내가 달빛 아래서 너무 오래 잤다고 생각하세요?"
그녀의 입은 억지로 웃고 있었고 눈빛은 세상과 동떨어진 외로운 사람의 것이었다. - P122

이곳은 아름다운 곳이다. 야생적이고, 문명의 손길이 닿지않은 곳. 무엇보다도 문명으로 오염되지 않은 곳이다. 아주 이국적인 곳. 또한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비밀스러운 아름다움의 장소다. 그리고 이곳은 자신만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그 뒤에 숨겨진것을 알고 싶다. 뒤에 감춘 것은 결코 예사롭지 않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곤 했다.
-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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