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케인 철이 곧 시작되겠군. 나는 생각했다. 나무들이 뿌리를 깊게 박고 태풍과 싸울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러나 무슨 소용이다. 태풍이 오면 그들은 다 휩쓸려 날아가버릴 것을, 그러나 대왕야자들은 굳건히 서서 버틴다고 한다. (앙투아네트가 말해 주었지.) 가지들을 모두 떨어뜨리고, 키큰 갈색의 기둥처럼 당당히 서 있다고 한다. 괜히 대왕야자라고 불리겠어? 대나무들은 쉬운 방법을 택한다. 그들은 땅으로 몸을 굽히고 끽끽 소리를 내며, 살려 달라고 신음하고 울면서 몸을 납작 엎드리고 눕는다. 오만방자한 바람은 이런 비천한것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간다.(살게 내버려 둬) 으르렁거리고, 소리치며, 웃어대면서, 거친 바람은 지나가 버린다.
그러나 그런 얘기는 다 몇 달 후의 일이다. 지금은 영국의 여름 날씨처럼 너무나 시원하고, 또 회색빛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복수와 허리케인을 연관지어 생각한다. 온갖 단어들이 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간다. 연민이라는 단어가 그중 하나다. 그 단어가 내 마음을 편치 못하게 한다. 돌풍 속을 걸어가는 발가숭이 갓난아이와 같은 연민.
- P231

나는 산들도 언덕들도 강들도 비도 증오하고, 그 색깔이 무엇이든 간에, 황혼도 증오한다. 나는 이곳의 아름다움도 마력도 그리고 내가 결코 알아낼 수 없는 비밀도 증오한다. 나는 이곳이 보여 주는 아름다움 속에 내재한 무관심도 잔인성도 증오한다. 무엇보다도, 나는 이 여자를 증오한다. 왜냐하면 이 여자는 그 마력과 아름다움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나를 목마른 상태로 남겨 놓았다. 내 온 인생은, 발견하기도 전에 이미 상실한 것을 그리워하고 목말라하는 그런 인생이 될것이다.  - P242

 그레이스에게는 이 말을 하지 않을 거다. 그녀의 이름이 그레이스여서는 안 돼, 이름이라는 건 중요하니까. 그 남자가 나를 앙투아네트라고 부르지 않자, 나는 앙투아네트가 창문을 통해 슬그머니 날아가 버리는 것을 보았어. 앙투아네트의 향기도, 옷도, 거울도 모두 사라져버리는 것을 나는 보았거든.
- P248

그레이스가 비웃었다.
바닥에 흐트러진 내 빨간 드레스를 보고 있자니 불이 바닥 여기저기로 퍼져 나가는 듯 느껴졌다. 그 모습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화염은 내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를 가르쳐주려는듯했다. 내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 나는 곧 기억하게 될 거야. 나는 생각했다.
- P257

 나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기다렸다. 그녀가 코를 고는 소리를 들은 후,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열쇠를 집어 들고 잠긴문을 열었다. 그리고 촛불을 들고 복도로 나왔다. 이제 드디어 나는 내가 왜 여기에 끌려왔는지를 알게 되었고,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도 알았다. 바람이 어디서 불어왔는지 촛불이 깜박거렸고, 나는 촛불이 꺼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손으로 바람을 막아주자 촛불은 다시 살아나 타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가는 이 캄캄한 길을 밝혀 주기 위하여.
- P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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