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어느 한 분야에 특화되기를 거부했다. 어떤 한 부분이 아니라 전체 상황을 파악하는 쪽을 선호했다. (…) 그리고 니콜라이의관리 방식은 가장 탁월한 결과를 낳았다.
- 레오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

어떤 도구도 만능이 아니다. 모든 문을 여는 마스터키 같은 것은없다.
아널드 토인비, 『역사의 연구』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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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풍선(소포체)의 내부란 큰 풍선(세포)에 있어 대체 무엇에 해당하는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외부다. 즉 단백질은 소포체의 피막을 통과하여 그 내부로 이동하는 시점에서 위상기하학적으로는 이미 세포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다.
언뜻 생각하기에 기묘하기도 한 이 논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포체의 출처를 추적할 필요가 있다. 소포체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풍선 외부에서 꼭 쥔 주먹을 큰 풍선의 고무 피막을 향해 내리 꽂은 모습을 상상해 보자. 주먹 주위에는 고무 피막이 밀착되어 있고, 주먹 자체는 풍선 내부에 들어가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주먹이 존재하는 공간은 외부와 통해 있다.
소포체도 이런 방법으로 형성되었다. 우선 세포막을 함몰시키고, 그 입구 부분, 즉 손목 부분을 서서히 좁혀가면서 최종적으로는 그곳을 홀맺어 끊는 방법으로 분리되는 것이다.
그 결과 작은 풍선이 큰 풍선 내부에 부유하게 된다. 따라서 소포체의 내부는 원래 세포 입장에서 보면 외부였던 세계다.
- P172

세포막의 안과 밖 혹은 그 주변에는 미세한 단백질이 다수 존재하는데, 항상 세포막과 상호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단백질은 각각 고유의 구조에서 유래하는 상보성이 있다. 그 상보성으로 인해 어떤 단백질이 링 모양의 환을 형성하면 부드러운 세포막은 잘록해질 것이다. 소포체막과 결합한 단백질 A가 세포막과 결합한 단백질 B와의 사이에서 열쇠와 열쇠구멍같은 특이한 결합을 일으킨다면 소포체막의 그 부분은 세포막의 특정 부분으로 쏙 들어갈 것이다. 또한 또 다른 막 결합형 단백질군이 세포막의 안쪽을 따라 그 상보적 관계에 기초한 소쿠리 모양의 네트워크 구조를 형성하면 세포막은 소쿠리 곳곳에 실로 꿰매서 덮어씌운 얇은 천처럼, 어떤 경우에는구면으로, 어떤 경우에는 아메바 같은 부정형으로, 때로는 적혈구처럼 옴폭 들어간 곡면을 만들 것이다.
- P180

다세포생물에는 하나하나의 세포에 게놈이 한 개씩 존재한다. 그러므로 전신에서 어떤 단백질의 존재를 없애기 위해서는 모든 세포의, 모든 게놈을 상대로 데이터를 없애는 작업을 해야만 한다. 사람이든 생쥐 같은 실험동물이든 하나의 개체는 수십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개개의 세포에대해 녹아웃 실험을 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출발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수정란이다. 만약 수정란의 유전자 중 어떤 데이터를 소거할 수있다면 어떻게 될까? 수정란에서 출발한 모든 세포는 같은 게놈 복사본을 계승하게 되므로 온몸의 세포 가운데 특정 단백질의 존재를 지울 수 있게 된다.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 P211

생물에는 시간이 있다. 그 내부에는 항상 불가역적인 시간의 흐름이 있고, 그 흐름에 따라 접히고, 한 번 접히면 다시는 펼칠 수 없는 존재가 생물이다. 생명이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GP2 녹아웃 마우스는 우리 안에서 평범한 모습으로 열심히 먹이를 먹고 있다. 그러나 그 정상적인 모습은 유전자의 결여가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즉 GP2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는 아니라는것이다. 분명 GP2에는 세포막에 대한 중요한 역할이 부여되어 있을 것이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은 생명이라는 동적평형이 어느 순간에 GP2의 결여를 교묘하게 보완한 결과다. 눈앞에 보이는 ‘정상‘ 이란 결여에 대한 다양한 연쇄적 응답과 적응, 즉 반응의 귀추에 의해 만들어진 또 다른 평형의 모습인 것이다.
우리는 한 개의 유전자를 잃은 마우스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낙담할 것이 아니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라워해야 한다. 동적 평형이 갖는 유연한 적응력과 자연스러운 복원력에 감탄해야 한다.
결국 우리가 밝혀낼 수 있었던 것은 생명을 기계적으로 조작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 P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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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슨 부인은 일주일 내내 이지에게 화나 있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부인은 평소에도 이런저런 이유로 이지에게 화를 냈다. 화의 뿌리는 길고, 가지가 많고, 깊었다.  - P157

리처드슨 부인이 지워버린 잊었다고 생각한 입원 기간의 모든 기억을 부인의 몸은 세세히 기억했다. 엄습하는 불안, 이지를 생각할 때마다 스미는 두려움, 부인은 현미경을 들여다보듯 이지가 하는 모든 일에 집중하며 이지의 행동을 이렇게 지렇게 바꾸고 약점이나 사고를 불러올 만한 징후는 없는지 살폈다. 단지 맞춤법에 서툰 걸까, 아니면 정신 장애의 조짐일까? 그저 필체가 엉망이고 산수를 잘 못하고 정상적으로 짜증을 내는 걸까, 아니면 무언가 더 나쁜 일이 일어나려는 걸까? 시간이 흐르면서 걱정은 두려움에서 풀려나 스스로 생명을 갖게 되었다. 이지를 낳으면서 부인은 작고 안전한 길을 따라 잘 굴러가던 인생이 어떻게 아무런 경고도없이 극적으로 경로를 벗어나 미끄러질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 P161

"이지, 똑바로 앉아."
부인은 저녁 식탁에서 이렇게 말하며 속으로 척추 측만증과 뇌성마비를 떠올렸다.
"이지, 진정해."
이처럼 딱히 분명하게 표현하지 않아도 분노는 걱정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화는 두려움의 경호원이다‘라는 글귀를 병원 포스터에서 읽었지만 리처드슨 부인은 그 뜻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이런 식으로 해서는 안 돼‘라고 생각할 틈도 없을 정도로 부인은 너무 바빴다.
- P162

부모에게 자식은 단순히 인간이 아니라 장소, 일종의 나니아 왕국처럼 지금 사는 현재와 기억 속의 과거와 갈망하는 미래가 한꺼번에 존재하는 광활하고 영원한 장소였다. 부모는 자식을 볼 때마다 그런 곳을 볼 수 있었다. 3차원 입체 영상처럼 자식의 얼굴에 겹쳐지는 아기 적 모습과 어린아이가 되었을 때의 모습과 다 커서 어른이 될 모습을 동시에 보았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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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아는 거절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실 거절은 상황을 악화시켜 악감정에 이르게 할 뿐이었다. 사람들이 무언가를 선한 행동으로 믿고 그것을 행하기로 결심했을 때는 보통 그들을 만류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미아는 알았다. 미아는 난감한 심정으로 리처드슨 가족, 넓고 화려한 리처드슨 씨네 집, 자신이 그 귀한 땅에 과감히 발을 들였을 때 펄이 지을 표정을 떠올렸다. 그러고는 자신이 리처드슨가의 왕국에 안착하여 눈에 잘 띄지 않게 배후에 남아 딸을 지켜보는 모습을 상상했다. 딸의 삶 속에 있는 자신의 존재를 재확인했다.
"감사합니다. 그런 제안을 다 해주시고 마음이 참 넓으시네요. 제가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어요?"
미아가 이렇게 말하자 리처드슨 부인이 활짝 웃었다.
-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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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델리펭귄 암컷과 수컷은 서로 자리를 교대하기 전후에 둥지로 돌을 물어다 나른다. 돌 몇 개 더 쌓는다고 딱히 둥지에 도움이 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열심히 하는 모습을 짝에게 보여준다. 새끼를 돌보는 사이사이에도 별것 아닌 돌을 통해서 서로 부지런히 애정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것이다.
- P139

펭귄이 무얼 먹고 사는지 조사하기 위해서 매년 펭귄의 혈액을 채취한다. 그 안에 포함된 성분을 자세히 분석하면 올해는 어떤 먹이를 많이 먹었는지 추측할 수 있다.
하루는 혈액 채취를 위해 펭귄 납치를 계획했다. 포획망과 방진복을 준비하고 펭귄을 잡기 위한 준비를 마쳤다. 그 순간 젠투펭귄 한 마리가 제 발로 우리에게 걸어왔다. 갑자기 흰옷을 입고 나타난 인간에게 호기심이 생긴 걸까? 어쩌면 경계하는 마음으로 감시를 하려고 왔을지도 모른다.
어떤 이유에서든 녀석은 내가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다가와서 한참을 날 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그물을 든 침입자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겁 없이 다가온 펭귄을 쉽게 잡을 수 있었지만 그냥 돌아갈 때까지 지켜봤다. 아무런 경계심 없이 궁금증을 갖고 다가온 녀석의 기대를 꺾고 공포심을 심어주기는 싫었다.
- P153

뉴스 기사를 읽다가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살아 있는 동물은 쇼핑몰에서 파는 물건처럼 전시되는 상품이 아니다. 나는 이런 실내체험 동물원을 규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생명을 아무렇지도 않게 다루는 걸 보면서 어린아이들이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절대 체험해서는 안 되는 체험이다.
- P173

내가 지금 펭귄에 대해 알고 있는 건 아주아주 적은 사실일뿐이다. 남극 연구자들이 흔히 하는 식상한 비유지만, 정말빙산의 일각도 채 되지 않을 것이다. 관찰하면 할수록 더 궁금증이 남는다. 평생을 연구해도 펭귄의 삶에 대해 전부 알기는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아주 조금씩 그들에게 가까워지고있다는 것이다. 펭귄에 대한 지식이 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예전보다는 펭귄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 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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