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오래된 책을 다시 펴내며

이 책은 20세기 세계사의 열한 가지 큰 사건을 다룬 보고서다.
‘큰‘ 사건은 ‘작은‘ 사건의 집합이므로 사실상 수백 가지 사건을 다뤘다고 할 수 있다. 하필 왜 이 사건들을 선택했는가? 세계를 지금 모습으로 만든 결정적인 장면이기 때문이다. 20세기가 끝나고 20년 넘는 세월이 흘렀으니 그런 사건을 고르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적 거리는 생겼다고 본다.
나는 아날로그 시대 사람이다. 21 세기가 열릴 때 마흔한 살이었다. 20세기에 배우고 익히고 경험한 것을 토대로 가치관을 형성하고 삶의 방식을 선택했다. 마음을 열어 세상의 변화를 껴안으려고 노력했지만 디지털 시대에 적응하기가 늘 수월하지는 않았다.
내 인생의 절반은 냉전 시대였다. 전직 장군들이 양복을 입고 우리나라를 지배했다. 말할 자유가 없었다. 말을 해도 통하지않았다. 가난한 사람이 많았고 사는 게 고르지 않았다.  - P5

그때 작가 에밀 졸라 (Émile Zola)가 참전해 전황을 단숨에 바꿨다. 그는 에스테라지에 대한 무죄선고가 나오고 이틀이 지난1898년 1월 13일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나는 고발한다」였다. 

나는 최후의 승리를 추호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더욱 강한 확신으로 거듭 말씀드립니다. 진실이 전진하고 있으며, 아무것도 그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진실이 땅속에 묻히면 조금씩 자라나 엄청난 폭발력을 획득하며, 마침내 그것이 터지는 날 세상 모든 것을 날려버릴 것입니다. 오늘 나의 행위는 진실과 정의의 폭발을 앞당기기 위한 혁명적 수단일 뿐입니다. 나의 불타는 항의는 영혼의 외침입니다. 부디 나를 중죄 재판소로 소환해 푸른 하늘 아래에서 조사하기를 바랍니다. 기다리겠습니다. - P31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첫번째 이유는 ‘인간적 요소‘일 것이다. 드레퓌스 가족은 서로 믿고 사랑했다. 그 사랑과 믿음으로 참혹한 불운과 시련을 이겨냈다. 반전을 거듭한 드라마의 주인공들, 알지도못하고 만난 적도 없는 사람의 누명을 벗기려고 부당한 비난과 박해를 감수하며 싸운 사람들의 이야기는 문학의 향기를 풍긴다. 모든 것을 걸고 진실을 드러낸 피카르 중령,
지성과 열정의 화신 졸라, 끝까지 책임을 다한 클레망소, 언론의 선동과 반유대주의자의 집단 광란을 이성의 힘으로 이겨낸 시민들, 프랑스의 민주주의가 허물어지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재심 요구파를 지지하고 응원하고 연대한 세계의 지식인들, 그들은 인간이 어리석고 때로 기괴하지만 지적 재능과 선한 본성을 지닌 존재임을 증명했다. - P39

세계는 크게 달라졌다. 극심한 군사적 경쟁체제에서 발전한 근대국가는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새로운 단계로 도약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제국들의 무덤‘이었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던 제국을 무너뜨리고 국민국가의 시대를 열었다. 세르비아에 최초의 선전포고를 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해체되고 독일어를 쓰는 주민이 다수인 지역만 남아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이 됐다. 러시아 황제의 궁전에는 붉은 깃발이 올랐다. 세계제패를 꿈꿨던 독일제국의 빌헬름 2세는 권좌에서 떨어졌고 독일민중은 ‘바이마르공화국‘을 세웠다. 400년 넘게 존속한 오스만제국도 사라졌다. 제국의 장군이었던 케말 파샤(Kemal Pasha)가 터키어를 쓰는 주민이 다수인 지역을 묶어 터키공화국을 수립했다.
세계 최대 채무국이었던 미합중국은 세계 최대 채권국이자 최강의 군사대국으로 면모를 일신했다. - P61

 그러나 미국과 유럽을 제외한 세계는 달라진 게 없었다. 오스만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났지만 분할통치 전략에 휘둘린 아랍은 요르단과 시리아 등 여러 나라로갈라져 미국의 영향력 아래 들어갔다. 영국은 인도의 독립운동을 더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일본은 3·1독립투쟁을 총칼로 짓밟았고 중국 대륙을 조금씩 먹어 들어갔다.
아시아·아프리카 · 라틴아메리카 식민지의 민족주의자들은 윌슨 대통령의 말을 오해했다. 그가 거론한 ‘식민지 문제의 공정한 해결‘은 식민지와 종속국의 자주권을 존중하거나 보장한다는뜻이 아니라 패전국의 식민지를 적절하게 재분배하자는 말이었다. ‘민족자결주의‘는 다양한 민족과 종교를 포용한 오스만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옛 영토를 처리하는 원칙이었을 뿐이다. 제국주의 식민지 쟁탈전은 끝나지 않았고, 더 무서운 전쟁이 인류를 기다리고 있었다. -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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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차 문제는 재난의 문제다. 인간이 만든 해고가 인간 삶을 부수는 극단의 형태로 드러난 정치적 사건이다(이창근, 2015). 그러나 이러한 ‘재난‘이 6년 동안 지속되는 와중에 국가는 해고자와 가족이 다시 설 수 있는 안전망을 제공해주지 못했고 쌍용자동차 관련 노동자와 가족 28명은 죽음으로 이 재난의 사회적 의미를 알려주었다. 급격한 사회경제적 지위의 하락과 사회적 지지의 단절 속에서 해고자는 6년간의 모든 부담을 신체적, 정신적으로 감당해야 했고 본 연구는 쌍용자동차 노동자에 대한 연구를 통해 정리해고가 그들의 몸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주고자 했다. 노동자들이 해고로 인한 고통을 온전히 감내하도록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국가와 정책입안자의 책무이자 역할이다. 본 연구는 정리해고가 노동자 삶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는 정책적 대안이 시급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 P102

저는 보상보다도 직업병 예방의 측면에서 걱정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삼성은 두 가지 형태로 작업장의 위험을 외주화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위험한 작업을 국내 협력업체에 하청으로 맡기는 것입니다. 특히 화학물질이나 가스 등 위험물질을 다루는일은 소수 인원으로 소사장이 운영하는 2차 협력업체에 맡깁니다. 협력업체들은 이러한 작업을 하다 문제가 생겨도, 원청의 눈밖에 날까 전전긍긍하며 밖에 알리지 않습니다. 심지어 노동자들에게 안전보호구를 착용하지 않거나 안전규정을 준수하지 않을 경우 모든 책임을 노동자 본인이 진다는 서약서를 쓰게도 합니다. 2013년 1월 삼성전자 반도체 화성공장의 불산 누출 사고당시, 하청업체 노동자들이 제대로 된 보호구 없이 수습하다 숨진 것은 이런 구조 속에서 필연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또 다른 위험의 외주화는 노동력이 좀 더 저렴하고 작업장 내 규제가 적은 해외 지역에 공장을 세우는 것입니다. 기업이 사용하는 화학물질을 ‘기업 기밀‘이라는 이름으로 밝힐 필요가 적은 지역에 공장을 세우는 것이지요. 삼성은 중국 시안의 반도체 공장을 비롯해,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지역에 20곳이 넘는생산 거점을 만들며 공장을 세워가고 있습니다. 글로벌 기업인삼성이 세계 각 지역에 공장을 세우는 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지만, 과연 규제가 더 느슨한 나라에 세워진 그 공장들이 투명한 안전관리를 하고 있는지 또 다른 피해자가 생겨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습니다.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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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앞서 말했듯이 코로나 팬데믹 초기에는 사회를 지키는 데 꼭 필요한 인공호흡기, 마스크, 소독제 등을 충분히 생산할 시스템이 없었다. 경비 절감을 위해 해외로 공장을 옮긴 탓에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들에서 마스크조차 넉넉히 구하지 못한것이다. 그 모든 일이 자본의 가치 증식을 우선하여 ‘사용가치‘를 희생시킨 결과다. 그 결과, 위기상황에서 다시 일어날 수 있는회복력을 상실했다.
이처럼 ‘사용가치‘를 무시한 생산은 기후 위기의 시대에 치명적일 수 있다. 기후 위기 시대에는 해야 하는 일이 많다. 식량, 물,
전력, 주거, 교통기관에 보편적 접근성을 보장하고, 홍수와 해일에 대비하며, 생태계도 보호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가치‘가 아니라 위기 대응에 필요한 것을 우선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코뮤니즘은 생산의 목적을 크게 전환한다. 생산의 목적을 상품의 ‘가치‘ 증대가 아니라 ‘사용가치‘에 두고, 사회적 계획에 따라 생산이 이뤄지도록 하는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GDP 증대를 목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기본적인 수요를 충족하는 데 중점을 둔다. 이야말로 ‘탈성장‘의 기본적인 입장이다.  - P299

어느 공장에 신기술이 도입되어 그때껏 10명이 하던 작업을 혼자 하게 된다고 가정해보자. 생산력은 10배가 오른 것이지만,
노동자 개인의 능력이 10배가 되지는 않는다. 그저 노동자 9명이하던 일을 화석연료의 에너지로 바꾸었을 뿐이다. 노동자라는 임금 노예 대신 화석연료라는 ‘에너지 노예‘가 일하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화석연료의 ‘에너지 수지 비율EROEI, Energy Returnon Energy Invested 이 매우 높다는 사실이다. 에너지 수지 비율은 에너지 투자 비율이라고도 하는데, 1에 해당하는 에너지를 써서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지 나타내는 지표다.
1930년대의 원유에 대해 살펴보면, 당시에는 에너지를 1만큼 투자해서 얻을 수 있는 에너지가 100이었다. 즉, 투자한 에너지를 제외한 99의 에너지는 자유롭게 쓸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뒤로 원유의 에너지 수지 비율은 계속해서 떨어졌다. 요즘은 1의 에너지를 투자해서 얻을 수 있는 에너지가 10 정도에 불과한 것이 문제시되고 있다." 채굴하기 쉬운 원유를 전부 파냈기 때문이다. - P302

탈탄소 사회로 전환하려면 에너지 수지 비율이 높은 화석연료를 버리고 재생에너지를 쓸 수밖에 없다. 그러면 에너지 수지 비율이 저하되는 만큼 경제 성장은 어려워진다. 이처럼 이산화탄소배출량을 줄이다 생산력이 저하되는 것을 ‘배출의 함정emissions trap‘이라고 부른다. 에너지 수지 비율이 저하되어 ‘에너지 노예‘가 줄어들면, 그 대신 인간이 장시간 일해야 할 것이다. 당연히 생산력 증대로 하는노동 시간 단축에 제동이 걸리고, 생산도 감속된다.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이기 위한 생산 감속을 우리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배출의 함정‘에 빠져 생산력이 저하될것이기 때문에 ‘사용가치‘를 만들어내지 않는 무의미한 일을 줄이고 그 외 필요한 부문에 노동력을 배분하는 것이 점점 더 중요해질 것이다.  - P303

소련의 인상이 워낙 강해서 놀랄지도 모르겠는데, 사실 마르크스는 노동을 ‘매력적‘으로 바꾸길 원했다. 노동 시간이 단축되어도 노동 자체가 지루하고 힘들면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해소하려고 소비주의적 활동에 몰두할 것이다. 그래서 노동이라는 활동의 핵심을 바꿔서 스트레스를 줄이는 것이 인간다운 생활을 되찾기 위해 꼭 필요하다.
그렇지만 현대의 생산 현장을 보면 자동화로 인한 자본의 ‘포섭‘이 노동을 한층 더 단조롭게 만들고 있다. 철저한 매뉴얼화 덕에 작업 효율이 비약적으로 높아졌지만, 그와 동시에 노동자 개개인의 자율성은 박탈되었다. 그 탓에 지루하고 무의미한 노동이 만연하고 있다. - P304

마르크스에 따르면 노동의 창조성과 자율성을 되찾기 위한 첫 단계는 바로 ‘분업 폐지‘다. 자본주의 분업체제에서 노동은 획일적이고 단조로운 작업 속에 갇힌 채 이뤄진다. 그에 저항하여 노동을 매력적으로 바꾸려면 사람들이 다종다양한 노동에 종사할수 있도록 생산 현장을 설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거듭하여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 및
‘도시와 농촌의 대립‘을 극복하는 것이 미래 사회의 과제라고 주장했다.
마르크스는 말년에 쓴 「고타 강령 비판」에도 그런 점을 강조했다. 미래 사회에서는 노동자들이 "분업에 노예적으로 종속되지 않게 되고", "노동이 생활을 위한 수단일 뿐 아니라 그 자체가
‘첫번째 생활 욕구"가 된다. 그 결과 노동자들의 능력은 틀림없이
"전면적 발전"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 목적을 위해서라도 평생에 걸친 평등한 직업 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노동자가 자본의 ‘포섭‘을 극복하고, 진정한 의미로 산업의 지배자가 되기 위해서 말이다.  - P305

다시 말해 ‘사회적 소유‘가 일으킬 결정적인 변화란 의사결정 과정의 감속인 것이다.
이는 일부 대주주의 의견이 우선하여 반영되는 현재 대기업의 의사결정 과정과 크게 다르다. 대기업이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에맞춰서 신속하게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이유는 경영진의 의향에 기초하여 비민주적으로 의사결정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마르크는 그것을 ‘자본의 전제‘라고 불렀다.
그런 대기업에 비해 마르크스의 어소시에이션은 생산 과정에서 민주주의를 중시하기에 자연스레 경제 활동의 속도가 느려진다. 소련은 경제 활동이 느려지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관료가 주도하는 독재국가가 되어버렸다. - P308

기후 정의 climate justice라는 말이 낯설지도 모르겠는데, 최근 유럽과 미국에서는 매일같이 언론에 등장하고 있는 말이다. 기후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선진국의 부유층이지만, 그 피해를 입는것은 화석연료를 그다지 사용하지 않았던 글로벌 사우스의 사람들과 미래 세대다. 이 불공정을 해소하고 기후 변화를 멈춰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기후 정의다. - P333

ㅇ 책의 첫머리에서 ‘인신세‘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인공물, 즉 부하와 모순이 지구를 뒤덮은 시대라고 설명했다. 자본주의가 지구를 부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인신세‘가 아니라 ‘자본세라고 부르는 게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연대하여 자본의 전제에서 인류의 유일한 고향 지구를 지켜낸다면, 그때는 긍정적인 의미로 인류의 새로운 시대를 ‘인신세‘라 부르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인류의 새로운 미래로 향하는 길을 비추는 한 줄기 빛을 찾아내기 위해서 자본에대해 철저하게 분석한 ‘인신세의 자본론‘이다.
물론 새로운 미래는 이 책을 읽은 여러분 한 사람 한사람이 3.5퍼센트에 가담할 것을 결단하느냐에 달려 있다. - P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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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결과가 보여주는 함의는 곱씹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지역 주민들은 그동안 HIV/AIDS 때문에 죽었던 걸까요, 아니면 HIV 치료약을 공공자금으로 제공하지 못했던 공동체로 인해 죽었던 걸까요? 이 논문은 후자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논문은 개개인이 감염되었던 바이러스 때문이 아니라 이미 세상에 존재하는 치료약을 제공받지 못하는 시스템으로 인해 사람들이 죽었던 것이라는 점을 계량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 P67

공동체는 그 구성원들이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책임을 지니고 있습니다. 건강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추구하기 위한기본 요건이기 때문이지요. 건강은 인권을 지켜내기 위한, 정치·경제적인 기회를 보장받기 위한 조건입니다. 건강해야 공부할 수 있고 투표할 수 있고 일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묻습니다. 당신은 거미를 본 적이 있나요? - P72

하지만 몇 번을 다시 생각해도 결론은 같습니다. 학자인 제가 걸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무엇이 더 합리적이고 올바른 길인가를 곰곰이 따져보고 발언하는 것뿐입니다. 제 연구가 이 세상을 마주하는 저의 방식이라면, 그 무대를 제가 선택할 수 있는것은 아니겠지요. 오스트리아의 과학철학자 오토 노이라트OttoNeurath가 말했던 것처럼요.

우리는 망망대해에서 배를 뜯어 고쳐야 하는 뱃사람과 같은 신세다. 우리에게는 부두로 가서 배를 분해하고 좋은 부품으로 다시 조립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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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의식이 높은 사람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평소에 자연과 건강을 중시하여 유기농채소를 고른다 해도, 아마 많은 이들이 생선이나 닭고기는 깨끗하게 포장되어 진열대에 놓인 ‘상품‘만먹지 않을까.
현대인 대부분은 동물을 사육하고 생선을 낚아서 그것들을 먹을거리로 손질하는 능력이 없다. 옛날 사람들은 그러기 위한 도구까지도 직접 만들었는데, 그들에 비하면 우리는 자본주의에 빠져들어 생물로서 무력해졌다. 우리는 상품의 힘을 매개로 삼지않으면 살아가지 못한다. 자연과 함께 살아가기 위한 기술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주변부를 약탈하지 않고서는 도시의 생활을 해나가지 못한다.
한때 유행했던 ‘로하스LOHAS‘ 역시 무력한 상태를 극복하려하지 않고 소비만으로 지속 가능성을 목표하다가 결국 실패했다.
소비자 의식이 변하는 정도로는 성장을 목표하는 상품경제에 너무나 간단히 잡아먹히는 것이다.
이처럼 잡아먹히고 빠져드는 것을 마르크스의 개념을 사용해 다른 말로 바꾸면 ‘포섭‘이라고 한다. 우리의 생활은 자본에 ‘포섭‘되어 무력해지고 있다. - P221

먼저 고르츠는 자본주의에서 이뤄지는 기술 발전의 위험성을 분명히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전문가에게 전부 맡기는 생산력 지상주의는 결국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것으로 이어져 "정치와 근대성 양쪽 모두를 부정하는 일"이 된다.
그러므로 생산력 지상주의의 위험성을 피하기 위해서는 ‘열린 기술‘과 ‘닫힌 기술‘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고르츠는 말한다. ‘열린 기술‘이란 ‘커뮤니케이션, 협업, 타자와 교류를 증진하는 기술이다. 그에 비해 ‘닫힌 기술‘은 사람들을 분단시키고 ‘이용자를 노예화하며‘ ‘생산물 및 서비스 공급을 독점하는 기술을 가리킨다."
‘닫힌 기술‘의 대표적인 예는 원자력발전이다. 오랫동안 원자력발전은 ‘깨끗한 에너지‘라고 여겨졌다. 하지만 원자력발전은 보안상의 이유로 일반 사람들과 격리되었고 그에 관한 정보도 비밀리에 관리되었다. 그런 특성은 갈수록 불리한 사실을 은폐하는것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중대한 사고가 일어나고 말았다.
원자력발전을 민주적으로 관리하기란 어렵다. ‘닫힌 기술‘은 특성 탓에 민주주의적인 관리와 어울리지 않고, 중앙집권적인하향식 정치를 필요로한다. 이처럼 기술과 정치는 결코 무관하지 않다. 특정한 기술은 특정한 정치 형태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기후 변화 문제를 살펴보면 지구공학이나 역배출기술 역시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닫힌 기술‘일 수밖에 없다. - P227

토지는 근원적인 생산수단이었고, 개인이 자유롭게 매매할수 있는 사적 소유물이 아니었으며, 사회 전체가 함께 관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입회지 같은 공유지를 영국에서는 ‘커먼즈commons‘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공유지에서 과실, 장작, 물고기, 들새, 버섯 등 생활에 필요한 것을 적당량 채집했다. 삼림에서구한 도토리로 가축을 키웠다고도 한다.
그렇지만 공유지는 자본주의와 함께 존재할 수 없었다. 모두가생활에 필요한 것을 스스로 조달한다면 시장에서 상품이 전혀 팔리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도 굳이 상품을 구입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인클로저로 커먼즈를 철저히 해체하고 배타적인 사적 소유로 전환해야 했다. - P239

생활수단을 잃은 사람들 대부분은 도시에 들어가 임금 노동자로 일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다. 적은 임금 탓에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수 없었고, 가족 모두가 필사적으로 일해야 했다. 그렇게 해도 값비싼 고기와 채소는 구할 수 없었다. 입수할 수 있는 식량의 종류가 전보다 줄어든 데다 질도 나빠졌다. 시간도 돈도 모자랐기에 전통적인 레시피는 쓸모없는 것이 되었고, 단순하게 감자를 삶거나 굽는 요리만 하게 되었다. 생활의 질이 명백하게낮아진 것이다.
그렇지만 자본의 관점으로 보면 같은 상황이 전혀 다르게 읽힌다. 자본주의란 사람들이 모든 것을 자유롭게 시장에서 매매하는 사회를 가리킨다. 토지에서 쫓겨나 살아가기 위한 수단을 잃은 사람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서 화폐를 손에 넣고 시장에서 생활수단을 구입해야 했는데, 그로 인해 상품경제는 단숨에 발전할수 있었다. 자본주의가 이륙하기 위한 조건이 갖춰진 것이다. - P240

그랬는데 어떻게든 인공적인 희소성을 만들어내면서 시장은모든 것에 가격을 매길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 ‘인클로저‘로 커먼즈를 해체하고 토지의 희소성을 만들어냈듯이. 인클로저 후에 토지의 소유자는 이용료를 징수하기 시작했다.
본원적 축적 전후를 비교해보면 땅도 물도 ‘사용가치‘ (유용성)는 변하지 않았다. 커먼즈에서 사적 소유가 되며 변한 것은 희소성이다. 희소성의 증대가 상품의 ‘가치‘를 키운 것이다.
그 결과 사람들은 생활에 필요한 재화를 이용할 기회를 잃고 점점 곤궁해졌다. 화폐로 계측되는 ‘가치‘는 늘어났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가난해졌다. 아니, 그보다는 ‘가치‘를 늘리기 위해서 생활의 질을 의도적으로 희생시킨 것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파괴와 낭비 같은 행위조차도 희소성을 만들어내기만 한다면 절호의 기회로 삼기 때문이다.  - P251

기후 변화가 비즈니스 찬스인 것도 그 때문이다. 기후 변화는 물, 경작지, 주거지 등에서 희소성을 만들어낸다. 희소성이 늘어나면 그만큼 수요가 공급보다 많아지는데, 그런 상황이 자본에는 막대한 이윤을 올릴 기회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재난의 충격에 편승하여 이익을 취하는 ‘기후 변화 쇼크 독트린shock doctrine (충격 요법 정치)‘이다. 돈벌이만 생각한다면, 사람들의 생활이 희생되어도 희소성을 유지하는 것이 ‘합리적‘ 이기까지 한 것이다.
역시 재난편승형 자본주의에 속하는 ‘코로나 쇼크 독트린‘을 맞이하여 미국 초부유층의 자산이 2020년 봄에 5650억 달러(약687조 원)나 늘어났다는 사실을 떠올려보길 바란다.
‘사용가치‘를 희생시킨 희소성이 개인 재산을 늘린다. 이야말로 자본주의의 불합리를 뜻하는 ‘가치와 사용가치의 대립‘이다." - P252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자유의 나라‘에서 꽃피는 ‘좋은 자유‘란 즉물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소비주의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얼핏 보면 자본주의는 생활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이면에서 추구되는 것은 무제한적인 물질적 욕구 충족이다. 뷔페식당, 계절마다 버려지는 옷, 무의미한 브랜드화, 이 모두
‘필연의 나라‘에 만연한 동물적 욕구와 얽힌 것이다.
그에 비해 마르크스가 추구하는 ‘자유의 나라‘는 바로 그 물질적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에서 시작된다. 집단적이고 문화적인 활동의 영역에야말로 인간적 자유의 본질이 있다고 마르크스는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니 ‘자유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서는 무한한 성장만 좇으며 사람들을 장시간 노동과 제한 없는 소비로 떠미는 시스템을 해체해야 한다. 설령 총량을 보았을 때 지금보다 생산이 줄어든다고 해도, 전체를 보았을 때는 행복하고, 공정하며, 지속 가능한 사회를 향한 ‘자기 억제‘를 자발적으로 해야 한다. 마구잡이로 생산력을 키우는 게 아니라 자제를 하여 ‘필연의 나라‘를 축소하면
‘자유의 나라‘가 확대될 것이다." - 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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