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오래된 책을 다시 펴내며

이 책은 20세기 세계사의 열한 가지 큰 사건을 다룬 보고서다.
‘큰‘ 사건은 ‘작은‘ 사건의 집합이므로 사실상 수백 가지 사건을 다뤘다고 할 수 있다. 하필 왜 이 사건들을 선택했는가? 세계를 지금 모습으로 만든 결정적인 장면이기 때문이다. 20세기가 끝나고 20년 넘는 세월이 흘렀으니 그런 사건을 고르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적 거리는 생겼다고 본다.
나는 아날로그 시대 사람이다. 21 세기가 열릴 때 마흔한 살이었다. 20세기에 배우고 익히고 경험한 것을 토대로 가치관을 형성하고 삶의 방식을 선택했다. 마음을 열어 세상의 변화를 껴안으려고 노력했지만 디지털 시대에 적응하기가 늘 수월하지는 않았다.
내 인생의 절반은 냉전 시대였다. 전직 장군들이 양복을 입고 우리나라를 지배했다. 말할 자유가 없었다. 말을 해도 통하지않았다. 가난한 사람이 많았고 사는 게 고르지 않았다.  - P5

그때 작가 에밀 졸라 (Émile Zola)가 참전해 전황을 단숨에 바꿨다. 그는 에스테라지에 대한 무죄선고가 나오고 이틀이 지난1898년 1월 13일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나는 고발한다」였다. 

나는 최후의 승리를 추호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더욱 강한 확신으로 거듭 말씀드립니다. 진실이 전진하고 있으며, 아무것도 그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진실이 땅속에 묻히면 조금씩 자라나 엄청난 폭발력을 획득하며, 마침내 그것이 터지는 날 세상 모든 것을 날려버릴 것입니다. 오늘 나의 행위는 진실과 정의의 폭발을 앞당기기 위한 혁명적 수단일 뿐입니다. 나의 불타는 항의는 영혼의 외침입니다. 부디 나를 중죄 재판소로 소환해 푸른 하늘 아래에서 조사하기를 바랍니다. 기다리겠습니다. - P31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첫번째 이유는 ‘인간적 요소‘일 것이다. 드레퓌스 가족은 서로 믿고 사랑했다. 그 사랑과 믿음으로 참혹한 불운과 시련을 이겨냈다. 반전을 거듭한 드라마의 주인공들, 알지도못하고 만난 적도 없는 사람의 누명을 벗기려고 부당한 비난과 박해를 감수하며 싸운 사람들의 이야기는 문학의 향기를 풍긴다. 모든 것을 걸고 진실을 드러낸 피카르 중령,
지성과 열정의 화신 졸라, 끝까지 책임을 다한 클레망소, 언론의 선동과 반유대주의자의 집단 광란을 이성의 힘으로 이겨낸 시민들, 프랑스의 민주주의가 허물어지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재심 요구파를 지지하고 응원하고 연대한 세계의 지식인들, 그들은 인간이 어리석고 때로 기괴하지만 지적 재능과 선한 본성을 지닌 존재임을 증명했다. - P39

세계는 크게 달라졌다. 극심한 군사적 경쟁체제에서 발전한 근대국가는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새로운 단계로 도약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제국들의 무덤‘이었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던 제국을 무너뜨리고 국민국가의 시대를 열었다. 세르비아에 최초의 선전포고를 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해체되고 독일어를 쓰는 주민이 다수인 지역만 남아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이 됐다. 러시아 황제의 궁전에는 붉은 깃발이 올랐다. 세계제패를 꿈꿨던 독일제국의 빌헬름 2세는 권좌에서 떨어졌고 독일민중은 ‘바이마르공화국‘을 세웠다. 400년 넘게 존속한 오스만제국도 사라졌다. 제국의 장군이었던 케말 파샤(Kemal Pasha)가 터키어를 쓰는 주민이 다수인 지역을 묶어 터키공화국을 수립했다.
세계 최대 채무국이었던 미합중국은 세계 최대 채권국이자 최강의 군사대국으로 면모를 일신했다. - P61

 그러나 미국과 유럽을 제외한 세계는 달라진 게 없었다. 오스만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났지만 분할통치 전략에 휘둘린 아랍은 요르단과 시리아 등 여러 나라로갈라져 미국의 영향력 아래 들어갔다. 영국은 인도의 독립운동을 더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일본은 3·1독립투쟁을 총칼로 짓밟았고 중국 대륙을 조금씩 먹어 들어갔다.
아시아·아프리카 · 라틴아메리카 식민지의 민족주의자들은 윌슨 대통령의 말을 오해했다. 그가 거론한 ‘식민지 문제의 공정한 해결‘은 식민지와 종속국의 자주권을 존중하거나 보장한다는뜻이 아니라 패전국의 식민지를 적절하게 재분배하자는 말이었다. ‘민족자결주의‘는 다양한 민족과 종교를 포용한 오스만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옛 영토를 처리하는 원칙이었을 뿐이다. 제국주의 식민지 쟁탈전은 끝나지 않았고, 더 무서운 전쟁이 인류를 기다리고 있었다. -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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