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계획이 무엇이었든, 또 어떻게 될 예정이었든, 하여간 폴 디가영영 망쳐놓았다. 식탁과 우렁찬 남자 목소리로 그 지역의 명물인 유령을 124번지에서 내쫓아버렸다. 덴버는 검둥이들이 자기들에게 보내는 경멸의 시선을 되레 자랑스럽게 여기는 법을 터득했다. 귀신의 출몰은 사악한 악마가 뭔가를 바라고 저지르는 짓이라는 그들의 억측을 비웃었다. 마법의 짜릿한 즐거움이나, 눈에 보이는 사물의 배후에있는 것들을 단지 짐작이 아니라 똑똑히 안다는 그 순수한 기쁨을 검둥이들은 아무도 몰랐다. 오빠들은 알았지만 두려워했고, 베이비 할머니는 알았지만 슬퍼했다. 아무도 유령 친구가 옆에 있다는 든든한 기분을 만끽하지 못했다. 세서조차 그걸 사랑하지 않았다. 그저 당연하게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마치 갑자기 변덕을 부리는 날씨를 받아들이듯.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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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쇼카 왕이 개인적인 신앙심만으로 불교 교리를 나라의 법으로 삼은 건 아닐 겁니다. ‘지금껏 단 한순간도 하나로 묶인 적 없던 사람들을 어떻게 마찰과 분쟁 없이 통합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불교를답으로 내세웠던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불교는 꽤 유용했습니다.

혹시 불교를 믿는 척만 했던 건 아닐까요? 회개도 거짓말이고요.

순수한 신앙심과 정치적 목적 둘 다 있었을 거예요. 통일된 지 얼마안 된 나라를 하나로 묶을 정신적인 토대를 마침 자기가 믿던 종교에서 찾았다고 봐야겠지요. 아대륙이 작은 나라로 조각조각 나뉘어있었을 때와 같은 구시대의 종교로는 더 이상 사람들을 설득하기 어려웠을 테고요.
아쇼카 왕처럼 강력한 왕이 나섰으니 인도 전역에 불교가 퍼지는건 시간문제였습니다. - P226

그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던지 인도 사람들은 조각을 하면 마연을 해서 내구성을 높였어요. 일찍부터 마연한 조각과 토기를 만들다가 마우리아 제국 때 와선 돌이 들어가는 데는 모조리 마연하죠. 궁전 기둥도 그랬고요. 이 역시 페르시아의 영향이라 보기도 합니다.
간혹 강의 중에 학생들이 이런 이야기를 해요. ‘우리나라에는 왜 이런 섬세한 동물 조각이 없는 건가요? 아쉬워 죽겠어요"라고요. 찾아보면 십이지신상 같은 게 있긴 한데 뭔가 어설퍼요. 무슨 동물인지구분하기도 어렵고 신이라기엔 묘하게 귀여운 구석이 있습니다. 어설퍼 보이는 까닭은 조각 실력보다 재료 탓이 커요. 우리나라 돌은 대부분 입자가 굉장히 거칠고 단단한 화강암이거든요. - P254

사원이 스투파를 중심으로 만들어졌다는 건 사원이라면 반드시 스투파가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 절에는 탑이 꼭 있어야한다는 거지요. 절이 처음 생겨나던 순간부터 탑은 절이라는 공간의핵심이었습니다. 오늘날에는 탑을 절의 뜰을 장식하는 기념물쯤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지만요.
인도 산치에는 절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거대한 사원이 있어요. 아쇼카 왕이 세운 스투파 중 하나가 있던 지역인데 그 주변으로 스투파가 여러 기 지어지면서 사원이 형성된 곳이죠. -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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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아파르트헤이트, 사실상의 노예제의 체계적 확산은 참사가 아닌 글로벌 자본주의의 구조적 필연성의 결과다.
그래서 어쩌면 난민은 사우디아라비아로 가지 않으려고 하는것이 아닐까? 그러나 난민은 유럽에서도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고 있지 않는가? 현지 노동자들은 난민의 값싼 노동력에 압박과 위협을 느낀 나머지 반이민적-대중영합적 극우파에게그들의 표를 몰아주지 않을까? 대다수 난민들에게 다가올 꿈은 정확히 이런 현실일 것이다.  - P64

요컨대 난민은 케이크를 얻고자 한다. 그들은 기본적으로서구 복지국가의 최상의 혜택을 누리기 원하지만 복지국가의근간을 이루는 이데올로기와 부분적으로 전혀 합치하지 않는 자신의 생활방식을 고집하고, 이를 바꿀 생각을 하지 않는다. 독일은 문화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난민을 통합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해왔다. 그러나 먼저 부숴야 할 금기가 있다-그들 중 과연 몇이나 실제로 통합되기를 원할까? 통합을 가로막는 장애가 서구의 인종차별주의만이 아니라면 어찌할것인가? 이제 우리는 난민을 부르주아 유럽을 침범한, ‘잃어버릴 것이라고는 족쇄밖에 없는‘ 프롤레타리아로 보는 진부한 태도를 떨쳐버려야 한다. 유럽이든 중동이든 계급분열은 존재한다. 핵심은 서로 다른 계급의 동력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묻는 것이다.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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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돌 만들기보다 더 어려운 건 쌓는 방법, 즉 건축 기술입니다. 평평하지도 균질하지도 않은 토지 위에 건물을 올리기 위해서는 바닥 경사 등을 포함해 고려할 게 많지요. 레고처럼 조그만 벽돌을 쓰거나사용하는 벽돌의 개수가 얼마 안 된다면 문제없어요. 쌓다가 잘못됐다 싶을 때 다시 부수고 새로 쌓을 수 있으니까 말이에요. 하지만 무거운 벽돌을 수천수만개 써야하면 그럴 수 없죠. 필요한 벽돌 개수와 사이즈를 미리 계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정도로 정교한 공사를 실행할 수 있었다는 건 모헨조다로 미터건, 마일이건, 이건일정한 측량 기준, 그러니까 도량형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 P125

보통 ‘부처‘ 하면 석가모니를 떠올릴 텐데 꼭 그렇진 않아요. 주의할 게 석가모니는 부처지만, 부처는 석가모니가 아니란 사실이에요. 부처란 깨달은 자‘들‘로서 한 명이 아니거든요. 석가모니는 무수한 부처들 중 한 사람이었던 거고요. 석가모니의 원래 이름은 ‘고타마 싯다르타입니다.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된 거지요.

신이 여럿이라는 건가요?

엄밀히 말해 부처는 신이 아니에요. 부처란 깨달은 인간들을 뜻해요. 석가모니 역시 누구나 깨달은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 P190

불교가 막 탄생하던 기원전 6세기, 인더스문명이 쇠락한 인도 땅에는 아리아인이 들어와 있었어요. 유목민이었던 아리아인은 초원을떠돌다 기원전 1500년경 인더스강 유역에 진입해 기원전 1000년경에는 갠지스강 유역마저 점령합니다. 이들은 오랜 유목 생활로 체력도 뛰어났을뿐더러 다른 민족이 청동기를 사용할 때이미 철기를 쓰고 있었기에 막강한 전투력을 바탕으로 토착민을 압도할 수있었습니다. 아리아인의 지배가 계기가 되어 평등한 사회였던 인더스 문명끝에 엄격한 카스트 제도가 도입됐습니다.

토착민들이 하위 계층이 된 건가요?

그렇죠. 종족이나 직업에 따라 카스트 제도로 계급을 나눠 사람을구별했어요. 이는 현재까지 이어지는 극심한 차별과 불평등을 초래했습니다.

아리아인은 왜 카스트제도를 만든 걸까요? 평등하게 지냈을 때도아무 문제 없었잖아요?

정복자로서 토착민보다 우월한 존재로 서고 싶어 했기 때문이에요.
그러기 위해서는 근거가 필요했죠. 이때 들고 온 게 베다와 카스트습니다. - P193

하지만 죽은 뒤에는 상황이 달라졌어요. 가르침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다 보니 세월이 흐르며 정확성이 떨어졌습니다. 그걸바로잡아줄 사람은 세상에 없었고요. 나중에 석가모니는 이렇게 말했다. 저렇게 말했다 하며 다투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었죠.
그래서 석가모니의 제자들은 한데 모여 자신들이 기억하는 석가모니의 가르침 중에서 무엇이 옳은지 정리하는 작업을 시작합니다. 이과정을 ‘경전의 결집‘이라고 해요. 역시 글이 아니라 구전이었죠.

구전으로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정리했다니 전혀 상상이 안 가요….

석가모니가 사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뤄진 최초의 결집을 예로 들어보죠. 장장 7개월에 이르는 기간 동안 석가모니의 제자 500여명이 함께했는데 과정은 이랬습니다. 먼저 한 제자가 자기가 기억하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읊어요. 그러곤 그 내용에 문제가 없는지 확인한 후, 모두가 이에 동의하면 정설로 채택합니다. 마지막엔 그렇게정리된 걸 다 같이 암송했지요. 이런 결집은 수백 년에 걸쳐 여러 차례 진행됐습니다. 글로 기록되는 건 기원전 1세기경이고요. 1954년까지도 결집이 이뤄졌죠.
1차 이후 행해진 결집에는 석가모니에게 귀의한 일반인들과 왕들도힘을 보탰어요. 결국 불교가 널리 퍼질 수 있었던 건 석가모니의 설법뿐 아니라 그 깨달음을 주변에 적극적으로 전파한 인도 사람들이있었기 때문입니다. -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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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리아 내전, 이라크와 리비아의 긴장이 난민유출을 일으켰지만 그게 유일한 원인은 아니다. 나는 이 사건을 시발로 경제가 취약한 나라를 떠나려는 대이동 추세가 촉발되었다고 본다. 고향을 등지게 만든 것은 결국 체제의 문제다. 유럽의 진보적 법률 덕에 난민은 유럽에 체류하면서 일자리 없이 각종 복지혜택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 작가, 극작가, 연출가인 예브제니 그리쉬코예츠는 자신의 블로그에 이렇게 썼다. "그들은 탈진했고, 분노했고, 굴욕감을 느끼고 있다. 그들은 유럽적 가치, 생활방식, 전통, 다문화주의, 관용을 전혀 모른다. 그들이 자발적으로 유럽의 법을 지키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또한 자신이 처한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자신을 받아들여주었다고 해서 결코 유럽인에게 감사하지도 않을것이다. 왜냐하면 유럽이 자신의 조국을 피바다로 만들었기때문이다. (・・・・・・) 앙겔라 메르켈은 현대 독일사회와 유럽이 이 문제에 충분히 대비했다고 장담했지만 그건 말도 되지 않는 헛소리다! " - P59

사우디아라비아는 ‘외국인 불청객‘을 용인하지 않는 이슬람 근본주의 신정국가이기 때문에 난민을 받아들이지 않는것일까? 그런 면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는 사우디아라비아가 경제적으로는 서구에 완전히 동화된 나라임을 잊어서는안 된다. 경제적 관점에서 보자면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는 서구 자본의 전초기지, 즉 서구로부터 들어오는 석유 수익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국가가 아닌가? 국제사회는 사우디아라비아는 물론 쿠웨이트, 카타르 등에 그들의 의무를 다하고 일정 비율의 난민을 수용하도록 최대한의 압력을 행사해야 한다. 더욱이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슬람 과격분자들의알 아사드 축출 음모를 지원해 시리아 상황을 결정적으로 악화시킨 책임을 져야만 한다. - 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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