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루소,
<뱀을 부리는 주술사>

화가 루소는 늘 일요일에 그림을 그렸다. 집안 사정이 어려워 일찍 취업했고 군대 복무 중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집안을 책임지기 위해 말단 세관원으로 일한 그는 화가라는 꿈을 포기하지 않고 쉬는날이면 루브르 박물관에서 거장들의 작품을 모사하며 그림 실력을쌓았다. 그래서 그는 일하지 않는 일요일에만 그림을 그린다고 ‘일요화가‘ 또는 ‘세관원 화가‘라고 불렸다. 실제로 더 많은 이가 ‘화가 루소‘보다 ‘세관원 화가 루소‘라고 불렀다. - P15

세상이 바뀌자 종교 미술에도 큰 변화가 일어난다. 기존 가톨릭교회의 화려한 종교 미술은 사치와 부패의 온상으로 여겨지며 자리를 잃는다. 교회라는 큰 구매자를 잃고 어려움에 처한 화가들은 고심 끝에 일반 시민의 집 안을 꾸밀 수 있는 벽걸이형 그림을 그리며 생계를 잇는다. 다행히도 바뀐 세상은 화가들에게도 기회를 마련해주었고 벽걸이형 그림은 다른 유럽에서 볼 수 없던 네덜란드만의 빛나는 회화사를 만들어낸다.
부를 쌓은 네덜란드인들은 투자할 곳을 찾기 시작했고 미술 시장이 그들의 눈에 들었다. 부자들은 과거의 귀족이나 왕족처럼 그림으로 집 안을 꾸미고 싶어 했고 그로 인해 벽걸이형 그림이 빛을 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화가의 그림을 중계하는 화상이 등장하고 미술시장에 투자하는 이들도 생겨난다. 과거 미술 시장의 가장 큰 소비자가 교회였다면 네덜란드에서는 부르주아와 전 유럽인으로 확대된것이다. 또 종교와 역사같이 어려운 주제를 담은 그림에서 쉽고 아담하고 예쁜 정물화, 초상화, 풍속화로 경향이 바뀐다. 17세기 네덜란드의 경제 발전이 없었다면 정물화는 여전히 종교화나 역사화의 배경으로 머물며 더 오래 자신의 시간을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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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인 교육은 주로 빈 서판을 기초로 한다. 아이들이 텅 빈 채학교에 오면 그들의 마음에 지식이 침전되고 그 지식은 후에 다양한 시험을 통해 재생산된다. (전통적인 교육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예금과대출 모델이라 부른다.) 빈 서판은 또한 초기의 몇 학년도가 평생의 사회적 가치가 형성되는 기회 지대라는 이론을 강조한다. 오늘날 수많은 학교들이 그 초기 학년도를 이용해 환경, 성, 성적 관심, 인종적 다양성에대해 취해야 할 바람직한 태도를 주입시킨다.
진보적인 교육은 대부분 고상한 야만인에 기초한다. A. S. 닐은 유명한 저서 『서머힐』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이는 선천적으로 현명하고 현실적이다. 어른의 가르침 없이 혼자 내버려두면 발달할 수 있는 데까지 발달한다." 닐을 비롯해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진보적 이론가들은 학교 교육에서 시험, 학년, 교과과정은 물론이고 심지어 책까지 제거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어떤 학교도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지만 그 운동은 교육 현실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완전 언어 (Whole Language)라는 이름의 독서 교육 방법에서는 아이들에게 어떤 철자가 어떤 소리와 어울리는가를 가르치는 대신 풍부한 책으로 둘러싸인 환경을 제공해 독서기술이 자발적으로 발달하기를 기대한다." 구성주의라고 알려진 수학교육 철학에서는 아이들에게 구구단을 외우게 하는 대신 집단적으로 문제를 풀게 함으로써 수학적 진리를 스스로 재발견하게 한다. 두 방법 모두 학생들의 지식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때에는 실패를 면치 못하지만, 그 옹호자들은 표준화된 시험 방법을 경멸하는 경향을 보인다. - P392

교육은 빈 서판에 무언가를 쓰는 것도, 아이들의 고상함이 활짝 피어나게 하는 것도아니다. 교육은 인간의 마음에 선천적으로 부족한 능력들을 보충하려는 과학 기술에 가깝다. 아이들은 걷기, 말하기, 사물 인식, 친구들의 개성을 기억하기 등을 배우기 위해 학교에 가지 않는다. 물론 그런 과제들은 읽기, 더하기, 연도 외우기 등보다 훨씬 어렵다. 그리고 글자 익히기, 셈, 과학 등을 배우기 위해 학교에 간다. 종 보편적으로 진화할 수 없을만큼의 최근 시기에 발명된 지식과 기술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결코 빈 수용체나 보편적 학습자가 아니라 특정한 사고와 학습의 도구 상자를 갖추고 태어난 존재이며, 설계 능력에서 벗어난 문제를 정복하기 위해서는 그 도구들을 영리하게 보강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아이들의 마음에 새로운 사실과 기술을 주입해야 할 뿐 아니라, 낡은 것들을 수정하고 억제해야 한다.  - P393

사실 복제 인간은 다른 시대에 태어난 일란성 쌍둥이일 뿐이다. 아인슈타인에게 쌍둥이 동생이 있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는 강시나 좀비가 아니었을 것이고, 아인슈타인과 똑같은 의식의 흐름을 보여 주지도 않았을 것이고, 자신의 장기를 포기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어쩌면 아인슈타인과 전혀 달랐을지도 모른다(지능은 부분적으로만 유전되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의 세포로 복제 인간을 만들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복제에대한 기괴한 오해는 사람의 몸이 영혼으로 채워져 있다는 완고한 믿음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강시 군대, 블랭크, 장기 농장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복제가 영혼 없는 몸을 찍어내는 것이라 상상한다. 히틀러가 부활하거나 사람들이 파우스트처럼 영원한 생명에 집착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복제가 영혼이 딸린 몸을 찍어내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자식을 잃은 부모들 중에는 마치 죽은 자식을 되살릴 수 있을 것처럼 복제를 갈망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 또한 그런 생각이 기초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사실 죽은 자식을 복제한다고 해도 복제된 동생은 죽은형과는 다른 세계에서 성장할 뿐 아니라 다른 뇌 세포를 가지고 다른 감각 경험의 선로를 밟을 것이다. - P399

이 딜레마를 해결할 방법은 없다. 그것은 근본적인 모순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 모순은 개인이나 영혼에 대한 모 아니면 도 식의 개념이 수반된 우리의 직관 심리와 인간의 뇌는 서서히 진화했고 서서히 발달하며 서서히 죽는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잔인한 생물학적 사실 사이에서 빚어진다. 그리고 이런 사실은 낙태, 안락사, 동물의 권리 같은 도덕적 난제들이 명확한 그리고 직관적으로 만족스러운 방식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정책도 만족스럽지 못하다거나 그 문제가 전적으로 개인적 취향, 정치 권력, 또는 종교적 교의에 맡겨져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생명윤리학자 로널드 그린이 지적했듯이 그것은 다만 우리가 그 문제를 재구성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자연적인 경계를 발견하는 문제에서, 각 정책의 딜레마를 고려해 선과 악을 가장 훌륭하게 절충하는 경계를 선택하는 문제로 이동해야한다. 각각의 경우에 현실적으로 실행할 수 있고, 행복을 극대화할 수있고, 현재와 미래의 고통을 최소화할 수 있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 현재의 많은 정책들이 이미 이런 식의 화해와 타협을 거친 것들이다. 동물에 대한 연구에는 허용과 규제가 교차하고, 말기 태아는 개인으로서 완전한 법적 권리를 인정받지는 못하지만 산모의 생명이나 건강이 위협받는 경우가 아니라면 낙태되지 못하게 되어 있다. 그린은 경계를 발견하는 문제에서 경계를 선택하는 문제로의 이동에야말로 획기적인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 P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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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고 보면 많은 축제가, 나아가 인구 유출을 겪고 있는 지자체들의 모든 사업이 결국 이런 패턴 아닌가 싶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와 ‘이렇게라도 해야 하지 않나.‘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대개는 하는 쪽을 택하는.  - P173

‘먹기 위해 동물을 죽이는 것‘과 ‘동물을 오락거리로 다루며 갖고 놀면서 고통스럽게 죽이는 것‘은 다른문제라는 데에 많은 사람들이 합의하는 것 같았다. 적어도 돼지 번지점프 행사에서는. - P223

"동물을 아끼는 사람이 인간도 아낀다."라는 말은 믿지않지만(히틀러만 봐도 그렇다.) "동물에게 잔인한 사람은 인간에게도 잔인하다."라는 칸트의 말은 믿는다. 그래서 "아이들이 너무 좋아해요!"라는 말로 맨손 잡기 같은 체험을 요약하는 말을 들으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인간의 생명 vs. 동물의 생명‘이라는 화두까지는 어림도 없고, ‘인간의 재미 vs 동물의 생명‘에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인간의 재미‘를 선택하는 그 해맑은 가학성이 별생각 없이 돼지를 번지점프대에 세우기도 하는 것이다. 아마 누군가에게는 번지점프당하는 돼지를 보는 것도 특별한 ‘체험‘이고 즐거운 유희였을 것이다. - P225

닭, 소, 말, 양, 돼지가 자유로운 환경에서 행복하게 사육되지 못하는 것은 개선해야 할 문제이지 다른 생물을 똑같이 학대할 수 있는 근거가 아니다. 그래선 안 된다. 세상의 모든 동물 학대를 정당화시킬 수 있는 비겁한 논리다. 르포 작가한승태가 쓴 『고기로 태어나서』의 한 대목을 빌리자면 "우리가 이런저런 윤리나 논리에 대해 고민하는 이유는 모두에게공평하게 잔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야기하는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니까. 먹거리로서의 살생을 포기할 수 없다면 적어도 오락거리로서의 살생과 학대부터 없애 나가야 한다.  - P231

벌교읍 전체가 ‘태백산맥 민속촌‘ 같기도 하다. 읍민들이 조정래 작가를 마주치면 "선생님 덕에 저희가 먹고삽니다. 정말 고맙습니다."라고 인사를 한다는데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든다. 한 소설가가 소설의 배경으로 벌교를 선택하는 순간 문학의 운명, 벌교의 운명, 꼬막의 운명,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운명이 바뀌었다. 물론 벌교가 가진 역사적 자원, 즉 동학농민운동부터 항일운동으로 이어지는 강력한 저항의 역사(정확히는 벌교가 속했던 낙안군의 역사다. 낙안군은 1908년 일제의 입김에 의해 찢겨 서쪽은 보성에, 동쪽은 순천에 편입되었다.)가 작가로 하여금 그러한 선택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태백산맥』이 가진 문학적 자원이 거꾸로 벌교의 경제를 받쳐주고 자존심을 지켜 주고 있는 것이다.
한때는 당대와 후대 사람들의 의식과 삶에 큰 영향을 끼쳤던 문학이 하나의 ‘작은 취향‘이 된 이 시대에 평범한 일상의 공간 속에서 문학이 힘을 발휘해 사람들을 돕고 또 사람들은 그에 감사해하는 이 그림은 우리에게 조금은 뭉클한 기분을 들게 했다. - P258

이전의 여행들이 주로 그 지역의 명소나 음식, 풍광으로 기억에 남았다면 축제를 통해 방문했던 지역들은 유독 사람들로 기억에 남았다. 지역의 이름이 뉴스에 등장할 때마다 떠오르는 건 축제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가까이에서 한꺼번에 만나지 못했을 주민들의 얼굴이었고, 원고를 쓰고 술을 마실때마다 우리의 화제에 오르는 건 글에 미처 담지 못한 그들과의 이야기였으니까. 이 책에 등장하는 곳들을 모두 다시 가 보고 싶은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축제장 안팎에서 마주치고 스쳐 갔던 모든 이들의 안녕이 궁금하고, 그들의 삶의 공간으로서 도시의 안부가 궁금하다. 앞으로 어떻게 변해 갈지도.
한편으로는 아직 가보지 못한 지역이 많다는 사실에도 무척 설렌다. 독특한 자연으로, 장소에 서린 역사로, 역사에서흘러나온 문화로, 주변 지역과 얽힌 이야기로, 무엇보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로 만들어진 지역 저마다의 색깔과 무늬를 따라가는 일을 어서 다시 시작하고 싶다. 축제여도, 아니어도 좋을 것이다. 자, 또 어디까지 가 볼 수 있을까. - P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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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범죄자 처벌이 철폐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사람들은 범죄자 처벌이 어떤 습관적 범죄자에게는 효과가 없을뿐더러) 그 사건에 대해서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만약 우리가 처벌 여부를 결정할 때 정말로 단기적 효과를 계산한다 해도 잠재적 범죄자는 그것을 예상하고 계산에 넣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단 범죄가 일어나고 난 후에는 처벌이 무가치해진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고, 그래서 해 볼 테면 해 보라는 식의 배짱으로 행동하고 벌을 받지 않을수 있다. 유일한 해결책은 즉각적인 효과와는 무관하게 범죄자를 처벌하는 단호한 정책을 채택하는 것이다. 처벌하겠다는 엄포가 없으면 해볼 테면 해 보라는 식의 배짱도 없을 것이다. 올리버 웬델 홈스는 이렇게 설명했다. "만일 내가 교수대에 설 (혹은 전기 의자에 앉을) 사람과 철학적 대화를 나누고 있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의 행동을 당신으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그런 행동을 피할 수 있도록 우리는 공익을 위해 당신을 희생시키고자 합니다. 원한다면 당신 자신이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병사라고 생각해도 될 겁니다. 그러나 법은 약속대로 지켜져야 합니다. 정의를 "원칙의 문제" 로서 적용하는 정책이 이 약속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사실은 즉각적인 대가나 상식과의 일치와는 무관하다. 만약 사형을 기다리는 어느 죄수가 자살을 기도한다면, 우리는 그를 신속히 병원으로 후송해서 응급처치를 하고 최고의 현대 의학으로 그의 목숨을 살린 다음 그를 처형할 것이다. 그것은 "정의를 기만" 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차단하는 정책의 일부이다. - P323

 우리가 공동체에서 살아가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주된 수단은 억제 기능을 가진 그 뇌 체계에 의존한다. 유혹을 위한 체계를 이해한다고 해서 억제를 위한 체계에 기초를 둔 우리의 수단을 버릴이유는 없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사람들에게 행동의 책임을 지우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고, 의지, 영혼, 자아 또는 기계 속의 어떤 유령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 P326

오늘날 마음과 뇌에 대한 어떤 발견들은 책임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되었지만, 그것은 책임의 영역을 축소하기보다는 확대할 것을 요구하는 듯하다. 여성을 괴롭히고 때리는 행위에서 때때로 최고조에 달하는 욕구가 많은 남성에게 존재한다고 가정해보자. 그것은 정말로, 어쩔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그런 범죄를 지은 남성들을 보다 관대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강력하고 광범위한 충동을 억제하는 최고의 방법으로써 보다 확실하고 엄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어느 사악한 정신병자가 동정심이 없고 그로 인해 희생자의 고통을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의 능력 수준이 낮다고 해서 처벌을 완화해야 하겠는가? 아니면 그가 이해하는 유일한 언어로 교훈을 주기 위해 더욱 확실하고 엄하게 처벌해야 하겠는가? - P328

왜 사람들의 직관은 정반대- "자신을 통제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면 보다 관대하게 처벌해야 한다."와 "자신을 통제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면보다 엄하게 처벌해야 한다." ―로 갈리는가? 그 이유는 억제의 역설에있다. 어떤 사람들은 소화전 앞에 주차를 못하게 하는 건 국수 가락으로한 대 때리겠다는 위협만으로 충분하다고 가정해보자.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좋지 못한 유전자, 좋지 못한 뇌, 좋지 못한 유년 시절 때문에 열 대를 때리겠다고 위협할 필요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불법 주차자를 아홉 대로 처벌하는 정책은 불필요한 고통을 초래하고 문제를 해결하지못할 것이다. 아홉 대는 보통 사람들을 막기에는 필요 이상이고 결함을 가진 사람을 막기에는 필요 이하이기 때문이다. 열 대의 형벌만이 불법주차와 채찍질을 모두 감소시킬 수 있다. 모두를 억제할 수 있고, 누구도 소화전을 막지 않을 것이며, 누구도 매를 맞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설적이게도 극단적인 두 정책 (가혹한 처벌과 무벌 정책)이 바람직하고, 중도적인 정책들은 그렇지 않다. 물론 현실적으로 사람들의 억제 경계는 단 두 개의 가치로 고정되지 않고 넓게 분산되어 있으며(어떤 사람은 한 대, 또 어떤 사람은 두 대 등등), 그래서 범행 억제의 이득과 가해 비용의 무게를 어떻게 재느냐에 따라 중간에 놓인 여러 수준의 처벌이 바람직할 것이다. - P329

신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악행이 반복된다는 것은 그것이 우연한 도착 행위가 아님을 말해 준다. 아무도 볼 수 없는 전지전능한 권위자는 성전의 전사들을 끌어 모으는 사악한 지도자들에게는 아주 쓸 만한 후원자다. 또한 입증할 수 없는 믿음은 객관적으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부모와 동료들로부터 전해지기 때문에 집단마다 다르고 그래서 서로를 구별하는 견장이 된다. - P336

 사람들의 전형은 일반적으로 통계와 일치하며, 많은 경우 그 통계적 치우침은 성이나 인종 집단 사이에 존재하는 실제적 차이보다 낮게 매겨지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렇다고해서 전형적 특성이 변하지 않는다거나 사람들이 전형적 특성을 불변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이 아니라, 단지 사람들이 그러한 특성을 그때그때 상당히 정확하게 지각한다는 뜻이다.
게다가 인종 집단에 독특한 특징이 있다는 생각이, 해당 집단의 모든 구성원이 그러한 특성을 공유한다는 믿음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독일인이 평균적으로 비독일인보다 더 능률적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모든 독일인이 모든 비독일인보다 더 능률적이라고 믿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사람들은 개인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알면 아무 어려움 없이 전형을 무시한다.  - P362

물론 많은 전형이 부분적으로 정확하다고 해서 인종 차별, 성차별,
인종적 편견이 괜찮다는 것은 아니다. 공적인 면에서 사람들이 개인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민주주의적 원리와는 완전히 무관하게, 우리가 전형에 대해 신경을 써야 하는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직접적인 경험보다는 적대적인 묘사를 기초로 한 전형은 십중팔구 부정확하다. 그리고 어떤 전형들은 단지 예언에 맞춰 행동하는 경향 때문에 정확해진다. 40년 전에는 여성이나 아프리카계 미국인에게 주지사나 대통령 후보 자격을 부여하지 않는 것이 옳았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순전히 자격을 가로막는 장벽 때문이었다. 그들에겐 자격이 없다는 믿음 때문에 입학을 거부했던 대학 정책이 대표적인 예이다. 제도적 장벽이 철폐된 후에야 현실이 변할 수 있었다. 좋은 소식은 현실이 변하면 사람들의 전형도 함께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 P364

완곡 표현의 바퀴는 사람의 마음에서는 말이 아니라 개념들이 1차적이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어떤 개념에 새 이름을 붙이면 그 이름에는 개념의 색깔이 스며든다. 개념은 적어도 장기적으로 볼 때는 이름 때문에 새로워지지 않는다. 소수 인종을 가리키는 이름들은 사람들이 그들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갖고 있는 한 계속 변할 것이다. 그 이름이 어느 하나로 고정될 때 우리는 상호 존경심이 정착되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 P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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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다. 축제 프로그램의 하나로 매년 ‘아랑규수선발대회‘를 연다. 이쯤 되면 정말 ‘어쩌라고‘와 ‘어쩌려고‘를 넘어 ‘어쩌자고‘ 하는 기분이 드는데, 행사 내용도 가관이다. 밀양에 살거나 고향이 밀양인 17세 이상 28세 이하 ‘미혼‘ 여성들이 필기시험을 치르고, 아랑이 ‘살해당한 현장‘인 영남루에 모여 ‘재예 겨루기‘를 한다. 한복을 갖춰 입고 머리도 길게 땋아 내린 여성들이 한데 모여 차를 얼마나 맛있고 곱게 우리는지, 다과상을 어떻게 차리는지, 절하는 자태는 어떤지 등으로 심사를 받고 ‘장기자랑‘까지 한다. (1등은 다음 해 축제의 성화 최종 봉송자가 된다.) 주최 측은 이 행사의 취지를 "아랑의 뜻을 되새기기 위해"라고 밝혔는데, 그러려면 ‘규수‘를 뽑을게 아니라 영남루에서 성폭력 가해자 규탄대회 같은 걸 열어야 하는 게 아닐까. 여기에 쓸 예산으로 그 어느 지자체보다도 강력한 성폭력 대응 TF팀 ‘아랑‘을 만들고 운영하는 게 낫지 않을까.
물론 오랜 세월 아랑을 만들어온 방식을 갑자기 바꾸기는 힘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정한 ‘고퀄‘은 크레인 위에서가 아니라 낡고 상한 것을 버리는 데에서 나온다. 나비가 된 아랑을 높이 띄우려고만 하지 말고, 아랑이란 글자에 ‘리‘ 하나만끼워 넣으면 아리랑이 될 뿐인 것을 무리해서 엮으려 이런저런 의미를 덧대지 말고, 시대와 윤리에 맞게 재해석된 아랑에게 제대로 하늘을 날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
- P106

지역축제의 작은 대회에 나간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나올 반응들.("심지어 아리랑이 주제래!") 혹여나 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도 ‘가오‘ 빠지고 눈치 보여서 그러지 못했을 성격으로 10대를 보낸 우리의 눈에는 그럼에도 결국 이 무대 위에 선 아이들이 참 눈부셨다. 이들이 「밀양아리랑」을 현대적으로 바꿔 내기 위해,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수없이 돌려 들으며 고민했을 시간들, 서른 명의 여중생들이 아리랑에 맞는 스텝을 찾아내고 오랜 시간을 들여 발을 맞췄을 시간들을 생각하면 어쩐지 힘이났다. 누군가들의 비웃음이나 놀림을 눈 딱 감고 무시하고 문득문득 꺼내 보며 웃을 수 있는 순간을 쟁취해 낸 사람들에게서 얻는 어떤 기운 같은 것.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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