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인 교육은 주로 빈 서판을 기초로 한다. 아이들이 텅 빈 채학교에 오면 그들의 마음에 지식이 침전되고 그 지식은 후에 다양한 시험을 통해 재생산된다. (전통적인 교육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예금과대출 모델이라 부른다.) 빈 서판은 또한 초기의 몇 학년도가 평생의 사회적 가치가 형성되는 기회 지대라는 이론을 강조한다. 오늘날 수많은 학교들이 그 초기 학년도를 이용해 환경, 성, 성적 관심, 인종적 다양성에대해 취해야 할 바람직한 태도를 주입시킨다. 진보적인 교육은 대부분 고상한 야만인에 기초한다. A. S. 닐은 유명한 저서 『서머힐』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이는 선천적으로 현명하고 현실적이다. 어른의 가르침 없이 혼자 내버려두면 발달할 수 있는 데까지 발달한다." 닐을 비롯해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진보적 이론가들은 학교 교육에서 시험, 학년, 교과과정은 물론이고 심지어 책까지 제거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어떤 학교도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지만 그 운동은 교육 현실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완전 언어 (Whole Language)라는 이름의 독서 교육 방법에서는 아이들에게 어떤 철자가 어떤 소리와 어울리는가를 가르치는 대신 풍부한 책으로 둘러싸인 환경을 제공해 독서기술이 자발적으로 발달하기를 기대한다." 구성주의라고 알려진 수학교육 철학에서는 아이들에게 구구단을 외우게 하는 대신 집단적으로 문제를 풀게 함으로써 수학적 진리를 스스로 재발견하게 한다. 두 방법 모두 학생들의 지식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때에는 실패를 면치 못하지만, 그 옹호자들은 표준화된 시험 방법을 경멸하는 경향을 보인다. - P392
교육은 빈 서판에 무언가를 쓰는 것도, 아이들의 고상함이 활짝 피어나게 하는 것도아니다. 교육은 인간의 마음에 선천적으로 부족한 능력들을 보충하려는 과학 기술에 가깝다. 아이들은 걷기, 말하기, 사물 인식, 친구들의 개성을 기억하기 등을 배우기 위해 학교에 가지 않는다. 물론 그런 과제들은 읽기, 더하기, 연도 외우기 등보다 훨씬 어렵다. 그리고 글자 익히기, 셈, 과학 등을 배우기 위해 학교에 간다. 종 보편적으로 진화할 수 없을만큼의 최근 시기에 발명된 지식과 기술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결코 빈 수용체나 보편적 학습자가 아니라 특정한 사고와 학습의 도구 상자를 갖추고 태어난 존재이며, 설계 능력에서 벗어난 문제를 정복하기 위해서는 그 도구들을 영리하게 보강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아이들의 마음에 새로운 사실과 기술을 주입해야 할 뿐 아니라, 낡은 것들을 수정하고 억제해야 한다. - P393
사실 복제 인간은 다른 시대에 태어난 일란성 쌍둥이일 뿐이다. 아인슈타인에게 쌍둥이 동생이 있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는 강시나 좀비가 아니었을 것이고, 아인슈타인과 똑같은 의식의 흐름을 보여 주지도 않았을 것이고, 자신의 장기를 포기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어쩌면 아인슈타인과 전혀 달랐을지도 모른다(지능은 부분적으로만 유전되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의 세포로 복제 인간을 만들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복제에대한 기괴한 오해는 사람의 몸이 영혼으로 채워져 있다는 완고한 믿음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강시 군대, 블랭크, 장기 농장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복제가 영혼 없는 몸을 찍어내는 것이라 상상한다. 히틀러가 부활하거나 사람들이 파우스트처럼 영원한 생명에 집착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복제가 영혼이 딸린 몸을 찍어내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자식을 잃은 부모들 중에는 마치 죽은 자식을 되살릴 수 있을 것처럼 복제를 갈망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 또한 그런 생각이 기초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사실 죽은 자식을 복제한다고 해도 복제된 동생은 죽은형과는 다른 세계에서 성장할 뿐 아니라 다른 뇌 세포를 가지고 다른 감각 경험의 선로를 밟을 것이다. - P399
이 딜레마를 해결할 방법은 없다. 그것은 근본적인 모순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 모순은 개인이나 영혼에 대한 모 아니면 도 식의 개념이 수반된 우리의 직관 심리와 인간의 뇌는 서서히 진화했고 서서히 발달하며 서서히 죽는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잔인한 생물학적 사실 사이에서 빚어진다. 그리고 이런 사실은 낙태, 안락사, 동물의 권리 같은 도덕적 난제들이 명확한 그리고 직관적으로 만족스러운 방식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정책도 만족스럽지 못하다거나 그 문제가 전적으로 개인적 취향, 정치 권력, 또는 종교적 교의에 맡겨져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생명윤리학자 로널드 그린이 지적했듯이 그것은 다만 우리가 그 문제를 재구성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자연적인 경계를 발견하는 문제에서, 각 정책의 딜레마를 고려해 선과 악을 가장 훌륭하게 절충하는 경계를 선택하는 문제로 이동해야한다. 각각의 경우에 현실적으로 실행할 수 있고, 행복을 극대화할 수있고, 현재와 미래의 고통을 최소화할 수 있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 현재의 많은 정책들이 이미 이런 식의 화해와 타협을 거친 것들이다. 동물에 대한 연구에는 허용과 규제가 교차하고, 말기 태아는 개인으로서 완전한 법적 권리를 인정받지는 못하지만 산모의 생명이나 건강이 위협받는 경우가 아니라면 낙태되지 못하게 되어 있다. 그린은 경계를 발견하는 문제에서 경계를 선택하는 문제로의 이동에야말로 획기적인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 P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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