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 보면 많은 축제가, 나아가 인구 유출을 겪고 있는 지자체들의 모든 사업이 결국 이런 패턴 아닌가 싶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와 ‘이렇게라도 해야 하지 않나.‘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대개는 하는 쪽을 택하는. - P173
‘먹기 위해 동물을 죽이는 것‘과 ‘동물을 오락거리로 다루며 갖고 놀면서 고통스럽게 죽이는 것‘은 다른문제라는 데에 많은 사람들이 합의하는 것 같았다. 적어도 돼지 번지점프 행사에서는. - P223
"동물을 아끼는 사람이 인간도 아낀다."라는 말은 믿지않지만(히틀러만 봐도 그렇다.) "동물에게 잔인한 사람은 인간에게도 잔인하다."라는 칸트의 말은 믿는다. 그래서 "아이들이 너무 좋아해요!"라는 말로 맨손 잡기 같은 체험을 요약하는 말을 들으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인간의 생명 vs. 동물의 생명‘이라는 화두까지는 어림도 없고, ‘인간의 재미 vs 동물의 생명‘에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인간의 재미‘를 선택하는 그 해맑은 가학성이 별생각 없이 돼지를 번지점프대에 세우기도 하는 것이다. 아마 누군가에게는 번지점프당하는 돼지를 보는 것도 특별한 ‘체험‘이고 즐거운 유희였을 것이다. - P225
닭, 소, 말, 양, 돼지가 자유로운 환경에서 행복하게 사육되지 못하는 것은 개선해야 할 문제이지 다른 생물을 똑같이 학대할 수 있는 근거가 아니다. 그래선 안 된다. 세상의 모든 동물 학대를 정당화시킬 수 있는 비겁한 논리다. 르포 작가한승태가 쓴 『고기로 태어나서』의 한 대목을 빌리자면 "우리가 이런저런 윤리나 논리에 대해 고민하는 이유는 모두에게공평하게 잔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야기하는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니까. 먹거리로서의 살생을 포기할 수 없다면 적어도 오락거리로서의 살생과 학대부터 없애 나가야 한다. - P231
벌교읍 전체가 ‘태백산맥 민속촌‘ 같기도 하다. 읍민들이 조정래 작가를 마주치면 "선생님 덕에 저희가 먹고삽니다. 정말 고맙습니다."라고 인사를 한다는데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든다. 한 소설가가 소설의 배경으로 벌교를 선택하는 순간 문학의 운명, 벌교의 운명, 꼬막의 운명,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운명이 바뀌었다. 물론 벌교가 가진 역사적 자원, 즉 동학농민운동부터 항일운동으로 이어지는 강력한 저항의 역사(정확히는 벌교가 속했던 낙안군의 역사다. 낙안군은 1908년 일제의 입김에 의해 찢겨 서쪽은 보성에, 동쪽은 순천에 편입되었다.)가 작가로 하여금 그러한 선택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태백산맥』이 가진 문학적 자원이 거꾸로 벌교의 경제를 받쳐주고 자존심을 지켜 주고 있는 것이다. 한때는 당대와 후대 사람들의 의식과 삶에 큰 영향을 끼쳤던 문학이 하나의 ‘작은 취향‘이 된 이 시대에 평범한 일상의 공간 속에서 문학이 힘을 발휘해 사람들을 돕고 또 사람들은 그에 감사해하는 이 그림은 우리에게 조금은 뭉클한 기분을 들게 했다. - P258
이전의 여행들이 주로 그 지역의 명소나 음식, 풍광으로 기억에 남았다면 축제를 통해 방문했던 지역들은 유독 사람들로 기억에 남았다. 지역의 이름이 뉴스에 등장할 때마다 떠오르는 건 축제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가까이에서 한꺼번에 만나지 못했을 주민들의 얼굴이었고, 원고를 쓰고 술을 마실때마다 우리의 화제에 오르는 건 글에 미처 담지 못한 그들과의 이야기였으니까. 이 책에 등장하는 곳들을 모두 다시 가 보고 싶은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축제장 안팎에서 마주치고 스쳐 갔던 모든 이들의 안녕이 궁금하고, 그들의 삶의 공간으로서 도시의 안부가 궁금하다. 앞으로 어떻게 변해 갈지도. 한편으로는 아직 가보지 못한 지역이 많다는 사실에도 무척 설렌다. 독특한 자연으로, 장소에 서린 역사로, 역사에서흘러나온 문화로, 주변 지역과 얽힌 이야기로, 무엇보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로 만들어진 지역 저마다의 색깔과 무늬를 따라가는 일을 어서 다시 시작하고 싶다. 축제여도, 아니어도 좋을 것이다. 자, 또 어디까지 가 볼 수 있을까. - P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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