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매 순간 두려움이 나를 지배하겠지. ‘오늘, 모든 일이 만천하에 드러날 거야‘ 라는 생각으로 늘 고통 받겠지. 가령, 사소한 범죄와 비행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내뱉는 작은 거짓말들을 저질렀다고 치자. 정말 두려운 건 범죄와 비행 자체는 아닐 것이다. 자신이 무능하고 무책임하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들키는 게 더욱 두려울 것이다. 그 두려움은 절대로 떨쳐버릴 수 없다.
문명과 야만 사이의 가느다란 선을 넘어가면 혹시 그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있을까? 그 선을 정말 쉽게 넘어갈 수 있다는 걸, 10억분의1초에도 넘어갈 수 있다는 걸, 그저 손만 내밀면 그만이라는 걸 누구나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선을 겁낸다.
그 선을 넘은 다음에는? - P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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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해군대장 출신 사이토 마코토는 1919년 8월 조선총독부 제3대 총독으로 부임했다. 3·1운동으로 촉발된 일제의 조선 식민통치 위기를 수습해 지배체제를 안정시키라는 특명을 받은 터였다. 그는 취임 즉시 민심 수습책의 하나로 전임 총독들이 펼친 강압적 ‘무단정치‘를 종식하고 새로운 ‘문화정치‘를 표방했다. 그는 총독을 문관에 개방하고, 조선인 차별대우 철폐, 지방분임주의, 조선 재래 문화와 습관 존중, 언어 집회와 출판의 자유, 경찰 기관의 정비, 인재 등용, 문호 개방 등을 새로운 시정방침으로 발표했다.
이에 따라 조선합병 후 헌병이 주로 담당하던 치안 업무를 보통경찰이 맡도록 했다. 또 제복을 입고 칼을 차고 근무하던 관리와 교사들도 조선 민중의 반감을 불러일으킨다는 판단에 따라 민간인 복장으로 전환했다. 총독부 관리나 보통학교 교장, 경찰관 등에 조선인을 임용하기 시작했고, <조선일보>, <동아일보>, <시대일보> 등 조선어 신문의 발행도 허용했다. 무단통치 시절에 비해 민주주의적 권리가 대폭 신장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런 통치 형태의 변화는 어디까지나 식민지 지배를 공고하게 다지기 위한 고도의 정치공학적 술책에 지나지 않았다. 겉으로는 자유가 대폭 허용된 것 같지만 실제로는 교묘한 방식으로 지배체제를 강화한 것이었다. - P62

반면 이런 기만적인 문화통치는 조선인 사회를 빠르게 분열시켰다. 문화통치 시기에 많은 지식인이 변절했고, 위장된 자치론으로 독립운동에 혼선이 빚어졌다. 일제 총독부 관료와 경찰, 교원등으로 채용된 조선인은 ‘친일파‘로 성장해 1930, 40년대 일제 식민통치의 적극적인 협조자 노릇을 했다. 온건파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문화통치의 개량 공간에서 활동하면서 점점 친일파로 전향하는 자들이 속출했다. 결국 문화통치를 통해 조선 식민통치 기반을 강화하겠다는 일제의 속셈이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둔 셈이다.
김상옥은 그런 문화통치의 기만성을 폭로하고, 3·1만세운동이후 침체에 빠진 국내외 독립운동에 자극제 역할을 하고자 사이토를 암살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된다. - P64

이튿날 장규동의 사망소식을 듣고 이시영, 조소앙, 윤기섭, 조완구, 신익희 등 임시정부 동지들이 달려와 3일장을 지내기로 하고 장례를 준비했다. 장례비가 없어 고민하던 차에 때마침 백범김구가 부음을 듣고 장례비조로 중국 돈 100원을 보내왔다.
실의에 빠져 있던 상옥은 그 돈을 보자 관을 사겠다며 혼자 시내로 나갔다. 하지만 그는 관을 사오지 않았다. 그 대신 비장한 표정으로 품속에서 모제르 7연발 권총을 꺼냈다. 관 대신 총을 산것이다. 장례를 준비하던 임정 동지들은 그런 상옥의 행동을 어이없어 했다.
그러나 그는 동지들에게 결연한 어조로 "사랑하는 내 동지 장규동을 죽인 것은 병마도 아니고 귀신도 아니다. 내 동지를 죽인것은 바로 일제의 경관이다. 이 총으로 그놈들을 죽여 동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말했다. - P108

바깥에서 "투항하라"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하지만 상옥은 조용히 눈을 감고 머리에 권총을 갖다 댔다. 그의 눈에 살짝 물기가 맺혔다.
배고픈 어린 시절 낮에는 첫불공장과 대장간에서 일하면서 밤에는 야학을 다니며 공부하던 일부터 동생 춘원과 함께 영덕철물상회를 운영했던 일, 3·1만세운동 후 <혁신공보>를 제작해 경성시내에 뿌렸던 일, 암살단을 조직해 사이토 총독을 죽이려고 한일, 상하이 시절 연인 장규동의 죽음, 임시정부 인사들을 만나고 의열단에 가입해 원대한 조국광복의 꿈을 키웠던 일 등 34년의짧은 생애가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스쳐갔다.
김상옥은 모제르 7연발총의 방아쇠를 힘껏 당겼다.
‘탕!‘ - P141

경찰 수뇌부는 물론이고 특별수사대장 미와도 이런 반론에 대해 뚜렷한 증거로 반박하지 못했다. 마침내 경찰 수뇌부는 의열단의 본거지인 중국 톈진과 베이징, 상하이 등에 수사요원을 보내상옥의 경성 잠입 목적과 종로서 사건과의 연관성 등에 대한 자세한 내막을 추적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경기도 경찰부에서 가장뛰어난 조선인 출신 고등계 형사 한 명을 중국으로 출장 수사를보냈다.
그러나 식민지 경찰의 이런 노력은 역설적으로 또 다른 거대한의열단 폭탄 사건의 시발점이 되고 말았다. - P151

놀랍게도 그가 바로 이태준이 소개해주겠다던 마자르였다. 혼자서 약산을 찾아 몽골에서 베이징까지 온 것이다. 마자르는 약산에게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해줬다. 그는 이태준과 함께 고륜을 떠나 베이징으로 오던 길에 러시아 백군을 만났는데, 이태준은 일본군 장교들의 농간으로 끝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외국인인 그는다행히 생명만은 건질 수 있었다. 친구 이태준은 비록 죽었지만 그와의 약속만큼은 꼭 지키고 싶어 혼자서 약산을 찾아 베이징까지 오게 됐다는 것이다.
헝가리 출신인 마자르는 이태준이 설명한 대로 지금까지 약산과 의열단이 접할 수 없었던 뛰어난 폭탄 제조 전문가였다. 또한 조선을 비롯한 약소민족의 독립운동을 열렬히 지지했다.  - P197

그로부터 한 달 정도 지난 1923년 1월 하순, 신채호는 마침내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를 없이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 생존의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였다."로 시작되는 6400 여 자 분량의 ‘조선혁명선언‘을 탈고했다.

"우리는 혁명수단으로 우리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을 죽여 없이곧 우리의 정당한 수단임을 선언하노라・・・・・・ 우리는 우리의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과 타협하려는 자(내정독립 · 자치 · 참정권 등을 주장하는 자)나 강도정치하에서 기생하려는 주의를 가진 자(문화운동자)나 다 우리의 적임을 선언하노라.…… 우리는 끊임없는 폭력, 암살, 파괴, 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여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 · 암살 · 파괴 · 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박탈치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 중에서 - P205

하지만 두 조직이 국내에서 함께 움직이면서 예상치 못한 보안상 허점이 노출됐다. 의열단은 원래 경찰과 밀정의 감시를 피하기위해 놀라울 정도로 보안에 철저한 조직이었다. 일본 경찰과 헌병이 김원봉을 체포하고 의열단 조직을 와해시키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했지만 번번이 허탕을 쳤던 이유도 의열단의 보안능력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 작전에는 고려공산당 당원들의 대대적으로 가담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고려공산당 당원은 의열단원과 달리 비밀작전에 대한 훈련을 받아본 경험이 전혀 없었다.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와 해박한 지식을 이용해 작전을 도울 수는 있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아마추어리즘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조동근은 김시현의 부탁을 받아 자기 집에 폭탄을 보관키로 했지만 발각될 것이 두려워 이번 작전과는 별 관계가 없는 3자인 홍우룡에게 폭탄을 맡기는 우를 범했다. 결국 홍우룡의 신고로 신의주 경찰의 수사가 시작됐다.
허점은 의열단 내부에도 있었다. 특히 중국에서 비밀 훈련을 받은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이번 거사를 위해 국내에서 충원된 의열단원들이 문제였다. 황옥이 경성에서 폭탄을 맡겼던 조황이 대표적이다. 조황 역시 경찰에 발각될 것이 두려워 평소에 알고 지내던 ‘김두형‘에게 폭탄 보관을 의뢰했다. 경찰의 끄나풀이던 김두형은 즉각 경기도 경찰부에 이 사실을 알렸고, 경찰은 황옥과 조황을 연이어 체포했다. 국내 작전의 총책임자인 김시현이 체포된것도 내부의 밀고 때문이었다. - P268

하지만 김원봉은 훗날 이 사건과 관련, 황옥이 자신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범행을 부인했던 것이라고 증언했다. 김원봉은 황옥이 톈진에서 경성으로 출발할 때 "우리의 혁명운동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오. 혹시 이번의 우리 계획이 불행히 패를 보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황공은 결코 우리가 이번에 취한수단 방법에 관하여는 일체, 발설을 마오. 한 번 드러나고 보면 같은 방책을 두 번 쓸 수는 없는 일 아니겠소?"라고 당부했다.
만약 황옥이 독립투사로서 기개를 보여주며 거사 가담을 시인하면 일제는 반드시 끝까지 추궁할 것이고, 그러면 이번 계획과 관련된 모든 비밀이 드러나면서 피해가 엄청나게 커질 게 불 보듯뻔했다. 그래서 황옥은 ‘친일 주구‘, ‘밀정‘ 또는 ‘변절자‘니 하면서온 세상이 자기를 조롱하고 비웃더라도 자기 하나 수모를 감수하면 조직이 안전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재판정에서 그렇게 행동했다는 것이다.
- P274

의열투사들의 고난스런 해방 후 삶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우리의 망각이다. 이 책을 집어든 독자 가운데는 거의 처음으로 김상옥과 황옥, 김시현, 김원봉의 이름을 접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것이다.
과거사를 대하는 프랑스의 한 사례는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준다. 프랑스의 모든 고등학교에서는 2008년부터 해마다 10월이면 제2차 세계대전당시 독일 나치에게 처형된 17세 레지스탕스 소년을 추모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2007년 5월 대통령 취임식을 마친 후 곧바로파리 외곽의 레지스탕스 추모장을 방문, 나치 독일과 싸우다 숨진레지스탕스가 프랑스 청년의 귀감이 되도록 교육하라고 지시한데 따른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쓰라린 경험을 안고 있는 우리는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조국독립을 위해 싸우다 쓰러져간 투사들의 삶을 조명하여 정당하게 평가하고 대우해주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이 책이 그런 우리의 노력에 조금이나 도움이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 P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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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여자를 그렇게 비인간적으로 대우하던 시대는 지났다. 우리는더 이상 여자들을 가두거나 뇌의 일부를 잘라내지 않는다. 그 대신 약을 준다. 여자에게 항우울제가 처방될 확률은 남자의 2.5배다. 항우울제를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정신 건강 문제가 있는 사람들의 인생을 바꿔놓을 수도 있다. 그러나 왜 그렇게 여자에게 많이 처방되는지를 질문해볼 가치는 있다. 단순히 여자가 도움을 더 많이 청하기 때문은 아니다. 2017년 스웨덴의 연구에 따르면 실제로 우울증 때문에 병원을더 많이 찾는 쪽은 남자였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여자에게 항우울제가 많이 처방되는가? 단순히 여자들이 "마음이 약하기" 때문인가? 자신에게 맞지 않는 세상에서 사는 것이 우리 여자들의 정신 건강에 영향을 미치나? 아니면 항우울제는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여자들을 위한 새로운 그리고 확실히 선호되는 전전두엽절개술인가? - P282

우리는 여자들이 하는 무급 노동이, 여자 개인이 자신의 개인적 이익을 위해 자기 가족을 개인적으로 돌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사회는 여자들의 무급 노동에 의존할뿐 아니라 그로 인한 혜택을 입는다. 우리 모두가 낸 세금으로 운영하는공공서비스 예산을 정부가 삭감한다고 해서 그 서비스의 수요가 갑자기 사라지지는 않는다. 단지 여자들에게 노동이 떠넘겨질 뿐이다. 그것이 여성의 유급 노동력 참여율과 GDP에 미치는 모든 부정적 영향과 함께. 그래서 여자들이 하는 무급 노동은 단순한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만든 제도 속에 포함되어 있으며 집어넣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쉽게 뺄 수도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데이터를 수집한 다음에 남성 편향적 허구가 아니라 현실을 중심으로 경제를 다시 설계할 의지뿐이다. - P311

 위협은 공포에서 비롯되는데 사실 그 공포는 젠더 데이터 공백에 의해 생긴 것이다. 남자의 목소리와 남자의 얼굴로 가득한 문화 속에서 자란 어떤 남자들은 그들이 당연히 남자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권력이나 공간을 여자들이 빼앗아 갈까 봐 두려워한다. 그 공포는 우리가 문화적 젠더 데이터 공백을 메워서 남자아이들이 더 이상 공공영역을 자기들 것이라고 생각하며 자라지 않게될 때까지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 P345

그러나 복구 계획자들은 여자들에게 필요한 것을 묻지 않음으로써 여성정책연구소가 (1차 허리케인, 2차 홍수에 이은) "3차 재난"이라고 부른 것을 일으켰다. 이 3차 재난은 "제방붕괴와 마찬가지로 인재"였다.
뉴올리언스 시 공공주택에 살았던 임차인 대부분은 청소만 마치면원래 살던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고 돌아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 (공공주택 대단지 4곳의 별명인) "더 브릭스the bricks"는 무너지지 않은 데다 주택도시개발부에 따르면, 골조가 온전해서 청소 후에 다시 살아도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다. "뉴올리언스에 집세가 저렴하고골조가 온전한 집이 대단히 부족한데도" 이 집들을 철거하기 위한 자금지원 계획이 발표됐다. 그 대신 중저소득자를 위한 집이 들어설 예정이었는데 기존의 4534채에 한참 못 미치는 706 채밖에 안 됐다.
마이애미의 "우리가 다시 지을 것이다" 처럼 뉴올리언스 재건 계획자들은 "이제 영원히 살 곳을 잃은 전부 저소득자이고 대부분이 흑인여성인 수천 명"에게 필요한 것보다 사업 이익을 더 중요시한 듯하다. - P356

성별/젠더 데이터 공백에 대한 해법은 분명하다. 여성 진출 공백을 메우면 된다. 의사결정과정에, 연구에, 지식 생산에 참여한 여자들은 여자를 잊지 않는다. 여성의 삶과 관점이 빛 속으로 나오게 된다. 이는 세계 곳곳의 여자들에게도 이롭지만, 코바늘뜨기하는 수학과 교수 타이미나의 이야기가 보여주듯이, 인류 전체에게 이로운 경우도 많다. 그래서 다시 프로이트의 "여성성이라는 수수께끼"로 돌아가보면 해답은 처음부터 우리 눈앞에 있었다. 여자들에게 물어보기만 했으면 됐던 것이다. - P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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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종로서에 폭탄을 던졌나

겨울바람이 제법 매섭게 불던 1923년1월 12일 금요일 저녁 7시 반, 경성 종로의 천도교당(지금의 수운회관)에는 진보적 성향의 사회단체인 서울청년회가 주최하는 대중연설회가 열리고 있었다. 빈곤타파와 자유연애, 사상자유 등 매우 민감한 주제를 다룬다는 소문 때문인지 초저녁부터 500여 명이 넘는 청중이 좌석을 가득 메웠다. - P13

김두한은 자신이 백야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어렸을 때부터 미와에게 온갖 횡포와 감시를 당했으며, 응징 차원에서 광복 직후 남산 인근 자택에 숨어 있던 미와를 끌어내 남산인근에 생매장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두한의 이런 주장과 당시 문헌자료를 대조하면 선뜻 납득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일부 역사학자들이 김두한의 증언에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하는 이유이기도하다.
우선 두 사람의 이력으로 보면 서로 부딪힐 일이 없었다. 김두한이 한창 주먹생활을 하던 1930년대 후반에 미와는 이미 종로서를 떠나고 없었다. 그는 1930년에 경기도 경찰부, 1934년에 충남경찰부를 거쳐서 1935년부터는 함경북도에서 경찰서장과 경찰국장 등으로 일하고 있었다. 미와는 그곳에서 경찰생활을 끝낸 뒤1940년대엔 총독부 보안과 촉탁으로 잠시 일했을 뿐이다.
더구나 미와는 1884년생이다. 김두한과는 무려 서른네 살이나 나이차가 난다. 김두한이 20대일 때 미와는 이미 환갑이 넘은 노인이었다. 일본 기록에는 미와가 해방 후 일본으로 돌아가 1960년대에 사망한 것으로 돼 있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김두한이 자신의 활약을 다소 과장하려다 보니, 종로서 출신이면서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가장 악명 높은 고등계 형사인 미와를 거론한 것 아니냐는 문제 제기도 만만치 않다. - P27

반면 일제는 이런 ‘개량 공간‘으로 들어오지 않는 항일독립운동세력을 한층 가혹하게 탄압했다. 칼 찬 헌병을 고등계 형사들로 바꿨을 뿐 조선 곳곳에서 더욱 교묘한 감시와 통제가 자행됐다.
이처럼 변화된 정세에서 독립운동 단체와 인사들은 무장투쟁론과같은 강경한 투쟁 노선에서부터 적절한 때를 기다리며 민족의 실력을 키우자는 준비론, 미국 등 열강의 힘을 빌리자는 외교론 등을 놓고 격렬한 노선투쟁을 벌였다.
이런 상황에서 김상옥의 입장은 분명했다. 조선물산장려운동이나 <혁신공보> 발행 등 애국계몽운동을 직접 체험하며 한계를 뼈저리게 느낀 그는 준비론과 외교론 등을 단호히 배격했다. 그는 일제를 무너뜨리려면 무력투쟁을 벌이는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그는 무력투쟁 노선에 공감하는 동지들을 규합해 1919년 12월에 ‘암살단‘을 구성했다. 이 단체는 명칭 그대로 조선총독을 비롯해 총독부 고관과 민족반역자 암살 등을 목적으로 한 비밀결사였다. 바로 이 암살단의 활동이 김상옥의 존재를 일제와 조선 민중에게 뚜렷이 각인시킨 첫 계기가 됐다.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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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이 필요로 하는 화덕이나 실행계획을 몇십 년째 설계하지 못하여 초래된 보건 재난은 앞으로 더욱 악화될 예정이다. 기후변화로 인해 토양침식과 사막화가 가속화되어 질 좋은 연료를 구하기가 힘들어지면 더욱 강한 유독가스를 배출하는 나뭇잎, 짚, 배설물을 연료로 사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환경친화적인 화덕이 여성의 삶을 엄청나게 개선하리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안타까운 일이다. 2011년 예맨의 연구에 따르면 물과 가스 화덕이 없는 여자들은 자기 시간의 24%를 유급노동에 소비했다. 반면에 물과 가스 화덕이 있는 여자들은 그 비율이 약52%까지 올라갔다." 인도의 화덕 사용에 관한 2016년 보고서에 따르면 환경친화적인 화덕-예를 들면 조리 시간을 혁신적으로 단축하는 값싸고 이동이 간편한 아나기 2 Anagi 2-으로 바꾼 여자들은 사교 활동, 가족과의 시간, 지역 모임에 더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또한 아이들도 학교에 더 자주 보내는 것으로 나타났다. 
- P201

사실 모체 외상과 관련된 태아 사망 원인 1위가 자동차 사고인데도" 임부를 위한 안전벨트조차 없다. 2004년 연구에 따르면 임부는 표준 안전벨트를 사용해야 하지만 7개월 이상 임부의 62%가 표준 안전벨트를 매지 못한다. 게다가 아랫배가 나온 임부의 경우 3점 안전벨트가 자궁 위로 올라갈 수 있는데 1996년 연구에 따르면 안전벨트를 자궁 밑으로 맨 경우와 비교했을 때 복부에 가해지는 충격이 3~4배에 달해 "태아 부상의 위험도 그만큼 높아진다" 표준안전벨트는 임신하지 않은 여자에게도 안 좋다. 안전벨트가 유방 사이로 지나가는 게 불편해서 많은 여자들이 "잘못된 방법으로 매기 때문에 또다시 부상 위험이 높아진다(작은 남성 인형이 아니라 제대로 된 여성인형을 만들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다). 그리고 임신기간 동안에는 여자의 배만 변하는 것이 아니다. 유방 크기의 변화 또한 안전벨트의 위치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그 효력을 감소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또다시 여성에 관한 데이터가 있지만 그냥 무시하는 상황과 마주친다. 지금 필요한 일은 공백 없는 데이터를 사용해 자동차를 처음부터 다시 설계하는 것이지만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충돌시험 인형의 모델이 될 여자는 쉽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 P241

채워야 할 의학계의 젠더 데이터 공백이 여전히 많긴 하지만 여자가 단순히 ‘작은 남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지난 20년간 명백히 증명었다. 남체와 여체는 세포단위에서까지도 다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것을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
의학 교과서에 성별별 정보를 집어넣기 위해서는 우선 성별별 데이터가 존재해야 하지만 지금껏 의학 연구에서 여성이 거의 배제되어왔기에 데이터가 심각하게 부족하다. 심지어 가장 기초적인 성결정에서조차 성별 데이터 공백이 있다. 성별을 결정하는 부분이 Y염색체라는 획기적인 논문이 1905년에 나온 이후로 여성은 (아이러니하게도) 디폴트가 되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디폴트가 여성에게 주목한다는 뜻이아니었다. 오히려 연구는 "능동적" 과정으로 간주된 고환 발달에 초점을 맞추고 여성의 성 발달은 수동적 과정으로 간주했다. 2010년에 난소결정이라는 능동적 과정을 연구하기 시작할 때까지 말이다. - P252

해부학 교과서에 여자를 넣지 못한 것처럼 임상시험에 여자를 넣지못한 것은 남체를 디폴트인체로 보는 데서 비롯된 역사적 문제이지만 20세기 최대의 의료계 스캔들 중 하나가 터진 뒤인 1970년대에 이 전통적 편향이 급격히 악화되면서 여성 건강에 엄청난 피해를 가져왔다. 
1960년에 의사들은 입덧이 심한 임부에게 탈리도마이드를 처방하기 시작했다. 이 약은 1950년대 후반부터 여러 나라에서 일반의약품으로 판매되었던 약한 진정제로 개발자들이 "아무리 투여량을 높여도 쥐1마리 죽지 않았기 때문에" 안전하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쥐는 죽지않았어도 태아 발달에는 영향을 미쳤다(제조사들은 이르면 1959년부터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1962년에 이 약이 판매 금지되기 전까지 전 세계에서 만 명이 넘는 아이들이 탈리도마이드 관련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이 스캔들의 여파로 1977년 미국 식품의약국(이하 FDA로 표기)은 임신 가능성이 있는 여자를 임상시험에서 제외하라는 지침을 발표했다. 이 지침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남성 표준은 아무런 이의 제기 없이 받아들여졌다.
- P254

 FDA의 정의에 따르면 복제약은 "이미 시판 중인 상표 약과 동일 성분으로 만들어진 약‘으로, 원본 약의 특허가 만료된 후에 판매되기 시작한다. 복제약 시험은 원본 약 시험보다 훨씬 덜 엄격해서 생체이용률이 원본과 동일하다는 것만 입증하면 되는데 "거의 예외 없이" 젊은 성인 남성만을 대상으로 시행된다. 이것은 중요하다. 유효성분이 같더라도 첨가제와 제조법이 다르면 약효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2002년 FDA 의약품평가연구센터 Center for Drug Evaluation and Research는 "원본 약과 비교했을 때 대부분의 복제약이 생물학적동등성에서 남녀간에 상당한 통계학적 차이를 보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 P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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