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해군대장 출신 사이토 마코토는 1919년 8월 조선총독부 제3대 총독으로 부임했다. 3·1운동으로 촉발된 일제의 조선 식민통치 위기를 수습해 지배체제를 안정시키라는 특명을 받은 터였다. 그는 취임 즉시 민심 수습책의 하나로 전임 총독들이 펼친 강압적 ‘무단정치‘를 종식하고 새로운 ‘문화정치‘를 표방했다. 그는 총독을 문관에 개방하고, 조선인 차별대우 철폐, 지방분임주의, 조선 재래 문화와 습관 존중, 언어 집회와 출판의 자유, 경찰 기관의 정비, 인재 등용, 문호 개방 등을 새로운 시정방침으로 발표했다. 이에 따라 조선합병 후 헌병이 주로 담당하던 치안 업무를 보통경찰이 맡도록 했다. 또 제복을 입고 칼을 차고 근무하던 관리와 교사들도 조선 민중의 반감을 불러일으킨다는 판단에 따라 민간인 복장으로 전환했다. 총독부 관리나 보통학교 교장, 경찰관 등에 조선인을 임용하기 시작했고, <조선일보>, <동아일보>, <시대일보> 등 조선어 신문의 발행도 허용했다. 무단통치 시절에 비해 민주주의적 권리가 대폭 신장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런 통치 형태의 변화는 어디까지나 식민지 지배를 공고하게 다지기 위한 고도의 정치공학적 술책에 지나지 않았다. 겉으로는 자유가 대폭 허용된 것 같지만 실제로는 교묘한 방식으로 지배체제를 강화한 것이었다. - P62
반면 이런 기만적인 문화통치는 조선인 사회를 빠르게 분열시켰다. 문화통치 시기에 많은 지식인이 변절했고, 위장된 자치론으로 독립운동에 혼선이 빚어졌다. 일제 총독부 관료와 경찰, 교원등으로 채용된 조선인은 ‘친일파‘로 성장해 1930, 40년대 일제 식민통치의 적극적인 협조자 노릇을 했다. 온건파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문화통치의 개량 공간에서 활동하면서 점점 친일파로 전향하는 자들이 속출했다. 결국 문화통치를 통해 조선 식민통치 기반을 강화하겠다는 일제의 속셈이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둔 셈이다. 김상옥은 그런 문화통치의 기만성을 폭로하고, 3·1만세운동이후 침체에 빠진 국내외 독립운동에 자극제 역할을 하고자 사이토를 암살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된다. - P64
이튿날 장규동의 사망소식을 듣고 이시영, 조소앙, 윤기섭, 조완구, 신익희 등 임시정부 동지들이 달려와 3일장을 지내기로 하고 장례를 준비했다. 장례비가 없어 고민하던 차에 때마침 백범김구가 부음을 듣고 장례비조로 중국 돈 100원을 보내왔다. 실의에 빠져 있던 상옥은 그 돈을 보자 관을 사겠다며 혼자 시내로 나갔다. 하지만 그는 관을 사오지 않았다. 그 대신 비장한 표정으로 품속에서 모제르 7연발 권총을 꺼냈다. 관 대신 총을 산것이다. 장례를 준비하던 임정 동지들은 그런 상옥의 행동을 어이없어 했다. 그러나 그는 동지들에게 결연한 어조로 "사랑하는 내 동지 장규동을 죽인 것은 병마도 아니고 귀신도 아니다. 내 동지를 죽인것은 바로 일제의 경관이다. 이 총으로 그놈들을 죽여 동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말했다. - P108
바깥에서 "투항하라"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하지만 상옥은 조용히 눈을 감고 머리에 권총을 갖다 댔다. 그의 눈에 살짝 물기가 맺혔다. 배고픈 어린 시절 낮에는 첫불공장과 대장간에서 일하면서 밤에는 야학을 다니며 공부하던 일부터 동생 춘원과 함께 영덕철물상회를 운영했던 일, 3·1만세운동 후 <혁신공보>를 제작해 경성시내에 뿌렸던 일, 암살단을 조직해 사이토 총독을 죽이려고 한일, 상하이 시절 연인 장규동의 죽음, 임시정부 인사들을 만나고 의열단에 가입해 원대한 조국광복의 꿈을 키웠던 일 등 34년의짧은 생애가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스쳐갔다. 김상옥은 모제르 7연발총의 방아쇠를 힘껏 당겼다. ‘탕!‘ - P141
경찰 수뇌부는 물론이고 특별수사대장 미와도 이런 반론에 대해 뚜렷한 증거로 반박하지 못했다. 마침내 경찰 수뇌부는 의열단의 본거지인 중국 톈진과 베이징, 상하이 등에 수사요원을 보내상옥의 경성 잠입 목적과 종로서 사건과의 연관성 등에 대한 자세한 내막을 추적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경기도 경찰부에서 가장뛰어난 조선인 출신 고등계 형사 한 명을 중국으로 출장 수사를보냈다. 그러나 식민지 경찰의 이런 노력은 역설적으로 또 다른 거대한의열단 폭탄 사건의 시발점이 되고 말았다. - P151
놀랍게도 그가 바로 이태준이 소개해주겠다던 마자르였다. 혼자서 약산을 찾아 몽골에서 베이징까지 온 것이다. 마자르는 약산에게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해줬다. 그는 이태준과 함께 고륜을 떠나 베이징으로 오던 길에 러시아 백군을 만났는데, 이태준은 일본군 장교들의 농간으로 끝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외국인인 그는다행히 생명만은 건질 수 있었다. 친구 이태준은 비록 죽었지만 그와의 약속만큼은 꼭 지키고 싶어 혼자서 약산을 찾아 베이징까지 오게 됐다는 것이다. 헝가리 출신인 마자르는 이태준이 설명한 대로 지금까지 약산과 의열단이 접할 수 없었던 뛰어난 폭탄 제조 전문가였다. 또한 조선을 비롯한 약소민족의 독립운동을 열렬히 지지했다. - P197
그로부터 한 달 정도 지난 1923년 1월 하순, 신채호는 마침내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를 없이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 생존의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였다."로 시작되는 6400 여 자 분량의 ‘조선혁명선언‘을 탈고했다.
"우리는 혁명수단으로 우리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을 죽여 없이곧 우리의 정당한 수단임을 선언하노라・・・・・・ 우리는 우리의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과 타협하려는 자(내정독립 · 자치 · 참정권 등을 주장하는 자)나 강도정치하에서 기생하려는 주의를 가진 자(문화운동자)나 다 우리의 적임을 선언하노라.…… 우리는 끊임없는 폭력, 암살, 파괴, 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여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 · 암살 · 파괴 · 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박탈치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 중에서 - P205
하지만 두 조직이 국내에서 함께 움직이면서 예상치 못한 보안상 허점이 노출됐다. 의열단은 원래 경찰과 밀정의 감시를 피하기위해 놀라울 정도로 보안에 철저한 조직이었다. 일본 경찰과 헌병이 김원봉을 체포하고 의열단 조직을 와해시키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했지만 번번이 허탕을 쳤던 이유도 의열단의 보안능력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 작전에는 고려공산당 당원들의 대대적으로 가담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고려공산당 당원은 의열단원과 달리 비밀작전에 대한 훈련을 받아본 경험이 전혀 없었다.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와 해박한 지식을 이용해 작전을 도울 수는 있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아마추어리즘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조동근은 김시현의 부탁을 받아 자기 집에 폭탄을 보관키로 했지만 발각될 것이 두려워 이번 작전과는 별 관계가 없는 3자인 홍우룡에게 폭탄을 맡기는 우를 범했다. 결국 홍우룡의 신고로 신의주 경찰의 수사가 시작됐다. 허점은 의열단 내부에도 있었다. 특히 중국에서 비밀 훈련을 받은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이번 거사를 위해 국내에서 충원된 의열단원들이 문제였다. 황옥이 경성에서 폭탄을 맡겼던 조황이 대표적이다. 조황 역시 경찰에 발각될 것이 두려워 평소에 알고 지내던 ‘김두형‘에게 폭탄 보관을 의뢰했다. 경찰의 끄나풀이던 김두형은 즉각 경기도 경찰부에 이 사실을 알렸고, 경찰은 황옥과 조황을 연이어 체포했다. 국내 작전의 총책임자인 김시현이 체포된것도 내부의 밀고 때문이었다. - P268
하지만 김원봉은 훗날 이 사건과 관련, 황옥이 자신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범행을 부인했던 것이라고 증언했다. 김원봉은 황옥이 톈진에서 경성으로 출발할 때 "우리의 혁명운동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오. 혹시 이번의 우리 계획이 불행히 패를 보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황공은 결코 우리가 이번에 취한수단 방법에 관하여는 일체, 발설을 마오. 한 번 드러나고 보면 같은 방책을 두 번 쓸 수는 없는 일 아니겠소?"라고 당부했다. 만약 황옥이 독립투사로서 기개를 보여주며 거사 가담을 시인하면 일제는 반드시 끝까지 추궁할 것이고, 그러면 이번 계획과 관련된 모든 비밀이 드러나면서 피해가 엄청나게 커질 게 불 보듯뻔했다. 그래서 황옥은 ‘친일 주구‘, ‘밀정‘ 또는 ‘변절자‘니 하면서온 세상이 자기를 조롱하고 비웃더라도 자기 하나 수모를 감수하면 조직이 안전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재판정에서 그렇게 행동했다는 것이다. - P274
의열투사들의 고난스런 해방 후 삶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우리의 망각이다. 이 책을 집어든 독자 가운데는 거의 처음으로 김상옥과 황옥, 김시현, 김원봉의 이름을 접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것이다. 과거사를 대하는 프랑스의 한 사례는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준다. 프랑스의 모든 고등학교에서는 2008년부터 해마다 10월이면 제2차 세계대전당시 독일 나치에게 처형된 17세 레지스탕스 소년을 추모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2007년 5월 대통령 취임식을 마친 후 곧바로파리 외곽의 레지스탕스 추모장을 방문, 나치 독일과 싸우다 숨진레지스탕스가 프랑스 청년의 귀감이 되도록 교육하라고 지시한데 따른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쓰라린 경험을 안고 있는 우리는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조국독립을 위해 싸우다 쓰러져간 투사들의 삶을 조명하여 정당하게 평가하고 대우해주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이 책이 그런 우리의 노력에 조금이나 도움이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 P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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