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종로서에 폭탄을 던졌나
겨울바람이 제법 매섭게 불던 1923년1월 12일 금요일 저녁 7시 반, 경성 종로의 천도교당(지금의 수운회관)에는 진보적 성향의 사회단체인 서울청년회가 주최하는 대중연설회가 열리고 있었다. 빈곤타파와 자유연애, 사상자유 등 매우 민감한 주제를 다룬다는 소문 때문인지 초저녁부터 500여 명이 넘는 청중이 좌석을 가득 메웠다. - P13
김두한은 자신이 백야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어렸을 때부터 미와에게 온갖 횡포와 감시를 당했으며, 응징 차원에서 광복 직후 남산 인근 자택에 숨어 있던 미와를 끌어내 남산인근에 생매장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두한의 이런 주장과 당시 문헌자료를 대조하면 선뜻 납득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일부 역사학자들이 김두한의 증언에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하는 이유이기도하다. 우선 두 사람의 이력으로 보면 서로 부딪힐 일이 없었다. 김두한이 한창 주먹생활을 하던 1930년대 후반에 미와는 이미 종로서를 떠나고 없었다. 그는 1930년에 경기도 경찰부, 1934년에 충남경찰부를 거쳐서 1935년부터는 함경북도에서 경찰서장과 경찰국장 등으로 일하고 있었다. 미와는 그곳에서 경찰생활을 끝낸 뒤1940년대엔 총독부 보안과 촉탁으로 잠시 일했을 뿐이다. 더구나 미와는 1884년생이다. 김두한과는 무려 서른네 살이나 나이차가 난다. 김두한이 20대일 때 미와는 이미 환갑이 넘은 노인이었다. 일본 기록에는 미와가 해방 후 일본으로 돌아가 1960년대에 사망한 것으로 돼 있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김두한이 자신의 활약을 다소 과장하려다 보니, 종로서 출신이면서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가장 악명 높은 고등계 형사인 미와를 거론한 것 아니냐는 문제 제기도 만만치 않다. - P27
반면 일제는 이런 ‘개량 공간‘으로 들어오지 않는 항일독립운동세력을 한층 가혹하게 탄압했다. 칼 찬 헌병을 고등계 형사들로 바꿨을 뿐 조선 곳곳에서 더욱 교묘한 감시와 통제가 자행됐다. 이처럼 변화된 정세에서 독립운동 단체와 인사들은 무장투쟁론과같은 강경한 투쟁 노선에서부터 적절한 때를 기다리며 민족의 실력을 키우자는 준비론, 미국 등 열강의 힘을 빌리자는 외교론 등을 놓고 격렬한 노선투쟁을 벌였다. 이런 상황에서 김상옥의 입장은 분명했다. 조선물산장려운동이나 <혁신공보> 발행 등 애국계몽운동을 직접 체험하며 한계를 뼈저리게 느낀 그는 준비론과 외교론 등을 단호히 배격했다. 그는 일제를 무너뜨리려면 무력투쟁을 벌이는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그는 무력투쟁 노선에 공감하는 동지들을 규합해 1919년 12월에 ‘암살단‘을 구성했다. 이 단체는 명칭 그대로 조선총독을 비롯해 총독부 고관과 민족반역자 암살 등을 목적으로 한 비밀결사였다. 바로 이 암살단의 활동이 김상옥의 존재를 일제와 조선 민중에게 뚜렷이 각인시킨 첫 계기가 됐다.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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