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의 대규모 기아는 1928~1932년 실시한 스탈린의 첫 번째 5개년 계획의 산물이었다. 이 기간에 스탈린은 공산당 최상부를 장악했고, 산업화와 집단화 정책을 강행했으며, 패배한 국민을 이끌 무서운 아버지로 부상했다. 그는 시장을 계획경제로, 농민을 노예로, 시베리아와 카자흐스탄의 불모지를 강제수용소 단지로 바꿔버렸다. 그의 정책은 수만 명을 처형으로, 수십만 명을 탈진으로 죽게 했고, 수백만명을 굶주림의 위험에 빠뜨렸다. 물론 공산당 내부의 반발을 우려하긴 했지만, 스탈린에게는 엄청난 정치적 재능과 총독들의 자발적인지지, 그리고 무엇보다 미래를 예견하며 미래를 만든다고 주장하는 관료체제가 있었다. 그 미래는 공산주의였다. 중공업이 필요하며, 따라서 집단농장이 필요하고, 결과적으로 소련 사회의 최대 집단인 농민을 통제해야 하는 공산주의 말이다. - P63

처벌을 위한 농민 대량 추방은 소비에트 경제의 강제노동 대량 이용과 맞아떨어졌다. 1931년 특별 정착지와 강제수용소는 ‘굴라크‘라는 단일 시스템으로 통합되었다. 소련인들 스스로 ‘강제수용소 제도‘라 부른 굴라크는 농업 집단화와 함께 시작되었고 집단화에 의존했다. 결과적으로 476개의 수용소 단지에 수용되게끔 1800만 명이 선고를 받았고, 150만 명에서 300만 명이 감금 도중에 사망했다. 자유농민은 노예 노동자가 되어, 스탈린이 소련 근대화에 필요하다고 믿었던 거대 운하, 광산, 공장 건설에 투입되었다. - P66

소련령 우크라이나 농촌사회 대부분은 여전히 종교 공동체였다.
젊고 야심만만하며, 공인된 종교인 공산주의 무신론에 이끌린 많은젊은이는 우크라이나 대도시나 모스크바 또는 레닌그라드로 떠났다. 무신론 공산주의 정권이 자신들의 동방 정교회를 탄압했지만, 농민들은 여전히 신자였고 상당수는 집단농장과의 계약을 악마와의 거래로 받아들였다. 사탄이 공산당원이라는 탈을 쓰고 이 땅에 나타났으며, 그의 집단농장이 고문과 저주를 불러올 명부를 기록한다고 믿는 사람도 있었다. 새로운 농기계센터는 게헨나의 전초기지처럼 보였다. 로마 가톨릭교도인 우크라이나의 일부 폴란드 농민은 집단화를 종말론적 관점으로 봤다. 어느 폴란드인은 집단농장에 참가하지 않는 이유를 아들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내 영혼을 악마에게 팔고 싶진 않단다." 이러한 독실함을 이해하는 당원들은 자신들이 스탈린의 제1계명이라 부른, 집단농장은 먼저 국가에 음식을 공급한 후 인민에게 공급해야 한다는 계명을 선전했다. 농민도 익히 알고 있던 성경의 제1계명의 패러디라고 할 수 있었다. "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부농이 굴라크로 강제이주하면서 우크라이나 마을은 원래 있던 지도자를 잃어버렸다.  - P69

소련 서부에서의 집단화가 불러온 혼란은 폴란드가 개입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낳았고, 소련 동부에서의 무질서는 일본에 유리하게 작용하는 듯했다. 소비에트 중앙아시아, 특히 무슬림이 대부분인 소비에트 카자흐스탄에서 집단화는 소련령 우크라이나에서보다 훨씬 더 심각한 혼란을 불러왔다. 집단화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극적인 사회 변혁을 요구했다. 카자흐스탄 국민은 농민이 아니라 유목민이었고, 소비에트 현대화의 첫 단계는 그들을 정착하게 하는 것이었다. 집단화가 시작되기 전에, 유목민들은 먼저 정착 농민부터 되어야했다. ‘정착화‘ 정책은 목동이 가축을 갖지 못하게 했고, 따라서 생존수단을 앗아갔다. 사람들은 낙타나 말을 타고 국경을 넘어 중국의 무슬림 지역인 신장(또는 투르키스탄)으로 이동했고, 그래서 스탈린은 그들이 중국의 내분에 관여하는 핵심 외세인 일본의 첩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P72

누구 못지않게 정치를 사적으로 풀었던 스탈린은 우크라이나 기근또한 사적인 차원에서 접근했다. 그가 먼저 보인 충동적 행동이면서그 뒤로도 바꾸지 않았던 방침은 우크라이나 농민의 굶주림을 우크라이나 공산당 당원의 배신으로 간주하는 것이었다. 스탈린은 자신의 집단화 정책이 비난받을 가능성은 허용할 수가 없었다. 문제는 실행과정에, 지역 지도자에게 있어야 했고 절대로 집단화라는 개념 자체에 있어서는 안됐다. 1932년 상반기에 자신의 변혁을 밀어붙이면서, 스탈린이 골몰한 문제는 국민의 고통이 아니었다. 집단화 정책의 이미지가 손상될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그는 굶주리는 우크라이나농민이 조국인 공화국에서 이반하고 있으며 "징징거림으로써" 다른소련 시민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 P79

폴란드는 1932년 7월 불가침 조약에 서명함으로써 현상유지를 받아들였고, 따라서 우크라이나 농민의 운명도 스탈린이 좌우하게 되었다. 융통성 없는 열정으로 무장한 스탈린은 아직 휴가가 끝나지 않은) 8월, 자신의 최측근들에게 집단화에 부족한 것은 올바른 법적 근거뿐이라는 이론을 제안했다. 그는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사회주의에도 재산을 보호하는 법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농업 생산량 전부를 국유재산으로 선포하고, 식량 무단 수집은 모두 절도로 간주하며, 이러한 절도는 즉결 처형으로 처벌한다면 국가를 강화할 수 있으리라. 따라서 굶주리는 농민이 얼마 전까지 자기 땅이었던 곳의 밭고랑에서 감자 껍질을 주우면 총살당할 수도 있도록 해야 했다. 스탈린은 이 법률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던 것같다. 하지만 당연히 그 결과 기세등등한 국가가 저지르는 온갖 폭력으로부터 농민을 보호하는 법적 장치는 모두 사라졌다.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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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치가 떨리게 무서운건 지독한 독재 때문도 막강한 인민군대 때문도 아니었다. 어떻게 그렇게 완벽하고 천연덕스럽게 시치미를 뗄 수가 있느냐 말이다. 인간은 먹어야 산다는 만고의 진리에 대해. 시민들이 당면한 굶주림의 공포 앞에 양식 대신 예술을 들이대며 즐기기를 강요하는그들이 어찌 무섭지 않으랴. 차라리 독을 들이댔던들 그보다는 덜 무서울 것 같았다. 그건 적어도 인간임을 인정한 연후의 최악의 대접이었으니까. 살의도 인간끼리의 소통이다. 이건 소통이 불가능한 세상이었다. 어쩌자고 우리 식구는 이런 끔찍한 세상에 꼼짝 못하고 묶여 있는 신세가 되고 말았을까. - P66

우리는 다 같이 쓸쓸하고 허한 소리로 웃었다. 웃음 끝에 그가 도통한 표정으로 한마디 더 했다.
"욕먹을 소리지만 이런저런 세상 다 겪어 보고 나니 차라리 일제시대가 나았다 싶을 적이 다 있다니까요. 아무리 압박과 무시를 당했다지만 그래도 그때는 우리 민족, 내 식구끼리는 얼마나 잘 뭉치고 감쌌어요. 그러던 우리끼리 지금 이게 뭡니까. 이런 놈의 전쟁이 세상에 어딨겠어요. 같은 민족끼리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어 형제간에 총질하고, 부부간에 이별하고, 모자웬수지고, 이웃끼리 고발하고, 한핏줄을 산산이 흩트려 척을 지게 만들어 놓았으니.…." -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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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꿨네, 다시는 꿈꾸지 않기를

안방에선 올케가 오빠 다리의 총구멍에 심을 갈아 끼우고 있었다. 종아리는 바싹 말랐는데 총구멍은 생생하고도 깊었다. 심으로 박은 일 센티 너비의 가제는 그 안에서 서리서리 끝도 없이 풀려 나왔고, 새것을 집어넣을 때도 꾸역꾸역 한없이 들어가는것 같았다. 지켜보는 동안의 숨 막히는 고통 때문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저 구멍이 차라리 심장을 관통했더라면, 하는 생각을안 하기가 그렇게 힘들었다. 그 생각은 뜨겁고도 오싹했다. 밖에서 뭘 보았느냐고 오빠가 물었다. 아무것도 아무도 못 보았다고 대답했다. - P11

그날 밤 이후 다시는 우리 식구 말고 딴 사람을, 군인이고 민간인이고 만난 적이 없었지만 이 도시가 진공상태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날 밤만이 아닐 것이다. 인민군대는 아마 매일 밤그렇게 스며들어 올 것이다. 그렇지만 이 도시엔 반반한 집 튼튼한 건물도 많은데 하필이 빈촌에 주둔할 까닭이 없을 것이다. 어쩌면 붉은 군대는 단지 이 도시를 거쳐 갔을 뿐 그들이 있어야할 전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남쪽에 있을지도 모른다. 신문도, 방송도, 떠도는 말도 접할 길이 없었으므로 우리는 오늘 우리가 안 죽었다는 것밖에는 앞으로 언제 어떤 일이 닥칠지 아무런 예측도 할 수 없었다. 전선이 일단은 우리 머리 위를 지나갔다는 확실한 증거는 그날 밤 전찻길까지 나가서 본 광경이 전부였다. 세상이 또 한 번 바뀌었다면 우리는 인민공화국의 하늘 아래 있으련만 그 실감은 나지 않았다. 

세상이야 어떻게 돌아가든, 남이야 어떻게 살든 내 알바 아니게 내 식구 생각만 하겠노라고 했다. 수단 방법 안 가리고 돈을 벌어서 내 식구호강시키며 살겠노라고 미리 빼기는 오빠를 직시한다는 것은 차마 못할 노릇이었다. 쉽게 말해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살겠다는 건데 딴 사람도 아닌 우리 오빠 입에서 어떻게 저런 소리가 나올 수 있을까, 차라리 귀를 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쩌면 배신감이었을지도모른다.
오빠는 나에게 천성의 생각하는 갈대였다. 그런 그가 지금 살찐 돼지가 되려고 열심히 자신과 식구들을 훈련시키고 있었다.
말이 많아지면서 표정도 과묵하던 때의 준수한 모습은 간데없이, 소심하고 비루해지고 있었다. 오빠가 넘어온 이데올로기의전선은 나로서는 처음부터 상상을 초월한 것이긴 했지만 이런 오빠를 보고 있으면 그 선의 잔인하고 음흉한 파괴력에 몸서리가 쳐지곤 했다. 오빠 같은 한낱 나약한 이상주의자가 함부로 넘나들 수 있는 선이 아니었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변할 수가있을까. 오빠가 얼굴을 잃고 돌아왔다고 해도 지금의 오빠보다는 유사성을 발견하기가 쉬울 것 같았다. 허구한 날 오빠는 다시 꿈꾸지 않기를 꿈꾸고, 엄마는 오냐오냐 맞장구를 쳐대며 즐거워했지만, 엄마의 태도도 서른 살 먹은 아들의 포부를 듣는 태도라기보다는 세 살 먹은 어린애의 재롱을 보는 태도에 가까웠다.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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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시 맑게 갠 계곡의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막다른 길로 들어가 진입로에 차를 세웠다. 현관문은 열려 있었다. 앤이 양팔로 잭을 안고 햇살 아래 서 있었다. 앤의 얼굴은 밤새 한숨도 못 잔 표정이었다. 그러나 앤은 화를 내지 않았다. 언성을 높이지도 않았다. 아니, 사실,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앤은 그저 나에게 지친 미소만, 지친 어깻짓만 해보였을 뿐이다. 그 미소, 그 어깻짓은 이렇게 말했다.
‘다 이해해. 다 이해해...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그러다가 잭이 나를 보고 양팔을 흔들었다.
"아빠, 아빠."
잭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끝> - P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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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기에 앞서
- 유럽의 한 장면


"살았어, 이젠 살았어!" 고픈 배를 움켜잡고 을씨년스러운 거리를, 황량한 들판을 비틀비틀 헤매고 다니던 소년은 이렇게 외쳤다. 소년의 눈에 들어온 먹을거리. 그러나 그것은 환상일뿐이었다. 들판의 밀은 남김없이 징발된 뒤였다. 그 무자비한 물자 징발은 유럽의 집단학살시대를 여는 것이었다. 때는 1933년, 이오시프 스탈린은 우크라이나를 의도적으로 기아의 늪에 빠뜨리는 중이었다. 그 소년은 결국 죽었다. 우크라이나 동포 300만 명과 마찬가지로 "나는 지하에서 그녀를다시 만날 거야." 어느 소련 젊은이는 자기 아내를 생각하며 이렇게말했다. 그 말은 들어맞았다. 그는 그녀 다음 순서로 총살되었고, 그녀와 함께 묻혔다. 스탈린의 1937~1938년 대숙청 기간에 다른 70만명과 함께였다. "그놈들은 내 결혼반지를 내놓으라고 했다. 나는.....…." 어느 폴란드 장교의 일기는 이렇게 중단되는데, 1940년에 그가 소련비밀경찰의 손에 처형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무렵, 폴란드를 동시 침공한 소련군과 나치 독일군에게 희생된 20만 폴란드인의 한 사람이었다. 1941년 말, 러시아의 레닌그라드에서 어느 열한 살짜리 러시아 소녀는 낡은 일기장에 마지막 말을 이렇게 썼다. "이제 타나만 남았어." 히틀러가 스탈린을 배신하고, 그 도시를 포위했다. 그리고 그녀의 가족은 농성 끝에 굶어 죽은 400만 명의 소련인에 포함되었다. 이듬해 여름, 이번에는 열두 살짜리 유대인 소녀가 벨라루스에서 아빠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를 썼다. "죽기 전에 인사해. 나 무서워. 그들이 아이들을 구덩이에 산 채로 집어던지고 있어."
그녀 외에도 독일군이 가스나 총탄으로 죽인 유대인은 500만 명이상이었다. - P5

 모두 블러드랜드의 도시들로, 독일의 유대인 대량학살은 점령된 폴란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소련땅에서 이뤄졌고 독일 본토에서는 진행되지 않았다. 히틀러가 수상으로 집권한 1933년 당시 독일의 유대인 인구는 1퍼센트도 되지 않았으며, 독일이 팽창한 뒤인)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시점에도 4분의 1이하였다. 히틀러가 집권하고 첫 6년 동안, 독일의 유대인들은 이민을 허락받았다(굴욕과 박해의 와중에서). 1933년 히틀러의 집권을 지켜봤던 독일계 유대인 대부분은 천수를 누렸다. 독일계 유대인 16만5000명을 학살한 일은 분명 끔찍한 범죄이지만, 유럽 유대인 전체가겪은 비극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홀로코스트 전체 희생자의 3퍼센트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치 독일이 1939년 폴란드를, 1941년 소련을 침공했을 때에야 ‘유럽에서 유대인을 몰아낸다‘는 히틀러의 비전이 유럽 유대인의 가장 큰 두 분파와 연결되었다. 그의 유럽 유대인박멸의 꿈은 유대인이 살고 있는 유럽 땅에서만 실현될 수 있었다. - P8

이 책은 한 정치적 대량학살의 이야기다. 1400만 명의 희생자는 모두 소련 또는 나치의 살육 정책으로 생명을 잃었으며, 그 둘 사이의 전쟁으로 숨진 것이 아니다. 심지어 그들의 4분의 1은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도 전에 죽어갔다. 또 20만 명은 1939년에서 1941년사이, 즉 독일과 소련이 ‘동맹국‘으로서 유럽 지도를 다시 그리던 시기에 죽었다. 1400만 명의 학살은 때로 경제 계획의 일환이었거나 혹은 경제 문제 때문에 가속이 붙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엄격하게 따지자면 결코 경제적 필요성 때문에 빚어진 일은 아니다. 스탈린은 1933년 배고픈 농민들에게서 식량을 강제 징발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었다. 히틀러도 그보다 8년 뒤, 소련 전쟁포로들의 식량 배급을 끊으면 어떻게 될지 알고 있었다. 두 경우 모두 300만 명 이상이 죽었다. 1937년과 1938년의 대숙청 시기에 숨져간 수십만 명의 소련 농민과 노동자는 스탈린의 명확한 지시에 따른 희생자였으며, 그것은 1941년과 1945년 사이에 히틀러의 명확한 지시대로 수백만 명의 유대인이 총과 가스에 희생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 P10

유럽의 대량학살 하면 보통 홀로코스트가 떠오르며, 홀로코스트는 빠르게 진행된 ‘살인 공정‘이었다고 여겨진다. 그런 이미지는 지나치게 단순하고, 명쾌하다. 독일과 소련의 살육 현장에서, 그 살육 방법은 오히려 원시적인 것이었다. 1933년에서 1945년까지 블러드랜드서 살육된 1400만 명의 민간인과 전쟁포로 중 절반 이상은 식량을 배급받지 못해 죽었다. 20세기 중반, 유럽인들은 같은 유럽인을 무지무지하게 많이 굶겨 죽였다. 홀로코스트 다음가는 두 가지 최대 대량학살, 1930년대에 스탈린이 시행한 의도적 굶주림과 1940년대 초히틀러의 소련 전쟁포로 굶기기는 이런 식의 학살이었다. 그건 사실 계획상으로는 더 큰 규모였다. "기아 계획"에서 나치는 1941년과1942년에 걸친 겨울에 수천만 명의 슬라브인과 유대인을 굶겨 죽이려 했다. 굶겨 죽이기 다음에는 총살이 집행되었고, 그다음은 가스실이었다. - P15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사실은 이 전쟁이 하나로 통합되어 있던 세계 경제를 조각내버렸다는 사실이다. 1914년에 살아 있던 유럽의 성인은 생전에 두번 다시 그만큼의 자유무역이 복구되는 일을 보지 못했다. 또 그런 유럽인의 대부분은 그 전 시대 수준의 번영을 다시는 누려보지 못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간단히 말해서 두 진영의 무력 충돌이었다. 한쪽 진영에는 독일 제국, 합스부르크 왕실,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동맹 제국)가 반대 진영에는 프랑스, 러시아 제국, 영국, 이탈리아, 세르비아, 미국(협상 제국)이 있었다. 1918년 협상 제국의 승리는 3대 유럽 대륙 제국인 합스부르크, 독일, 오스만의 종말을 가져왔다. 전후강화 조약인 베르사유 조약, 생제르맹 조약, 세브르 조약, 트리아농 조약의 결과 다민족 제국은 국민국가들로 바뀌고, 군주국들은 민주공화정으로 바뀌었다. 이 전쟁에서 무너지지 않은 유럽 강대국들도, 가령 영국 그리고 특히 프랑스는 크게 약화되었다. 승리자들 사이에는1918년의 승리로 전쟁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환상이있었다. 패전국들에서는 나라의 주도권을 쥐려던 혁명가들이 더 급진적인 변혁을 위한 유혈은 정당하다고 여기는 믿음이 있었다. 그런 변혁이야말로 참혹했던 전쟁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피해를 위로하리라는 믿음도,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정치적 비전은 공산주의 유토피아였다. 전쟁이 끝나던 때는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한 유명한말,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고 한 지 70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 P28

구러시아 제국의 붕괴와 구독일 제국의 패배는 동유럽에 힘의 공백 상태를 만들어냈고, 이는 볼셰비키들이 채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레닌과 트로츠키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내전에 그들의새로운 붉은 군대를 투입했지만, 발트해 연안의 다섯 지역(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폴란드)은 독립 공화국이 되었다. 이들지역을 잃고, 볼셰비키 러시아는 러시아 제국 때보다 더 동쪽으로 밀려난 모양새가 되었다. 이 신생 독립국들 가운데 폴란드는 다른 모든나라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인구를 보유했으며,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전후에 생겨난 다른 어떤 국가보다, 폴란드는동유럽의 세력 판도를 바꿔놓았다. 강대국이 되기에는 모자랐지만, 그 어떤 강대국의 팽창 정책이라도 펴기에 걸림돌이 될 만큼의 큰 영토는 갖고 있었다. 100여 년 이래 처음으로 러시아와 독일을 분리하는 나라였던 것이다. 폴란드의 존재 자체가 러시아와 독일 세력 사이에서 완충 역할을 했고, 따라서 모스크바와 베를린 모두 이 나라를 눈엣가시로 여겼다. - P31

레닌의 유산에 대한 스탈린의 해석은 결정적이었다. 스탈린이 1924년 "일국사회주의"를 언급했을 때, 그는 소련이 노동자의 천국이 될 것이라고, 그러나 단결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 만국의 노동자들의 도움은 별로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 셈이었다. 농업 우선 정책에 대해서는 일부 공산주의자의 반대가 있을 뿐이었지만, 소련의 지방에곧 자멸이 예약돼 있다는 데는 모두 의견 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거친 이행을 시작하는 데 쓸 초기 자본은 어디서 얻을 것인가? 한 가지 방법은 농민에게서 "잉여 농산물을 빼앗아, 외국에 팔아 벌어들인 외화로 기계류를 수입하는 한편 증가하고있는 노동계급의 배를 채워주는 것이었다. 1927년, 국가의 투자가 결정적으로 공업 위주로 바뀌던 해, 이 문제는 결정적 시기에 들어갔다.
근대화에 대한 논쟁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트로츠키(세계혁명론)와 스탈린사이의 대결이었다.  - P43

소련의 정책을 주무르는 데 능수능란함을 보여준 그는 앞서의 약속을 지켜야 했다. 1928년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스탈린은 농지를 몰수하고, 농민들을 국가 통제하에서 일하게 하며, 곡물을 국가 재산으로 삼는다는 "집단화" 정책을 내놓았다. 토지, 장비, 사람은 모두 집단농장에 소속되고, 대단위 작업을 통해 더 효율적으로 농작물을 생산할 것이었다(그렇게 믿어졌다). 집단농장은 농기계센터를 중심으로 구성되며, 이 센터는 현대식 장비와 주택을 현장 정치국원들에게 배분한다. 집단화는 국가가 농산물을 통제할 수있도록 했고, 그리하여 노동자들을 잘 대우하고 그들의 지지를 유지하는 한편 해외 수출을 해서 얻은 외화로 공업에 투자할 수 있도록했다. - P44

 그리고 대공황이 닥쳤는데, 이는 스탈린에게도 기회였지만 히틀러에게는 더 큰 기회가 되었다. 독일 경제의 파탄은 공산혁명의 가능성을 점치게 했으며, 이 역시 히틀러의 집권에 도움이 되었다. 국제 경제 위기는 과격한 변화를 정당화하는 듯 보였다. 규모가 컸던 독일 공산당이 혁명에 나설 가능성은 공포를 불러일으켰으며, 그 공포는 히틀러의 손에 의해 민족주의로 연결되었다. 1930년 9월 선거에서 나치는 득표율 18퍼센트와 107개 의석을 얻었다. 그리고 1932년 7월 선거에서는 압승을 거뒀다. 득표율은 37퍼센트 이상이었다.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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