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의 대규모 기아는 1928~1932년 실시한 스탈린의 첫 번째 5개년 계획의 산물이었다. 이 기간에 스탈린은 공산당 최상부를 장악했고, 산업화와 집단화 정책을 강행했으며, 패배한 국민을 이끌 무서운 아버지로 부상했다. 그는 시장을 계획경제로, 농민을 노예로, 시베리아와 카자흐스탄의 불모지를 강제수용소 단지로 바꿔버렸다. 그의 정책은 수만 명을 처형으로, 수십만 명을 탈진으로 죽게 했고, 수백만명을 굶주림의 위험에 빠뜨렸다. 물론 공산당 내부의 반발을 우려하긴 했지만, 스탈린에게는 엄청난 정치적 재능과 총독들의 자발적인지지, 그리고 무엇보다 미래를 예견하며 미래를 만든다고 주장하는 관료체제가 있었다. 그 미래는 공산주의였다. 중공업이 필요하며, 따라서 집단농장이 필요하고, 결과적으로 소련 사회의 최대 집단인 농민을 통제해야 하는 공산주의 말이다. - P63
처벌을 위한 농민 대량 추방은 소비에트 경제의 강제노동 대량 이용과 맞아떨어졌다. 1931년 특별 정착지와 강제수용소는 ‘굴라크‘라는 단일 시스템으로 통합되었다. 소련인들 스스로 ‘강제수용소 제도‘라 부른 굴라크는 농업 집단화와 함께 시작되었고 집단화에 의존했다. 결과적으로 476개의 수용소 단지에 수용되게끔 1800만 명이 선고를 받았고, 150만 명에서 300만 명이 감금 도중에 사망했다. 자유농민은 노예 노동자가 되어, 스탈린이 소련 근대화에 필요하다고 믿었던 거대 운하, 광산, 공장 건설에 투입되었다. - P66
소련령 우크라이나 농촌사회 대부분은 여전히 종교 공동체였다. 젊고 야심만만하며, 공인된 종교인 공산주의 무신론에 이끌린 많은젊은이는 우크라이나 대도시나 모스크바 또는 레닌그라드로 떠났다. 무신론 공산주의 정권이 자신들의 동방 정교회를 탄압했지만, 농민들은 여전히 신자였고 상당수는 집단농장과의 계약을 악마와의 거래로 받아들였다. 사탄이 공산당원이라는 탈을 쓰고 이 땅에 나타났으며, 그의 집단농장이 고문과 저주를 불러올 명부를 기록한다고 믿는 사람도 있었다. 새로운 농기계센터는 게헨나의 전초기지처럼 보였다. 로마 가톨릭교도인 우크라이나의 일부 폴란드 농민은 집단화를 종말론적 관점으로 봤다. 어느 폴란드인은 집단농장에 참가하지 않는 이유를 아들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내 영혼을 악마에게 팔고 싶진 않단다." 이러한 독실함을 이해하는 당원들은 자신들이 스탈린의 제1계명이라 부른, 집단농장은 먼저 국가에 음식을 공급한 후 인민에게 공급해야 한다는 계명을 선전했다. 농민도 익히 알고 있던 성경의 제1계명의 패러디라고 할 수 있었다. "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부농이 굴라크로 강제이주하면서 우크라이나 마을은 원래 있던 지도자를 잃어버렸다. - P69
소련 서부에서의 집단화가 불러온 혼란은 폴란드가 개입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낳았고, 소련 동부에서의 무질서는 일본에 유리하게 작용하는 듯했다. 소비에트 중앙아시아, 특히 무슬림이 대부분인 소비에트 카자흐스탄에서 집단화는 소련령 우크라이나에서보다 훨씬 더 심각한 혼란을 불러왔다. 집단화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극적인 사회 변혁을 요구했다. 카자흐스탄 국민은 농민이 아니라 유목민이었고, 소비에트 현대화의 첫 단계는 그들을 정착하게 하는 것이었다. 집단화가 시작되기 전에, 유목민들은 먼저 정착 농민부터 되어야했다. ‘정착화‘ 정책은 목동이 가축을 갖지 못하게 했고, 따라서 생존수단을 앗아갔다. 사람들은 낙타나 말을 타고 국경을 넘어 중국의 무슬림 지역인 신장(또는 투르키스탄)으로 이동했고, 그래서 스탈린은 그들이 중국의 내분에 관여하는 핵심 외세인 일본의 첩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P72
누구 못지않게 정치를 사적으로 풀었던 스탈린은 우크라이나 기근또한 사적인 차원에서 접근했다. 그가 먼저 보인 충동적 행동이면서그 뒤로도 바꾸지 않았던 방침은 우크라이나 농민의 굶주림을 우크라이나 공산당 당원의 배신으로 간주하는 것이었다. 스탈린은 자신의 집단화 정책이 비난받을 가능성은 허용할 수가 없었다. 문제는 실행과정에, 지역 지도자에게 있어야 했고 절대로 집단화라는 개념 자체에 있어서는 안됐다. 1932년 상반기에 자신의 변혁을 밀어붙이면서, 스탈린이 골몰한 문제는 국민의 고통이 아니었다. 집단화 정책의 이미지가 손상될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그는 굶주리는 우크라이나농민이 조국인 공화국에서 이반하고 있으며 "징징거림으로써" 다른소련 시민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 P79
폴란드는 1932년 7월 불가침 조약에 서명함으로써 현상유지를 받아들였고, 따라서 우크라이나 농민의 운명도 스탈린이 좌우하게 되었다. 융통성 없는 열정으로 무장한 스탈린은 아직 휴가가 끝나지 않은) 8월, 자신의 최측근들에게 집단화에 부족한 것은 올바른 법적 근거뿐이라는 이론을 제안했다. 그는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사회주의에도 재산을 보호하는 법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농업 생산량 전부를 국유재산으로 선포하고, 식량 무단 수집은 모두 절도로 간주하며, 이러한 절도는 즉결 처형으로 처벌한다면 국가를 강화할 수 있으리라. 따라서 굶주리는 농민이 얼마 전까지 자기 땅이었던 곳의 밭고랑에서 감자 껍질을 주우면 총살당할 수도 있도록 해야 했다. 스탈린은 이 법률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던 것같다. 하지만 당연히 그 결과 기세등등한 국가가 저지르는 온갖 폭력으로부터 농민을 보호하는 법적 장치는 모두 사라졌다.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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