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꿨네, 다시는 꿈꾸지 않기를
안방에선 올케가 오빠 다리의 총구멍에 심을 갈아 끼우고 있었다. 종아리는 바싹 말랐는데 총구멍은 생생하고도 깊었다. 심으로 박은 일 센티 너비의 가제는 그 안에서 서리서리 끝도 없이 풀려 나왔고, 새것을 집어넣을 때도 꾸역꾸역 한없이 들어가는것 같았다. 지켜보는 동안의 숨 막히는 고통 때문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저 구멍이 차라리 심장을 관통했더라면, 하는 생각을안 하기가 그렇게 힘들었다. 그 생각은 뜨겁고도 오싹했다. 밖에서 뭘 보았느냐고 오빠가 물었다. 아무것도 아무도 못 보았다고 대답했다. - P11
그날 밤 이후 다시는 우리 식구 말고 딴 사람을, 군인이고 민간인이고 만난 적이 없었지만 이 도시가 진공상태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날 밤만이 아닐 것이다. 인민군대는 아마 매일 밤그렇게 스며들어 올 것이다. 그렇지만 이 도시엔 반반한 집 튼튼한 건물도 많은데 하필이 빈촌에 주둔할 까닭이 없을 것이다. 어쩌면 붉은 군대는 단지 이 도시를 거쳐 갔을 뿐 그들이 있어야할 전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남쪽에 있을지도 모른다. 신문도, 방송도, 떠도는 말도 접할 길이 없었으므로 우리는 오늘 우리가 안 죽었다는 것밖에는 앞으로 언제 어떤 일이 닥칠지 아무런 예측도 할 수 없었다. 전선이 일단은 우리 머리 위를 지나갔다는 확실한 증거는 그날 밤 전찻길까지 나가서 본 광경이 전부였다. 세상이 또 한 번 바뀌었다면 우리는 인민공화국의 하늘 아래 있으련만 그 실감은 나지 않았다.
세상이야 어떻게 돌아가든, 남이야 어떻게 살든 내 알바 아니게 내 식구 생각만 하겠노라고 했다. 수단 방법 안 가리고 돈을 벌어서 내 식구호강시키며 살겠노라고 미리 빼기는 오빠를 직시한다는 것은 차마 못할 노릇이었다. 쉽게 말해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살겠다는 건데 딴 사람도 아닌 우리 오빠 입에서 어떻게 저런 소리가 나올 수 있을까, 차라리 귀를 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쩌면 배신감이었을지도모른다. 오빠는 나에게 천성의 생각하는 갈대였다. 그런 그가 지금 살찐 돼지가 되려고 열심히 자신과 식구들을 훈련시키고 있었다. 말이 많아지면서 표정도 과묵하던 때의 준수한 모습은 간데없이, 소심하고 비루해지고 있었다. 오빠가 넘어온 이데올로기의전선은 나로서는 처음부터 상상을 초월한 것이긴 했지만 이런 오빠를 보고 있으면 그 선의 잔인하고 음흉한 파괴력에 몸서리가 쳐지곤 했다. 오빠 같은 한낱 나약한 이상주의자가 함부로 넘나들 수 있는 선이 아니었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변할 수가있을까. 오빠가 얼굴을 잃고 돌아왔다고 해도 지금의 오빠보다는 유사성을 발견하기가 쉬울 것 같았다. 허구한 날 오빠는 다시 꿈꾸지 않기를 꿈꾸고, 엄마는 오냐오냐 맞장구를 쳐대며 즐거워했지만, 엄마의 태도도 서른 살 먹은 아들의 포부를 듣는 태도라기보다는 세 살 먹은 어린애의 재롱을 보는 태도에 가까웠다.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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