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국방군이 소련군 포로들을 기차에 실어 어딘가로 이동시킬때에는 지붕이 없는 화물열차를 이용했고, 따라서 포로들은 눈비를 비롯한 기상 변화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기차가 목적지에 도착하자수백 명의, 심지어 때로는 수천 명의 얼어 죽은 시체들이 열차 밖으로 쏟아져 내렸다. 이송 중 사망률은 70퍼센트에 달했다. 이 죽음의 행군과 이송에서 약 20만 명의 포로가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점령한 소련 지역에 설치한 80여 개에 이르는 포로수용소에 겨우 살아 도착한 포로들은 하나같이 지치고 굶주린 상태였으며, 이들 중 다수는 부상을 입거나 병들어 있었다. 보통 포로수용소라는 것은 군인들이 적국 소속 군인들의 목숨을 보존해주기 위해 만드는 간단한 시설이다. 이러한 수용소들은 비록어려운 여건 속에서 익숙지 않은 장소에 세워지지만, 자신의 동료들 역시 적국의 손에 포로로 붙잡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만든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소련 지역에 마련된 독일의 포로수용소는 그런 일반적인 포로수용소와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그것은 수용자들의 삶을 아예 끝장내버리기 위해 고안되었다.  - P315

군 상급 사령부와 일선의 장교들이 불법적이고 잔인한 정책들을 실행에 옮김에 따라 그들은 히틀러가 제시한 종류의 논리 말고는 이를 정당화할 수단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특정 인간들은 없애버려야 할 식충일 뿐이며 슬라브족, 유대인, 아시아인들과 그 밖에 소련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인간 이하의 존재로, 소모품보다 못한 것들이라는 논리였다. 1933년 우크라이나 공산주의자들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1941년의 독일군 장교들은 굶주림을 정책으로 옮겼다. 두 사례 모두에서 개개인들은 처음에 이런 정책에 반대하거나 의구심을 가졌다. 그러나 집단이라는 차원에서는 결국 정권이 자행한 범죄에 스스로 연루되었으며, 따라서 자기네 지도자들의 도덕적 우월성을 인정한 채 그냥 그것에 따라버렸다. 시스템이 재앙으로 변했고, 그들은 시스템으로 변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히틀러의 유럽에 첫 수용소망을 만들고 그것들을 운영했던 독일 국방군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는 수천, 수만, 수십만,
마침내는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은 장소가 되었다. - P319

그러나 이 같은 잔혹함은 소련의 사기를 꺾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소련의 의지를 더욱 불타오르게 만들었다. 정치 장교, 공산주의자, 유대인을 가려내는 작업은 무의미했다. 이미 붙잡은 이들의 목숨을 빼앗는 일은 소련을 그다지 약화시키지 못했다. 실제로 대규모 기아 정책과 신원 선별 및 조사 작업은 붉은 군대가더욱 맹렬히 저항하도록 만들었다.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 배고픔에몸부림치다 죽을 것이 빤하다면, 군인들은 싸우는 길을 택할 게 틀림없다. 붙잡히면 그 즉시 총살임을 잘 알고 있던 공산주의자와 유대인 그리고 정치 장교들이 항복을 선택할 리 만무했다.  - P330

독일인들은 굶주림과 공포로 가득 찬 포로수용소의 포로들 중 최소 100만 명을 따로 뽑아 자신들의 군대 및 경찰력을 보조하는 인원으로 썼다. 애초에는 소련이 무너지면 이들의 도움을 통해 소련 영토를 좀더 손쉽게 장악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소련을 무너뜨리는 것이 뜻대로 되지 않고 오히려 전쟁이 길어지자, 이 소련인들에게는 히틀러와 그를 따르는 자들이 점령 지역에서 시행하고자했던 대량학살을 보조하는 역할이 주어졌다. 앞서 수용소의 포로였던 이들 보조자에게는 삽이 쥐어졌고, 독일군이 유대인들을 쏴 죽일장소에 도랑을 파라는 명령이 뒤따랐다. 다른 이들은 유대인을 쫓던 경찰 조직에 편성되었다. 몇몇 포로는 트라브니키에 있는 훈련소로 보내져 경비병 훈련 과정을 밟기도 했다. 나치에 봉사하도록 재훈련 받은 이 소련 시민 및 참전 군인들은 1942년 독일이 점령한 폴란드 트레블린카, 소비부르, 베우제츠의 학살 시설로 파견되었는데, 그곳은 앞으로 100만 명이 넘는 폴란드 유대인이 독가스를 마시고 숨져갈 장소였다. 마치 소련을 무너뜨리려던 전쟁이 유대인을 학살하는 전쟁으로 변모했던 것처럼, 독일이 펼친 하나의 학살 정책에서 살아남은 이들 중 몇몇은 이렇듯 또 다른 학살 정책의 공범자가 되어버렸다. - P334

1941년 여름까지의 유토피아는 다음의 네 가지였다. 바로 소련을 몇 주 만에 무너뜨릴 전격적 승리가 그 첫번째였고, 두 번째 유토피아는 3000만 명을 몇 달 내로 굶겨 죽일 굶주림 계획이었으며, 전쟁 뒤 유럽의 유대인들을 완전히 쓸어버릴 마지막 해결책이 그 세 번째, 소련의 서쪽 땅들을 독일의 식민지로 만들 이른바 동유럽 종합 계획이 그 네 번째 유토피아였다.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행된 지 6개월이 지난 시점이 되자, 히틀러는 유대인 말살에 우선순위를 배정하는 쪽으로 전쟁 목표를 수정하기에 이른다. 그때까지 그의 심복들은 그러한 바람들을 실행하는 데 필요한 이데올로기적, 행정적 책임과 재량권을 지니고 있었다. 전격적 승리는 끝내 없었다. 비록 수백만 명의 소련 시민이 기아에 목숨을 빼앗겼지만, 굶주림 계획은 실현 불가능한다는 게 명백해졌다. 동유럽 종합 계획 또는 전후 식민화 계획은 무엇이 됐든 뒤로 미뤄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유토피아가 시들해지자, 정치적 미래는 이러한 환상들에서 그나마 실제로 뽑아낼 수 있는 것들에 달려 있게되었다. 괴링, 힘러, 하이드리히 세 사람은 엉망이 돼버린 폐허 속에서 그나마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차지하고자 앞다투어 움직였다.  - P338

정치적 계산과 그간 해당 지역 주민들이 받았던 고통들이 이들의그 같은 집단학살에의 참여를 온전히 설명해주는 것은 아니다.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폭력은 독일인들과 해당 지역 비유대인들을 한데 뭉치게 만들었다. 분노는 독일이 바랐던 대로 소련에 협력한 자들보다는 유대인들을 향하게 되었다. 독일의 주장에 반응을 보인 사람들은 실제로 자신들이 겪은 아픔의 원흉이 유대인들이라 믿었건 믿지않았건 이제 스스로가 새 주인에게 꼬리를 흔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행동을 통해 나치의 세계관을 좀더 분명히 해주고있었다. 내무인민위원회의 처형에 대한 앙갚음으로서의 유대인 학살은 소련이 유대인 국가라는 나치의 시각을 뚜렷하게 해주었다. 또한 유대인에 대한 폭력은 앞서 스스로 소련에 협력했던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폴란드인들에게는 자신들이 얻은 변절자라는 오명을 벗어던질 기회였다. 유대인들이 공산주의자들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생각은 점령한 자뿐만 아니라 몇몇 점령당한 이들에게도 요긴한 아이디어였던 것이다. - P353

너무나 확연하게 드러나는 소비에트 폭력의 기록들로 말미암아 독일은 심지어 자신들만의 범죄 행위를 저지르면서도 스스로를 과거 소비에트가 벌인 범죄의 상처들을 원래대로 회복시켜주고 있다는 식으로 내세울 수 있었다. 그들이 귀가 따갑도록 표방한 것들에 비춰보면, 두 번의 점령을 받은 이들 지역에서 독일이 찾아낸 것들은 그들로하여금 어떤 특정한 느낌을 받게 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바로 과거 이들이 훈련받고 또 목격할 준비가 되었다고 여겨지던 것들, 즉 추정상으로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뒤에서 조종한‘ 소비에트의 범죄에 대한 일종의 확인이었다. 소비에트가 벌인 잔혹 행위들은 독일의 나치 친위대원, 경찰, 군인들이 이내 벌이게 될 유대인 여성 및 아동 학살 정책을 스스로에게 정당화하는 아주 좋은 구실이 될 것이었다.  - P355

1941년 11월 24일, 스탈린은 소련 동부에 대기중이던 전략적 예비 병력들을 불러와 독일 국방군 산하 중앙 집단군과의 교전에 투입했다. 그는 이러한 위험을 감수할 자신이 있었다. 이미 도쿄 고위층에 침투해 있던 정보원들을 비롯해 그 밖의 모든 소식통은 하나같이 일본이 소련령 시베리아를 칠 가능성은 없다는 보고를 올려온 터였다. 1941년 여름 독일의 공격이 없을 것이라 믿었던 과거 그의 판단은 틀렸다. 그러나 1941년 가을 일본의 공격이 없을 것이라 믿은 이번 판단은 옳았다. 그는 줄곧 침착하게 이 사안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12월 5일이 되자 붉은 군대는 반격에 나서기 시작했다. 독일 군인들은 패배감을 맛봤다. 이미지칠 대로 지친 말들에 가져온 장비를 다시 싣고 신속하게 퇴각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독일군은 허허벌판에서, 추위에 몸을 웅크린 채, 모든 것이 부족한 상태로 혹독한 겨울을 보내야 할 운명이었다. - P379

일본은 1933년부터 이 판에서 히틀러와 스탈린 두 사람이 서로 취하거나 맞서온 아주 중요한 변수였다. 이유는 서로 달랐지만 두 사람다 일본이 남쪽에서 육지를 두고는 중국과, 바다를 두고는 유럽 제국들 및 미국과 싸움을 벌이길 바랐다. 히틀러는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환영했는데, 이는 그것이 미군의 무장 속도를 늦추고 또 미국이 전투를 벌이더라도 유럽보다는 태평양에서 벌이게 만들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바르바로사 작전과 태풍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후에도, 히틀러는 일본이 소련보다는 미국과 싸우기를 원했다. 그는1942년 초까지 소비에트 정복을 완수하고 그 뒤 태평양에서 그동안 일본과의 전투로 약해진 미국을 상대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스탈린 역시 줄곧 일본이 남쪽으로 움직이도록 하기 위해 매우 신중하게 외교 및 군사 정책을 펼쳐오고 있었다. 그가 품은 생각의 핵심은 히틀러와 똑같았다. 즉 ‘소련 땅은 내 것이니, 일본은 이곳에서 멀리 떨어뜨려둬야 한다‘는 것이었다. 베를린과 모스크바는 일본을 동아시아와 태평양에 묶어두길 원했고, 도쿄는 바로 그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일본이 움직이던 때는 독일이 모스크바에서 꽁무니를 빼던 바로그 시점이었기에 진주만 공격은 앞서의 시나리오와 정반대의 의미,
즉 독일에게 있어서 최악의 상황을 의미했다. 영국을 위협하는 동시에 자력으로 미국에 맞설 준비에 들어갈 대륙 제국으로서의 독일은커녕, 하나같이 약한 동맹국들(이탈리아, 헝가리, 루마니아, 슬로바키아)혹은 결정적이랄 수 있는 동유럽 전선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하는 동맹국들(일본, 불가리아)을 이끌고 소련, 영국,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유일한 유럽 국가가 된 것이었다. 일본은 독일보다 이를 더잘 파악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들은 히틀러가 스탈린과 단독강화를 맺은 뒤 아시아 및 북아프리카 패권을 두고 영국 및 미국에 맞서 싸우기를 바랐다. 일본은 영국의 해상 패권을 무너뜨리고자 했고, 독일은 자신의 영역인 유럽 대륙 내에서 일을 벌이고자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히틀러에게 남은 것은 소련을 파괴하고 그 폐허 위에 대륙 제국을 세운다는 단 하나의 세계 전략뿐이었고, 그는 이를 계속 고수하는길을 택했다. - P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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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중에 파타고니아라는 이름이 등장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파타고니아는 팀북투나 샹그릴라와 같이 지도상의 특정한 장소라기보다는 아득하고 흥미로운 이상향을 의미했다. 당시에는 특히 더 그랬다. 카탈로그의 소개말에 "피오르로 이어지는 빙하, 바람에 흔들리는들쭉날쭉한 봉우리, 가우초, 콘도르"라는 글귀를 쓰다가 파타고니아가 떠올랐다. 우리는 험준한 남부 안데스와 케이프 혼(Cape Horn)의 환경에 맞는 의류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런 목표를 가진 우리에게잘 어울리는 이름이었고 어떤 언어로도 발음이 가능했다.
1973년, 진짜 파타고니아와의 강한 연계를 위해 폭풍우가 몰아치는하늘, 피츠로이산(FitzRoy Mt.)의 스카이라인을 기초로 한 삐죽삐죽한 봉우리, 푸른 바다가 있는 상표를 만들었다. - 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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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곳의 수용소는 교육받은 계층의 폴란드인들이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관찰하는 일종의 실험장과도 같은 곳이었다. 코젤스크, 오스타시코프, 스타로빌스크는 겉보기에는 폴란드와 다를 게 없는 곳이 되어 있었다. 수감자들 모두 폴란드 군복과 폴란드를 상징하는 흰색 독수리가 그려진 모자 외엔 아무것도 걸치고 있지 않았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그들 중 누구도 전쟁 전 자신들의 고향인 동부 폴란드에서는평소 그런 복장을 하고 있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제 그곳에는 소련을상징하는 망치, 낫, 붉은 별이 휘날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 그들이폴란드를 잊었을까? 아니다. 수용소에 있던 사람들은 이제 독일의 손에 떨어진 서부 지역 대학들이 문을 닫고, 소련 관할이 된 동부 지역대학들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대학으로 바뀌던 바로 그 순간에도 과거 이름난 인문학자 그리고 과학자였던 예비군 장교들을 주축으로 폴란드 대학에서 이뤄지던 강의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장교들은 작은신용조합을 만들어 가난한 이가 부유한 이에게 돈을 빌릴 수 있도록했다. 오래전 배운 시를 암송하기도 했으며, 엄청난 누군가는 폴란드의 사실주의 장편소설을 통째로 이야기해주기도 했다. 물론 이들은 서로 의견 충돌을 빚기도, 싸우기도, 누군가의 물건을 훔치기도 했다. 또한 소수는(이후 밝혀졌듯이 극소수) 소련에 협력하는 길을 택하기도했다. 장교들은 앞으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를 두고 밤새 의견 충돌을 빚었다. 하지만 폴란드인이라는 정체성만큼은 한결같았고, 이는 소련인들의 눈에도 확연했을 것이다.  - P238

폴란드 유대인 엘리트 일부가 유대인 평의회 위원이 되어 독일의 게토 정책을 집행한 데서 알 수 있듯 독일인들은 폴란드 유대인 엘리트들의 목숨만은 부지해주었다. 반면 폴란드 비유대인 엘리트들의 상황은 조금 달랐는데, 독일은 이들을 대개 일종의 정치적 위협으로 여겼다. 1940년 초 히틀러는 다음과 같은 결론, 즉 동방 총독부 내에 존재하는 좀더 위험한 폴란드인들을 그야말로 죽여 없애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는 프랑크에게 폴란드의 "리더십 요소들"은 "확실하게 제거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프랑크는 없애버릴 집단들의 목록을 작성했는데, 주로 교육받은 사람과 성직자 그리고 정치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인 사람들의 이름으로 채워진 명단은 과거 탄넨베르크 작전 때와 똑 닮아 있었다. 실로 흥미로운 우연의 일치는, 프랑크가 이들 폴란드의 "정신적 지도자들을 쓸어버릴 계획을 자기 수하들에게 이야기한 1940년 3월 2일은 바로 베리야가 소련 내 폴란드인 전쟁포로들에 대한 테러 행위를 지시하기 사흘 전이었다는 점이다. - P261

폴란드 사회의 목을 따버리는 방식을 통해 그곳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땅, 즉 운영하고 다스리기보다는 그저 지배가 어울리는 땅으로 만들려는 특정 정책들은 모스크바와 베를린에 의해 의도적으로 추진된 것들이었다. 한스 프랑크는 히틀러의 말을 따와, 폴란드의 "리더십 요소들"을 없애는 것이 곧 자신의 임무라고 밝혔다. 내무인민위원회의 장교들 역시 목표물을 찾고자 폴란드인 「인명록」까지 뒤지는 모습을 보이며 논리적 극단에서 나온 자신들의 임무를 수행했다. 이것은 그야말로 근대성에 대한 공격이자, 특정 지역과 사회에 자리하던 이른바 계몽의 화신에 대한 공격에 다름 아니었다. 동유럽에서 특정 사회가 갖고 있는 자부심은 바로 지식인 계급을 뜻하는 "인텔리겐차"에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특히 조국이 고난에 처했거나 타인의 손에 떨어졌을 때 그런 조국을 이끌어가는 자들로 여겼다. 아울러 저술, 연설, 행동 하나하나를 통해 모국의 문화를 잘 지키는 것 또한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라 여기던 자들이었다. 독일어에도 이와 똑같은 단어가 똑같은 뜻을 지니고 있었다. 바로 그러했기에 히틀러가명확하게 내린 명령이 "폴란드 인텔리겐차의 절멸"이었던 것이다. 앞서 소련 코젤스크 심문관들의 수장은 "서로 다른 두 철학"을 이야기했고, AB악치온이 펼쳐질 당시 어느 독일 심문관은 곧 사형당할 노인에게 "폴란드인들만의 사고방식"을 보이라고 명령했다. 그 대상들은 바로 폴란드 문명의 화신이자, 그것만의 특별한 사고방식을 나타낸다고 여겨진 지식인 계층이었다.
두 점령국의 손에 자행된 대량학살, 그것은 바로 폴란드 인텔리겐차가 자신들의 역사적 소임을 다했다는 비극의 증거였다. - P274

흔히 1941년 사태에 대한 의문은 좀더 추상적인 방식, 즉 유럽 문명과 관련된 것으로 제기된다. 몇몇 논의에 따르면, 독일(그리고 소련)의 학살 정책은 아마도 프랑스 혁명에서 나폴레옹 전쟁에 이를 때 자리 잡은 관념, 곧 정치 영역에서 이성의 힘과 역할이라는 계몽주의적관념에서 비롯된 이른바 ‘근대성‘이 그 정점에 이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의미에서의 근대성 논의는 1941년의 재앙에 대해 적어도 그 어떤 직접적인 설명도 제공해주지 못한다. 두 체제는 모두 계몽주의가 가진 낙관론, 즉 사회적 진보는 자연세계를 샅샅이 훑어나가는 과학의 눈부신 발걸음에 뒤따를 것이라는 생각을 거부했다. 히틀러와 스탈린 두 사람이 받아들였던 것은 19세기 후반의 수정된 다원주의로, 이에 따르면 진보는 가능하지만 그것은 오직 인종 혹은 계급 사이의 폭력적 투쟁의 결과로만 나타날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폴란드의 상층 계급을 말살한다거나(스탈린주의) 원래 폴란드인들은 인간 이하의 존재인데 감히 그에 맞지 않게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계층을 파괴하는 것(국가사회주의)은 정당한 일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서로 꽤 딴판의 이데올로기를 가진 나치 독일과 소련 사이에는 모종의 타협이 가능했고, 그것이 이내 폴란드 정복으로 드러났던 것이다.  - P279

1941년 사태의 의문에 대한 답은 계몽주의의 지식 유산보다는 제국주의의 가능성과 그리고 파리보다는 런던과 더 깊은 관련을 맺고있다. 히틀러와 스탈린 두 사람은 모두 19세기 영국이 남긴 두 가지주요 유산과 마주하고 있었다. 바로 당시의 국제 정세라는 것을 만들어내고 있던 제국주의, 그리고 불패를 자랑하는 대영제국의 해상 지배권이었다. 적어도 바다에서만큼은 영국의 적수가 될 수 없었던 히틀러에게 있어, 동부 유럽은 새로운 대륙 제국을 만들 기회의 땅과도 같았다. 게다가 동쪽에 별다른 마음을 품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다.
소련과 그에 해당되는 모든 것은 언젠가는 완전히 쓸어버려야 할 것들이었다. 그런 뒤 그곳은 히틀러가 1941년 7월에 밝힌 것처럼 "에덴동산"이 될 것이었다. 대영제국의 그림자는 또한 제국주의가 자본주의를 인위적으로 지탱하고 있다고 믿은 스탈린의 전임자 레닌의 뇌리를 사로잡고 있던 것이기도 했다. 레닌의 후계자로서, 스탈린의 과업은 제국주의와 자본주의가 여전히 끈질기게 버티고 있는 세계로부터 사회주의의 고향 소련을 지켜내는 것이었다. 스탈린은 이미 히틀러라는 인물이 떠오르기 전부터 제국주의 세계를 자신이 인정하고 있음을 드러냈는데, 그에 따르면 제국주의가 계속되고 있기에 사회주의는 전 세계에 걸친 영구 혁명이 아닌 소련을 통해 대표되어야 한다. 히틀러와 손을 잡은 것은 바로 이 같은 이데올로기적 타협("일국사회주의")에서 나온 부속물이었다.  - P280

서로 동맹이든 아니면 적이든, 또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소련과 나치 지도부 앞에는 강력한 영국의 존재라는 현실이 던지는 근본적인 문제가 놓여 있었다. 그것은 바로 현대 세계에서 거대한 대륙 제국이 세계 시장으로의 안정된 연결통로 없이, 그리고 막강한 해군력 없이, 어떻게 번영을 누리며 자신의 지배력을 확보해낼 수 있을까라는 문제였다.
이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스탈린과 히틀러가 내놓은 기본 답안은똑같았다. 즉 그런 국가는 반드시 넓은 땅을 보유하고 경제적 자급자족을 일궈낼 수 있어야 하며, 체제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따라서 스탈린주의의 내부적 산업화 혹은 나치의 식민지 토지개혁과 같은 이른바 자신들의 역사적 과업을 달성할 수 있는 시민들을 보유해야만 한다. 히틀러와 스탈린 두 사람은 풍부한 식량, 원자재, 광물자원으로 뒷받침되는 거대 규모의 제국주의적 경제 자립 국가를 지향했다. 아울러 스탈린의 이름이 철을 의미하는 스틸steel에서 따온 것이라는점, 그리고 히틀러 또한 철 생산에 특별한 관심을 가진 데서 볼 수 있듯이, 그들은 현대에 특정 자원이 갖는 중요한 의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스탈린과 히틀러 모두 농업을 자신들의 혁명 완수를 위한 핵심 요소로 파악했다. 두 사람 눈에, 자신들의 체제는 식량 생산을 통해 나머지 세계로부터 좌우되지 않는 경제적 자립을 일궈낼 것이며, 타락한 자본주의 체제보다 자신들이 우월하다는 사실을 드러내줄 것이었다. - P283

우크라이나의 식량은 소련의 완전무결성을 지키고자 했던 스탈린의 계획에서만큼이나 나치의 동부 제국 계획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던 것이었다. 스탈린의 우크라이나 "요새지대"는 곧 히틀러의 우크라이나 "곡창지대"였다. 독일군 작전 참모진은 일련의 연구를 통해 1940년 8월, 우크라이나가 "농업적으로나 공업적으로 소련에서 가장가치 있는 지역"이라고 결론 내렸다. 1941년 1월 민간 계획을 책임지고 있던 헤르베르트 바케는 히틀러에게 "우크라이나 점령은 우리를모든 경제적 걱정거리에서 벗어나도록 해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우크라이나를 통해 히틀러가 원한 것은 "이제 그 누구도 지난 전쟁에서처럼 우리를 배고픔에 허덕이게 할 수 없을 것"이었다. 우크라이나 정복은 독일을 영국의 해상 봉쇄로부터 자유롭게 해줄 것이고, 그곳에대한 식민화는 독일을 미국과 같은 세계적인 강대국으로 만들어줄것이었다. - P289

이들의 계산에 따르면, 집단농장에서 생산한 식량은 독일인들을 먹여 살리기에 딱 적당한 수준이지만 그 외의 동쪽 인민들을 먹여 살리기에는 모자랐다. 그런 점에서 이들 동쪽 주민은 정치적 통제와 경제적 균형을 위한수단으로 치부되어야 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1941년 5월 23일까지 공들여 만들어낸 굶주럼 계획, 소련 땅에서 전쟁이 벌어지는 기간 및 그 후 정복지의 소련시민들을, 특히 대도시 지역의 시민들을 굶김으로써 독일군과 독일(및 서유럽) 민간인들을 먹여 살린다는 계획이었다. 이제 우크라이나지역의 식량은 러시아와 나머지 소련 지역을 먹여 살리기 위해 전처럼 북쪽으로 운송되는 것이 아니라, 독일과 나머지 유럽 지역에 영양을 공급하기 위해 서쪽으로 운송될 것이었다. 독일이 보기에, 우크라이나(그리고 러시아 남부 지역)는 필요한 양보다 더 많은 식량이 생산되는 "식량 과잉 지역"이었고, 러시아와 벨라루스는 이와 반대로 "식량결핍 지역"이었다. 우크라이나 도시들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벨라루스 및 러시아 서북부 주민들 대부분은 배를 곯아야 하거나 아니면 그곳을 떠야 할 자들이었다. 도시들은 파괴되고, 그 땅은 자연림으로 되돌아가야 할 것이며, 약 3000만 명은 1941년에서 1942년사이의 겨울에 그대로 굶어 죽어야만 했다. 굶주림 계획에는 "식량 결핍 지역의 공업뿐 아니라 대부분의 인구도 절멸시킬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 P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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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옳은 것을 선택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압도적으로 성공하는 법

나는 거의 60년 동안 사업가로 살아왔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누군가 자신이 알코올 중독자라거나 변호사라고(나는 이 직업을 존경해 본 적이없다) 인정하는 것만큼이나 내게 어려운 일이다. 기업은 자연의 적이되어, 토착 문화를 파괴하고,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착취한 것을 부유한사람들에게 쥐여 주고, 공장폐수로 지구를 오염시킨 일들을 책임져야 할 주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기업은 식량을 생산하고, 질병을 치료하고, 인구를 제한하고, 사람들을 고용하고, 우리 삶의 질을 전반적으로 향상시킬수 있다. 이성과 영혼을 저버리지 않고도 수익을 내면서 이런 좋은 일들을 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 P25

 우리 마음속의 최우선은 항상 품질이었다. 적절치 못한 도구는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고 우리 자신이 우리 제품의 최대 고객이었으므로 죽음에 이르는 그사람이 우리가 될 수 있었다. 디자인에 있어서 우리의 지침은 프랑스의 비행사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의 사상에 바탕을 두었다.

항공기뿐 아니라 사람이 만드는 모든 것이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하는 모든산업 활동, 모든 계산과 추정, 사람들이 초안을 만들고 청사진을 그리는 데 보낸 모든 밤들은 하나의 원리로 수렴된다. ‘단순성‘이라는 궁극의 원칙으로 가구의 곡선이나 배의 용골이나 비행기의 동체를 다듬는다고 생각해 보자 장인정신을 담은 수 세대에 걸친 실험을 통해, 인간의 가슴이나 어깨의 곡선과 같은 궁극의 자연스러움을 드러내야 한다는 법칙이 존재하기라도하는 것처럼 그 일에 임해야 한다. 어떤 것이든 완벽은 더 이상 더할 것이 없을 때가 아니라 더 이상 뺄 것이 없는 무엇 하나 걸치지 않은 적나라한 상태에 이를 때에 달성된다. - P53

선(禪)을 통해 나는 단순해지는 법을 배웠다. 단순해지는 것이 가장 풍성한 결과를 낸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암벽을 오르는 사람은 커다란 등반 장비들을 베이스에 남겨 두고, 오로지 자신의 기술과 바위의 특성에만 의존해서 암벽을 맨손으로 오를 수 있도록 기술을 완벽하게 연마했을 때에야 대가의 반열에 오른다.
나는 하루에 8시간에서 10시간 동안 강철 피톤을 벼리는 대장장이로서 선을 배웠다. 나는 과도한 움직임으로 에너지를 낭비하거나 손을 바꾸지 않고 움직였다. 피톤을 잡고, 두드리고, 다시 노에 넣어 온도를높이고, 또 다른 피톤을 집어 드는 과정이 궁도나 다도가 보여 주는 유려함이나 우아함을 가지도록 말이다. 긴 하루 일과가 끝나면 낡고 녹슨 기름통이 수십억 개의 작은 루비처럼 반짝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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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뜻밖에도 박씨는 나를 생각하고 그 화집을 가지고 나온 거였다. 한산한 오전 시간에 겸연쩍은 미소를 띠고 나한테로 화집을 들고 왔다. 일제 때 선전에 입선한 작품을 모은 화집이었다. 그는 미리 특정의 페이지를 펴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 주면서 자기 그림이라고 했다. 농가 여자들이 마주 보고 절구질을 하고 있는 그림이었다. 특선이나 무감사 같은 특별한 그림은 아닌 듯했다. 꽤 크게나온 그림도 있었는데, 그의 것은 명함만한 크기로 흑백으로 나와 있었다. 그 밑에 들어 있는 작가 이름을 보고 처음으로 나는그가 박수근이라는 걸 알았다. 박씨라는 성 외에 이름을 더 알았다 뿐, 그전부터 박수근이라는 화가를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래도 진짜 화가가 우리 초상화에 있었다는 것은 나에게는 사건이요 충격이었다. 우선 그동안 내가 너무 버르장머리없이 군 게 무안했다. 그는 그 화집을 내 책상 위에 놓고 갔다가 저녁에 퇴근할 때서나 가져간 것 외에 아무런 의사 표시도 하지않았다. 나 역시 왜 그걸 나에게 보여 줬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나는 막연히 나의 신경질과 오만불손에 대한 그 나름의 항거. 최소한의 꿈틀거림이 아닐까, 정도로 추측했다.
너만 잘난 게 아냐, 여기 잘난 사람 또 있어. 라고 말해 주고싶은 게 아니었을까. 그 후 나는 다시는 지진아 지도하는 국민학교 여선생 같은 짓거리를 안 하게 됐다. 안 했다기보다는 못했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 P304

그러나 사람을 애정을 가지고 바라본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그가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은 순하고 덤덤한 데 있었고, 그런 것은 나타나기보다는 숨어 있는 특색이었다. 초상화부 화가들은 다 비슷비슷하게 가난했고 하고 다니는 꼴도 한물감으로 칠해 놓은 것처럼 궁상맞아 보였지만 그에게는 남다른 의젓함이있었다. 다들 늘 돈, 돈, 돈, 했고 한 푼에 치를 떨었고, 자기 그림이 빠꾸당하면 불같이 화를 내느라 딴 그림까지 망쳐 놓기 일쑤였다. 박수근의 가난엔 그런 조바심이 없었다. 그의 그림이 빠꾸당하지 않게 하려고 온갖 아양을 다 떨고 있는 내 등 뒤로 와서 슬그머니 그림을 빼앗으면서, 또 그려 주면 될 걸 뭘 그렇게 애를 쓰느냐고 위로한 것도 그밖에 없었다. 그는 내가 몽상한 천재적인 예술가는 아니었다. 그가 만약 천재였다면 사는 일을 위해 예술을 희생하려 들진 않았을 것이다. 그는 예술보다 사는 일을 우선했다. 그가 가장 사랑한 것도 아마 예술이 아니라 사는 일이었을 것이다. 사는 일을 위해 하나밖에 없는 재주로 열심히 작업을 했다. 그뿐이었다. - P307

막내를 생각해서 홀로 남은 어머니는 막내를 만나기는 했지만 늘 구박만 받았다. 구박이 아니라 애정 표현인지도 모르지만, 왜 아버지하고 형 따라가지 않고 나 같은 자식한테 뭘 바라고 남았냐고 모진 소리를 해도 노인은 노염도 안 타고 오히려 구수하게 받았다.
"바라긴, 우리 지섭이 대문 열어 주려고 남아 있었다. 어쩔래? 넌 어려서부터 딴 사람이 대문 열어 주면 재수 없다고 심통부리곤 했잖여."
"엄마, 난 엄마를 부양하고 책임질 능력이 없단 말야. 엄마가나한테 붙는 건 약속이 틀려. 난 막내잖아. 효도할 자신 없단 말야."
이렇듯 버릇없는 소리를 거침없이 지껄여도 노인은 탄하지않고, 재롱 보듯이 즐거운 표정을 짓는 걸 보면 신기했다.
"인석아, 살아 돌아와 대문 흔든 게 효도지 더 어떻게 효도를 하냐." - P322

해가 뉘엿뉘엿해질 무렵 실컷 방망이질하고 삶아 빨아 백설처럼 희게 된 홑이불 빨래를 이고 식구들이 돌아왔을 때는 나는 멀쩡해져 있었다. 빨래를 너는 엄마의 표정도 흰빛을 받아 개운하고 무심해 보였다.
엄마에게나 나에게나 온몸을 내던진 울음은 앞으로 부드럽게 살기 위해 꼭 필요한 통과의례, 자신에게 가하는 무두질 같은 게아니었을까. 그러나 엄마하고 나하고 만날 수만 있었다면 둘 다 울지 않았을 것이다. 따로따로니까 서로 안 보니까 울 수 있는 울음이었다.
그날 엄마가 정릉으로 빨래를 간 건 참 잘한 일이었다. - P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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