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곳의 수용소는 교육받은 계층의 폴란드인들이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관찰하는 일종의 실험장과도 같은 곳이었다. 코젤스크, 오스타시코프, 스타로빌스크는 겉보기에는 폴란드와 다를 게 없는 곳이 되어 있었다. 수감자들 모두 폴란드 군복과 폴란드를 상징하는 흰색 독수리가 그려진 모자 외엔 아무것도 걸치고 있지 않았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그들 중 누구도 전쟁 전 자신들의 고향인 동부 폴란드에서는평소 그런 복장을 하고 있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제 그곳에는 소련을상징하는 망치, 낫, 붉은 별이 휘날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 그들이폴란드를 잊었을까? 아니다. 수용소에 있던 사람들은 이제 독일의 손에 떨어진 서부 지역 대학들이 문을 닫고, 소련 관할이 된 동부 지역대학들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대학으로 바뀌던 바로 그 순간에도 과거 이름난 인문학자 그리고 과학자였던 예비군 장교들을 주축으로 폴란드 대학에서 이뤄지던 강의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장교들은 작은신용조합을 만들어 가난한 이가 부유한 이에게 돈을 빌릴 수 있도록했다. 오래전 배운 시를 암송하기도 했으며, 엄청난 누군가는 폴란드의 사실주의 장편소설을 통째로 이야기해주기도 했다. 물론 이들은 서로 의견 충돌을 빚기도, 싸우기도, 누군가의 물건을 훔치기도 했다. 또한 소수는(이후 밝혀졌듯이 극소수) 소련에 협력하는 길을 택하기도했다. 장교들은 앞으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를 두고 밤새 의견 충돌을 빚었다. 하지만 폴란드인이라는 정체성만큼은 한결같았고, 이는 소련인들의 눈에도 확연했을 것이다. - P238
폴란드 유대인 엘리트 일부가 유대인 평의회 위원이 되어 독일의 게토 정책을 집행한 데서 알 수 있듯 독일인들은 폴란드 유대인 엘리트들의 목숨만은 부지해주었다. 반면 폴란드 비유대인 엘리트들의 상황은 조금 달랐는데, 독일은 이들을 대개 일종의 정치적 위협으로 여겼다. 1940년 초 히틀러는 다음과 같은 결론, 즉 동방 총독부 내에 존재하는 좀더 위험한 폴란드인들을 그야말로 죽여 없애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는 프랑크에게 폴란드의 "리더십 요소들"은 "확실하게 제거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프랑크는 없애버릴 집단들의 목록을 작성했는데, 주로 교육받은 사람과 성직자 그리고 정치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인 사람들의 이름으로 채워진 명단은 과거 탄넨베르크 작전 때와 똑 닮아 있었다. 실로 흥미로운 우연의 일치는, 프랑크가 이들 폴란드의 "정신적 지도자들을 쓸어버릴 계획을 자기 수하들에게 이야기한 1940년 3월 2일은 바로 베리야가 소련 내 폴란드인 전쟁포로들에 대한 테러 행위를 지시하기 사흘 전이었다는 점이다. - P261
폴란드 사회의 목을 따버리는 방식을 통해 그곳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땅, 즉 운영하고 다스리기보다는 그저 지배가 어울리는 땅으로 만들려는 특정 정책들은 모스크바와 베를린에 의해 의도적으로 추진된 것들이었다. 한스 프랑크는 히틀러의 말을 따와, 폴란드의 "리더십 요소들"을 없애는 것이 곧 자신의 임무라고 밝혔다. 내무인민위원회의 장교들 역시 목표물을 찾고자 폴란드인 「인명록」까지 뒤지는 모습을 보이며 논리적 극단에서 나온 자신들의 임무를 수행했다. 이것은 그야말로 근대성에 대한 공격이자, 특정 지역과 사회에 자리하던 이른바 계몽의 화신에 대한 공격에 다름 아니었다. 동유럽에서 특정 사회가 갖고 있는 자부심은 바로 지식인 계급을 뜻하는 "인텔리겐차"에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특히 조국이 고난에 처했거나 타인의 손에 떨어졌을 때 그런 조국을 이끌어가는 자들로 여겼다. 아울러 저술, 연설, 행동 하나하나를 통해 모국의 문화를 잘 지키는 것 또한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라 여기던 자들이었다. 독일어에도 이와 똑같은 단어가 똑같은 뜻을 지니고 있었다. 바로 그러했기에 히틀러가명확하게 내린 명령이 "폴란드 인텔리겐차의 절멸"이었던 것이다. 앞서 소련 코젤스크 심문관들의 수장은 "서로 다른 두 철학"을 이야기했고, AB악치온이 펼쳐질 당시 어느 독일 심문관은 곧 사형당할 노인에게 "폴란드인들만의 사고방식"을 보이라고 명령했다. 그 대상들은 바로 폴란드 문명의 화신이자, 그것만의 특별한 사고방식을 나타낸다고 여겨진 지식인 계층이었다. 두 점령국의 손에 자행된 대량학살, 그것은 바로 폴란드 인텔리겐차가 자신들의 역사적 소임을 다했다는 비극의 증거였다. - P274
흔히 1941년 사태에 대한 의문은 좀더 추상적인 방식, 즉 유럽 문명과 관련된 것으로 제기된다. 몇몇 논의에 따르면, 독일(그리고 소련)의 학살 정책은 아마도 프랑스 혁명에서 나폴레옹 전쟁에 이를 때 자리 잡은 관념, 곧 정치 영역에서 이성의 힘과 역할이라는 계몽주의적관념에서 비롯된 이른바 ‘근대성‘이 그 정점에 이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의미에서의 근대성 논의는 1941년의 재앙에 대해 적어도 그 어떤 직접적인 설명도 제공해주지 못한다. 두 체제는 모두 계몽주의가 가진 낙관론, 즉 사회적 진보는 자연세계를 샅샅이 훑어나가는 과학의 눈부신 발걸음에 뒤따를 것이라는 생각을 거부했다. 히틀러와 스탈린 두 사람이 받아들였던 것은 19세기 후반의 수정된 다원주의로, 이에 따르면 진보는 가능하지만 그것은 오직 인종 혹은 계급 사이의 폭력적 투쟁의 결과로만 나타날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폴란드의 상층 계급을 말살한다거나(스탈린주의) 원래 폴란드인들은 인간 이하의 존재인데 감히 그에 맞지 않게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계층을 파괴하는 것(국가사회주의)은 정당한 일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서로 꽤 딴판의 이데올로기를 가진 나치 독일과 소련 사이에는 모종의 타협이 가능했고, 그것이 이내 폴란드 정복으로 드러났던 것이다. - P279
1941년 사태의 의문에 대한 답은 계몽주의의 지식 유산보다는 제국주의의 가능성과 그리고 파리보다는 런던과 더 깊은 관련을 맺고있다. 히틀러와 스탈린 두 사람은 모두 19세기 영국이 남긴 두 가지주요 유산과 마주하고 있었다. 바로 당시의 국제 정세라는 것을 만들어내고 있던 제국주의, 그리고 불패를 자랑하는 대영제국의 해상 지배권이었다. 적어도 바다에서만큼은 영국의 적수가 될 수 없었던 히틀러에게 있어, 동부 유럽은 새로운 대륙 제국을 만들 기회의 땅과도 같았다. 게다가 동쪽에 별다른 마음을 품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다. 소련과 그에 해당되는 모든 것은 언젠가는 완전히 쓸어버려야 할 것들이었다. 그런 뒤 그곳은 히틀러가 1941년 7월에 밝힌 것처럼 "에덴동산"이 될 것이었다. 대영제국의 그림자는 또한 제국주의가 자본주의를 인위적으로 지탱하고 있다고 믿은 스탈린의 전임자 레닌의 뇌리를 사로잡고 있던 것이기도 했다. 레닌의 후계자로서, 스탈린의 과업은 제국주의와 자본주의가 여전히 끈질기게 버티고 있는 세계로부터 사회주의의 고향 소련을 지켜내는 것이었다. 스탈린은 이미 히틀러라는 인물이 떠오르기 전부터 제국주의 세계를 자신이 인정하고 있음을 드러냈는데, 그에 따르면 제국주의가 계속되고 있기에 사회주의는 전 세계에 걸친 영구 혁명이 아닌 소련을 통해 대표되어야 한다. 히틀러와 손을 잡은 것은 바로 이 같은 이데올로기적 타협("일국사회주의")에서 나온 부속물이었다. - P280
서로 동맹이든 아니면 적이든, 또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소련과 나치 지도부 앞에는 강력한 영국의 존재라는 현실이 던지는 근본적인 문제가 놓여 있었다. 그것은 바로 현대 세계에서 거대한 대륙 제국이 세계 시장으로의 안정된 연결통로 없이, 그리고 막강한 해군력 없이, 어떻게 번영을 누리며 자신의 지배력을 확보해낼 수 있을까라는 문제였다. 이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스탈린과 히틀러가 내놓은 기본 답안은똑같았다. 즉 그런 국가는 반드시 넓은 땅을 보유하고 경제적 자급자족을 일궈낼 수 있어야 하며, 체제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따라서 스탈린주의의 내부적 산업화 혹은 나치의 식민지 토지개혁과 같은 이른바 자신들의 역사적 과업을 달성할 수 있는 시민들을 보유해야만 한다. 히틀러와 스탈린 두 사람은 풍부한 식량, 원자재, 광물자원으로 뒷받침되는 거대 규모의 제국주의적 경제 자립 국가를 지향했다. 아울러 스탈린의 이름이 철을 의미하는 스틸steel에서 따온 것이라는점, 그리고 히틀러 또한 철 생산에 특별한 관심을 가진 데서 볼 수 있듯이, 그들은 현대에 특정 자원이 갖는 중요한 의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스탈린과 히틀러 모두 농업을 자신들의 혁명 완수를 위한 핵심 요소로 파악했다. 두 사람 눈에, 자신들의 체제는 식량 생산을 통해 나머지 세계로부터 좌우되지 않는 경제적 자립을 일궈낼 것이며, 타락한 자본주의 체제보다 자신들이 우월하다는 사실을 드러내줄 것이었다. - P283
우크라이나의 식량은 소련의 완전무결성을 지키고자 했던 스탈린의 계획에서만큼이나 나치의 동부 제국 계획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던 것이었다. 스탈린의 우크라이나 "요새지대"는 곧 히틀러의 우크라이나 "곡창지대"였다. 독일군 작전 참모진은 일련의 연구를 통해 1940년 8월, 우크라이나가 "농업적으로나 공업적으로 소련에서 가장가치 있는 지역"이라고 결론 내렸다. 1941년 1월 민간 계획을 책임지고 있던 헤르베르트 바케는 히틀러에게 "우크라이나 점령은 우리를모든 경제적 걱정거리에서 벗어나도록 해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우크라이나를 통해 히틀러가 원한 것은 "이제 그 누구도 지난 전쟁에서처럼 우리를 배고픔에 허덕이게 할 수 없을 것"이었다. 우크라이나 정복은 독일을 영국의 해상 봉쇄로부터 자유롭게 해줄 것이고, 그곳에대한 식민화는 독일을 미국과 같은 세계적인 강대국으로 만들어줄것이었다. - P289
이들의 계산에 따르면, 집단농장에서 생산한 식량은 독일인들을 먹여 살리기에 딱 적당한 수준이지만 그 외의 동쪽 인민들을 먹여 살리기에는 모자랐다. 그런 점에서 이들 동쪽 주민은 정치적 통제와 경제적 균형을 위한수단으로 치부되어야 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1941년 5월 23일까지 공들여 만들어낸 굶주럼 계획, 소련 땅에서 전쟁이 벌어지는 기간 및 그 후 정복지의 소련시민들을, 특히 대도시 지역의 시민들을 굶김으로써 독일군과 독일(및 서유럽) 민간인들을 먹여 살린다는 계획이었다. 이제 우크라이나지역의 식량은 러시아와 나머지 소련 지역을 먹여 살리기 위해 전처럼 북쪽으로 운송되는 것이 아니라, 독일과 나머지 유럽 지역에 영양을 공급하기 위해 서쪽으로 운송될 것이었다. 독일이 보기에, 우크라이나(그리고 러시아 남부 지역)는 필요한 양보다 더 많은 식량이 생산되는 "식량 과잉 지역"이었고, 러시아와 벨라루스는 이와 반대로 "식량결핍 지역"이었다. 우크라이나 도시들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벨라루스 및 러시아 서북부 주민들 대부분은 배를 곯아야 하거나 아니면 그곳을 떠야 할 자들이었다. 도시들은 파괴되고, 그 땅은 자연림으로 되돌아가야 할 것이며, 약 3000만 명은 1941년에서 1942년사이의 겨울에 그대로 굶어 죽어야만 했다. 굶주림 계획에는 "식량 결핍 지역의 공업뿐 아니라 대부분의 인구도 절멸시킬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 P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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