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국방군이 소련군 포로들을 기차에 실어 어딘가로 이동시킬때에는 지붕이 없는 화물열차를 이용했고, 따라서 포로들은 눈비를 비롯한 기상 변화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기차가 목적지에 도착하자수백 명의, 심지어 때로는 수천 명의 얼어 죽은 시체들이 열차 밖으로 쏟아져 내렸다. 이송 중 사망률은 70퍼센트에 달했다. 이 죽음의 행군과 이송에서 약 20만 명의 포로가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점령한 소련 지역에 설치한 80여 개에 이르는 포로수용소에 겨우 살아 도착한 포로들은 하나같이 지치고 굶주린 상태였으며, 이들 중 다수는 부상을 입거나 병들어 있었다. 보통 포로수용소라는 것은 군인들이 적국 소속 군인들의 목숨을 보존해주기 위해 만드는 간단한 시설이다. 이러한 수용소들은 비록어려운 여건 속에서 익숙지 않은 장소에 세워지지만, 자신의 동료들 역시 적국의 손에 포로로 붙잡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만든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소련 지역에 마련된 독일의 포로수용소는 그런 일반적인 포로수용소와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그것은 수용자들의 삶을 아예 끝장내버리기 위해 고안되었다.  - P315

군 상급 사령부와 일선의 장교들이 불법적이고 잔인한 정책들을 실행에 옮김에 따라 그들은 히틀러가 제시한 종류의 논리 말고는 이를 정당화할 수단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특정 인간들은 없애버려야 할 식충일 뿐이며 슬라브족, 유대인, 아시아인들과 그 밖에 소련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인간 이하의 존재로, 소모품보다 못한 것들이라는 논리였다. 1933년 우크라이나 공산주의자들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1941년의 독일군 장교들은 굶주림을 정책으로 옮겼다. 두 사례 모두에서 개개인들은 처음에 이런 정책에 반대하거나 의구심을 가졌다. 그러나 집단이라는 차원에서는 결국 정권이 자행한 범죄에 스스로 연루되었으며, 따라서 자기네 지도자들의 도덕적 우월성을 인정한 채 그냥 그것에 따라버렸다. 시스템이 재앙으로 변했고, 그들은 시스템으로 변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히틀러의 유럽에 첫 수용소망을 만들고 그것들을 운영했던 독일 국방군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는 수천, 수만, 수십만,
마침내는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은 장소가 되었다. - P319

그러나 이 같은 잔혹함은 소련의 사기를 꺾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소련의 의지를 더욱 불타오르게 만들었다. 정치 장교, 공산주의자, 유대인을 가려내는 작업은 무의미했다. 이미 붙잡은 이들의 목숨을 빼앗는 일은 소련을 그다지 약화시키지 못했다. 실제로 대규모 기아 정책과 신원 선별 및 조사 작업은 붉은 군대가더욱 맹렬히 저항하도록 만들었다.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 배고픔에몸부림치다 죽을 것이 빤하다면, 군인들은 싸우는 길을 택할 게 틀림없다. 붙잡히면 그 즉시 총살임을 잘 알고 있던 공산주의자와 유대인 그리고 정치 장교들이 항복을 선택할 리 만무했다.  - P330

독일인들은 굶주림과 공포로 가득 찬 포로수용소의 포로들 중 최소 100만 명을 따로 뽑아 자신들의 군대 및 경찰력을 보조하는 인원으로 썼다. 애초에는 소련이 무너지면 이들의 도움을 통해 소련 영토를 좀더 손쉽게 장악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소련을 무너뜨리는 것이 뜻대로 되지 않고 오히려 전쟁이 길어지자, 이 소련인들에게는 히틀러와 그를 따르는 자들이 점령 지역에서 시행하고자했던 대량학살을 보조하는 역할이 주어졌다. 앞서 수용소의 포로였던 이들 보조자에게는 삽이 쥐어졌고, 독일군이 유대인들을 쏴 죽일장소에 도랑을 파라는 명령이 뒤따랐다. 다른 이들은 유대인을 쫓던 경찰 조직에 편성되었다. 몇몇 포로는 트라브니키에 있는 훈련소로 보내져 경비병 훈련 과정을 밟기도 했다. 나치에 봉사하도록 재훈련 받은 이 소련 시민 및 참전 군인들은 1942년 독일이 점령한 폴란드 트레블린카, 소비부르, 베우제츠의 학살 시설로 파견되었는데, 그곳은 앞으로 100만 명이 넘는 폴란드 유대인이 독가스를 마시고 숨져갈 장소였다. 마치 소련을 무너뜨리려던 전쟁이 유대인을 학살하는 전쟁으로 변모했던 것처럼, 독일이 펼친 하나의 학살 정책에서 살아남은 이들 중 몇몇은 이렇듯 또 다른 학살 정책의 공범자가 되어버렸다. - P334

1941년 여름까지의 유토피아는 다음의 네 가지였다. 바로 소련을 몇 주 만에 무너뜨릴 전격적 승리가 그 첫번째였고, 두 번째 유토피아는 3000만 명을 몇 달 내로 굶겨 죽일 굶주림 계획이었으며, 전쟁 뒤 유럽의 유대인들을 완전히 쓸어버릴 마지막 해결책이 그 세 번째, 소련의 서쪽 땅들을 독일의 식민지로 만들 이른바 동유럽 종합 계획이 그 네 번째 유토피아였다.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행된 지 6개월이 지난 시점이 되자, 히틀러는 유대인 말살에 우선순위를 배정하는 쪽으로 전쟁 목표를 수정하기에 이른다. 그때까지 그의 심복들은 그러한 바람들을 실행하는 데 필요한 이데올로기적, 행정적 책임과 재량권을 지니고 있었다. 전격적 승리는 끝내 없었다. 비록 수백만 명의 소련 시민이 기아에 목숨을 빼앗겼지만, 굶주림 계획은 실현 불가능한다는 게 명백해졌다. 동유럽 종합 계획 또는 전후 식민화 계획은 무엇이 됐든 뒤로 미뤄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유토피아가 시들해지자, 정치적 미래는 이러한 환상들에서 그나마 실제로 뽑아낼 수 있는 것들에 달려 있게되었다. 괴링, 힘러, 하이드리히 세 사람은 엉망이 돼버린 폐허 속에서 그나마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차지하고자 앞다투어 움직였다.  - P338

정치적 계산과 그간 해당 지역 주민들이 받았던 고통들이 이들의그 같은 집단학살에의 참여를 온전히 설명해주는 것은 아니다.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폭력은 독일인들과 해당 지역 비유대인들을 한데 뭉치게 만들었다. 분노는 독일이 바랐던 대로 소련에 협력한 자들보다는 유대인들을 향하게 되었다. 독일의 주장에 반응을 보인 사람들은 실제로 자신들이 겪은 아픔의 원흉이 유대인들이라 믿었건 믿지않았건 이제 스스로가 새 주인에게 꼬리를 흔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행동을 통해 나치의 세계관을 좀더 분명히 해주고있었다. 내무인민위원회의 처형에 대한 앙갚음으로서의 유대인 학살은 소련이 유대인 국가라는 나치의 시각을 뚜렷하게 해주었다. 또한 유대인에 대한 폭력은 앞서 스스로 소련에 협력했던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폴란드인들에게는 자신들이 얻은 변절자라는 오명을 벗어던질 기회였다. 유대인들이 공산주의자들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생각은 점령한 자뿐만 아니라 몇몇 점령당한 이들에게도 요긴한 아이디어였던 것이다. - P353

너무나 확연하게 드러나는 소비에트 폭력의 기록들로 말미암아 독일은 심지어 자신들만의 범죄 행위를 저지르면서도 스스로를 과거 소비에트가 벌인 범죄의 상처들을 원래대로 회복시켜주고 있다는 식으로 내세울 수 있었다. 그들이 귀가 따갑도록 표방한 것들에 비춰보면, 두 번의 점령을 받은 이들 지역에서 독일이 찾아낸 것들은 그들로하여금 어떤 특정한 느낌을 받게 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바로 과거 이들이 훈련받고 또 목격할 준비가 되었다고 여겨지던 것들, 즉 추정상으로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뒤에서 조종한‘ 소비에트의 범죄에 대한 일종의 확인이었다. 소비에트가 벌인 잔혹 행위들은 독일의 나치 친위대원, 경찰, 군인들이 이내 벌이게 될 유대인 여성 및 아동 학살 정책을 스스로에게 정당화하는 아주 좋은 구실이 될 것이었다.  - P355

1941년 11월 24일, 스탈린은 소련 동부에 대기중이던 전략적 예비 병력들을 불러와 독일 국방군 산하 중앙 집단군과의 교전에 투입했다. 그는 이러한 위험을 감수할 자신이 있었다. 이미 도쿄 고위층에 침투해 있던 정보원들을 비롯해 그 밖의 모든 소식통은 하나같이 일본이 소련령 시베리아를 칠 가능성은 없다는 보고를 올려온 터였다. 1941년 여름 독일의 공격이 없을 것이라 믿었던 과거 그의 판단은 틀렸다. 그러나 1941년 가을 일본의 공격이 없을 것이라 믿은 이번 판단은 옳았다. 그는 줄곧 침착하게 이 사안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12월 5일이 되자 붉은 군대는 반격에 나서기 시작했다. 독일 군인들은 패배감을 맛봤다. 이미지칠 대로 지친 말들에 가져온 장비를 다시 싣고 신속하게 퇴각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독일군은 허허벌판에서, 추위에 몸을 웅크린 채, 모든 것이 부족한 상태로 혹독한 겨울을 보내야 할 운명이었다. - P379

일본은 1933년부터 이 판에서 히틀러와 스탈린 두 사람이 서로 취하거나 맞서온 아주 중요한 변수였다. 이유는 서로 달랐지만 두 사람다 일본이 남쪽에서 육지를 두고는 중국과, 바다를 두고는 유럽 제국들 및 미국과 싸움을 벌이길 바랐다. 히틀러는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환영했는데, 이는 그것이 미군의 무장 속도를 늦추고 또 미국이 전투를 벌이더라도 유럽보다는 태평양에서 벌이게 만들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바르바로사 작전과 태풍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후에도, 히틀러는 일본이 소련보다는 미국과 싸우기를 원했다. 그는1942년 초까지 소비에트 정복을 완수하고 그 뒤 태평양에서 그동안 일본과의 전투로 약해진 미국을 상대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스탈린 역시 줄곧 일본이 남쪽으로 움직이도록 하기 위해 매우 신중하게 외교 및 군사 정책을 펼쳐오고 있었다. 그가 품은 생각의 핵심은 히틀러와 똑같았다. 즉 ‘소련 땅은 내 것이니, 일본은 이곳에서 멀리 떨어뜨려둬야 한다‘는 것이었다. 베를린과 모스크바는 일본을 동아시아와 태평양에 묶어두길 원했고, 도쿄는 바로 그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일본이 움직이던 때는 독일이 모스크바에서 꽁무니를 빼던 바로그 시점이었기에 진주만 공격은 앞서의 시나리오와 정반대의 의미,
즉 독일에게 있어서 최악의 상황을 의미했다. 영국을 위협하는 동시에 자력으로 미국에 맞설 준비에 들어갈 대륙 제국으로서의 독일은커녕, 하나같이 약한 동맹국들(이탈리아, 헝가리, 루마니아, 슬로바키아)혹은 결정적이랄 수 있는 동유럽 전선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하는 동맹국들(일본, 불가리아)을 이끌고 소련, 영국,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유일한 유럽 국가가 된 것이었다. 일본은 독일보다 이를 더잘 파악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들은 히틀러가 스탈린과 단독강화를 맺은 뒤 아시아 및 북아프리카 패권을 두고 영국 및 미국에 맞서 싸우기를 바랐다. 일본은 영국의 해상 패권을 무너뜨리고자 했고, 독일은 자신의 영역인 유럽 대륙 내에서 일을 벌이고자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히틀러에게 남은 것은 소련을 파괴하고 그 폐허 위에 대륙 제국을 세운다는 단 하나의 세계 전략뿐이었고, 그는 이를 계속 고수하는길을 택했다. - P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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