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스스로를 지켜낼 수 없었던 취약계층들이 우선적으로 끌려가 사라지는 결과를 낳았다. 대부분의 고아원은 8월 5일이 되자 텅 빈상태가 되었다. 이름 높은 교육자였던 야누시 코르차크는 자신이 돌보던 아이들과 함께 움슐락플라츠로 나갔다. 고개를 높이 들고 당당히 걷던 그의 양팔에는 두 아이가 안겨 있었다. 이날 코르차크와 함께 강제이주 대상이 된 6623명의 유대인 중에는 그의 동료였던 스테파니아 빌친스키를 비롯해 게토 안의 고아들을 교육하거나 돌보던 이들이 여럿 포함되어 있었다.  - P476

여인들의 경우 모두 이발 과정을 거쳐야 했기에, 그들에게는 혹여 살아남아 자신들의 말을 전해줄지도 모를 동료 유대인들과 이야기할수 있는 잠깐의 시간이 주어졌다. 루트 도르프만의 경우 그녀의 머리를 깎던 이발사로부터 그녀는 고통 없이 빠른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위안을 받으며 함께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한나레빈손은 자신에게 배정된 이발사에게 꼭 탈출해 온 세상에 트레블렌카에서 있었던 일을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 P488

유대인들은 사전에 충분히 대비한 경우에만 그것도 한정적으로만 자신들이 지니고 있던 것들을 지켜낼 수 있었다. 대개 그들은 언젠가 그것을 물물교환 또는 뇌물로 쓸 수 있기를 바라면서 각자 비교적 휴대하기 편한 귀중품을 가지고 있다면 챙겨두고자 했다. 간혹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미 알아차린 유대인들은 지니고 있던 돈과 귀중품을 열차 밖으로 집어던졌다. 박해자들의 배를 불려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이것이 트레블린카 주변에서 흔히 볼 수있었던 광경이다. 이제 죽음의 시설물 안쪽으로 들어가보자. 유대인 노역자들이 맡은 일 중 하나는 귀중품을 수색하는 것이었고, 찾아낸 귀중품 중 일부는 물론 그들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확보한 귀중품들을 시설물 안팎을 드나들 수 있었던 트라브니키 대원들에게 건넸고, 그 대가로 트라브니키 대원들은 인근 마을에서 먹거리를 가져다주었다. 트라브니키 대원들은 유대인 노동자들로부터 받은 귀중품을 현지 여성들 혹은 분명 바르샤바만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온 매춘부들에게 주었고, 이 과정에서 성병에 감염된 이들은 다시 의사 출신 유대 노역자들에게 진찰을 받으러 찾아오기도했다. 이렇게 그곳에는 아주 특별한 그리고 서로 밀접하게 이어진 순환의 현지 경제가 자리하고 있었다. 어느 목격자는 이를 두고 귀중품을 휘감은 타락한 "유럽"의 모습이었다고 회상했다.  - P489

1944년에 들어서자, 이미 독일은 소련 땅에서 물러난 상태였고, 이에 소련 유대인들을 사살하는 것이 더는 불가능한 상태가 된다. 아울러 붉은 군대의 진군으로 라인하르트 작전과 관련된 시설들은 모두 폐쇄되기에 이르렀고, 자연스레 아우슈비츠는 그해 마지막 해결책의 최대 시행처로 떠올랐다. 60만 명쯤 되는 유대인의 거의 전부가 1944년 아우슈비츠에서 독일인들의 손에 목숨을 잃는다. 이들 대다수는 헝가리 출신 유대인이었다. 헝가리 또한 이탈리아와 마찬가지로 주권을 잃기 전까지 그리고 독일의 동맹이던 시기까지는 자신의 땅에 있던 유대인들을 독일의 학살 공장들로 보내지 않았다(일반적으로, 독일의 동맹국에 머물던 유대인들은 독일이 점령한 곳에 있던 유대인들에비해서는 대우나 처지가 나은 편이었다). 그러나 1944년 5월 헝가리 지도부가 전쟁 중 독일에 등을 돌리려 시도한 뒤, 독일은 헝가리를 점령하고 자신의 정부를 세웠다. 새로 들어선 헝가리 파시스트 정권은 5월 유대인들을 강제추방하기 시작했는데, 이들 중 약 11만 명은 강제노역대상자로 선정되어 상당수가 살아남았으나 적어도 32만7000명은 가스실에서 살해당했다. 전쟁 기간에 약 30만명의 폴란드 유대인이 아우슈비츠로 보내졌고, 이들 중 약 20만 명이 목숨을 빼앗겼다. 형가리와 폴란드 유대인들을 하나로 보면, 이들이 아우슈비츠 유대인 희생자의 대다수를 점했다. - P495

아우슈비츠는 홀로코스트의 정점이었고, 그것이 최고조에 이른 시기는 이미 독일의 손안에 있던 소련 및 폴란드 유대인 대다수가 목숨을 잃고 난 뒤였다. 홀로코스트를 통해 100만명가량의 소련 유대인이 사망했고, 아우슈비츠에서 죽은 인원은 이들 전체의 1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했다. 폴란드 유대인은 홀로코스트에서 약 300만 명이 숨졌으며, 이들 중 아우슈비츠에서 살해당한 이들은 고작 7퍼센트밖에되지 않는다. 몰로토프-리벤트로프 라인 동쪽에서는 거의 130만 명의 유대인이 대부분 총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또 다른 약 130만 명의 폴란드 유대인은 동방 총독부에서 라인하르트 작전 당시 독가스로 살해당했으며(트레블린카에서 70만 명 이상, 배우세츠에서 약 40만 명,
소비부르에서 15만 명, 마이다네크에서 5만 명), 이들과 별개인 35만 명 역시 제국에 병합된 지역에서 독가스 중독으로 사망했다(아우슈비츠에서 사망한 20만 명 외에 헤움노에서 숨진 약 15만 명). 이 밖에 남아 있던폴란드 유대인 희생자 대부분은 게토 청소 작업(약 10만 명)과 추수감사제 작전(4만2000명) 혹은 기타 소규모 작전 및 개별 처형으로 목숨을 잃었다. 여기에 더해, 이보다 더 많은 수가 게토 안에서 질병과 굶주림으로, 아니면 강제수용소에서 노역에 시달리다 숨을 거두었다."
- P496

붉은 군대는 순식간에 몰로토프-리벤트로프 라인을 넘어 동방 총독부 루블린 지구가 있던 지역에 들어섰다. 종군기자로서 붉은 군대와 동행했던 작가 바실리 그로스만은 독일인들이 남긴 흔적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붉은 군대가 마이다네크에 있던 수용소를 발견한 것은 1944년 7월 24일이었다. 8월 초, 그로스만은 그곳에 남아있던 자신의 부족한 상상력으로는 도저히 그려낼 수 없는 거대한 공포를 봤다. 트레블린카가 눈에 들어오자마자 그는 과거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아챌 수 있었다. 바로 폴란드 유대인들이 가스실에서 목숨을 빼앗겼다는 것, 그들의 시신은 불태워졌다는 것, 타고 남은 재와 뼛조각들은 벌판에 파묻혔다는 것이다. "흡사 바다처럼, 걸을 때마다 출렁이는 땅"을 걷던 그는 바르샤바와 빈에서 찍은 아이들의 사진, 우크라이나 자수 조각, 금발과 흑발 머리 묶음 같은 흔적들을 볼 수 있었다. - P503

 폴란드 국내군 안에도 유대인 출신이 상당수 있었고, 그런 사실은 비록 겉으로 논의된 적이 거의 없었지만 이미 폴란드 국내군지휘관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폴란드 국내군에 있던 유대 출신의 다수는 자신을 유대인이라기보다는 폴란드인이라 여기고있었다. 다른 이들은 전쟁 시기의 바르샤바에서는 누군가가 유대인이라 왈가왈부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에서, 자신들의 유대인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았다. 비록 폴란드 국내군 내부에 반유대주의자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지만, 만에 하나 이들이 배신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1943년 1월에 접어들어 바뀐 사정은 과거 독일에 맞서 무기를 들었던 유대인들이 이제 유대인으로서 레지스탕스 활동을 시작한 것이었다. 이것은 폴란드 국내군 및 폴란드 사회에 만연해있던 반유대주의적 고정관념, 즉 ‘유대인은 싸워야 할 때 싸우지 않는 비겁자들‘이라는 이미지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었다. 이제 폴란드 국내군 바르샤바 지휘부는 유대 전투단이 자신들의 각종 총기, 탄환, 폭약 등의 무기를 숨겨둔 장소 상당수를 이용할 수 있게 해주었다. - P517

독일의 정책이 그래도 누군가는 살 수 있다는 믿음을 주던 시기만 하더라도, 유대인 개개인의 마음속에는 그 예외가 바로 자신이길 바라는 마음이 자리했고, 이에 유대인 사회 내부가 여러 갈래로 나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러나 바르샤바 게토 유대인들 사이에 이제 독일 정책의 결론은 예외 없는 죽음뿐이라는 확신이 서자, 유대인 사회는 똘똘 뭉치기 시작했다. 1943년 1월에서 4월 사이, 그들은 스스로 지하 저장고에 수없이 많은 벙커를 만들었는데, 이들 사이에는 경우에 따라 비밀 연결 통로까지 존재했다. 유대전투단은 지휘 체계를 확립했다. 총 지휘는 모르데하이 아니엘레비치가 맡고, 마레크 에델만, 이즈라엘 카날, 이츠라크 쿠키에르만(마지막에 엘리에제르 겔레르로 대체됨)이 세 곳으로 나뉜 게토 지역을 각각 맡았다. 그를 더 많은 무기를 들여왔으며 이에 맞게 단원들을 훈련시켰다. 독일의 군수공장에서 일하던 몇몇 유대인은 즉석 폭발물 제조에 필요한 부품들을 훔쳐오기도 했다. 유대 전투단은 독일인들의 게토 습격 계획을 사전에 파악하고 있었고, 독일인이 들이닥쳤을 때 그들은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폴란드 국내군의 일부는 놀라움과 감탄의 감정을 담아 이를 "유대-독일 전쟁"이라 불렀다. - P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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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뮤어는 자신의 짐을 양철통 하나에 넣을 수 있는 정도로 제안아곤 했다. 묵은 빵 한 덩어리와 외투 한 벌로 말이다. 그것은 환경적인 고려이기도 하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소유한 모든 것들은 만들어져서, 팔리고, 운송되고, 보관되고, 세탁되고, 결국은 버려지는 그 모든 단계에서 환경에 피해를 입힌다. 우리에게 직접적인 책임이 있기도 하고, 우리에게서 비롯되어 다른 사람에 의해 저질러지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생산자로서든 소비자로서든 무언가를 구입할 때에는 이렇게 자문해 보아야 한다. 이 구매가 필요한가? 요가를 하기 위해서 새로운 옷이 정말로 필요한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이 제품이 한가지 이상의 일을 해낼 것인가?
우리는 작은 암벽 등반용 배낭을 만든 적이 있었다. 배낭을 멨을 때 편안하도록 등 부분에 얇은 발포고무 패드가 들어 있었다. 이 패드는 떼어 내면 야영지에서 방석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티턴에서 등반을 함께하던 친구 한 명이 넘어져서 팔이 부러졌을 때 나는 이 패드와 액세서리 끈 몇 개로 완벽한 부목을 만들 수 있었다.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필요한 것은 줄어든다. 숙련된 플라이 낚시꾼은 낚싯대 하나, 플라이 한 종류, 낚싯줄 한 종류만으로도 장비와 플라이를 잔뜩 가진 서투른 사람보다 많은 물고기를 낚는다. 나는 소로의 조언을 절대 잊지 않는다. "새 옷이 필요한 모든 사업을 조심하라". - P147

우리는 교체가 으뜸으로 여겨지는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차나 세탁기와 같은 고가의 제품을 정기적으로 수리한다. 하지만 새것을 사는 게 더 쉽고 비용도 적게 든다. 직접수리를 시도한다면 품질 보증을 적용받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는 안내문이나, 필요한 정보와 부품의 부족 등 다른 이유도 있다.
이런 조건은 소유자가 아닌 소비자 중심의 사회를 만든다.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소유자는 적절한 관리부터 수리, 재사용, 공유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구매에 책임질 권한을갖는다. 하지만 소비자는 사용하고 만들고, 버린 뒤 또 그 일을 반복한다. 생태계를 파멸로 몰아가고 있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다.
- P152

대부분의 성공한 기업들은 한정된 상품을 아주 잘 만든다. 최고의 회사가 만드는 제품은 그들보다 뒤처지는 경쟁사가 만드는 제품에 비해 들어가는 부품의 수가 50퍼센트 적다. 부품이 적다는 것은 제조 공정이 빠르고 단순하다(그리고 비용이 적게 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부품이 적다는 것은 고장을 일으킬 가능성이 적다는 것을 의미한다. 품질이 보장되는 것이다. 좋은 회사는 품질을 관리하는 인력이 적은데도 불구하고 결함이 적고 따라서 낭비도 적다.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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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비에트 인민들의 사기를 끌어올리고 독일에 대한 자신의 자신감을 보여주고자, 그는 실제로 모스크바의 서쪽을 방어하고 있던 붉은 군대의 사단들을 불러들여대로를 행진하라고 지시했다. 이날 이뤄진 연설을 통해 그는 모두 러시아인인 6명의 혁명 이전 영웅들의 이름을 언급하며, 소비에트 인민들에게 "위대한 선조들"의 선례를 따를 것을 주문했다. 이처럼 절망의 시기, 소비에트의 지도자는 러시아 민족주의에 호소했던 것이다.
스탈린은 스스로 유대인 집단학살에 대해 언급한 지 불과 하루 만에 이렇듯 자기 자신과 인민을 옛 제정 러시아와 연결 짓고 있었다.
소련 서기장으로서, 다른 이들도 아닌 혁명 이전 러시아 역사 속 영웅들을 끌어들이면서 그는 이 유령들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스탈린은 러시아인을 역사의 중심에 두는 방식을 통해, 독일의 침략으로 러시아인들보다 더 큰 고통에 시달린 사람들을 비롯한 여타 소련 인민들의 역할을 암암리에 축소시켜버리고 있었다. - P407

빨치산을 이용한 전투는 주변의 민간인들이 아닌 제복을 입은 군인끼리 서로를 주목표로 전투를 벌이는 관행을 파괴하는 것이었으므로,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불법이었다. 원칙적으로 빨치산들은 적국의 점령자들로부터 민간인을 보호하는 것이 주목적이지만, 실제에 있어 그들은 점령자들과 마찬가지로 민간인들에게 빼앗은 것으로 연명해야만 한다. 더불어 민간인들 속에 섞여 숨어 있으므로, 그들은 현지 주민들에 대한 점령자들의 앙갚음을 때로는 의도적으로 줄여낸다. 앙갚음은 곧 빨치산들의 선전과 인원 충원에 활용되거나 아니면 앙갚음 후 남은 생존자들을 숲으로 숨어드는 것 말고는 달리 선택할 길이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독일군은 언제나 물자와인원이 부족한 상태였고 특히 일선에서의 요구가 많았기에, 군사 및 민간 당국은 더더욱 빨치산들이 불러일으킬지도 모를 혼란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 P419

디를레방거의 부대는 그저 이미 극심한 공격에 시달리고 있던 정규군을 지원하기 위해 벨라루스에 파견된 여러 무장친위대 및 질서 경찰 부대 중 하나일 뿐이었다. 1942년 말까지, 독일 군인들은 극심한 피로에 시달리고 있었고, 패배를 직감하고 있었으며, 민간인들에 대한 일반적인 의무들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상태였다. 또한 그들에게는 빨치산을 극도로 잔인하게 대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상태이기도 했다. 대 빨치산 임무를 배정받은 군인들을 맞이한 것은 자유자재로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질 수 있는 그리고 자신들은 모르는 현지 지형지물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적과 싸워야 하는 데서 오는 불안감이었다. 독일 국방군은 이제 언젠가부터 민간인, 특히 무엇보다 유대인 대량학살을 주요 과업으로 삼아오던 경찰 및 나치 친위대와 협력하고있었다. 이들의 임무가 빨치산 몰살이라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간인 사망자 수는 독일의 정규 군사 작전 계획의 세부 지침들이 무엇이든 엄청나게 높을 수밖에 없었다. - P435

전쟁이 끝날 때까지 동쪽에서 끌려온 그 대다수가 슬라브족인 약 800만 명의 외국인이 제국 안에서 노역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것은 나치의 인종주의적 기준에서 보더라도, 다소 엇나간 결과물이아닐 수 없었다. ‘자랑스러운 독일인들`은 수백만 명의 "인간 이하의존재들"을 죽이고자 독일 밖으로 나아가 그 목표를 달성하기는커녕 마찬가지로 수백만 명의 "인간 이하의 존재들"을 독일로 들여와 일을 시키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만일 그들이 애초에 이들 "인간이하의 존재들"을 죽이러 나가지 않았다면 그들 자신이 하고 있었을 일이었다. 독일 밖에서 이뤄진 대량학살과는 별개로, 결국 그들이 벌인 일의 순수한 결과는 독일 전역을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더 슬라브족으로 가득한 이른바 슬라브의 땅으로 만들어버린 것이었다. (이러한 뒤틀림은 그때까지 살아남은 유대인들이 강제노동을 위해 독일 내 수용소로 보내진 1945년 초 극에 달한다. 그간 약 540만 명의 유대인을 인종적인 적으로 몰아 살해해온 독일인들이 이제는 고국 밖으로 학살 원정을 떠나지 않았다면 학살자인 자신들이 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을 시키고자, 그때까지 살아남은 유대인들을 고국 땅으로 들여왔던 것이다.) - P441

동방 총독부 및 독일에 병합된 폴란드 땅에 있던 폴란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한 대량학살은 독일의 점령이 시작되고 2년 이상의 시간이 흐른 뒤, 그리고 유대인들이 게토에 격리된지 약 1년 이상의 시간이 흐른 뒤 시작되었다. 이들 폴란드 유대인은 6곳의 주요 시설, 즉동방 총독부에 있던 4곳, 제국에 편입된 지역에 있던 2곳의 시설에서 독가스에 살해되었다. 이 시설들은 하나의 조합으로서 작동하거나 아니면 1941년 12월에서 1944년 11월까지 그러했듯 헤움노, 베우세츠트레블린카, 마이다네크, 아우슈비츠에 있던 또 다른 시설들과 궤를 맞춰 작동했다. 몰로토프-리벤트로프 라인 서쪽에서 벌어진 핵심 학살 작전은 바로 ‘라인하르트 작전‘으로, 이를 통해 1942년 베우제츠소비부르, 트레블린카 등지에서 약 130만 명의 폴란드 유대인이 독가스 중독으로 숨을 거두었다. 이 작전의 화려한 마지막을 장식한 곳은 아우슈비츠로, 이곳에서는 폴란드 유대인 약 20만 명과 기타 유럽 지역의 유대인 70만명 이상이 가스실로 끌려갔고, 학살의 대부분은1943년에서 1944년 사이에 이뤄졌다. - P456

동방 총독부에 있던 폴란드 유대인들을 완전히 쓸어버리려던 나치의 정책은 이제 죽은 하이드리히를 기리는 뜻에서 "라인하르트 작전"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암살에 대한 언급은 독일인들의 화풀이 대상이 될 만한 희생양들을 만들어냈고, 유대인 대량학살은 그의 죽음에대한 보복으로 등장했다. 나치의 세계관에서, 1942년 5월에 벌어진 하이드리히 암살은 1941년 12월 미국의 선전포고와 마찬가지 역할을 했다. 그것은 표면적으로 공격받은 나치들 사이에 올곧은, 또 정당한 연대의 감정이 생기게끔 했고, 독일이 처한 곤경과 정책의 진짜 원인에 대한 관심을 흐트러뜨렸다. 하이드리히는 이 전쟁의 원흉인 이른바 전 세계적 규모로 펼쳐지는 유대인 음모에 희생된 매우 유명한 "희생양"이 되었다." - P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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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승리도 가능성의 영역 밖으로 밀려난 이 시점에서, 유대인학살 자체는 인종주의적 망상이 부린 마법으로 ‘독일의 승리‘와 동의어가 되었다. 미국, 영국, 소련은 모두 독일의 적이었고, 유대인 역시 독일의 적이었다. 이것은 곧 ‘유대인이 이들 모두에게 입김을 불어넣는 배후 세력‘이라는 괴상한 삼단논법으로 이어진다. 더 나아가 만약 이들 적국이 유대인이 좌우하는 국가라면, 유럽에 있는 유대인들은 적국들이 뿌려둔 공작원이다. 따라서 유럽의 유대인들을 죽이는 것은 곧 독일의 적에 대한 직간접 공격으로, 도덕적 측면뿐만 아니라 군사적 논리 차원에서도 정당화될 수 있는 일이다. 힘러는 히틀러의 바람 곧 유럽에 있는 유대인들은 1941년 12월 현재 "빨치산으로서", 독일의 뒤를 찌를 적들의 공작원으로서 죽여 없애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이때까지 빨치산 공격에 대한 "응징"으로서의 유대인 학살 논리는 이미 한층 단단해진 터였다.  - P388

마지막 해결책의 다섯 번째이자 최종판은 말 그대로 대량학살이었다. 나치의 언어에서 재정착이라는 말은 이제 다른 말의 완곡한 표현이 되었다. 수년 동안 독일의 지도부는 유대인들을 특정 지역에 재정착시키는 것을 통해 자신들이 유대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상상했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옮겨간 어느 곳에서든 죽을 때까지 노동을 해야만 할 것이고, 어쩌면 완전히 씨가 말라 더는 종족 번식을 하지 못할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앞서처럼 그들을 죽여 없앤다는 것은 없었다. 따라서 재정착은 비록 1940년 그리고 1941년에 들어선 유대인 정책이 그리고 있는 것처럼 완전히 잘못된 것은 아니더라도 어찌됐든 불완전한 것이었다. 이후 이른바 재정착 혹은 동부로의 재정착은 곧 대량학살을 뜻하게 된다. 아마도 재정착이라는 완곡어법은 기존 나치 유대인 정책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음을 드러내는것을 통해 나치가 한 가지 명백한 사실을 못 본 체하고 넘어갈 수 있도록 해준 듯 보인다. 그 사실은 바로 독일의 정책은 변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이 뜻대로 풀리지 않았기에 변화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는 독일인들로 하여금 군사적 재앙이 자신들의 유대인 정책을 좌우해버린 현실로부터 스스로를 위안할 방패막이가 되어주었다. - P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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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스로를 사업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등반가였고, 서핑을 하는 사람, 카약을 하는 사람, 스키를 타는 사람, 대장장이였다. 나는 그저 나 자신과 친구들이 원하는 좋은 도구와 기능적인 옷을 만드는 것을 좋아했을 뿐이다. 융자가 잔뜩 들어 있는 데다가 언제라도 안전 부적격 판정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은 해변의 오두막 한 채와 낡아빠진 포드 밴이 말린다와 내가 가진 개인 자산의 전부였다. 이제 우리에게는 각자 가족이 딸린 직원들이 있는 차입금이 엄청난 회사가 있었다. 모두의 운명이 이 회사의 성공에 달려 있었다.
우리의 책임과 금융 부채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본 어느 날, 나는 사업가이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사업가로 남게 될 것이라는 깨달음이찾아왔다. 이 게임에서 살아남으려면 사업에 진지하게 임해야 한다는것이 명백한 상황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나는 평범한 사업 규칙을 따라서는 행복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항공사 잡지 광고에서 본 양복을 입은 창백한 얼굴의 시체들과는 가능한 거리를 두고 싶었다. 사업가가 되어야만 한다면 나만의 방식으로 사업을 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 P83

기업가정신에 관한 말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기업가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비행 청소년을 연구하라" 이다. 비행 청소년은 행동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이건 정말 엿같네. 난 내 방식대로 할 거야." 난 정말 사업가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사업가가 되려면 좋은 명분들이 필요했다. 다행히 나에게는 사업을 확장하더라도 절대 놓치고싶지 않은 것이 있었다. 일은 늘 즐거워야 한다는 점이다. 일터로 오는길에는 신이 나서 한 번에 두 칸씩 계단을 겅중겅중 뛰어올라야 한다. 내키는 대로 자유롭게 입고 심지어는 맨발로 일하는 동료들에 둘러싸여 있어야 한다. 유연한 근무로 파도가 좋을 때는 서핑을 하고 함박눈이 내리면 스키를 타고 아이가 아플 때는 집에 머물면서 아이를 돌볼수 있어야 한다. 일과 놀이와 가족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어야 한다.
기존의 규칙을 버리고 나만의 시스템이 돌아가게 만드는 창의적 경영은 나에게 큰 만족감을 주었다. - P85

곧 우리는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심각한 위험에 처했다.
아웃도어 전문 시장이라는 우리에게 꼭 맞는 자리를 벗어나 버린것이다. 1980년대 후반, 회사의 성장세가 지속된다면 10년 내에 10억 달러규모의 회사가 될 상황이었다. 10억 달러라는 지점에 이르려면 대형상점이나 백화점에서도 물건을 팔아야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최고의 등반 장비를 만드는 제조업체로서 지켜 왔던 회사 설립의 근본 취지에 도전하는 일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품질의 아웃도어 의류를 만들고자 하는 회사가나이키와 같은 규모가 될 수 있을까? 테이블 10개짜리 미슐랭 3스타 프랑스식 식당이 테이블을 50개로 늘려도 별 3개를 유지할 수 있을까?
두 가지 모두를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일까? 파타고니아가 진화한 1980년대 내내 이런 질문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를 괴롭힌 또 다른질문이 있다. 자연의 훼손이었다. 네팔, 아프리카, 폴리네시아 등지에 등반이나 서핑, 낚시를 하러 가면 그전에 방문했던 때로부터 몇 년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생생히 목격할 수 있었다. - P106

개발 계획은 무산되었다. 우리는 마크에게 사무 공간과 우편함을 내주고 벤투라강을 위한 그의 투쟁에 도움이 되고자 약간의 기부도 했다. 더 많은 개발 계획이 생겨났지만, 벤투라의 친구들(Friends of theVentura River)은 그런 계획들을 좌절시키고, 물을 정화하고, 유수의 양을 늘리기 위해 노력했다. 우리는 하수처리장을 2단계, 3단계로 확충하기 위한 로비 활동을 벌였다. 야생동물이 늘어났고 좀 더 많은 연어들이 강으로 올라와 알을 낳기 시작했다. 마크는 두 가지 중요한 가르침을 주었다. 풀뿌리 환경운동이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으며 황폐해진 야생동물의 서식지도 노력을 기울인다면 복구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의 성과에 고무된 우리는 천연 서식지를 보호하고 복구하는 활동을 하는 소규모 단체에 정기적으로 기부를 하기 시작했다. 직원이많고, 간접비가 발생하고, 기업과 연줄이 있는 대형 비정부기구(NGO)는 피했다. 1986년 우리는 지역의 풀뿌리 환경단체에 매년 수익의 10퍼센트를 기부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세전 수익의 10퍼센트나 총매출액의 1퍼센트 중 큰 액수로 분담금을 높였다. 우리는 호황이든 불황이든 매년 그 약속을 지켜 왔다. - P110

• 회사의 모든 결정은 환경 위기를 염두에 두고 내린다. 우리는 피해를 주지않기 위해 분투해야만 한다. 우리의 활동은 가능한 문제를 줄이는 역할을해야 한다. 우리는 이 분야의 활동을 지속적으로 평가, 재검토함으로써 개선을 위해 부단히 노력할 것이다.
• 제품의 품질에 최대한의 관심을 쏟는다. 여기에서 품질은 내구성, 자연 자원(원료, 에너지, 운송)의 최소 사용, 다기능, 비노후화, 용도에 대한 완벽한 적합성에서 나오는 종류의 아름다움으로 정의된다. 특히 일시적인 유행을 따르는 것은 우리 기업의 가치관과 부합하지 않는다.
• 이사회와 경영진은 성공적인 공동체가 지속 가능한 환경의 일부라는 것을인식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직원들과 지역사회, 공급업자와 고객들이 포함된 공동체의 일원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이 모든 관계에 대한 책임을 인식하고 그들의 보편적 이익을 염두에 두고 결정을 내린다. 회사와 근본적인가치관을 공유하는 동시에 문화적, 인종적 다양성을 보여 주는 사람들을 고용하는 것이 우리의 정책이다.
• 이익을 추구하되 성과를 우선시하지 않는다. 성장과 확장은 우리 회사의 기반이 되는 가치가 아니다.
• 우리는 사업 활동이 환경에 주는 부정적인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매년 스스로에게 총매출의 1퍼센트 혹은 연 수익의 10퍼센트 중 큰 금액을 세금으로 부과한다. 이 세금의 모든 수익은 지역 공동체와 환경운동의 보조금으로 사용한다.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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