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스스로를 지켜낼 수 없었던 취약계층들이 우선적으로 끌려가 사라지는 결과를 낳았다. 대부분의 고아원은 8월 5일이 되자 텅 빈상태가 되었다. 이름 높은 교육자였던 야누시 코르차크는 자신이 돌보던 아이들과 함께 움슐락플라츠로 나갔다. 고개를 높이 들고 당당히 걷던 그의 양팔에는 두 아이가 안겨 있었다. 이날 코르차크와 함께 강제이주 대상이 된 6623명의 유대인 중에는 그의 동료였던 스테파니아 빌친스키를 비롯해 게토 안의 고아들을 교육하거나 돌보던 이들이 여럿 포함되어 있었다.  - P476

여인들의 경우 모두 이발 과정을 거쳐야 했기에, 그들에게는 혹여 살아남아 자신들의 말을 전해줄지도 모를 동료 유대인들과 이야기할수 있는 잠깐의 시간이 주어졌다. 루트 도르프만의 경우 그녀의 머리를 깎던 이발사로부터 그녀는 고통 없이 빠른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위안을 받으며 함께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한나레빈손은 자신에게 배정된 이발사에게 꼭 탈출해 온 세상에 트레블렌카에서 있었던 일을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 P488

유대인들은 사전에 충분히 대비한 경우에만 그것도 한정적으로만 자신들이 지니고 있던 것들을 지켜낼 수 있었다. 대개 그들은 언젠가 그것을 물물교환 또는 뇌물로 쓸 수 있기를 바라면서 각자 비교적 휴대하기 편한 귀중품을 가지고 있다면 챙겨두고자 했다. 간혹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미 알아차린 유대인들은 지니고 있던 돈과 귀중품을 열차 밖으로 집어던졌다. 박해자들의 배를 불려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이것이 트레블린카 주변에서 흔히 볼 수있었던 광경이다. 이제 죽음의 시설물 안쪽으로 들어가보자. 유대인 노역자들이 맡은 일 중 하나는 귀중품을 수색하는 것이었고, 찾아낸 귀중품 중 일부는 물론 그들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확보한 귀중품들을 시설물 안팎을 드나들 수 있었던 트라브니키 대원들에게 건넸고, 그 대가로 트라브니키 대원들은 인근 마을에서 먹거리를 가져다주었다. 트라브니키 대원들은 유대인 노동자들로부터 받은 귀중품을 현지 여성들 혹은 분명 바르샤바만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온 매춘부들에게 주었고, 이 과정에서 성병에 감염된 이들은 다시 의사 출신 유대 노역자들에게 진찰을 받으러 찾아오기도했다. 이렇게 그곳에는 아주 특별한 그리고 서로 밀접하게 이어진 순환의 현지 경제가 자리하고 있었다. 어느 목격자는 이를 두고 귀중품을 휘감은 타락한 "유럽"의 모습이었다고 회상했다.  - P489

1944년에 들어서자, 이미 독일은 소련 땅에서 물러난 상태였고, 이에 소련 유대인들을 사살하는 것이 더는 불가능한 상태가 된다. 아울러 붉은 군대의 진군으로 라인하르트 작전과 관련된 시설들은 모두 폐쇄되기에 이르렀고, 자연스레 아우슈비츠는 그해 마지막 해결책의 최대 시행처로 떠올랐다. 60만 명쯤 되는 유대인의 거의 전부가 1944년 아우슈비츠에서 독일인들의 손에 목숨을 잃는다. 이들 대다수는 헝가리 출신 유대인이었다. 헝가리 또한 이탈리아와 마찬가지로 주권을 잃기 전까지 그리고 독일의 동맹이던 시기까지는 자신의 땅에 있던 유대인들을 독일의 학살 공장들로 보내지 않았다(일반적으로, 독일의 동맹국에 머물던 유대인들은 독일이 점령한 곳에 있던 유대인들에비해서는 대우나 처지가 나은 편이었다). 그러나 1944년 5월 헝가리 지도부가 전쟁 중 독일에 등을 돌리려 시도한 뒤, 독일은 헝가리를 점령하고 자신의 정부를 세웠다. 새로 들어선 헝가리 파시스트 정권은 5월 유대인들을 강제추방하기 시작했는데, 이들 중 약 11만 명은 강제노역대상자로 선정되어 상당수가 살아남았으나 적어도 32만7000명은 가스실에서 살해당했다. 전쟁 기간에 약 30만명의 폴란드 유대인이 아우슈비츠로 보내졌고, 이들 중 약 20만 명이 목숨을 빼앗겼다. 형가리와 폴란드 유대인들을 하나로 보면, 이들이 아우슈비츠 유대인 희생자의 대다수를 점했다. - P495

아우슈비츠는 홀로코스트의 정점이었고, 그것이 최고조에 이른 시기는 이미 독일의 손안에 있던 소련 및 폴란드 유대인 대다수가 목숨을 잃고 난 뒤였다. 홀로코스트를 통해 100만명가량의 소련 유대인이 사망했고, 아우슈비츠에서 죽은 인원은 이들 전체의 1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했다. 폴란드 유대인은 홀로코스트에서 약 300만 명이 숨졌으며, 이들 중 아우슈비츠에서 살해당한 이들은 고작 7퍼센트밖에되지 않는다. 몰로토프-리벤트로프 라인 동쪽에서는 거의 130만 명의 유대인이 대부분 총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또 다른 약 130만 명의 폴란드 유대인은 동방 총독부에서 라인하르트 작전 당시 독가스로 살해당했으며(트레블린카에서 70만 명 이상, 배우세츠에서 약 40만 명,
소비부르에서 15만 명, 마이다네크에서 5만 명), 이들과 별개인 35만 명 역시 제국에 병합된 지역에서 독가스 중독으로 사망했다(아우슈비츠에서 사망한 20만 명 외에 헤움노에서 숨진 약 15만 명). 이 밖에 남아 있던폴란드 유대인 희생자 대부분은 게토 청소 작업(약 10만 명)과 추수감사제 작전(4만2000명) 혹은 기타 소규모 작전 및 개별 처형으로 목숨을 잃었다. 여기에 더해, 이보다 더 많은 수가 게토 안에서 질병과 굶주림으로, 아니면 강제수용소에서 노역에 시달리다 숨을 거두었다."
- P496

붉은 군대는 순식간에 몰로토프-리벤트로프 라인을 넘어 동방 총독부 루블린 지구가 있던 지역에 들어섰다. 종군기자로서 붉은 군대와 동행했던 작가 바실리 그로스만은 독일인들이 남긴 흔적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붉은 군대가 마이다네크에 있던 수용소를 발견한 것은 1944년 7월 24일이었다. 8월 초, 그로스만은 그곳에 남아있던 자신의 부족한 상상력으로는 도저히 그려낼 수 없는 거대한 공포를 봤다. 트레블린카가 눈에 들어오자마자 그는 과거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아챌 수 있었다. 바로 폴란드 유대인들이 가스실에서 목숨을 빼앗겼다는 것, 그들의 시신은 불태워졌다는 것, 타고 남은 재와 뼛조각들은 벌판에 파묻혔다는 것이다. "흡사 바다처럼, 걸을 때마다 출렁이는 땅"을 걷던 그는 바르샤바와 빈에서 찍은 아이들의 사진, 우크라이나 자수 조각, 금발과 흑발 머리 묶음 같은 흔적들을 볼 수 있었다. - P503

 폴란드 국내군 안에도 유대인 출신이 상당수 있었고, 그런 사실은 비록 겉으로 논의된 적이 거의 없었지만 이미 폴란드 국내군지휘관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폴란드 국내군에 있던 유대 출신의 다수는 자신을 유대인이라기보다는 폴란드인이라 여기고있었다. 다른 이들은 전쟁 시기의 바르샤바에서는 누군가가 유대인이라 왈가왈부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에서, 자신들의 유대인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았다. 비록 폴란드 국내군 내부에 반유대주의자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지만, 만에 하나 이들이 배신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1943년 1월에 접어들어 바뀐 사정은 과거 독일에 맞서 무기를 들었던 유대인들이 이제 유대인으로서 레지스탕스 활동을 시작한 것이었다. 이것은 폴란드 국내군 및 폴란드 사회에 만연해있던 반유대주의적 고정관념, 즉 ‘유대인은 싸워야 할 때 싸우지 않는 비겁자들‘이라는 이미지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었다. 이제 폴란드 국내군 바르샤바 지휘부는 유대 전투단이 자신들의 각종 총기, 탄환, 폭약 등의 무기를 숨겨둔 장소 상당수를 이용할 수 있게 해주었다. - P517

독일의 정책이 그래도 누군가는 살 수 있다는 믿음을 주던 시기만 하더라도, 유대인 개개인의 마음속에는 그 예외가 바로 자신이길 바라는 마음이 자리했고, 이에 유대인 사회 내부가 여러 갈래로 나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러나 바르샤바 게토 유대인들 사이에 이제 독일 정책의 결론은 예외 없는 죽음뿐이라는 확신이 서자, 유대인 사회는 똘똘 뭉치기 시작했다. 1943년 1월에서 4월 사이, 그들은 스스로 지하 저장고에 수없이 많은 벙커를 만들었는데, 이들 사이에는 경우에 따라 비밀 연결 통로까지 존재했다. 유대전투단은 지휘 체계를 확립했다. 총 지휘는 모르데하이 아니엘레비치가 맡고, 마레크 에델만, 이즈라엘 카날, 이츠라크 쿠키에르만(마지막에 엘리에제르 겔레르로 대체됨)이 세 곳으로 나뉜 게토 지역을 각각 맡았다. 그를 더 많은 무기를 들여왔으며 이에 맞게 단원들을 훈련시켰다. 독일의 군수공장에서 일하던 몇몇 유대인은 즉석 폭발물 제조에 필요한 부품들을 훔쳐오기도 했다. 유대 전투단은 독일인들의 게토 습격 계획을 사전에 파악하고 있었고, 독일인이 들이닥쳤을 때 그들은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폴란드 국내군의 일부는 놀라움과 감탄의 감정을 담아 이를 "유대-독일 전쟁"이라 불렀다. - P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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