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이광웅이 노래한 것처럼 이 땅에서 뭐든지 제대로 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다. 분단된 조국에서 통일을 위해 발 벗고 나선다는 것은정녕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독재정권하에서 수많은 사법살인이있었지만 민주주의만을 외쳤다고 죽이지는 않았다. 심지어 이승만을 저격했던 유시태나 김시현도 사형을 선고받지는 않았다. 그런데 통일을외치면 꼭 죽였다. 조봉암이 죽었고, <민족일보> 조용수가 죽었고, 사회당의 최백근이 죽었고, 통혁당 사람들이 죽었고, 전략당 사람들이 죽었고, 뒤의 일이지만 인혁당과 남민전 사람들이 죽었다. 분단된 조국에서참된 민족주의자의 길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었다. 대학가에서 화제가 되었던 한 강연에서 장준하는 "민족주의는 군사정부에 의해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민족주의는 호사한 호텔 창가에서 샹송을 들으며 흘리는 눈물 속에서 불려지는 감상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장준하가 말하는 민족주의란 중국 광야에서광복군으로 일본군과 싸우면서 "춥고 배고프고 발톱이 빠지도록 조국을 찾아 헤매는 가운데 뼛속으로 체험한 민족주의" 였다. 이제 장준하는 그때보다 더 절박한 심정으로 다시 돌베개를 베러 나선 것이다. - P140
장준하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것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였다. 장준하는 세상을 뜨기 20여 일 전인 7월 말 김대중을 찾았다. 1971년 대통령선거 당시 국민당에 몸담고 있던 장준하는 김대중을 공격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둘 사이에는 약간의 앙금이 있었다. 이제 장준하가 준연금 상태에 있어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김대중을 찾아가 당신이 못 움직이니내가 움직이겠다며 희생을 각오하고 싸울 터이니 힘을 합치자고 제안했다. 장준하는 광주로 홍남순 변호사를, 원주로 지학순 주교를 찾아다니며 김영삼과 신민당이 빠져나간 공백을 메우려 했다. 장준하와 김대중이 손을 잡는다는 것은 박정희로서는 영 꺼림칙한 일이었다. <<김대중자서전>>은 장준하의 죽음을 독재정권에 의한 살인으로 확신했던 함석현이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장준하는 김대중과 화해한 것이 죽음을불러왔어. 저놈들이 둘이 합치면 어찌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 둘중 하나는 죽어야만 했을 것이야." - P149
4·19 묘지 앞에서 장준하는 "지금의 우리를 대신해서 이 민족이 당했던 그 무서운 시련을 죽음으로 감당한 사람들‘에 대한 예의를 이야기한적이 있다. "지금 우리 가슴속에 그들이 살 자리를 비워주지 않는다면어찌 같은 피가 흐르는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는가? 장준하처럼 살고장준하처럼 죽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의 유족들은 사글셋방을 전전한다는데 우리 마음 한구석에라도 장준하가 살 자리를 비워놓지 않는다면우리는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장준하는 분단과 전쟁으로 파괴당한 젊은이들에게, 삭막해질 대로 삭막해진 분단한국의 사상계에 <사상계>를통해 영혼의 자양분을 대준 겨레의 큰 스승이었다. 그러나 정작 다섯이나 되는 제 새끼들은 대학 교육도 시키지 못한 못난 아비였다. - P150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빛나는 성취가 민주화와 산업화라면 그 역사는반드시 다시 쓰여야 한다. 그 성취의 진정한 주역은 박정희도 아니고 몇몇 이름난 민주화운동가들도 아니다. 우리가 가장 기억해야 할 사람들은 그 시절 가장 어려운 처지에서 자신들이 인간임을 자각하고, 인간으로서의 대우를 받기 위해 노력했던 수많은 여성 노동자들이다. 그 당시민중의 최전선을 지킨 것은 무쇠팔뚝의 남성 노동자들이 아니라 가녀린 ‘공순이‘들이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기지 않은 그들의 역사는아직 쓰이지 않았다. - P182
한국전쟁 이후 노동운동의 불모지였던 이 땅에 뒤늦게 1970년대에 민주노조의 깃발이 오를 수 있었던 데는 개신교의 산업신교회와 천주교의 한국가톨릭노동청년회 JOC) 같은 산업선교또는 노동사목 조직의 역할이 매우 컸다. 너무나 열악했던 한국의 노동현실에서 전태일의 죽음이 땅에 묻히지 않고, 그 불씨가 민중들의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해지다 민주노조라는 결실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은 산업선교회와 가톨릭노동청년회의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70년대 중반 이후 "도산(도시산업선교회)이 들어오면 도산한다"는 말이 한동안널리 퍼진 적이 있다. 이 말은 물론 근거 없는 모함이지만, 산업선교회의 활동에 대한 자본가들과 유신정권과 보수언론의 경계심이 물씬 묻어난다. - P203
당시 노동운동의 지원에서 종교계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것은 공산주의나 빨갱이로 몰릴 가능성이 적었고, 국제적인 네트워크를갖고 있어 권력이 쉽게 탄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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