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의 천재성은 이러한 사실 관계보다는 야망, 음모, 사랑, 고통 - 이런 것들은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다 - 과 관련된것이었다. 그는 흡수, 동화하는 지능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잡다한 지식의 파편들을 한데 모으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희곡에는 딱딱한 지적 응용과 관련된 구절은 들어 있지 않다. 모든단어에 학문이 작은 깃발처럼 매달려 있는 벤 존슨의 희곡과는 생판다른 점이다. 셰익스피어가 타키투스(55?-120?, 로마의 역사가), 플리니우스(23-79, 로마의 학자), 수에토니우스(2세기 초에 활동한로마의 전기작가 겸 역사가)에 대해서 알고 있었음을 드러내는 구절을 그의 희곡에서는 좀처럼 찾을 수 없다. 이런 사람들은 존슨에게는많은 영향을 끼쳤고, 프랜시스 베이컨에게는 제2의 천성이 되었다.
셰익스피어가 그들을 몰랐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사실 대단히 좋은일이다. 왜냐하면 그가 독서를 더 많이 했더라면, 그는 셰익스피어가아니라 자기 지식을 자랑하는 평범한 작가가 되고 말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존 드라이든이 1668년에 지적한 것처럼, "학문이 부족하다고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실상은 그를 더욱 칭찬하는 것이다. 그는지식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 P123

이런 창조적 충동을 모두가 좋아했던 것은 아니었다. 로버트 그린이 "우리의 깃털로 미화된(beautified by our feathers)"이라고 그를 비아냥거렸을 때, 그린은 "beautified"라는 단어로 셰익스피어의 신조어사용 습관을 조롱했다. 이런 비난에 움츠러들지 않고 셰익스피어는 작가생활을 계속 해나가면서 새로운 단어를 만드는 작업에 더욱 열을올렸다. 그의 작품활동이 가장 활발하고 창작력이 가장 왕성하던 시기에 쓴 희곡들 - 「맥베스」, 「햄릿」, 「리어 왕」 - 에 신조어는 두줄 반에 하나꼴이라는 놀라운 비율로 나타난다. 그는 「햄릿」한 작품에서만 모든 다른 증거로 미루어볼 때 관객들이 전에 들어본 적이없는 약 600개의 단어를 선보였다. -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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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년에게 금액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만족스러운 수준의 급여를 받고 있었다. 브리저는 충성심에서 그 명분을 찾고 싶었다. 여단 동지에 대한 충성. 그는 글래스를 존경했다. 글래스는 친절했고, 크게 드러나지 않는 방법으로 그를 지켜주었으며,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브리저는 글래스에게 진 빚을 모른 척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것에 목매여 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소년은 자신이 글래스와 빈터에 남겠다고 나섰을 때 놀라움과 감탄의눈으로 바라보던 남자들의 반응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보초를 서다가 큰 실수를 저질렀던 밤, 자신에게 집중되었던 분노와 경멸의 시선과는 대조적인 반응이었다. 여단을 이끌고 빈터를 떠나기 전 대위는 그의 어깨를 토닥여줬었다. 그 간단한 제스처는 소년에게 처음으로 소속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마침내 우락부락한 남자들 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은 것이다. 그래서 빈터에 남기로 한 거 아니었나? 상처 난 자존심을 치료하기 위해서? 딱한 동지가 아닌, 자기자신을 챙기기 위해서? 남의 불행을 통해 이득을 얻으려 했으니 피츠제럴드와 다를 바가 없는 건가? 아니, 오히려피츠제럴드만도 못했다. 적어도 그는 빈터에 남기로 한 이유를 당당히 밝혔으니까.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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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이광웅이 노래한 것처럼 이 땅에서 뭐든지 제대로 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다. 분단된 조국에서 통일을 위해 발 벗고 나선다는 것은정녕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독재정권하에서 수많은 사법살인이있었지만 민주주의만을 외쳤다고 죽이지는 않았다. 심지어 이승만을 저격했던 유시태나 김시현도 사형을 선고받지는 않았다. 그런데 통일을외치면 꼭 죽였다. 조봉암이 죽었고, <민족일보> 조용수가 죽었고, 사회당의 최백근이 죽었고, 통혁당 사람들이 죽었고, 전략당 사람들이 죽었고, 뒤의 일이지만 인혁당과 남민전 사람들이 죽었다. 분단된 조국에서참된 민족주의자의 길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었다.
대학가에서 화제가 되었던 한 강연에서 장준하는 "민족주의는 군사정부에 의해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민족주의는 호사한 호텔 창가에서 샹송을 들으며 흘리는 눈물 속에서 불려지는 감상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장준하가 말하는 민족주의란 중국 광야에서광복군으로 일본군과 싸우면서 "춥고 배고프고 발톱이 빠지도록 조국을 찾아 헤매는 가운데 뼛속으로 체험한 민족주의" 였다. 이제 장준하는 그때보다 더 절박한 심정으로 다시 돌베개를 베러 나선 것이다. - P140

장준하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것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였다. 장준하는 세상을 뜨기 20여 일 전인 7월 말 김대중을 찾았다. 1971년 대통령선거 당시 국민당에 몸담고 있던 장준하는 김대중을 공격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둘 사이에는 약간의 앙금이 있었다. 이제 장준하가 준연금 상태에 있어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김대중을 찾아가 당신이 못 움직이니내가 움직이겠다며 희생을 각오하고 싸울 터이니 힘을 합치자고 제안했다. 장준하는 광주로 홍남순 변호사를, 원주로 지학순 주교를 찾아다니며 김영삼과 신민당이 빠져나간 공백을 메우려 했다. 장준하와 김대중이 손을 잡는다는 것은 박정희로서는 영 꺼림칙한 일이었다. <<김대중자서전>>은 장준하의 죽음을 독재정권에 의한 살인으로 확신했던 함석현이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장준하는 김대중과 화해한 것이 죽음을불러왔어. 저놈들이 둘이 합치면 어찌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 둘중 하나는 죽어야만 했을 것이야." - P149

4·19 묘지 앞에서 장준하는 "지금의 우리를 대신해서 이 민족이 당했던 그 무서운 시련을 죽음으로 감당한 사람들‘에 대한 예의를 이야기한적이 있다. "지금 우리 가슴속에 그들이 살 자리를 비워주지 않는다면어찌 같은 피가 흐르는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는가? 장준하처럼 살고장준하처럼 죽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의 유족들은 사글셋방을 전전한다는데 우리 마음 한구석에라도 장준하가 살 자리를 비워놓지 않는다면우리는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장준하는 분단과 전쟁으로 파괴당한 젊은이들에게, 삭막해질 대로 삭막해진 분단한국의 사상계에 <사상계>를통해 영혼의 자양분을 대준 겨레의 큰 스승이었다. 그러나 정작 다섯이나 되는 제 새끼들은 대학 교육도 시키지 못한 못난 아비였다. - P150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빛나는 성취가 민주화와 산업화라면 그 역사는반드시 다시 쓰여야 한다. 그 성취의 진정한 주역은 박정희도 아니고 몇몇 이름난 민주화운동가들도 아니다. 우리가 가장 기억해야 할 사람들은 그 시절 가장 어려운 처지에서 자신들이 인간임을 자각하고, 인간으로서의 대우를 받기 위해 노력했던 수많은 여성 노동자들이다. 그 당시민중의 최전선을 지킨 것은 무쇠팔뚝의 남성 노동자들이 아니라 가녀린 ‘공순이‘들이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기지 않은 그들의 역사는아직 쓰이지 않았다. - P182

한국전쟁 이후 노동운동의 불모지였던 이 땅에 뒤늦게 1970년대에 민주노조의 깃발이 오를 수 있었던 데는 개신교의 산업신교회와 천주교의 한국가톨릭노동청년회 JOC) 같은 산업선교또는 노동사목 조직의 역할이 매우 컸다. 너무나 열악했던 한국의 노동현실에서 전태일의 죽음이 땅에 묻히지 않고, 그 불씨가 민중들의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해지다 민주노조라는 결실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은 산업선교회와 가톨릭노동청년회의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70년대 중반 이후 "도산(도시산업선교회)이 들어오면 도산한다"는 말이 한동안널리 퍼진 적이 있다. 이 말은 물론 근거 없는 모함이지만, 산업선교회의 활동에 대한 자본가들과 유신정권과 보수언론의 경계심이 물씬 묻어난다.  - P203

 당시 노동운동의 지원에서 종교계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것은 공산주의나 빨갱이로 몰릴 가능성이 적었고, 국제적인 네트워크를갖고 있어 권력이 쉽게 탄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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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찰은 마지막 미사를 드리기 위해 응암동성당으로 향하던 송상진의 영구차를 벽제 화장장으로 강제이송하려 하여, 유가족들과 4시간 20분 동안 실랑이를 벌였다. 유가족과 종교인들은 차에 시동을 걸지 못하게 열쇠구멍에 껌을 밀어 넣기도 하고, 차 앞에 드러눕기도 했다. 서른여섯 젊은 신부가 차 앞에 드러누웠지만 경찰은 크레인을 동원해 신부를 타고 넘어 영구차를 끌고 갔다. 그 젊은 신부는 그때부터 지팡이를 짚어야 했다. 거리의 신부, 문정현 신부다.
박정희 정권 시절 최악의 공안조작사건인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의문사위원회와 국정원 과거사위원회의 조사를 토대로, 2007년 재심에서무죄판결을 받았다. 유가족들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여 1심에서 490억의 배상판결을 받았고, 상당한 액수를 가집행 받았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자가 과잉계산 되었다며 배상액수를 대폭 삭감하였고,
국가는 이를 토대로 배상금을 받은 유가족과 사건 관련자 77명을 상대로 ‘부당이득‘ 251억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인혁당 사건은 끝나지 않았다. - P116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도 처음 군법회의에서 7명이나 사형이 선고되었지만, 1974년 7월 20일 여정남을 제외한 대부분이 무기로 감형되었다. 이때 이미 민청학련은 살리고, 인혁당은 죽인다는 방침이 정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상황은 인혁당 관련자들에게 매우 불리하게 돌아갔다. 8월 15일에는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가 피격 서거하여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1975년 2월 박정희는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 국민투표라는 승부수를 던진 뒤 긴급조치 위반자들을 석방하는 유화 조처를 취했다. 그런데 박정희의 기대와는 달리 석방된 사람들은 ‘자숙‘ 하는 대신 개선장군 대접을 받았고, 풀려난 김지하는 <동아일보>에 인혁당 사건이 고문으로 조작되었음을 생생하게 폭로했다. 격분한 박정희는 인혁당이 김일성의 지령으로 간첩에 의해 조직된 것이라며 극형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 간첩은 북이 보낸 남파간첩이 아니고, 미군정보기관이 북쪽으로 침투시킨 북파간첩이었다. 그런데도 박정희 정권은 사이곳 함락이 임박하는 등 정세가 악화되자 인혁당 관련자의 사형을 전격 집행했다. 형집행은 대법원 확정판결 18시간 만에 시작되었다. 구속이래 1년 가까이 면회를 할 수 없었던 가족들은 형이 확정되었으니 면회가 가능하겠지라고 아침 일찍 서대문구치소에 왔다가 사형이 집행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혼절했다. - P112

 박정희가 참가하는 행사에서는 웬만한 사람들은 식장 근처에 얼씬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특히 3·1절이나 광복절처럼 늘 대통령이 참석하는 기념식은 테러리스트의 표적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경비가 여간 엄중한 것이 아니었다. 문세광은 드골 암살 기도를 그린 <<자칼의 날>>이라는 소설을 탐독했다는데, 그 소설에서도 암살범 자칼은 드골이 반드시 참석하게 되어 있는 해방기념일을 거사일로 삼았다. 그런데 엄중한 경호는 늘 부작용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해 3·1절 기념식에서는 행사에 참석한 외국 대사 부인들의 핸드백조차 물품보관소에 보관하도록 하다가 대사부인회에서 영부인에게 엄중히 항의하는 바람에 경호과장이 2개월간 정직 처분을 받기까지 했다. 이 때문에 외국인에 대한 경호가 느슨해져 문세광이 일본 대사관 직원 행세를 하면서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이다. -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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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는 않았지만 귀로는 어미 곰의 덩치를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곰은 우거진 덤불을 빠르게 돌아 새끼들을 향해 다가오는 중이었다. 곰의입에서는 깊고 낮은 으르렁거림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천둥소리나 나무쓰러지는 소리와도 흡사했다.
으르렁 소리는 점점 커져갔다. 빈터로 들어선 곰이 멈춰 서서 까만 눈으로 글래스를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땅에 얼굴을 갖다 붙이고 새끼들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그를 코앞에 둔 곰은 사륜 짐마차의 커다란스프링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글래스는 근육으로 덮인 놈의 몸에 경탄했다. 두꺼운 앞다리가 떠받치고 있는 육중한 어깨, 은빛이 도는 털. 회색곰이 틀림없었다.
글래스는 크게 반응하지 않으려 애쓰며 몇 가지 선택지를 떠올려보았다. 본능은 그에게 도망치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다시 버드나무 숲 속으로! 강물 속으로! 깊이 잠수해! 필사적으로 허우적대면 하류까지 무사히내려갈 수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곰은 어느새 30미터쯤 앞으로 바짝 다가와 있었다. 글래스의 눈은 타고 오를 만한 미루나무를 찾아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높은 데 올라가 총을 내려 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최선이었다. 문제는 나무들이 참 뒤에 늘어서 있다는 사실이었다. 버드나무 숲도몸을 숨기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이제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이자리에서 곰을 쏘는 것. 인슈타트로 53구경 총알을 딱 한 번 발사해 회색곰을 쓰러뜨려야 했다. - P35

회색곰이 다시 네 발로 기어 글래스에게 다가왔다. 글래스는 얼굴과 가습을 보호하기 위해 공처럼 몸을 웅크렸다. 곰이 그의 뒷덜미를 물고 위로번쩍 들어올렸다. 어찌나 세차게 흔들어대던지 글래스는 척추가 부러져버릴까 두려웠다. 곰의 이빨이 그의 어깨뼈를 으스러뜨렸다. 발톱은 그의 등과 머리를 반복해서 할퀴었다. 그는 극심한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마침내곰이 글래스를 떨어뜨리고 그의 허벅지를 물었다. 곰은 다시 그를 흔들어대다가 한쪽으로 휙 던져버렸다. 아직 의식은 살아 있었지만 그는 더 이상저항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글래스는 반듯하게 누워 위를 올려다보았다. 회색곰은 그의 앞에서 뒷다리로 서 있었다. 어느새 글래스는 우뚝 선 거대한 짐승의 모습에 매료되어 있었다. 묘하게도 더 이상 공포와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곰이 마지막으로 포효했다. 그 요란한 소리가 글래스의 머릿속을 쩌렁쩌렁 울려댔다. 이내 육중한 곰이 그의 몸을 덮쳤다. 축축히 젖은 곰의 털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풍겼다. ‘어떻게 된 일이지?‘ 글래스는 오두막집 널빤지 현관에서 소년의 얼굴을 핥아대는 누런 개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환하던 하늘이 금세 새까맣게 변해버렸다.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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