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은 마지막 미사를 드리기 위해 응암동성당으로 향하던 송상진의 영구차를 벽제 화장장으로 강제이송하려 하여, 유가족들과 4시간 20분 동안 실랑이를 벌였다. 유가족과 종교인들은 차에 시동을 걸지 못하게 열쇠구멍에 껌을 밀어 넣기도 하고, 차 앞에 드러눕기도 했다. 서른여섯 젊은 신부가 차 앞에 드러누웠지만 경찰은 크레인을 동원해 신부를 타고 넘어 영구차를 끌고 갔다. 그 젊은 신부는 그때부터 지팡이를 짚어야 했다. 거리의 신부, 문정현 신부다.
박정희 정권 시절 최악의 공안조작사건인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의문사위원회와 국정원 과거사위원회의 조사를 토대로, 2007년 재심에서무죄판결을 받았다. 유가족들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여 1심에서 490억의 배상판결을 받았고, 상당한 액수를 가집행 받았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자가 과잉계산 되었다며 배상액수를 대폭 삭감하였고,
국가는 이를 토대로 배상금을 받은 유가족과 사건 관련자 77명을 상대로 ‘부당이득‘ 251억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인혁당 사건은 끝나지 않았다. - P116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도 처음 군법회의에서 7명이나 사형이 선고되었지만, 1974년 7월 20일 여정남을 제외한 대부분이 무기로 감형되었다. 이때 이미 민청학련은 살리고, 인혁당은 죽인다는 방침이 정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상황은 인혁당 관련자들에게 매우 불리하게 돌아갔다. 8월 15일에는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가 피격 서거하여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1975년 2월 박정희는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 국민투표라는 승부수를 던진 뒤 긴급조치 위반자들을 석방하는 유화 조처를 취했다. 그런데 박정희의 기대와는 달리 석방된 사람들은 ‘자숙‘ 하는 대신 개선장군 대접을 받았고, 풀려난 김지하는 <동아일보>에 인혁당 사건이 고문으로 조작되었음을 생생하게 폭로했다. 격분한 박정희는 인혁당이 김일성의 지령으로 간첩에 의해 조직된 것이라며 극형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 간첩은 북이 보낸 남파간첩이 아니고, 미군정보기관이 북쪽으로 침투시킨 북파간첩이었다. 그런데도 박정희 정권은 사이곳 함락이 임박하는 등 정세가 악화되자 인혁당 관련자의 사형을 전격 집행했다. 형집행은 대법원 확정판결 18시간 만에 시작되었다. 구속이래 1년 가까이 면회를 할 수 없었던 가족들은 형이 확정되었으니 면회가 가능하겠지라고 아침 일찍 서대문구치소에 왔다가 사형이 집행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혼절했다. - P112

 박정희가 참가하는 행사에서는 웬만한 사람들은 식장 근처에 얼씬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특히 3·1절이나 광복절처럼 늘 대통령이 참석하는 기념식은 테러리스트의 표적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경비가 여간 엄중한 것이 아니었다. 문세광은 드골 암살 기도를 그린 <<자칼의 날>>이라는 소설을 탐독했다는데, 그 소설에서도 암살범 자칼은 드골이 반드시 참석하게 되어 있는 해방기념일을 거사일로 삼았다. 그런데 엄중한 경호는 늘 부작용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해 3·1절 기념식에서는 행사에 참석한 외국 대사 부인들의 핸드백조차 물품보관소에 보관하도록 하다가 대사부인회에서 영부인에게 엄중히 항의하는 바람에 경호과장이 2개월간 정직 처분을 받기까지 했다. 이 때문에 외국인에 대한 경호가 느슨해져 문세광이 일본 대사관 직원 행세를 하면서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이다. -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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