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현대 사회에서는 개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주어져 있는 정체성의 규정 요소들, 예컨대 국적이나 출신 계급이나 인종이나 성별, 심지어 언어와 문화는 개인의 정체성 서사에 통합되는 한에서만 중요하고, 그렇지 않으면 우연하고 부수적인 요소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는 개인의 정체성의 핵이 더 이상 이런 요소들이 아니라, 그것들을 바탕으로 정체성 서사를 써나가는 주체의 저자성authorship 자체임을 뜻한다. 정체성에 대한 인정은 특정한 서사 내용("나는 레즈비언이다")에 대한 인정이 아니라, 서사의 편집권에 대한 인정이다. 우리는 정체성운동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갖지 못했더라도(펩femme이나 부치butch 같은 단어를 모른다 해도) 그저 귀를 기울이고 고개를 끄덕이는 행위를 통해 그러한 인정을 표현할 수 있다("네가 레즈비언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네가 오늘은 레즈비언이라고 고백하고 내일은 그것을부인해도 상관없다. 나는 너에 대해서 가장 잘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너 자신임을 인정한다". - P215
영아 유기가 성행한 로마에서, 그를 구조한 노예 상인은 그의 죽음을 유예했을 뿐, 그를 환대한 게 아니다. 그들의 관계를 특징짓는 것은 오히려 지속적인 적대이다. 노예 상인은 아무 때나 아이를 죽일 수 있고, 매질과 모욕으로 끊임없이 죽음을 환기시키면서 아이의 복종을 끌어내기때문이다. 이러한 고찰은 환대가 면책 혹은 망각과 관련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부모는 아이가 자기들로부터 나왔고, 한때 자기들의 일부였다는 사실을 잊어야 한다. 부모는 무엇보다 아이에게 생명을 준 사람이 자기들이고, 그들이 아이를 죽일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야 한다. 이 망각으로부터 사회의 가능성이 생겨난다. - P217
‘주인‘은 내부에 타자들을 포함한다. 환대의 권리를, 칸트가 그랬듯이공간에 대한 권리이자 교제의 권리, 즉 친교의 가능성으로 충전된 현상학적 공간사회에 들어갈 권리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환대가 단지 이방인들이 겪는 문제가 아니며, 반드시 국경선과 관련된 문제도 아님을 깨닫게 된다. 서류상으로 엄연히 미국 시민이었지만, 공공장소에대한 접근권이라는 면에서 외국인보다 못하였던, 민권운동 이전의 미국 흑인들이 좋은 예이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정상‘이 아니라는이유로 다른 사람들 틈에 끼지 못하고 고립된 삶을 살아야 했던 무수한이들은 또 다른 예일 것이다. 환대의 권리가 인류의 구성원이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권리라면, 이 권리를 부정당하는 사람은 ‘인류 공동체‘에속한다는 사실을 부정당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환대란 어떤 사람이 인류 공동체에 속해 있음을 인정하는행위, 그가 사람으로서 사회 속에 현상하고 있음을 몸짓과 말로써 확인해주는 행위라고 말하기로 하자. - P229
법이 정당성을 가지려면 확대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환대란 타자를 도덕적 공동체로 초대하는 행위이다. 환대에 의하여 타자는 비로소 도덕적인 것 안으로 들어오며, 도덕적인 언어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된다. 사회를 만드는 것은 규범이나 제도가 아니라바로 환대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푸코의 비판은 여전히 중요하다. 그는 사회 안에서어떻게 끊임없이 전쟁이 작동해왔는가를 보여주면서, 전쟁을 국경으로몰아내는 것만으로는 사회를 절대적 환대의 공간으로 만들 수 없음을암시한다. 전쟁이 하나의 가능성으로, 아직 도래하지 않았지만 언제나대비하고 또 준비해야 하는 사건으로 남아 있는 한, 사람들은 그들의자리의 안정성에 대해 확신할 수 없다. 그들은 언제라도 인민의 적으로규정되어 성원권을 박탈당할 수 있다. 환대는 그러므로 전쟁의 문제를해결해야 한다. 나는 여기서 환대에 관한 논의의 출발점으로 간주되는칸트의 유명한 텍스트에 ‘영구평화론‘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는 점을상기시키고 싶다. 칸트는 보편적인 환대를 영구평화의 조건으로 제시한셈이지만, 우리는 그 역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구평화야말로 절대적 환대의 조건이라고 말이다. -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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