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이란 본디 문화의 습득과는 무관하게 모든 사람이 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무엇이다. 영혼이 있다는 말은 신성하다는 뜻이며, 함부로 범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뒤르켐은 이 신성함이 사회로부터 온다고 말한다. 신성함의 원천은 개체의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 있다. 갓난아기의 둘레에 금줄을 치고, 함부로 손댈 수 없음을 선언하는 것은 사회이다. 사람은 신성하기 때문에 의례의 대상인 게 아니라, 의례의 대상이기 때문에, 의례의 수행을 통해서 비로소 신성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인격에 대한 이 같은 수행적 관점은 여전히 윤리학적인 문제를 내포한다. 신성함을 부여하는 힘이 사회에 있다면, 사회는 그것을 박달하는 힘 또한 가지고 있을 것이다. 사회가 한 개인에게서 신성함을 박탈하여 그를 어떤 금기의 보호도 받지 않는 벌거벗은 생명으로 만들려할 때, 우리는 무슨 근거로 그것을 비판할 수 있을까? 이것은 ‘권리를가질 권리‘에 대해 논의하면서 아렌트가 예리하게 의식하는 문제이기도하다. 나치스는 가치 있는 생명과 무가치한 생명을 구별하는 것은 주권자의 권한이며, ‘내재적 가치‘나 ‘빼앗길 수 없는 존엄‘ 따위는 존재하지않음을, 유태인들을 가스실로 보내고 그들의 몸을 비누나 성냥으로 만듦으로써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신성함의 원천이 개인의 바깥에 있다는 말은 결국 이러한 관점에 동조하는 게 아닌가? - P246

이 문제에 대한 나의 대답은 두 가지이다. 우선 사회는 주권자-국가나 총통처럼 단일한 주체가 아니다. 사회를 이루는 것은 사람들이며, 그들 각자는 타자를 사회적 죽음으로부터 끌어내는 힘을 미약하게나마 가지고 있다. 그리고 자기를 위해 나서주는 제삼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는 한, 벌거벗은 생명은 아직 완전히 벌거벗은 게 아니다(이는 발화의 장소성placedness 이라는 주제로 우리를 이끄는데, 우리가 벌거벗은생명들의 인권에 대해 아무리 열심히 이야기하더라도, 우리의 목소리가 그들에게 닿지 않는다면 그들은 사람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권 담론의 취약성은 그것이 신학적 관념 - 신은 자신의 모습을 본떠 인간을 창조하였다‘ 등등-에 기대고 있다는 사실보다는, 담론을 실천과 분리하여 비장소화한다는 사실에서 생겨난다).
다음으로, 신성함이 사회로부터 온다는 말은 결코 사회가 마음대로그 구성원에게서 존엄을 박탈할 수 있음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구성원들을 절대적으로 환대하는 것, 그들 모두에게 자리를 주고, 그 자리의 불가침성을 선언하는 것이야말로 사회가 성립하기 위한 조건이다.
조건부의 환대는 어떤 식으로든 사회 안에 전쟁을 다시 끌어들이고, 그리하여 사회의 개념을 토대에서부터 무너뜨린다.  - P247

아니다. 우리는 죽은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야말로 도덕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죽은 사람은 우리가 무엇을 준 갚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맺었던 관계의 본질은 우리가 더 이상 남들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게 되는 시점에 받게 될 대접을 통해 확인된다. 물론 죽은사람의 몸 자체는 그 사람이 아니다. 죽은 사람의 ‘사람‘은 몸과 분리되어 어딘가 다른 곳에 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사람에게서 온무언가가, 그 사람의 존재 혹은 부재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어떤 힘이 그가 두고 간 이 껍데기 속에 깃들어 있음을 느낀다. 그가 남긴 다른 유품들과 마찬가지로, 이 껍데기는 팔거나 버리거나 아무에게나 넘겨주어서는 안 되는 "간직할 의무가 있는 물건이다. 우리는 이 물건을 의례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망자와의 관계를 지속한다.
죽은 사람과 산 사람 사이에 의례적인 관계가 지속된다는 것은 죽은사람이 여전히 사회의 구성원임을 뜻한다. 사회는 산 자들로만 이루어진 게 아니다. 죽은 자들 역시 사회 안에 자리를 가지고 있다.  - 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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