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퍼드스코너, 버지니아주
2012년

보러가드는 밤하늘이 한 폭의 그림 같다고 느꼈다. 달이 구름 뒤로 숨자 사람들의 웃음소리는 엔진의 불협화음에 묻혀 허공에 흩어졌다. 근처에 있는 셰빌의 오디오에서 뿜어내는 저음은 너무도 강력한 나머지 심폐소생술을 받으면 이런 느낌일까,라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오래된 편의점 앞에는 신상 모델 몇 대가 되는 대로 주차어 있었다. 셰빌 외에도 매버릭 한 대, 임팔라 두 대, 카마로 몇 대와함께 미국 머슬카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차 대여섯 대가 어지럽게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피부에 서늘한 공기가 느껴졌고 코끝에는가스와 기름 냄새가 맴돌았다. 진하고 매캐한 배기가스와 탄 고무냄새였다. 귀뚜라미와 쏙독새가 있는 힘을 다해 우는 듯했지만 잘들리지 않았다. 보러가드는 눈을 감고 귀를 쫑긋 세웠지만 그 합창소릴 음미하는데 실패했다. 귀뚜라미와 쏙독새는 사랑을 힘껏 외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대부분을 이들과 같이 보내리라. - P1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내나라 사람들이 애커넌 씨 앞에서 부리는 주책에 대한 이런당혹스러움은 아무리 여러 번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게다가오늘의 부끄러움은 이전까지 느꼈던 것과 격이 다르게 진폭이 컸다. 오늘 황후의 영전에서 머리채를 붙잡고 뒹군 여자들이나 애커넌 씨의 바지 속 물건의 크기를 눈으로 가늠하고 있는 남자들은 시골 무지렁이들이 아니라 조상 대대로 이 나라의 최상류층을 이루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이날 부리는 추태는 대한민국이라는나라가 가질 수 있는 품격의 상한선이 여기까지밖에 안 된다고 하는 최종적 선고인 것 같았다. - P207

해동은 진형의 형제자매들이 거의 서울에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고모의 장례를 위해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해동의 아버지가 뒤집어쓴 모욕을 해명하기 위해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해동은 아주 자연스럽게, 고모의 상가에 모여 앉은 이 자리가 말하자면 양가의 상견례나 다름없는 것이라고 느끼게 되었다. 고모는 시신이 되어 땅에 묻히기 전, 고모의 육신이 이 땅에 머무는 마지막 순간에 해동의 부모로서 상견례에 함께했다. 그 미미한 연결이 해동을 기쁘게 했다. 겨우 그것밖에 안 되더라도 해동에게는 우주를 가득 채울 만큼 중요한 것이었다. - P244

해동이 가진 것은 온통 미미한 것들뿐이었다. 아버지가 돼지막에 숨겼던 인쇄기, 생전에 고모가 쌓은 덕과 인정, 애커넌 씨와 개인간 고용으로 만들어진 언커크의 일자리. 그런 미미한 것들은 길가의 거미줄처럼 금세 더럽혀지고 아무 발길에나 찢어지고 제일먼저 흔적 없이 사라졌다. 그런 것이 존재했다고 증언해줄 사람들도 뿔뿔이 흩어져 그것이 실제 있었다고 말할 근거조차 희박해지는 것들뿐이었다. 그에 비하면 윤덕영은, 벽수산장은 언커크는 얼마나 확실하고 단단하고 부인할 수 없이 존재하는가.
세상을 뒤바꾼 두 번의 전쟁과 왕조의 절멸과 윤덕영의 그 모든악명으로도 그것을 뒤흔들지 못했다. 저택은 그의 눈앞에 확실히존재하고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아버지의 인쇄기처럼, 그것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의심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꿋꿋하고 기세로운 그 저택의 힘에 기대어 오히려 윤덕영과 그 후손들은 부활을 꿈꾸었다. 이 세상에는 사라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흔들리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 것들. 지난 석 달 동안 그것의 질긴 생명력을 경험하면서 해동은 그것이 ‘힘‘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세상에는 부정할 수 없는 강력한힘들이 있었다. 그것을 가지지 못한 입장에서는 분하고 고까울지언정 그것이 아예 없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 P248

"잘 심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좋은 데다 심어야 한다."
산자락 아래쪽에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모습을 내려다보며 진만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흙바닥에 아무렇게나 엉덩이를 내려놓고 담배를 피워 문 그는 몸짓 하나 눈빛 하나까지도 훌륭한 일꾼이었다.
"저기 길 옆에, 동사무소에서 나무 심으라고 벌여놓은 데, 그런데다 심으면 아무리 잘 심어도 자랄 수가 없다. 높은 사람들 보기에 나무 심은 티가 금방 나니까 거기다 심으라고 하지만, 저렇게 흙이 얕고 언덕바지가 가팔라서 물도 금방 새는데 어떻게 묘목이버텨."
"그럼 저건 헛일이군요."
"순서가 있지 순서가 저런 데에 나무가 서려면 씨앗부터 천천히 자라야 해. 이렇게 산 안쪽에 그나마 흙이 좋은 데부터 나무가서야지. 그러면 나중에 저렇게 박한 땅에도 씨앗이 떨어져서 자라겠지. 하지만 지금 저기다가 나무를 세우려고 하면 되지도 않는단말이야. 뭐든지 제대로 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린단 말이네." - P263

아니면 이대로 무너져 기억 속으로 사라질까? 해동은 어느 쪽을 바라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저택은 나라의 것 같기도. 유엔의 것 같기도, 윤원섭의 것 같기도 했다.
친일파의 자손이 빌붙은 썩어빠진 집이기도 했고 세상에 다시 없이 아름다운 것이기도 했다. 적산, 그것은 그렇게 사람을 혼동되게했다. 썩어문드러져 짜내야 할 고름인지, 다시 얻지 못할 귀중한 자산인지 알 수 없었다.
지붕이 사라지고 유리창이 다 깨졌지만 벽과 기둥과 뾰족탑은여전히 멀쩡하게 튼튼했다. 자신만만한 윤원섭과 그녀를 둘러싼 실력자들을 보면 이곳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저택이 화재를 이기고 더 훌륭하게 복구될 것을 기뻐하기엔 그녀가 꼬나문양담배와 그녀에게 아첨하는 무리가 괘씸했다. 그렇다고 저택이 사라져 아예 없어진 모습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아까 타고 온 택시운전사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물어보고 싶었다. 중상을 입고 쓰러진 사자와도 같은 이 저택을 싹 쓸어 없애버릴지, 복구할지. 그런데저택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저 여자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가까이에서 눈으로 본 지금 그의 생각은 어떠하냐고 묻고 싶었다. - P274

저편 버드나무 아래에서 붉어진 눈으로 저택을 보고 있는 어멈과영감을 보았지만 멈추어 따로 작별인사를 할 수 없었다. 나중에 사업이 잘 풀리면 찾아와 막걸리 한사발이라도 대접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의 인생에 다시없이 빛나는 무대였던 이곳을 축복도 저주도 남기지 않고, 떠나야 할 때였다.
해동은 언커크 언덕을 내려왔다. - P27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주광성에서 형이상학으로
일단 포퍼 생물(내부 환경에서 사전 선택을 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뇌를 가진 생물)에 도달한 다음에는 무엇이 있을까? 다양한 갈래가 있지만 여기서는 그 위력을 가장 명확히 볼수 있는 특수한 혁신에 집중해 보자. 포퍼 생물의 후예 중에는 내부 환경이 외부 환경의 설계된 부분에 따라 형성되는 생물이 있다. 다윈의 근본적 통찰가운데 하나는 설계에는 많은 비용이 들지만 설계를 모방하는 데에는 별다른 비용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새로운설계를 내놓기는 어렵지만 낡은 설계를 보완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다는 뜻이다. 바퀴를 새롭게 발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일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우리가살고 있는 문화는 이미 바퀴의 설계도(그리고 어마어마하게 많은 다양한설계도들)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다윈 생물의 상층-상층-상층 집단을 ‘그레고리 생물‘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 P168

인류학자들은 도구의 사용이 지능을 비약적으로 향상시켰다는 사실을 오래전부터 알았다. 야생 침팬지는 투박하게 손질한 가느다란 막대기를 땅 속에 있는 흰개미의 집에 쑤셔 넣었다가 재빨리 빼내 거기에 달라붙은 흰개미를 핥아먹는다. 모든 침팬지가 이런 기술을 터득한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이런 사실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어떤 침팬지 ‘문화‘는 이렇게 흰개미를 잡는 요령을모른다. 이것은 도구의 사용과 지능의 관계가 쌍방향적임을 시사한다. 도구를 인식하고 유지하는 데 도구를 만드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에는 지능이 필요하지만 한편으로 도구는 도구를 갖게 되었다는혜택을 입은 존재의 지능을 높여 준다. 탁월하게 설계된 도구일수록(그 도구를 만드는 데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할수록 그것을 사용하는 존재에게 더 많은 지능을 선사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중에서도 가장탁월한 도구라 할 수 있는 것이 그레고리가 ‘마음의 도구‘라고 부르는 언어다. - P169

생물이 가진 생명력을 보여 주는 데 가장 많이 쓰이는 예가 바로 주광성(走光性)이다. 주광성은 빛과 어둠을 구분하여 빛을 쫓는능력이다. 빛은 에너지 변환이 용이하며 그 세기는 거리가 멀어짐에 따라 점점 줄어들므로 광원에서 방출된 빛의 경로만 실정되면변환기와 실행기 사이의 아주 간단한 연결만으로도 신뢰할 만한주광성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신경과학자 발렌티노 브라이텐베르크(Valentino Braitenberg)의 뛰어난 저서 『운반체 (Vehicles)』에서 나온가장 단순한 모델을 소개한다 그림 5. 이 모델에는 두 개의 빛 변환기가 있다. 두 변환기의 각각 다른 출력 신호는 두 개의 실행기로갈려 입력된다(실행기를 배의 양옆에 달린 엔진으로 생각하면 된다.). 빛이더 많이 변환될수록 엔진의 속도도 올라간다. 광원에서 가까운 변환기는 광원에서 먼 변환기보다 엔진을 더 빨리 돌리므로 운반체는 늘 빛의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광원에 가닿든가 아니면 광원 주위로 바짝 붙어 선회한다.
이런 단순한 존재의 세계는 빛, 어스름, 어둠으로 등급이 나뉜다. 이 체계는 이것밖에 모르며 이 이상을 알 필요도 없다. 빛의인식은 거의 자동으로 이루어진다. 변환기를 밝히는 것은 모두 같은 빛이다. 이 체계는 그 빛이 먼저 비췄다가 되돌아온 빛인지에관심을 두지 않는다. 만약에 달이 두 개라면 생태학적으로 차이가있을 수 있다. 어떤 달을 쫓아야 할지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경우 특정한 달을 달로 인식하거나 확인하는 것은 해결이 필요한또 하나의 문제로 등장할 것이다. 그런 세계에서는 단순한 주광성의 전략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달은 거듭 그 동일성을 확인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다.  - P17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각색 꽃이 만발한 봄이나 단풍 진 가을도 아니고, 푸른 숲이 우거진 한여름도 하다못해 흐드러지게 눈을 인 설경조차 아닌, 나무에 새잎도 나지 않아 온 세상이 사금파리처럼 빗금친 회색조인 가장 황량하고 볼품없는 계절에 그들은 언커크 언덕에 올랐다. 그런데도 진형은 나무에게 제각각 이름을 불러주었다. 추위 속에 흩어지는 음파에 불과한 그것이 불러오는 기묘한 생기에 해동은 내심으로 놀랐다. - P158

"시종원경, 중추원장, 귀족원 의장, 그런 것도 모두?"
"그 시대엔 어쩔 수 없었다니까"
"원치 않았는데도?"
"원치 않으셨지."
"그 시대에 어쩔 수 없이 그랬다면, 일등을 할 거까지야 있었을까?"
"뭐라고?"
젊은 외교관이 궁금해하는 외교관들에게 해동의 질문을 통역했다. 해동이 말하고 외교관이 통역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세상이 가끔 이상하게 뒤집히는 드문 순간이었다.
"당신 말대로, 그 시절에 나라를 위해서 피치 못하게 친일도 하고 돈도 긁었다고 치자고. 동의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어서 그랬다고 그런데 마지못해 하는 일이라면 적당히 흉내만 내지, 남들을 모두 제치고 일등을 하지는 않잖아? 어떻게 윤덕영처럼, 아무도생각해내지 못한 온갖 못된 수를 다 써서, 그 시대에 있었던 모든감투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차지할 수 있는 거지? 원치도 않는데 하는 수 없이 그랬다면?"
거침없던 윤원섭의 대답이 막힌 것만으로도, 짧은 침묵만으로도 해동은 그것을 작은 승리라고 느꼈다. 격렬한 감정에 치받혀 오히려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무감한 지경이 되었는데, 그 작은 승리의 감정만은 희미하게 감각할 수 있었다. - P187

황후의 서거 이후 왕실은 낙선재 내실에 빈소를 차리고 시민들의 조문을 받았다. 조문하는 시민들의 옷차림은 제각각이었다. 옛법도대로 갓을 쓰고 두루마기를 갖추어 입은 늙은 유생도 있었고, 장사하던 가게를 잠시 사환에게 맡기고 조문을 왔다는 누비 점퍼차림의 오십대 중년 남자도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애증이 섞여있지 않았다. 영친왕 이은씨나 그의 아들 이구씨에 대해 때로는 얄밉고 때로는 안된 마음이 교차하는 것과는 다르게 윤황후에 대해서는 오로지 묵묵한 애도와 애틋함뿐이었다. 윤황후가 사욕을 추구하지 않고 한결같이 명예를 지키며 기품 있는 일생을 살았다는평판을 얻은 것은 조선왕조에 내린 마지막 축복이었다. 아무도 왕정을 그리워하지 않았으나, 왕궁에서 혼례를 올리고 살림을 살아가던 인간의 훈김이 끝난 것을 순정한 마음으로 아쉬워했다. 결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지난 시절이지만, 아름다운 것도 있었다고 생각했다. - P19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먼 곳을 바라보듯 쓸쓸한 저 미소는 또 무언가. 그녀가 오로지 애커넌 씨 앞에서만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을 애커넌 씨에게 알릴 길이 없다는 게 안타까웠다. 그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말하는 순간 도리어 그 말을 입에 올린 자를 비천하게 만드는 종류의고약한 언술이 되었다. 권력자 앞에서만 평소에 없던 공손하고 우아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태고부터 이어진 얄팍한 술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통하는 것을 보면 인류는 문명이 아무리 발달해도 그리 많은 것을 배우는 것 같지 않았다. - P84

소년처럼 고양된 지금 같은 기분이 아니더라도 애커넌 씨는 어떤 장면을 보면서 아름답다는 말을 자주 하곤 했는데 해동은 시야가득 구불구불 이어지는 좁은 골목길에서 그가 말하는 아름다움이 대체 무엇인지 잘 알 수 없었고, 해동이 생각하기로는 어디건일단 가난, 그 지겹고 두꺼운 가난의 더께가 사라져야 그 안에 숨은 아름다움이 드러날 것 같았다. 실은 해동뿐 아니라 주변의 누구도 ‘가난하지 않은 상태‘가 어떤 것인지 잘 알지 못했다. 일단 끼니와 집세와 자식의 학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고생각했는데, 그 너머에 무엇이 더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해동을포함한 모두는 전력을 다해 간절하게 달리고 있었는데, 무엇을 향해 달려가는 중인지는 잘 알지 못했다. - P96

생활 표면에 드러나 문제를 일으키는 것들은 다른 데 있었다.
애커넌 씨가 오래 망설인 것이 분명한, 그러나 일단 말하기로 결심한 이상 단호하게 불쾌함을 표시한 얼굴로 적어도 매주 이 회 이상머리를 감아달라, 회의에 동석할 때는 외투에 한국 음식 냄새가 풍기지 않도록 신경써달라고 부탁한 그런 일들이 해동의 일상을 고통스럽게 했다. 어릴 때부터 선교사의 가르침 아래 자라서 서양인들의 예의와 생활에 익숙하다고 자신했고 나름대로 신경을 쓰고있었는데 그런 지적을 받으니 당장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국과 일본의 수교 문제 같은 것은 하루종일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라 옷소매를 킁킁거리게 만들지는 않았으니까. 자괴감이 들기는 했어도 감정의 격렬한 정도로 치자면 은근한 축에 속했다. 윤원섭이라는 여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서대문형무소가 그 여자를 한겨울의 찬바람 속에 토해놓은 뒤로 해동은 옷자락에 마늘 냄새 참기름 냄새가 풍기는지 하루종일 킁킁거리던 날들로 돌아가고 말았다. 사춘기 소년처럼 울화와 창피함이 갈마들었고, 아무도 묻지 않은 그의 내심의 지지를 얻어 체결된 한일 협정이 갑자기 의심스럽게 보였다. 이 결정이 너무 빠르지 않았는가? 해방 이전, 아니 심지어 합방 이전에 태어난 사람들이 아직 살아가는 이 시대에 일본과 아무 일 없다는 듯 손을 잡는다는 건, 그들을 모욕하는 결정이 아니었는가? 이 협정으로 인하여 숨어 살던 윤원섭 같은 무리가 몰려나와 그 시절엔 어쩔 수 없었다고 큰소리를 치게 된다면, 목표로 하였던 경제적 공동 번영을이룬다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옳은 세상일까? - P102

숙취로 인한 두통이 고민을 방해하였으나, 이 부분에서 해동은다소간 시간을 들여 깊은 생각을 하려 애를 썼다. 나라 전체가 잘사는 것이 더 큰 이익인가, 원섭과 같은 죄지은 자들이 죗값을 치르고 어려운 시절 묵묵히 고난을 감수했던 올바른 사람들이 떳떳하게 사는 것이 더 큰 이익인가? 이 부분에서 생각은 플리머스 자동차의 바퀴가 진흙 구렁에 빠져 헛도는 것처럼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헛되이 맴돌았다. - P103

저녁마다 쌀독을 긁는 늙은 어미들, 볼이 움푹 패도록 힘주어 꽁초의 마지막 연기를 빨아들이는 여윈 아비들의 얼굴에 잠시 웃음이 떠돌게 하는 그런 일들이 좀더 많이 일어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유엔과 정부에서 추구하는 것도 실은 그런 것들이었다. 그것이 모두 함께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인 것을 해동은 더이상 의심하지 않았다. 해동의 내면에 든든하게 뿌리를 내렸던 그 생각들이 윤원섭의 등장 이후 겨울바람을 만난 마른 나뭇잎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 - P104

"종묘를 지키시는 누대 선왕의 혼백이 두려운 일이로다. 짐은 하지 못할 일이니 공들이 알아서 처리하라."
시아버지 고종도 곤란한 일들이 닥치면 그런 식으로 대답하곤했다. 이제 대신들의 손아귀에 옥새가 들어가면 돌이키지 못할일이 벌어질 것을 황후는 깨달았다. 황후에게는 어린아이의 충동적인 민첩함이 아직 남아 있었다. 황후는 숨어 있던 병풍 뒤에서 뛰쳐나가 이제 막 남편 황제에게서 내무대신 이완용의 손으로 건네지려던 어보를 낚아채 방을 빠져나왔다. 스스로 인식하지 못했으나 이후 역사의 벽에 그녀의 일생을 음각하게 되는,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몇 발짝이었다. 영원처럼 느껴졌지만 실은 매우 짧은 복도 한 개에 불과했던 도피 이후 더이상 갈 길을 잃어 그녀는 아무데로나, 문이 열리는 아무 방으로나 달려들어가 어보를 치마폭 아래 집어넣고 몸을 웅크렸다. 굼벵이 같기도 하고 태아 같도 한, 동그랗게 웅크린 등짝이 그녀가 할 수 있었던 최대한의 분기였다. 머리를 세 바퀴 두른 무거운 달비가 바닥에 나뒹굴어 황후의 속머리가 드러났고, 가채에 꽂힌 떨잠이 바들바들 떨렸다.
먼저 달려온 사람은 아버지인 해풍부원군 윤택영이었다. 그는 옥새를 품고 엎드린 큰딸을 보고 어쩔 줄 몰랐다.
"황후마마, 어보를 이리 주옵소서. 국가의 대사이고 양국 황제간의 조약이니 마마께서 나서실 일이 아니오이다."
윤택영은 긴장하여 혀가 목구멍 안으로 말려들어가는 소리를냈다. 황후는 고개를 저을 뿐 친정 아비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뒤이어 달려온 대신과 각료들도 차마 어찌할 줄 모르고 우왕좌왕할때에, 윤덕영이 동생인 윤택영의 어깨를 밀치며 재촉했다.
"무엇하느냐, 얼른 빼앗지 않고?"
하지만 원래 성격이 유했던 윤택영은 어찌할 바를 몰라 계속황후마마, 황후마마를 되될 뿐이었다. 형인 윤덕영은 동생의 그런 답답함을 오래 참는 성격이 아니었다.
"이런 염병할! 내 혹여라도 이런 일이 일어날까 우려해 너를부르지 않았느냐! 에잇, 저리 비켜라!"
치마 속에 옥새를 숨긴 황후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아는사람은 윤덕영뿐이었다.
윤덕영은 황후를 벌렁 나자빠뜨린 후, 그 치마속을 뒤져서 옥새를 빼앗아 들었다. - P12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