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색 꽃이 만발한 봄이나 단풍 진 가을도 아니고, 푸른 숲이 우거진 한여름도 하다못해 흐드러지게 눈을 인 설경조차 아닌, 나무에 새잎도 나지 않아 온 세상이 사금파리처럼 빗금친 회색조인 가장 황량하고 볼품없는 계절에 그들은 언커크 언덕에 올랐다. 그런데도 진형은 나무에게 제각각 이름을 불러주었다. 추위 속에 흩어지는 음파에 불과한 그것이 불러오는 기묘한 생기에 해동은 내심으로 놀랐다. - P158
"시종원경, 중추원장, 귀족원 의장, 그런 것도 모두?" "그 시대엔 어쩔 수 없었다니까" "원치 않았는데도?" "원치 않으셨지." "그 시대에 어쩔 수 없이 그랬다면, 일등을 할 거까지야 있었을까?" "뭐라고?" 젊은 외교관이 궁금해하는 외교관들에게 해동의 질문을 통역했다. 해동이 말하고 외교관이 통역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세상이 가끔 이상하게 뒤집히는 드문 순간이었다. "당신 말대로, 그 시절에 나라를 위해서 피치 못하게 친일도 하고 돈도 긁었다고 치자고. 동의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어서 그랬다고 그런데 마지못해 하는 일이라면 적당히 흉내만 내지, 남들을 모두 제치고 일등을 하지는 않잖아? 어떻게 윤덕영처럼, 아무도생각해내지 못한 온갖 못된 수를 다 써서, 그 시대에 있었던 모든감투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차지할 수 있는 거지? 원치도 않는데 하는 수 없이 그랬다면?" 거침없던 윤원섭의 대답이 막힌 것만으로도, 짧은 침묵만으로도 해동은 그것을 작은 승리라고 느꼈다. 격렬한 감정에 치받혀 오히려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무감한 지경이 되었는데, 그 작은 승리의 감정만은 희미하게 감각할 수 있었다. - P187
황후의 서거 이후 왕실은 낙선재 내실에 빈소를 차리고 시민들의 조문을 받았다. 조문하는 시민들의 옷차림은 제각각이었다. 옛법도대로 갓을 쓰고 두루마기를 갖추어 입은 늙은 유생도 있었고, 장사하던 가게를 잠시 사환에게 맡기고 조문을 왔다는 누비 점퍼차림의 오십대 중년 남자도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애증이 섞여있지 않았다. 영친왕 이은씨나 그의 아들 이구씨에 대해 때로는 얄밉고 때로는 안된 마음이 교차하는 것과는 다르게 윤황후에 대해서는 오로지 묵묵한 애도와 애틋함뿐이었다. 윤황후가 사욕을 추구하지 않고 한결같이 명예를 지키며 기품 있는 일생을 살았다는평판을 얻은 것은 조선왕조에 내린 마지막 축복이었다. 아무도 왕정을 그리워하지 않았으나, 왕궁에서 혼례를 올리고 살림을 살아가던 인간의 훈김이 끝난 것을 순정한 마음으로 아쉬워했다. 결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지난 시절이지만, 아름다운 것도 있었다고 생각했다. - P19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