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곳을 바라보듯 쓸쓸한 저 미소는 또 무언가. 그녀가 오로지 애커넌 씨 앞에서만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을 애커넌 씨에게 알릴 길이 없다는 게 안타까웠다. 그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말하는 순간 도리어 그 말을 입에 올린 자를 비천하게 만드는 종류의고약한 언술이 되었다. 권력자 앞에서만 평소에 없던 공손하고 우아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태고부터 이어진 얄팍한 술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통하는 것을 보면 인류는 문명이 아무리 발달해도 그리 많은 것을 배우는 것 같지 않았다. - P84

소년처럼 고양된 지금 같은 기분이 아니더라도 애커넌 씨는 어떤 장면을 보면서 아름답다는 말을 자주 하곤 했는데 해동은 시야가득 구불구불 이어지는 좁은 골목길에서 그가 말하는 아름다움이 대체 무엇인지 잘 알 수 없었고, 해동이 생각하기로는 어디건일단 가난, 그 지겹고 두꺼운 가난의 더께가 사라져야 그 안에 숨은 아름다움이 드러날 것 같았다. 실은 해동뿐 아니라 주변의 누구도 ‘가난하지 않은 상태‘가 어떤 것인지 잘 알지 못했다. 일단 끼니와 집세와 자식의 학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고생각했는데, 그 너머에 무엇이 더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해동을포함한 모두는 전력을 다해 간절하게 달리고 있었는데, 무엇을 향해 달려가는 중인지는 잘 알지 못했다. - P96

생활 표면에 드러나 문제를 일으키는 것들은 다른 데 있었다.
애커넌 씨가 오래 망설인 것이 분명한, 그러나 일단 말하기로 결심한 이상 단호하게 불쾌함을 표시한 얼굴로 적어도 매주 이 회 이상머리를 감아달라, 회의에 동석할 때는 외투에 한국 음식 냄새가 풍기지 않도록 신경써달라고 부탁한 그런 일들이 해동의 일상을 고통스럽게 했다. 어릴 때부터 선교사의 가르침 아래 자라서 서양인들의 예의와 생활에 익숙하다고 자신했고 나름대로 신경을 쓰고있었는데 그런 지적을 받으니 당장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국과 일본의 수교 문제 같은 것은 하루종일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라 옷소매를 킁킁거리게 만들지는 않았으니까. 자괴감이 들기는 했어도 감정의 격렬한 정도로 치자면 은근한 축에 속했다. 윤원섭이라는 여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서대문형무소가 그 여자를 한겨울의 찬바람 속에 토해놓은 뒤로 해동은 옷자락에 마늘 냄새 참기름 냄새가 풍기는지 하루종일 킁킁거리던 날들로 돌아가고 말았다. 사춘기 소년처럼 울화와 창피함이 갈마들었고, 아무도 묻지 않은 그의 내심의 지지를 얻어 체결된 한일 협정이 갑자기 의심스럽게 보였다. 이 결정이 너무 빠르지 않았는가? 해방 이전, 아니 심지어 합방 이전에 태어난 사람들이 아직 살아가는 이 시대에 일본과 아무 일 없다는 듯 손을 잡는다는 건, 그들을 모욕하는 결정이 아니었는가? 이 협정으로 인하여 숨어 살던 윤원섭 같은 무리가 몰려나와 그 시절엔 어쩔 수 없었다고 큰소리를 치게 된다면, 목표로 하였던 경제적 공동 번영을이룬다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옳은 세상일까? - P102

숙취로 인한 두통이 고민을 방해하였으나, 이 부분에서 해동은다소간 시간을 들여 깊은 생각을 하려 애를 썼다. 나라 전체가 잘사는 것이 더 큰 이익인가, 원섭과 같은 죄지은 자들이 죗값을 치르고 어려운 시절 묵묵히 고난을 감수했던 올바른 사람들이 떳떳하게 사는 것이 더 큰 이익인가? 이 부분에서 생각은 플리머스 자동차의 바퀴가 진흙 구렁에 빠져 헛도는 것처럼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헛되이 맴돌았다. - P103

저녁마다 쌀독을 긁는 늙은 어미들, 볼이 움푹 패도록 힘주어 꽁초의 마지막 연기를 빨아들이는 여윈 아비들의 얼굴에 잠시 웃음이 떠돌게 하는 그런 일들이 좀더 많이 일어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유엔과 정부에서 추구하는 것도 실은 그런 것들이었다. 그것이 모두 함께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인 것을 해동은 더이상 의심하지 않았다. 해동의 내면에 든든하게 뿌리를 내렸던 그 생각들이 윤원섭의 등장 이후 겨울바람을 만난 마른 나뭇잎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 - P104

"종묘를 지키시는 누대 선왕의 혼백이 두려운 일이로다. 짐은 하지 못할 일이니 공들이 알아서 처리하라."
시아버지 고종도 곤란한 일들이 닥치면 그런 식으로 대답하곤했다. 이제 대신들의 손아귀에 옥새가 들어가면 돌이키지 못할일이 벌어질 것을 황후는 깨달았다. 황후에게는 어린아이의 충동적인 민첩함이 아직 남아 있었다. 황후는 숨어 있던 병풍 뒤에서 뛰쳐나가 이제 막 남편 황제에게서 내무대신 이완용의 손으로 건네지려던 어보를 낚아채 방을 빠져나왔다. 스스로 인식하지 못했으나 이후 역사의 벽에 그녀의 일생을 음각하게 되는,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몇 발짝이었다. 영원처럼 느껴졌지만 실은 매우 짧은 복도 한 개에 불과했던 도피 이후 더이상 갈 길을 잃어 그녀는 아무데로나, 문이 열리는 아무 방으로나 달려들어가 어보를 치마폭 아래 집어넣고 몸을 웅크렸다. 굼벵이 같기도 하고 태아 같도 한, 동그랗게 웅크린 등짝이 그녀가 할 수 있었던 최대한의 분기였다. 머리를 세 바퀴 두른 무거운 달비가 바닥에 나뒹굴어 황후의 속머리가 드러났고, 가채에 꽂힌 떨잠이 바들바들 떨렸다.
먼저 달려온 사람은 아버지인 해풍부원군 윤택영이었다. 그는 옥새를 품고 엎드린 큰딸을 보고 어쩔 줄 몰랐다.
"황후마마, 어보를 이리 주옵소서. 국가의 대사이고 양국 황제간의 조약이니 마마께서 나서실 일이 아니오이다."
윤택영은 긴장하여 혀가 목구멍 안으로 말려들어가는 소리를냈다. 황후는 고개를 저을 뿐 친정 아비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뒤이어 달려온 대신과 각료들도 차마 어찌할 줄 모르고 우왕좌왕할때에, 윤덕영이 동생인 윤택영의 어깨를 밀치며 재촉했다.
"무엇하느냐, 얼른 빼앗지 않고?"
하지만 원래 성격이 유했던 윤택영은 어찌할 바를 몰라 계속황후마마, 황후마마를 되될 뿐이었다. 형인 윤덕영은 동생의 그런 답답함을 오래 참는 성격이 아니었다.
"이런 염병할! 내 혹여라도 이런 일이 일어날까 우려해 너를부르지 않았느냐! 에잇, 저리 비켜라!"
치마 속에 옥새를 숨긴 황후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아는사람은 윤덕영뿐이었다.
윤덕영은 황후를 벌렁 나자빠뜨린 후, 그 치마속을 뒤져서 옥새를 빼앗아 들었다. -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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