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헤르멜린과 오코너는 자폐증에 주의를 돌렸다. 실제로 작은 과제를주어 어린이들을 테스트하고, 그 과정을 측정하고 싶었다. 당시에는이런 일을 쓸데없는 짓으로 여겼다. 자폐 어린이는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소통하지 못하고 전혀 협조가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협조나 대화에 의한 의사소통을 하지 않고도 관찰과 측정과 정량이 가능한 신체적, 정신적 반응을 이끌어낼 방법이 있으리라 믿었다. 괴상한 나무 상자는 이런 목표를 염두에 두고 만든 것이었다. 상자 안쪽은 완전히 까맣게 칠했다. 어린이가 머리를 들이미는 큰 구멍의 반대쪽에는 연구자가 상자 안에서 어린이의 표정이 어떻게 변하는지 관찰하기 위해 아주 작은 구멍을 하나 더 뚫었다.
그날 연구를 위해 마련된 작은 방을 찾은 어린이는 스물다섯 명이 넘었다. 어떤 아이는 단순한 호기심에서, 어떤 아이는 사탕을 준다는 꾀임에 넘어가 상자 안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처음 몇 초간 아이들의 눈에는 온통 깜깜한 공간만 보일 뿐이었다. 그러다 갑자기환한 조명이 밝혀지며 저쪽 어두운 구석에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실 상자 뒤쪽에 실제로 한 사람이 서 있다가 세 번째 구멍으로얼굴을 들이민 것이었다. 그 사람은 10초간 눈을 감았다 떴다. 30초가 지나면 조명이 꺼지고 상자 안은 다시 깜깜해졌다. 오코너와 헤르멜린은 아이들의 눈이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관심이 있었다. 조명이 켜졌을 때 어린이들이 어디를 얼마나 오래 바라보는지 기록하고, 같은 어린이에게 비슷하지만 한가지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 실험을 몇 번 반복하여 결과를 비교했다. 두 번째 실험에서는 조명이 들어왔을 때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한쌍의 흰색 카드를 세워놓고 그 위에 다양한 그림과 추상적인 기하학적 형태들 그리고 사진으로 찍은 사람의 얼굴이 나타나도록 했다. 지시에 따라 협조를 잘 해준 28명의 어린이를 모두 검사하는 데 몇 시간이 걸렸다.
다음날 헤르멜린과 오코너는 다른 학교로 가서 대략 비슷한 숫자의 어린이에게 똑같은 실험을 수행했다. 이들은 첫 번째 그룹과 소위 정신연령을 일치시켰으므로 실제 연령은 더 어렸다. 자폐증 어린이가 아닌 대조군이었다. 실험이 끝나자 오코너와 헤르멜린은 데이터를 분석했다. 전체적으로 자폐 어린이들은 상자의 어둡고 텅빈 공간에 주의를 기울이는 정도가 대조군과 크게 달랐다. 시선의 방향으로 봤을 때 대조군은 어둠에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반면 자폐 어린이들은 아무런 형체도 없는 텅 빈 공간과 그림자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극히 근소한 차이였으나, 차이는 분명 존재했다. 또한 그 차이는 헤르멜린과 오코너가 추구했던 일련의 질문에 전형적으로 나타난 소견이었다. 그들은 5년간 이런 식으로 꼼꼼하게 실험을 계속하여 세상에 관한 정보를 처리할 때 자폐 어린이가 나타내는 극히 작지만 정량화할 수 있는 차이를 꾸준히 밝혀냈다. 예를 들어 많은 자폐어린이가 보고듣는 것보다 촉감을 통해 더 많은 정보를 받아들였다. 전체적으로 그들은 다양한 데이터를 통해 자폐증에 신경학적원인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드디어 자폐증이 엄마의 사랑이 아니라 뇌와 관련되어 있다는 증거가 나온 것이다. - P396

레오 카너가 도널드 트리플렛과 다른 열 명의 어린이를 모델로자폐증이란 상태를 최초로 기술한 지 20년쯤 된 시점이었다. 하지만 20년간 자폐증이란 상태의 윤곽은 오히려 점점 흐려졌다. 수많은 전문가들의 목소리가 끼어들면서 정확한 정의는 갈수록 모호해졌다. 이미 1955년에 카너 자신도 "한두 가지 고립된 증상"을 가지고 부정확하고 엉성한 진단이 너무 많이 내려진다며 투덜거린 적이있었다. 그는 자신이 제시한 개념 전체가 일관성없는 표준들에 의해 계속 희석된다며 조바심을 냈다. 그는 이렇게 썼다. "하루아침에 이 나라에는 수많은 자폐 어린이가 살게 된 것 같다."
정신의학계 외부에 있는 사람이 보기에는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은 자폐증은 자폐증일 뿐이라고 생각할 것이었다. 그렇게 단순하고 객관적이며 변하지 않는 사실이 뭐가 문제란말인가? 하지만 사정은 그리 간단치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결코 간단치 않을 것이다. 일단 자폐증에는 생물학적 표지가 없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혈액검사로 뭔가를 측정하거나, 뺨 안쪽에서 면봉으로 검체를 채취하여 확인할 수 없다는 뜻이다. 오로지 어떤 사람의 행동을 관찰하고 해석하는 방법으로만 진단할 수 있다. 결국 어느 정도 판단의 주관성을 피할 수 없다. 특히 카너가 중요한 판단기준이라고 했던 "지적이고 수심어린 표정이라든지 "사물에 대한 애정어린 관계"와 같은 표현이 모호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이런 기준에 따른 의사들의 해석이 저마다 달랐으므로 진단의 불일치를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는 물론 그 후로도 오랫동안 자폐증이란 진단은 제눈에 안경에 불과했다. - P400

체크리스트는 22개 항목으로 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낸다.
돌맹이나 금속 등 희한한 물건들을 갖고 다니거나 수집한다.
종종 ‘특별‘하거나 특이한 목소리로 말한다.
신체의 움직임이 매우 어설프거나 어색하다.
사물을 특이한 방식으로 조사한다. 예를 들어 쿵쿵거리며 냄새를 맡거나 이빨로 물어본다.

로터는 설문 항목을 즉흥적으로 정했다. 우선 레오 카너가 자폐증의 본질이라고 주장했던 두 가지 기준, 즉 극단적인 자기고립과 동일함을 유지하려는 강박적인 고집을 큰 축으로 삼았다. 그리고특이하게 유쾌한 이름을 지닌 "크릭의 항목 기준Creak‘s Nine Points "이란 두 번째 진단기준을 차용했다. 1961년 5월 영국의학저널BritishMedical Journal)에 발표된 이 기준은 당시 자폐 행동을 나타내는 어린이를 기술하는 데 별생각없이 사용되었던 다양한 용어 중 하나인
"어린이 조현병적 증후군"의 정의라고 발표된 것이었다.
런던의 유명한 정신과 의사였던 밀드리드 크릭 Mildred Creak 은 열세 명으로 구성된 전문 위원회 의장을 맡아 9개월간 논쟁과 협의를벌인 끝에 급작스럽고 과도하며 외견상 비논리적인 불안", 이상한동작과 자세, "뚜렷한 개인 정체성 불인지" 등의 특징을 전체적인양상에 추가하여 하나의 증상 목록을 만들었다. 이렇게 전문가들이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9항목 기준 역시 임상진료에 사용하기에는 모호하고 혼란스러웠다. - P402

결과는 명백했다. 무작위적인 단어 목록을 제시했을 때 자폐 어린이는 비자폐 어린이와 똑같이 여덟 단어 대부분을 반복했으며, 사실 목록 마지막에 있는 몇 단어를 기억해내는 데는 더 좋은 성적을보였다. 하지만 어느 정도 의미가 통하는 목록을 제시했을 때는 비자폐 어린이들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분명 그들은 단어의 배열 속에 내재된 문장을 인식하고, 그런 인식을 이용해 목록에 있는 모든 단어를 기억해냈다. 하지만 자폐 어린이는 "이제 우리에게 편지를 써"라는 말을 "고양이 떨어져서 뒤로 갈퀴"만큼이나 무작위적이라고 인식하는 것 같았다. 그들의 뇌는 언어가 규칙을 갖고 배열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단어들이한테 보여 어떤 의미를 가져도 그 의미가 단어들을 기억하는 데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니, 그 의미를 듣지 못했다.
이 대목에서 프리스는 전날 밤 열심히 만든 카드들을 꺼냈다. 카드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집, 오리, 가위, 우산 같은 일상적인물체들이 간략한 선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그녀는 아이들 앞에 그림이 위로 가도록 네 장의 카드를 특정한 순서에 따라 놓아두었다. 조금 있다가 카드의 순서를 마구 뒤섞은 후, 다시 원래 순서로 늘어놓으라고 시켰다. 이번에도 순서 속에 기억을 돕기 위한 단서가 있었다. 카드들은 사건이 일어나는 논리적 순서에 맞게 배열되었다. 불이 켜진 촛불 그림 다음에는 똑같이 생긴 초가 거의 다 녹아 짧아진 모습을 그린 카드가 놓였다. 컵 속에 삶은 달걀이 들어 있는 카드옆에는 같은 컵 속에 껍질이 벗겨진 채 반쯤 먹은 달걀이 들어 있는모습을 그린 카드가 놓였다.
이처럼 순수하게 시각적 기억을 검사하는 실험에서 비자폐 어린이는 역시 시각적 단서에서 의미를 추정하여 좋은 성적을 냈다. 하지만 자폐 어린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점수는 대조군의 점수와사실상 같았다. 이렇게 흥미로운 결과로 인해 이 실험은 자폐 분야의 고전적인 연구로 손꼽힌다. 여기서 한 가지 강력한 가설이 제시되었다. 자폐 어린이가 비록 언어의 섬세한 구조와 그 안에 담긴 의미의 일부를 인지하지 못한다고 해도, 비언어적 수단을 통해 제공된 정보에서 의미를 추론하는 능력은 뛰어나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런 결과는 다시 한번 자폐 어린이가 청각보다 시각을 통한 학습에 훨씬 적절히 반응한다는 사실을 시사했다. 이런 통찰은 다른 실험에서 몇 번이고 재현되었을 뿐 아니라, 이후 교육방법을 개발하는 데도 필수적인 고려사항이 되었다. - P410

두 명 모두 자폐증이었던 네 쌍은 모두 일란성 쌍둥이였다. DNA 일치율이 쌍둥이가 아닌 형제자매와 마찬가지인 이란성 쌍둥이 중에 두 명이 모두 자폐증인 경우는 한 건도 없었다. 표본크기가 매우 작았지만 극명한 차이였다. 결론은 명백했다. 유전은 자폐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폴스타인이 지적했듯 가족 내에서 두 명의 어린이가 자폐증일 확률은 1/50로 매우 낮은 편이다. 하지만 일란성 쌍둥이에서 이 확률은 무려 1/3로 뛰어올랐다. 우연의 일치일 수는 없었다. 유전은 분명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 P419

1980년대 중반, 자폐증에 관해서라면 할말이 매우 많은 여성이 그특징을 완벽하게 포착한다고 생각되는 단어를 떠올렸다. 바로 "연속선continum "이다. 이 단어는 자폐적 특성이 매우 다양한 지적 및 사회적 능력을 지닌 사람에게 매우 다양한 강도와 조합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잘 표현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단순히 중증에서 경증에 이르는 직선이 아니라, 적지 않은 복잡성을 내포한 개념"이라고설명했다. 그러나 오래도록 "자폐증 연속선"에 대해 많은 글을 쓴후 훨씬 좋은 말이 떠올랐다. "자폐 스펙트럼"이다. 이 말은 자폐증을 해석하고, 자폐증에 반응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버렸다. 또한 정치와 사회와 과학 분야에 폭넓은 영향을 미쳤다. 간단히 말해 그때 로나 윙이 용어를 바꾸기로 결정한 것은 이후 자폐증을 둘러싼 모든 이야기를 바꿔버렸다. - P431

좁고 엄격한 정의가 실패했다고 해서 자폐증이 의미있는 형태를 갖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로나 윙과 굴드는 자폐증의 가장 중요한 특성들을 아우르는 "세 가지 핵심증상triad of impairment"이란 개념틀을 제안했다. 우선 뭔가를 주고받는 사회적 기술의 장애를 들었다. 두 번째는 비음성언어를 포함한 언어적 소통 관련 장애였다. 세 번째는 윙이 "사회적 상상력"이라고 부른 예컨대 가상놀이에 필요한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세 가지 핵심증상이란 개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융통성과 가변성이었다. 윙은이 개념를 내에서 자폐성향이 무한히 다양한 조합과 강도로 나타날수 있으며, 때로는 "정확히 정상과의 경계선상에 걸려 있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대담하게도 위대한 카너조차 이런 큰 그림을 보지 못했다고 단언했다. 처음에는 이런 개념을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연속선"이란 단어를 사용했고, 저서에도 "자폐성향의 연속선The Continuum of Autistic Traits "이란 장이 있었지만, 1988년에 이르면 똑같은 목적으로 "스펙트럼"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 P439

아스퍼거의 어린이들은 중요한 몇 가지 측면에서 약 1년 전에 카너가 기술한 미국 어린이들과 달랐다. 카너가 보기에 이들의 가장 특징적인 성향은 외견상 타인에게 무관심하며, 거의 완벽하게 고립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반면 아스퍼거의 소년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 특히 성인과 교류하기 위해 몹시 애를 쓰지만 관계는 불안으로 가득차 있으며, 따뜻함과 이해를 허용하지 않는 독특하고 까다로운 성격 때문에 관계맺기에 어려움을 겪는 것 같았다. 우정을 쌓지도못했는데, 그것은 다른 어린이들이 그들을 무자비하게 놀리고 괴롭혔기 때문이었다. 아스퍼거는 운동장이나 학교에 오가는 길에 이들이 괴롭히려고 달려드는 친구들과 싸움을 벌이는 모습을 여러 번보았다. 때때로 괴롭힘을 당한 어린이가 반격을 가하는 일도 있었다. 예를 들어 프리츠는 언젠가 망치를 들고 같은 반 아이 하나를 뒤쫓아간 적이 있으며, 소년들 중 몇몇은 제멋대로 행동한다는 이유로 1학년이나 2학년 때 퇴학을 당했다. 아스퍼거는 그들의 표정에서 정신이상의 징후를 보았으며, 때때로 눈에 "사악한 빛이 번뜩였다"고 적었다. 에른스트는 다른 어린이들뿐 아니라 교사와도 싸움을벌였으며, 하로는 상습적인 거짓말쟁이라고 묘사했다.
이렇듯 반사회적인 경향의 안쓰러운 악순환은 아스퍼거가 지적한 특이한 성향에 대해 사람들이 잔인한 반응을 보임으로써 더욱악화되었다. 소년들은 눈을 거의 마주치지 않았다. 시선은 "텅 빈 허공"을 향했다. 모든 것을 극단적으로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 나머지 눈썹을 치켜올린다든지, 어깨를 으쓱거린다든지, 한숨을 쉰다든지, 문장을 중간에서 끊는 등 타인의 비언어적 신호를 놓치곤 했다. 또한 동작이 매우 어설픈 경향이 있어 운동이나 놀이를 할 때 큰 골칫거리가 되곤 했다. 당연히 더 큰 놀림과 배척이 뒤따랐다. 카너의 중례와 크게 다른 또 한 가지 차이는 아스퍼거가 관찰한 어린이들이 대부분 극히 장황하게 말했다는 것이다. 단지 말이 많은 것이 아니었다.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성인에 가까운 말투를 구사했다. 문법이 지나치게 정확했고 온갖 어휘를 구사하는 바람에 때때로 이상하거나 성가시게 여겨졌다. 또한 문장철로의 배열 등 어느누구도 관심이 없는 한두 가지 주제에 푹 빠져 집착하는 경향이있었다. 억양 없는 말투로 거의 자동적으로 그 주제에 대한 말만 끝없이 늘어놓으며 주위 사람을 지루하거나 짜증나게 한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휘에 대한 타고난 재능이 오히려 사회적 관계에 걸림돌이 되었던 것이다. - P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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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첸이라는 종교적 존재를 일단 제쳐두고 보면, 위구르인 왕공 및 벡 관원들까지 포함한 건륭 칠순 잔치의 특별 하객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들은 한결같이 건륭의 치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청에 복속한 집단의 지도자들이었다. 두르베트, 우량하이, 위구르 무슬림 등의 복속은 1750년대 후반에 이루어진 제1차와 제2차 준가르 원정, 그리고 회부 원정의 결과였다. 금천 지역의 평정은 1747~1749년의 제1차 금천 원정과 1771~1775년의 제2차 금천 원정을 거쳐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 다섯 차례의 전쟁은 1792년 건륭제가 어제십전기御製十全記에서 스스로 자랑해 마지않은 이른바 ‘십전무공十全武功‘의 첫 번째에서 다섯 번째까지이다.
토르구트의 복속은 건륭의 시대에 성취한 무공의 결과는 아니었다. 하지만 토르구트는 신장 북부의 초원에서 살다가 1630년대 저 멀리 카스피해 북안의 볼가강 유역으로 떠난 유목민이었다. 그로부터 13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뒤 토르구트는 러시아의 압박에서 벗어나고자 막대한 희생을 감수하며 천신만고 끝에 1771 년 신장 북부의 초원으로 ‘귀향‘했다. 만 리 밖에서 제 발로 찾아온 셈이니. 건륭제의 입장에서 토르구트의 복속은 어떤 무공보다도 오히려 더 큰 자랑거리가 될 수 있었다. 토르구트의 복속을 정벌을 가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신속하러 온 ‘귀순‘으로 규정한 건륭제는, 이로써 "몽골에 속하는 모든 족속은 우리 대청국의 신하가 되지 않은 자가 없게 되었다고 기뻐하였다. - P113

1780년 열하에서 열린 칠순 잔치의 실상이 분명 상년례와는 질적으로 다른 일대 이벤트였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여기에는 물론 판첸의 방문이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판첸이 자신을 만나러 오겠다는 뜻을 밝혔을 때 만남의 장소를 베이징이 아닌 열하로 결정한 것은 바로 건륭 자신이었다. 건륭제는 또한 열하에 제국의 외번이 모두 모이는‘ 칠순 잔치를 준비했고(‘외번‘에 대해서는 다섯 번째 꼭지에서 자세히 설명하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몽골과 신장 지역의 왕공 귀족들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만 밝혀둔다), 앞에서 본 특별 하객들을 열하로 ‘초대‘하는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사실 1780년 열하에서 열린 칠순 잔치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건륭이었고, 판첸의 방문은 그의 칠순 잔치를 위해 활용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열하의 칠순 잔치는 건륭 자신이 이룩한 제국을 표상하는 기념비적 이벤트였다. 그것이 그저 우연이 아니라 건륭이 구상하고 추진한 ‘기획‘의 산물이었다면, 건륭제는 왕조의 의례 규범과는 다른 차원의 대경으로 자신의 칠순 생일을 기념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그럴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 P116

건륭의 칠순 만수절에 진하 특사를 파견하기로 하다

건륭 45년(1780) 정월 초하루, 청에서는 황제의 칠순을 기념하는 조서가 반포되었다. 조선은 외국 가운데 유일하게 이 조서의 반포 대상이 되었다.
황제가 조서를 보낼 때마다 조선에서는 감사의 뜻을 표하는 것이 ‘사대 외교‘의 규칙이었다. 게다가 청은 이 조서를 따로 파견한 칙사가 아니라, 황인점 일행의 귀국 편에 맡겨 보냈다. 이런 경우를 가리켜 ‘순부順付‘라고 하였다. 조서의 순부는 칙사 접대에 뒤따르기 마련인 조선의 행정적·재정적 부담을 덜어주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에 조선으로서는 더더욱 사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처럼 청에 대한 사은의 필요가 생긴 경우에는 어떤 방식을 취하여 사은할 것인지도 문제였다. 오로지 사은만을 위해 따로 사신을 파견할 것인가? 아니면, 조서의 순부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어차피 매년 보내기로 예정되어 있는 동지사 편에 사은의 표문과 방물을 맡겨 보낼 것인가?
전자를 가리켜 별사를 파견한다고 하고, 후자를 가리켜 표문을 ‘겸부兼付‘한다고 한다. - P134

 논의 결과, 정조는 삼월 20일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1725~1790)을 진하겸사은사의 정사로,
정원시鄭元始(1735~1782)를 부사로 임명하였다. 서장관 인선은 한 차례 변경을 거쳐 조정진(1732~1792)으로 최종 결정되었다.
이제부터는 금성위 박명원이 이끈 사행을 가리켜 ‘진하 특사‘라고 부르기로 한다. 전례가 없는 특별한 축하 사절이었으니 ‘특사‘라고 불러도 별문제가 없지 않을까 해서이다. 여기에 오늘날 외국에 특사를 파견할 때 국가 최고 지도자의 최측근 인사나 친인척을 임명하는 사례가 종종 있다는 점도 고려하였다. 정사로 임명된 박명원은 정조의 고모부였기에 바로 그런 종류의 특사에 속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1780 년 진하 특사 박명원에게 주어진 주된 임무는 물론 팔월 13일의 칠순 만수절을 축하하는 것이었지만, 공식 명칭이 ‘성절겸사은사‘가 아니라 ‘진하겸사은사進賀兼謝恩使‘였다는 점도 주의를 요한다. 칠순 만수절이라는 아주 특별한 성절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여느 성절에 대한 축하보다 격을 한 단계 높여 ‘진하‘라는 명목을 붙인 것이다. 방물 또한 진하의 사례에 맞추어 성절보다 많이 준비하였다.
한편 진하 표문의 날짜는 칠순 만수절 날짜에 맞춘 ‘건륭 45년 팔월 13일‘이었다. 앞서 서술했듯이, 건륭 44년까지의 성절 표문은 늦은 축하로 전달되었다. 그러나 건륭 45년의 진하 표문만은 진하 특사 파견에 의해 성절 당일에 전달되었다. 1645 년 병공 조치가 시행된 지 135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 P138

그러면 건륭이 칠순 잔치 장소를 열하로 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건륭은 칠순 생일 무렵 자신이 열하에 가 있으면 ‘외번이 모두 모일 수 있다고 했다. 이를 뒤집어 말하자면 베이징에서는 ‘외번‘이 모두 모이기 어렵다는 의미도 된다. 열하와 베이징 사이에는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었는가?
해답의 실마리는 천연두 문제에서 찾을 수 있다. 다섯 번째 꼭지에서 자세히 소개하겠지만, 청의 외번에 속하는 몽골의 왕공 귀족들은 정해진 순서에 따라 돌아가며 베이징을 직접 방문하여 정월 초하루의 하례에 참석하는 의무를 지고 있었다. 그러나 천연두 면역이 없는 왕공 귀족은 감염의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 한 베이징에 올 수 없었다. 한겨울의 베이징은 천연두 감염의 위험이 컸기 때문이다. 이에 건륭제는 천연두 면역이 없는 왕공 귀족을 위하여 매년 연말 베이징으로 오는 대신 팔월 중순 자신의 생일에 맞춰 열하로 오게 하였다. 만리장성 이북 지역은 남쪽보다는 천연두로부터 훨씬 더 안전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베이징은 천연두 면역이 없는 왕공들을 불러들이기에 부담스러운 장소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신장 지역에서 유목하던 두르베트나 토르구트의 왕공들은 당시 천연두 면역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베이징에서는 건륭이 바라는 대로 ‘외번이 모두 모이는‘ 환경을 만들기가 곤란했다. 반면에 열하에서라면 건륭제 자신이 ‘초청‘하고 싶은 ‘특별 하객‘들을 천연두에 대한 염려 없이 모이게 할 수 있었다. -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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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의 전과 같은 냉담한 태도, 공공연히 내비치는 저희들끼리의 튼튼한 연대감, 꿰뚫어 보는 듯한 그들의 눈길, 나에게는 이런 것으로 괴로워할 시간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나, 그들이 내어주었던 내가 끼어들 자리가 다시 그들만으로 메워졌다는 것은 견디기어려웠다. 나는 원점으로 돌아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 P115

찰스는 소매를 걷어 올린 채 웃으면서 건반을 더듬듯이 두드렸다. 그는처음부에서부터 탭댄서가 지그펠트 극장의 계단으로 오르는 대목을 연상시키는 까다로운 고음부의 당김음에 이르기까지 능수능란했다. 커밀라가찰스 옆에 앉은 채로 나를 보면서 웃었다. 의외의 미소라서 약간 놀라기는했지만 나도 웃음으로 커밀라의 웃음을 맞았다. 천장에 으스스하게 피아노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찰스의 연주에 깃든 절망적인 유쾌함에 어떤 추억, 이렇게 귀 기울여 앉아 듣고는 있지만 내가 결코 알지 못하는 추억이 더해지는 듯했다.
복엽기(復葉機) 날개 위에서의 찰스턴 춤, 가라앉는 배 위에서의 파티, 허리까지 물에 잠긴 오케스트라의 반주에 맞추어 용감하게도 마지막 ‘올드랭 사인‘을 부른 사람들. 그러나 사실 타이태닉호가 침몰할 당시 사람들이부른 노래는 ‘올드 랭 사인‘이 아니었다. 그것은 찬송가였다. 배 위에 닝자하게 퍼지는 찬송가, 가톨릭 신부가 부르는 마리아 찬가, 타이태닉호의 1등 선실은 프랜시스의 그 저택 서재와 비슷했을 것 같았다. 우중충한 나무, 화분에 심은 종려나무, 가두리에 장식 술이 출렁거리는 비단 등갓. 내가 술을너무 마신 모양이었다. 나는 팔걸이를 꼭 잡은 채 의자 등받이에 옆구리를대고 앉아 있었다(성모 마리아여). 그런데 서재 바닥이 침몰하는 타이태닉호의 갑판처럼 자꾸 기우뚱거리는 것 같았다. 기우뚱기우뚱하다가 우리 모두 가라앉을 것 같았다. 피아노는 물론 저택까지도. - P129

기억을 날짜별로 간추리는 작업은 재미있는 일이다. 프랜시스의 시골집에서 지내기 전의, 그 가을에 대한 나의 기억은 분명하지 못해서 아득하기만 하다. 그런데 시골집에 이르고부터는 그 기억이 명료하게, 그리고 때로는 유쾌하게 내 기억의 초점 위로 떠오르고는 한다. 그들과 교우하면서 취하던 나의 태도가 마네킹이었다면 이 마네킹이 하품을 하고 긴 잠에서 깬것은 바로 그 저택에서였다. 저택으로 가기 한 달 전만 하더라도 그들과의 관계는 내게는 생소한 일종의 신비 속에 싸여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었다. 그런데 그런 생소함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그들의 실제 모습은 이상화된 어떤 동아리보다 내게는 흥미로웠다.
내 기억에 따르면, 바로 그 저택에서 함께 지내게 되면서부터 그들이 지니던 생소함이 사라지면서 그들이 지닌 실제 모습대로 그 형상이 갖추어지기 시작했다. - P130

"아름답잖아, 이곳 아침은? 아름답기도 하거니와, 아침은 웬만큼 더러운것도 그런대로 볼만하게 만들거든."
"무슨 말인지 알겠다."
나는 그의 말이 무슨 말인지 정말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하루 중 플래노의 풍경이 그래도 견딜 만했던 것은 이른 아침뿐이었다. 아침 시각이라야 거리가 비고, 마른 풀, 쇠그물 울타리, 너도밤나무에 내리는 황금빛 빛줄기가 그나마 다정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 P136

우리는 모두 구두와 양말을 벗었다. 호변 쪽의 초록빛 물은 그렇게 맑을수가 없었다. 바닥의 자갈은 햇빛에 눈부시게 빛났다. 윗도리를 입는 것은물론 넥타이까지 맨 차림인데도 불구하고 바지를 무릎 높이까지 걷어 올리고 프랜시스 옆까지 다가간 헨리의 모습은, 초현실주의 회화에 그려진 구닥다리 은행가 같았다. 창백한 잎을 날리며 자작나무 사이로 불어온 바람은 커밀라의 옷을 하얀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게 했다. 커밀라는 웃으면서옷자락을 여몄으나 바람은 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시 처음처럼 옷을 부풀렀다.
나와 커밀라도 발이 잠길 정도의 깊이까지 들어갔다. 햇살은 호수의 물결에 환하게 부서졌다. 호수라기보다는 사하라사막에 나타남 직한 신기루같았다. 헨리와 프랜시스는 점점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하얀 가운 차림으로 요란하게 손짓을 해가며 떠들어대는 프랜시스와, 검은 양복 차림에 뒷짐을 진 채로 가만히 듣고 있는 헨리의 모습은, 포효하는 사막의 예언자와가만히 듣고 있는 악마의 모습을 연상하게 했다.
••••••
내게 커밀라는 공상의 실체였다. 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그리스에서 고딕 시대에 이르기까지, 산도둑에서 신들에 이르기까지 무한한 공상의 영역이 내 앞에 펼쳐지고는 했다. -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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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론그전부터 쇼플러는 센터에 있는 어린이들이 인형을 입으로 빨고, 연필의 냄새를 맡는 등 입과 코를 이용하여 세상을 탐색하는 행동에 관심이 있었다. 그는 어린이들이 "가까운" 감각을 이용하여 정보를 받아들이며, 이들에게는 이런 감각이 시각이나 청각 등 "먼"감각 보다 더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세웠다. 그는 베텔하임에게 장애학교 어린이들을 통해 가설을 검증해볼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베텔하임은 한마디로 거절했다. "왜 당신네 과학자들은 우리 임상가들이 다 아는 얘기를 항상 입증해야 한다고 법석을 피우는 거요?" 베텔하임은 쇼플러의 연구가 자폐증의 신경학적 기초에 대한 가설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정신분석이란 편향에 사로잡힌 그가 보기에는 어처구니없었다. "물론 나는 그렇게 멍청한 짓에 내 아이들을 빌려줄 수는 없소!"
쇼플러는 다른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연구를 마쳤다. 자폐 어린이들은 분명 "가까운 감각을 통한 정보 수집을 선호했다. 그 자체로흥미있는 통찰이자, 자폐증에 신경학적 독특함이 작용한다는 사실을 입증한 결과였다. 그럼에도 1964년 박사논문으로 발표한 이 연구는 나중에 쇼플러가 자폐증 분야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이란 평판을 얻은 것과 거의 관련이 없다. 그의 업적은 신경학이 아니라교육에 있었다. 최초로 자폐 어린이를 위한 학교들의 전국 네트워크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의 학교에서 부모들은 언제나 환영받았다. - P326

프로그램에 쓸 수 있는 자원은 보잘것없었지만, 쇼플러는 일찍방향을 정하고 충실히 따랐기 때문에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 부모들을 치료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부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그 원칙은 나중에 이바 로바스가 부모들을 교육시켜 ABA를 강화시킴으로써 치료 효과를 극대화하는 동시에 치료비를 절감할 수 있다고 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부모들에 대한 쇼플러의 헌신은 훨씬 깊은 것이었다. 쇼플러는 부모들을 단순히 값싸고 교육 가능한 보조인력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공동 치료사라고 불렀고, 부모들이 전문가에게 배우는 것만큼 전문가도 부모들에게 배울 점이 많다고 주장했다. 자폐증 학회에서 그는 가장 접근하기 쉬운 전문가였으며, 하루 종일 발표와 경험담이 이어진 뒤에도 늦게까지 남아 부모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부모를 참여시킨다는 생각은 그 뒤로도 연구의 중심이 되었다. 1971년 《현대심리치료저널Journal of Contemporary Psychotherapy)에 발표한 "희생양이 된 정신이상 어린이의 부모들"이란 논문에서 그는 동료 학자들에게 공식적으로 자신의 프로그램에서는 부모들이 "공동치료사로서 자녀의 사회화 과정에 성공적으로 참여했다"고 밝혔다. 같은 해, 《자폐증과 어린이 조현병 저널Journal of Autism and ChildhoodSchizophrenia》 창간호에 라이클러는 이렇게 썼다. "이제 자폐 어린이의 부모를 문제를 일으킨 사람으로 볼 것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로 보아야 한다." - P333

ABA 소송의 시대가 막을 올린 것이다.
캐서린 모리스의 책이 출간된 후 몇 년간, 자폐 부모들이 "전문가에게 접근하는 방식은 크게 달라졌다. 그전에는 대부분의 부모가 의사, 학교 교장, 정신과 의사, 기타 전문가에게 존경을 표했다. 힘있는 사람과 관계가 소원해져 자식에게 필요한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될까 우려해서였다. 끊임없이 노력하고 적극적인 것도 중요했지만, 너무 공격적으로 밀어붙이면 역효과가 날 수도 있었다. 이런 태달도는 1990년대 들어 부모들이 새로운 무기를 손에 쥐면서 크게라졌다. 바로 법이었다. 15년 전 발효된 장애아동교육법은 공립학교가 교육받기 원하는 모든 장애 어린이에게 적절한 교육을 제공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1990년에 통과된 장애인교육법은 이를 개정한것으로 사상 최초로 자폐증을 장애의 한 범주로 명시했다. 근본적인변화였다. 이제 모든 학교는 자폐 어린이의 필요에 따라 맞춤 교육프로그램을 제공할 의무가 있었다. 학교의 제안에 동의하지 않는부모는 소송을 제기할 권리가 법으로 보장되었다.
교육 관련 소송은 언제나 있었다. 부모들은 훈육방식을 바꾸기위해, 또는 여학생 야구부를 만들기 위해 학교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그래도 자폐 어린이의 교육이 문제가 된 일은 드물었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 각급 학교는 법학자들의 표현을 빌리면 끝없이밀려드는 "로바스 소송"으로 몸살을 앓았다. 법률 및 의학 분야 기자들은 ABA 치료비 지원 문제를 "법적으로 가장 관심이 뜨거운 주제"이자, "부모와 학교 양쪽에서 가장 큰 관심사"라고 썼다. 자폐를둘러싼 특수교육 소송의 비중은 특수교육이 필요한 학생 중 자폐인이 차지하는 비율의 열 배에 이르렀다. 자폐 부모가 자녀에게 더 많은 ABA를 시행하기 위해 법에 호소하는 경우가 지나치게 많다는 뜻이었다.
이런 다툼을 달가워하는 사람은 없었다. 법정싸움은 학교와 부모의 관계를 크게 악화시켰으며, 양쪽 모두 승리하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싸우는 과정에서 교육예산이 소송비용으로 줄줄 새는 모습은 모든 사람을 의기소침하게 했다.  - P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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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글

1780년의 열하를 가다

이 책의 제목 ‘1780 년, 열하로 간 정조의 사신들‘에서
‘1780 년‘과 ‘열하는 이야기의 중심을 차지하는 시·공간을 나타내고자 쓴 말이다. 역사에 상당한 조예가 있는 독자라도 1780 년에 도대체 어떤 중요한 일이 있었다는 거지?‘
라고 고개를 갸우뚱할 것 같다. 1780년은 지금까지 한국사에서 ‘아무 일도 없었던 해‘로 여겨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열하라는 지명은 한국의 독자들에게 전혀 낯설지 않다. 열하 하면 금방 [열하일기熱河日記]라는 책 제목이 머릿속에 떠오르기 때문이다. - P11

명 황제와 조선 국왕이 이와 같은 관계를지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기제는 1년에 몇 차례씩이나 있었던 사신의 왕래였다. 아무리 옛날이라 해도 사신의 왕래가 명과 조선의 관계에만 나타난 현상은 물론 아니었다. 오늘날의 대사관과 같은 외교관의 상주 제도가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국교를 맺은 나라끼리 사신을 주고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거꾸로, 정식으로 국교를 맺지 않은 관계에서라면 기껏해야 단발성의 사신 파견 정도가 가능할 뿐 사신의 잦은 왕래란 불가능하였다. 사신 왕래의 빈도가 곧 양국 관계의 친밀도를 반영하는 지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런 측면에서 명과 조선은 더할 나위 없이 친밀한 관계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명과 조선의 관계는 보통 ‘사대자소事大字小‘ 관계의 전형이라고 한다. 사대자소란 ‘약소국은 강대국을 지성으로 섬기고, 강대국은 약소국을 자애롭게 보살핀다‘는 의미이다. 대국과 소국의 관계를 마치 부모와 자식 사이 같은 따뜻한 관계에 빗댄 것이다. 관계의 실상이 정말 그러했다면, 약육강식의 냉혹한 국제 관계에 비하자면 정말 아름답기 그지없는 것이었다고 하겠다. 물론 주권 평등의 원칙을 무시한 것이므로 오늘날에는 절대 통할 수 없는 말이지만, 적어도 옛날 사람들한테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이야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이 강대국이 되고, 어느 쪽이 약소국의 입장에 설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문제였다. 청과 조선의 경우는 이게 정말 심각한 문제였다. 강대국과 약소국의 입장이 순식간에 뒤집혔기 때문이다.
조선은 명나라를 대국으로 섬기는 것을 당연시하였다.
마찬가지로 여진인들에게 섬김을 받는 것 또한 당연하게 여겼다. 훗날 청나라의 핵심을 형성하는 만주인들은 여진인들의 후예였고, 여진인들은 원래 조선 땅 동북쪽에 빌붙어 지내는 ‘오랑캐‘에 불과한 존재로 취급되었다.
조선 초기의 실록을 잠깐이라도 들여다보면 여진의 추장들이 때마다 예물을 바치러 찾아오고, 조선의 왕들이 선물을 하사하면서 그들을 다독이는 모습을 금세 찾을 수 있다.
말하자면, 여진은 조선을 섬기고 조선은 명을 섬기는 위계hierarchy질서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16세기 말까지는 그랬다. - P22

임조14년 병자년(1636) 이 월에 후금의 사신이 홍타이지를 황제로 추대하자는 취지의 요구를 들이밀었다. 이는 기존의 형제 관계를 군신 관계로 전환하자는 의미였다. 조선 조정에서는 척화론斥和論이 들끓었고, 후금의 사신은 거의 쫓겨나다시피 하면서 귀국길에 올랐다. 그러나 양국 관계가 곧바로 단절되지는 않았다. 조선 조정은 매년 봄마다 보내던 춘신사春信使를 그대로 파견하였다.
같은 해 사월, 홍타이지의 ‘황제 즉위식‘이 선양에서 거행되었다. 이제 홍타이지는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만주어로는 ‘고신 온초 후왈리야순 언두렁거 한Gosin Onco Hawaliyasun EndringgeHan)로 불리게 되었고, 이에 맞추어 국호는 대청국大淸國(만주어로는 ‘다이칭 구룬Daicing Gurun‘)으로, 연호는 천총에서 숭덕崇德으로 바뀌었다.
즉위식에서 홍타이지는 자신의 ‘칭제稱帝‘를 정당화하는 명분의 첫 번째로 ‘조선 정복‘의 업적을 내걸었는데, 이는 정묘호란의 성과를 과장한 것이었다. 그런데 마침 선양에 머물던 중 즉위식 현장으로 끌려간 조선의 사신들이 홍타이지에 대한 삼궤구고두를 완강하게 거부하는 바람에 황제 즉위식 현장에서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홍타이지는 아마도 조선의 사신들이 목숨이 아까워서라도 자신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의례를 고분고분 수행하리라 기대했던 것 같은데, 사신들은 자신들의 삼궤구고두 수행이 곧 조선 또한 홍타이지의 칭제에 동참했다는 의미가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터라 목숨을 걸고 저항한 것이다. 조선 사신들의 삼궤구고두 거부는 홍타이지가 칭제의 첫 번째 명분으로 내건 ‘조선 정복‘이 허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폭로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에 홍타이지는 자신의 칭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진짜로 조선을 정복하는 전쟁을 일으키기로 결심하였다.
조선 사신들이 흙탕물을 끼얹었다고 할 수 있는 즉위식으로부터 여덟 달이 지난 병자년 십이월 초, 홍타이지가 마침내 청의 대군을 직접 이끌고 오늘날 우리가 병자호란이라고 부르는 전면전을 개시했다.  - P31

조선은 국왕과 조정은 강화도로 건너가고, 각 지역의 군민은 평지의 성을 떠나 산성으로 들어가서 전쟁을 지구전으로 끌고 간다는 방어 전략을 세우고 청의 침공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전략을 미리 간파한 홍타이지는 개전 초기 서울을 곧바로 기습 타격하는 작전과 조선군의 산성 방어 거점들을 그대로 지나치는 작전을 구사했다. 홍타이지의 작전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청군의 선봉대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남하하였고, 전방 지역의 조선군은 그들의 초고속 진군을 저지하지 못했다. - P32

인조 15년 정축년(1637) 정월 중순, 남한산성 포위망을 완성한 청군은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면서 남한산성의 식량이 바닥나기를 기다리는 고사枯死작전을 구사하고 있었다. 아무리 일러도 이월 말은 되어야 전쟁을 끝낼 수 있으리라는 것이 홍타이지의 예상이었다. 그러나 청군 진영에 천연두 환자가 발생하는 바람에 홍타이지는 서둘러 전쟁을 끝내고 귀국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당시 홍타이지를 포함한 청군 지휘부는 대다수가 어려서 천연두를 앓은 적이 없기 때문에 평소에도 늘 천연두, 즉 마마의 공포에 쫓기며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마마 환자가 발발하면 감염을 피하고자 ‘자가격리‘를 위한 칩거에 들어가곤 했다. 전쟁에 나가더라도 감염의 위험이 높은 지역에서의 작전 참가는 기피하였다. 따라서 병자호란 당시 청군 진영의 천연두 발발은 홍타이지가 전쟁의 조기 종결을 추진하기에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었다. - P33

 오랑캐의 신변 안전 보장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인조는 성 대신에 홍타이지가 원래 원했던 군신 관계를 받아들임으로써 사실상의 항복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홍타이지는 인조의 출성을 고집했다.
인조의 출성 여부를 둘러싸고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진 가운데 청군은 인조의 출성을 압박하기 위해 한편으로는 남한산성을 공격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원래 예정보다 한 달가량을 앞당겨 강화도 점령 작전을 감행했다. 당시 강화도에는 종묘사직의 신주와 왕실 및 신료들의 가족이 피난을 가 있었던 터라, 청군의 강화도 점령은 남한산성의 농성 의지를 일거에 꺾고 인조의 출성을 이끄는 최후의 결정타가 될 수 있었다. - P35

 병자호란 무렵의 조선은 명이 많은 문제를 안고 있으며 국력도 크게 쇠퇴하였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겨우 10년도 지나지 않아 멸망의 길에 들어서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였다. 이 점에서는 명은 두말할 나위가 없거니와 심지어 청도 마찬가지였다. 1644년에 시작된 급변 사태는 그야말로 ‘천붕지열‘天崩地裂, 즉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것과 같은 충격이었다.
당시의 조선이 보기에 명의 멸망과 청의 중국 정복이라는 사건은 한바탕의 비극이 분명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나중에 조선에서는 거의 입에 올리지 않은, 어찌 보면 더 비극적인 사실이 한 가지 있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이 청의 동맹 세력에 편입되어 명과 싸웠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병자호란 직후 청이 눈엣가시와 같던 조선 연해 가도錦州주둔의 명군을 제거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 수군의 참전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명과 청이 요서초의 진저우 일대에서 운명을 걸고 벌인 한판 대결에서도 조선은 청을 위해 병력과 군량을 댔다. 1644년 섭정왕政王 도르곤(1612~1650) 이 이끄는 청군이 명의 수도 베이징에 입성할 때 소현세자昭顯世子(1612~1645)가 그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은 당시 조선의 비극적인 처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명의 멸망 이후 조선인들이 명에 대하여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면, 모르긴 몰라도 그 마음이 아마 조선을 이러한 비극적인 처지로 몰아넣은 청나라 오랑캐에 대한 원망으로 변환되어 삼전도의 치욕으로 생긴 원한을 증폭시키지 않았을까? - P40

영조는 긴 치세의 전반기 동안 ‘오랑캐의 운수는 100년을 가지 못한다‘는 역사의 가르침을 간직하며 청이 머지않아 멸망하리라는 기대를 품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실현되지 않았다. 청은 멸망하기는커녕 시간이 갈수록 세력과 판도를 키우더니 1760년경에 이르러서는 숙적 준가르를 절멸시키는 데 성공하여 공전의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이제 청의 멸망은 황하가 맑아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리 기다려도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이에 영조는 한편으로 황하가 맑아지는 기적의 날을 여전히 기다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중화 문명의 보존을 자임하였다. 앞의 인용문에서 보았듯이, 중원의 문물을 보존하면서 명 황제들에 대한 제사를 계속 이어가는 것이 조선의 도덕적 의무라고 여겼다. 영조는 1757년에도 "만약 황하가 맑아진다면, (중국은) 반드시 와서 우리나라를 본받을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는데, 중화의 보존은 영조에세 도덕적 의무이자 문화적 자존감의 원천인 동시에 조선의 역사적 사명이기도 하였다. - P58

1644년 명나라의 수도 베이징이 이자성李自成(1606~1645)이 이끄는 농민 반란군에게 떨어지고 숭정제가 자결하는 돌발 사태가 일어났다. 청나라는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십분 활용하여 베이징을 점령하고는 아예 자신들의 수도마저 그곳으로 옮겨버렸다. 이 사건은 보통 청의 입관이라고 불린다.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라고 하는 만리장성 동쪽 끝의 산해관 안쪽으로 들어왔다는 의미이다.
입관 전 시기 서울과 선양을 왕래하던 조선 사신들의 입장에서 청나라의 베이징 천도는 여행 거리와 기간, 그리고 여행으로 인한 노고가 대폭 증가함을 의미했다. 압록강을 건너 선양까지는 옛날 거리 단위로 540리에 불과했다. 대략 일주일 조금 넘게 가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러나 베이징까지는 무려 2,000리가 넘는 길이었다.  - P68

「이처럼 구월 · 시월 · 십일월에 잇따라 사신을 출발시켜야 했던 조선의 입장에서는 매우 다행스럽게도, 동지사겸 연공사 일행이 베이징에 도착한 음력 십일월에 청나라가 삼절, 즉 동지 · 정조·성절의 병공과 동시에 연공 방물의 감축을 발표하였다. 베이징 천도로 인해 조선 사신의 여정이 길어지면서 부담이 너무 커졌다는 것을 주된 이유로 제시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은 이듬해인 1645년부터 ‘1년 4행‘의무를 단 한 차례의 사신 파견으로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세 차례의 절사와 연공사를 합한 사행이었으므로 ‘삼절연공행三節年貢行‘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어떤 명절에 맞추어 보낼 것인지가 문제였다. 청나라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도 제시하였다. 그들은 정월 초하루, 즉 설날을 선택하였다. - P70

인조가 삼궤구고두를 올림으로써 홍타이지의 신하가 된 직후에 열린 연회에서 홍타이지는 인조를 그의 세 아들 소현세자, 봉림대군, 인평대군과 함께 단상에 올라와 자리를 잡도록 했다. 당시 단상의 자리 배치를 보면, 남쪽을 향해 앉은 홍타이지를 중심으로 왼쪽의 가장 상석에 인조가 앉았고, 그다음에 청의 공세 명과 소현세자가 순서대로 자리를 잡았다. 오른쪽에는 청의 왕공 네 명 다음에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이 앉았다. 삼전도 의례가 사실상 항복 의식이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자면, 이날의 연석에서 인조 부자를 단상으로 올라와 앉게 한 것도 뜻밖의 일인 터에 인조의 석차가 홍타이지 바로 다음이었다는 점은 더더욱 의외라고 하겠다.
인조를 제2위의 자리에 앉힌 것은 홍타이지의 결정이었다. 『청태종실록淸太宗實錄』에 따르면, 그가 이런 뜻밖의 결정을 하면서 내세운 이유는 비록 어쩔 수 없이 항복을 하긴 했지만 인조는 그래도 "역시 한 나라의 왕"이라는 것이었다. ‘한 나라의 왕‘이라는 구절은 만주어 기록에서 "다른 나라의왕"이라고 표현되어 있으니, 홍타이지는 인조를 엄연한 외국의 군주로 대우했다는 말이다. 조선의 기록도 이날의 잔치에서 홍타이지가 인조에 대한 존경과 우대의 뜻을 표한 사실을 밝히고 있다. 아마도 자신이 아는 범위의 세계에서 조선이 명나라 다음가는 대국이라는 인식의 발로였을 터이지만, 그 동기야 어쨌든 간에 이날 홍타이지의 인조에 대한 우대는 훗날 청 중심의 국제질서에서 조선이 높은 위상을 점하게 되는 역사적 연원이 되었다.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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