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헤르멜린과 오코너는 자폐증에 주의를 돌렸다. 실제로 작은 과제를주어 어린이들을 테스트하고, 그 과정을 측정하고 싶었다. 당시에는이런 일을 쓸데없는 짓으로 여겼다. 자폐 어린이는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소통하지 못하고 전혀 협조가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협조나 대화에 의한 의사소통을 하지 않고도 관찰과 측정과 정량이 가능한 신체적, 정신적 반응을 이끌어낼 방법이 있으리라 믿었다. 괴상한 나무 상자는 이런 목표를 염두에 두고 만든 것이었다. 상자 안쪽은 완전히 까맣게 칠했다. 어린이가 머리를 들이미는 큰 구멍의 반대쪽에는 연구자가 상자 안에서 어린이의 표정이 어떻게 변하는지 관찰하기 위해 아주 작은 구멍을 하나 더 뚫었다.
그날 연구를 위해 마련된 작은 방을 찾은 어린이는 스물다섯 명이 넘었다. 어떤 아이는 단순한 호기심에서, 어떤 아이는 사탕을 준다는 꾀임에 넘어가 상자 안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처음 몇 초간 아이들의 눈에는 온통 깜깜한 공간만 보일 뿐이었다. 그러다 갑자기환한 조명이 밝혀지며 저쪽 어두운 구석에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실 상자 뒤쪽에 실제로 한 사람이 서 있다가 세 번째 구멍으로얼굴을 들이민 것이었다. 그 사람은 10초간 눈을 감았다 떴다. 30초가 지나면 조명이 꺼지고 상자 안은 다시 깜깜해졌다. 오코너와 헤르멜린은 아이들의 눈이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관심이 있었다. 조명이 켜졌을 때 어린이들이 어디를 얼마나 오래 바라보는지 기록하고, 같은 어린이에게 비슷하지만 한가지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 실험을 몇 번 반복하여 결과를 비교했다. 두 번째 실험에서는 조명이 들어왔을 때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한쌍의 흰색 카드를 세워놓고 그 위에 다양한 그림과 추상적인 기하학적 형태들 그리고 사진으로 찍은 사람의 얼굴이 나타나도록 했다. 지시에 따라 협조를 잘 해준 28명의 어린이를 모두 검사하는 데 몇 시간이 걸렸다.
다음날 헤르멜린과 오코너는 다른 학교로 가서 대략 비슷한 숫자의 어린이에게 똑같은 실험을 수행했다. 이들은 첫 번째 그룹과 소위 정신연령을 일치시켰으므로 실제 연령은 더 어렸다. 자폐증 어린이가 아닌 대조군이었다. 실험이 끝나자 오코너와 헤르멜린은 데이터를 분석했다. 전체적으로 자폐 어린이들은 상자의 어둡고 텅빈 공간에 주의를 기울이는 정도가 대조군과 크게 달랐다. 시선의 방향으로 봤을 때 대조군은 어둠에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반면 자폐 어린이들은 아무런 형체도 없는 텅 빈 공간과 그림자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극히 근소한 차이였으나, 차이는 분명 존재했다. 또한 그 차이는 헤르멜린과 오코너가 추구했던 일련의 질문에 전형적으로 나타난 소견이었다. 그들은 5년간 이런 식으로 꼼꼼하게 실험을 계속하여 세상에 관한 정보를 처리할 때 자폐 어린이가 나타내는 극히 작지만 정량화할 수 있는 차이를 꾸준히 밝혀냈다. 예를 들어 많은 자폐어린이가 보고듣는 것보다 촉감을 통해 더 많은 정보를 받아들였다. 전체적으로 그들은 다양한 데이터를 통해 자폐증에 신경학적원인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드디어 자폐증이 엄마의 사랑이 아니라 뇌와 관련되어 있다는 증거가 나온 것이다. - P396

레오 카너가 도널드 트리플렛과 다른 열 명의 어린이를 모델로자폐증이란 상태를 최초로 기술한 지 20년쯤 된 시점이었다. 하지만 20년간 자폐증이란 상태의 윤곽은 오히려 점점 흐려졌다. 수많은 전문가들의 목소리가 끼어들면서 정확한 정의는 갈수록 모호해졌다. 이미 1955년에 카너 자신도 "한두 가지 고립된 증상"을 가지고 부정확하고 엉성한 진단이 너무 많이 내려진다며 투덜거린 적이있었다. 그는 자신이 제시한 개념 전체가 일관성없는 표준들에 의해 계속 희석된다며 조바심을 냈다. 그는 이렇게 썼다. "하루아침에 이 나라에는 수많은 자폐 어린이가 살게 된 것 같다."
정신의학계 외부에 있는 사람이 보기에는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은 자폐증은 자폐증일 뿐이라고 생각할 것이었다. 그렇게 단순하고 객관적이며 변하지 않는 사실이 뭐가 문제란말인가? 하지만 사정은 그리 간단치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결코 간단치 않을 것이다. 일단 자폐증에는 생물학적 표지가 없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혈액검사로 뭔가를 측정하거나, 뺨 안쪽에서 면봉으로 검체를 채취하여 확인할 수 없다는 뜻이다. 오로지 어떤 사람의 행동을 관찰하고 해석하는 방법으로만 진단할 수 있다. 결국 어느 정도 판단의 주관성을 피할 수 없다. 특히 카너가 중요한 판단기준이라고 했던 "지적이고 수심어린 표정이라든지 "사물에 대한 애정어린 관계"와 같은 표현이 모호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이런 기준에 따른 의사들의 해석이 저마다 달랐으므로 진단의 불일치를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는 물론 그 후로도 오랫동안 자폐증이란 진단은 제눈에 안경에 불과했다. - P400

체크리스트는 22개 항목으로 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낸다.
돌맹이나 금속 등 희한한 물건들을 갖고 다니거나 수집한다.
종종 ‘특별‘하거나 특이한 목소리로 말한다.
신체의 움직임이 매우 어설프거나 어색하다.
사물을 특이한 방식으로 조사한다. 예를 들어 쿵쿵거리며 냄새를 맡거나 이빨로 물어본다.

로터는 설문 항목을 즉흥적으로 정했다. 우선 레오 카너가 자폐증의 본질이라고 주장했던 두 가지 기준, 즉 극단적인 자기고립과 동일함을 유지하려는 강박적인 고집을 큰 축으로 삼았다. 그리고특이하게 유쾌한 이름을 지닌 "크릭의 항목 기준Creak‘s Nine Points "이란 두 번째 진단기준을 차용했다. 1961년 5월 영국의학저널BritishMedical Journal)에 발표된 이 기준은 당시 자폐 행동을 나타내는 어린이를 기술하는 데 별생각없이 사용되었던 다양한 용어 중 하나인
"어린이 조현병적 증후군"의 정의라고 발표된 것이었다.
런던의 유명한 정신과 의사였던 밀드리드 크릭 Mildred Creak 은 열세 명으로 구성된 전문 위원회 의장을 맡아 9개월간 논쟁과 협의를벌인 끝에 급작스럽고 과도하며 외견상 비논리적인 불안", 이상한동작과 자세, "뚜렷한 개인 정체성 불인지" 등의 특징을 전체적인양상에 추가하여 하나의 증상 목록을 만들었다. 이렇게 전문가들이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9항목 기준 역시 임상진료에 사용하기에는 모호하고 혼란스러웠다. - P402

결과는 명백했다. 무작위적인 단어 목록을 제시했을 때 자폐 어린이는 비자폐 어린이와 똑같이 여덟 단어 대부분을 반복했으며, 사실 목록 마지막에 있는 몇 단어를 기억해내는 데는 더 좋은 성적을보였다. 하지만 어느 정도 의미가 통하는 목록을 제시했을 때는 비자폐 어린이들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분명 그들은 단어의 배열 속에 내재된 문장을 인식하고, 그런 인식을 이용해 목록에 있는 모든 단어를 기억해냈다. 하지만 자폐 어린이는 "이제 우리에게 편지를 써"라는 말을 "고양이 떨어져서 뒤로 갈퀴"만큼이나 무작위적이라고 인식하는 것 같았다. 그들의 뇌는 언어가 규칙을 갖고 배열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단어들이한테 보여 어떤 의미를 가져도 그 의미가 단어들을 기억하는 데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니, 그 의미를 듣지 못했다.
이 대목에서 프리스는 전날 밤 열심히 만든 카드들을 꺼냈다. 카드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집, 오리, 가위, 우산 같은 일상적인물체들이 간략한 선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그녀는 아이들 앞에 그림이 위로 가도록 네 장의 카드를 특정한 순서에 따라 놓아두었다. 조금 있다가 카드의 순서를 마구 뒤섞은 후, 다시 원래 순서로 늘어놓으라고 시켰다. 이번에도 순서 속에 기억을 돕기 위한 단서가 있었다. 카드들은 사건이 일어나는 논리적 순서에 맞게 배열되었다. 불이 켜진 촛불 그림 다음에는 똑같이 생긴 초가 거의 다 녹아 짧아진 모습을 그린 카드가 놓였다. 컵 속에 삶은 달걀이 들어 있는 카드옆에는 같은 컵 속에 껍질이 벗겨진 채 반쯤 먹은 달걀이 들어 있는모습을 그린 카드가 놓였다.
이처럼 순수하게 시각적 기억을 검사하는 실험에서 비자폐 어린이는 역시 시각적 단서에서 의미를 추정하여 좋은 성적을 냈다. 하지만 자폐 어린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점수는 대조군의 점수와사실상 같았다. 이렇게 흥미로운 결과로 인해 이 실험은 자폐 분야의 고전적인 연구로 손꼽힌다. 여기서 한 가지 강력한 가설이 제시되었다. 자폐 어린이가 비록 언어의 섬세한 구조와 그 안에 담긴 의미의 일부를 인지하지 못한다고 해도, 비언어적 수단을 통해 제공된 정보에서 의미를 추론하는 능력은 뛰어나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런 결과는 다시 한번 자폐 어린이가 청각보다 시각을 통한 학습에 훨씬 적절히 반응한다는 사실을 시사했다. 이런 통찰은 다른 실험에서 몇 번이고 재현되었을 뿐 아니라, 이후 교육방법을 개발하는 데도 필수적인 고려사항이 되었다. - P410

두 명 모두 자폐증이었던 네 쌍은 모두 일란성 쌍둥이였다. DNA 일치율이 쌍둥이가 아닌 형제자매와 마찬가지인 이란성 쌍둥이 중에 두 명이 모두 자폐증인 경우는 한 건도 없었다. 표본크기가 매우 작았지만 극명한 차이였다. 결론은 명백했다. 유전은 자폐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폴스타인이 지적했듯 가족 내에서 두 명의 어린이가 자폐증일 확률은 1/50로 매우 낮은 편이다. 하지만 일란성 쌍둥이에서 이 확률은 무려 1/3로 뛰어올랐다. 우연의 일치일 수는 없었다. 유전은 분명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 P419

1980년대 중반, 자폐증에 관해서라면 할말이 매우 많은 여성이 그특징을 완벽하게 포착한다고 생각되는 단어를 떠올렸다. 바로 "연속선continum "이다. 이 단어는 자폐적 특성이 매우 다양한 지적 및 사회적 능력을 지닌 사람에게 매우 다양한 강도와 조합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잘 표현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단순히 중증에서 경증에 이르는 직선이 아니라, 적지 않은 복잡성을 내포한 개념"이라고설명했다. 그러나 오래도록 "자폐증 연속선"에 대해 많은 글을 쓴후 훨씬 좋은 말이 떠올랐다. "자폐 스펙트럼"이다. 이 말은 자폐증을 해석하고, 자폐증에 반응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버렸다. 또한 정치와 사회와 과학 분야에 폭넓은 영향을 미쳤다. 간단히 말해 그때 로나 윙이 용어를 바꾸기로 결정한 것은 이후 자폐증을 둘러싼 모든 이야기를 바꿔버렸다. - P431

좁고 엄격한 정의가 실패했다고 해서 자폐증이 의미있는 형태를 갖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로나 윙과 굴드는 자폐증의 가장 중요한 특성들을 아우르는 "세 가지 핵심증상triad of impairment"이란 개념틀을 제안했다. 우선 뭔가를 주고받는 사회적 기술의 장애를 들었다. 두 번째는 비음성언어를 포함한 언어적 소통 관련 장애였다. 세 번째는 윙이 "사회적 상상력"이라고 부른 예컨대 가상놀이에 필요한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세 가지 핵심증상이란 개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융통성과 가변성이었다. 윙은이 개념를 내에서 자폐성향이 무한히 다양한 조합과 강도로 나타날수 있으며, 때로는 "정확히 정상과의 경계선상에 걸려 있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대담하게도 위대한 카너조차 이런 큰 그림을 보지 못했다고 단언했다. 처음에는 이런 개념을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연속선"이란 단어를 사용했고, 저서에도 "자폐성향의 연속선The Continuum of Autistic Traits "이란 장이 있었지만, 1988년에 이르면 똑같은 목적으로 "스펙트럼"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 P439

아스퍼거의 어린이들은 중요한 몇 가지 측면에서 약 1년 전에 카너가 기술한 미국 어린이들과 달랐다. 카너가 보기에 이들의 가장 특징적인 성향은 외견상 타인에게 무관심하며, 거의 완벽하게 고립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반면 아스퍼거의 소년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 특히 성인과 교류하기 위해 몹시 애를 쓰지만 관계는 불안으로 가득차 있으며, 따뜻함과 이해를 허용하지 않는 독특하고 까다로운 성격 때문에 관계맺기에 어려움을 겪는 것 같았다. 우정을 쌓지도못했는데, 그것은 다른 어린이들이 그들을 무자비하게 놀리고 괴롭혔기 때문이었다. 아스퍼거는 운동장이나 학교에 오가는 길에 이들이 괴롭히려고 달려드는 친구들과 싸움을 벌이는 모습을 여러 번보았다. 때때로 괴롭힘을 당한 어린이가 반격을 가하는 일도 있었다. 예를 들어 프리츠는 언젠가 망치를 들고 같은 반 아이 하나를 뒤쫓아간 적이 있으며, 소년들 중 몇몇은 제멋대로 행동한다는 이유로 1학년이나 2학년 때 퇴학을 당했다. 아스퍼거는 그들의 표정에서 정신이상의 징후를 보았으며, 때때로 눈에 "사악한 빛이 번뜩였다"고 적었다. 에른스트는 다른 어린이들뿐 아니라 교사와도 싸움을벌였으며, 하로는 상습적인 거짓말쟁이라고 묘사했다.
이렇듯 반사회적인 경향의 안쓰러운 악순환은 아스퍼거가 지적한 특이한 성향에 대해 사람들이 잔인한 반응을 보임으로써 더욱악화되었다. 소년들은 눈을 거의 마주치지 않았다. 시선은 "텅 빈 허공"을 향했다. 모든 것을 극단적으로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 나머지 눈썹을 치켜올린다든지, 어깨를 으쓱거린다든지, 한숨을 쉰다든지, 문장을 중간에서 끊는 등 타인의 비언어적 신호를 놓치곤 했다. 또한 동작이 매우 어설픈 경향이 있어 운동이나 놀이를 할 때 큰 골칫거리가 되곤 했다. 당연히 더 큰 놀림과 배척이 뒤따랐다. 카너의 중례와 크게 다른 또 한 가지 차이는 아스퍼거가 관찰한 어린이들이 대부분 극히 장황하게 말했다는 것이다. 단지 말이 많은 것이 아니었다.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성인에 가까운 말투를 구사했다. 문법이 지나치게 정확했고 온갖 어휘를 구사하는 바람에 때때로 이상하거나 성가시게 여겨졌다. 또한 문장철로의 배열 등 어느누구도 관심이 없는 한두 가지 주제에 푹 빠져 집착하는 경향이있었다. 억양 없는 말투로 거의 자동적으로 그 주제에 대한 말만 끝없이 늘어놓으며 주위 사람을 지루하거나 짜증나게 한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휘에 대한 타고난 재능이 오히려 사회적 관계에 걸림돌이 되었던 것이다. - P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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