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의 전과 같은 냉담한 태도, 공공연히 내비치는 저희들끼리의 튼튼한 연대감, 꿰뚫어 보는 듯한 그들의 눈길, 나에게는 이런 것으로 괴로워할 시간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나, 그들이 내어주었던 내가 끼어들 자리가 다시 그들만으로 메워졌다는 것은 견디기어려웠다. 나는 원점으로 돌아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 P115
찰스는 소매를 걷어 올린 채 웃으면서 건반을 더듬듯이 두드렸다. 그는처음부에서부터 탭댄서가 지그펠트 극장의 계단으로 오르는 대목을 연상시키는 까다로운 고음부의 당김음에 이르기까지 능수능란했다. 커밀라가찰스 옆에 앉은 채로 나를 보면서 웃었다. 의외의 미소라서 약간 놀라기는했지만 나도 웃음으로 커밀라의 웃음을 맞았다. 천장에 으스스하게 피아노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찰스의 연주에 깃든 절망적인 유쾌함에 어떤 추억, 이렇게 귀 기울여 앉아 듣고는 있지만 내가 결코 알지 못하는 추억이 더해지는 듯했다. 복엽기(復葉機) 날개 위에서의 찰스턴 춤, 가라앉는 배 위에서의 파티, 허리까지 물에 잠긴 오케스트라의 반주에 맞추어 용감하게도 마지막 ‘올드랭 사인‘을 부른 사람들. 그러나 사실 타이태닉호가 침몰할 당시 사람들이부른 노래는 ‘올드 랭 사인‘이 아니었다. 그것은 찬송가였다. 배 위에 닝자하게 퍼지는 찬송가, 가톨릭 신부가 부르는 마리아 찬가, 타이태닉호의 1등 선실은 프랜시스의 그 저택 서재와 비슷했을 것 같았다. 우중충한 나무, 화분에 심은 종려나무, 가두리에 장식 술이 출렁거리는 비단 등갓. 내가 술을너무 마신 모양이었다. 나는 팔걸이를 꼭 잡은 채 의자 등받이에 옆구리를대고 앉아 있었다(성모 마리아여). 그런데 서재 바닥이 침몰하는 타이태닉호의 갑판처럼 자꾸 기우뚱거리는 것 같았다. 기우뚱기우뚱하다가 우리 모두 가라앉을 것 같았다. 피아노는 물론 저택까지도. - P129
기억을 날짜별로 간추리는 작업은 재미있는 일이다. 프랜시스의 시골집에서 지내기 전의, 그 가을에 대한 나의 기억은 분명하지 못해서 아득하기만 하다. 그런데 시골집에 이르고부터는 그 기억이 명료하게, 그리고 때로는 유쾌하게 내 기억의 초점 위로 떠오르고는 한다. 그들과 교우하면서 취하던 나의 태도가 마네킹이었다면 이 마네킹이 하품을 하고 긴 잠에서 깬것은 바로 그 저택에서였다. 저택으로 가기 한 달 전만 하더라도 그들과의 관계는 내게는 생소한 일종의 신비 속에 싸여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었다. 그런데 그런 생소함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그들의 실제 모습은 이상화된 어떤 동아리보다 내게는 흥미로웠다. 내 기억에 따르면, 바로 그 저택에서 함께 지내게 되면서부터 그들이 지니던 생소함이 사라지면서 그들이 지닌 실제 모습대로 그 형상이 갖추어지기 시작했다. - P130
"아름답잖아, 이곳 아침은? 아름답기도 하거니와, 아침은 웬만큼 더러운것도 그런대로 볼만하게 만들거든." "무슨 말인지 알겠다." 나는 그의 말이 무슨 말인지 정말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하루 중 플래노의 풍경이 그래도 견딜 만했던 것은 이른 아침뿐이었다. 아침 시각이라야 거리가 비고, 마른 풀, 쇠그물 울타리, 너도밤나무에 내리는 황금빛 빛줄기가 그나마 다정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 P136
우리는 모두 구두와 양말을 벗었다. 호변 쪽의 초록빛 물은 그렇게 맑을수가 없었다. 바닥의 자갈은 햇빛에 눈부시게 빛났다. 윗도리를 입는 것은물론 넥타이까지 맨 차림인데도 불구하고 바지를 무릎 높이까지 걷어 올리고 프랜시스 옆까지 다가간 헨리의 모습은, 초현실주의 회화에 그려진 구닥다리 은행가 같았다. 창백한 잎을 날리며 자작나무 사이로 불어온 바람은 커밀라의 옷을 하얀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게 했다. 커밀라는 웃으면서옷자락을 여몄으나 바람은 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시 처음처럼 옷을 부풀렀다. 나와 커밀라도 발이 잠길 정도의 깊이까지 들어갔다. 햇살은 호수의 물결에 환하게 부서졌다. 호수라기보다는 사하라사막에 나타남 직한 신기루같았다. 헨리와 프랜시스는 점점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하얀 가운 차림으로 요란하게 손짓을 해가며 떠들어대는 프랜시스와, 검은 양복 차림에 뒷짐을 진 채로 가만히 듣고 있는 헨리의 모습은, 포효하는 사막의 예언자와가만히 듣고 있는 악마의 모습을 연상하게 했다. •••••• 내게 커밀라는 공상의 실체였다. 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그리스에서 고딕 시대에 이르기까지, 산도둑에서 신들에 이르기까지 무한한 공상의 영역이 내 앞에 펼쳐지고는 했다. -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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