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첸이라는 종교적 존재를 일단 제쳐두고 보면, 위구르인 왕공 및 벡 관원들까지 포함한 건륭 칠순 잔치의 특별 하객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들은 한결같이 건륭의 치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청에 복속한 집단의 지도자들이었다. 두르베트, 우량하이, 위구르 무슬림 등의 복속은 1750년대 후반에 이루어진 제1차와 제2차 준가르 원정, 그리고 회부 원정의 결과였다. 금천 지역의 평정은 1747~1749년의 제1차 금천 원정과 1771~1775년의 제2차 금천 원정을 거쳐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 다섯 차례의 전쟁은 1792년 건륭제가 어제십전기御製十全記에서 스스로 자랑해 마지않은 이른바 ‘십전무공十全武功‘의 첫 번째에서 다섯 번째까지이다. 토르구트의 복속은 건륭의 시대에 성취한 무공의 결과는 아니었다. 하지만 토르구트는 신장 북부의 초원에서 살다가 1630년대 저 멀리 카스피해 북안의 볼가강 유역으로 떠난 유목민이었다. 그로부터 13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뒤 토르구트는 러시아의 압박에서 벗어나고자 막대한 희생을 감수하며 천신만고 끝에 1771 년 신장 북부의 초원으로 ‘귀향‘했다. 만 리 밖에서 제 발로 찾아온 셈이니. 건륭제의 입장에서 토르구트의 복속은 어떤 무공보다도 오히려 더 큰 자랑거리가 될 수 있었다. 토르구트의 복속을 정벌을 가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신속하러 온 ‘귀순‘으로 규정한 건륭제는, 이로써 "몽골에 속하는 모든 족속은 우리 대청국의 신하가 되지 않은 자가 없게 되었다고 기뻐하였다. - P113
1780년 열하에서 열린 칠순 잔치의 실상이 분명 상년례와는 질적으로 다른 일대 이벤트였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여기에는 물론 판첸의 방문이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판첸이 자신을 만나러 오겠다는 뜻을 밝혔을 때 만남의 장소를 베이징이 아닌 열하로 결정한 것은 바로 건륭 자신이었다. 건륭제는 또한 열하에 제국의 외번이 모두 모이는‘ 칠순 잔치를 준비했고(‘외번‘에 대해서는 다섯 번째 꼭지에서 자세히 설명하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몽골과 신장 지역의 왕공 귀족들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만 밝혀둔다), 앞에서 본 특별 하객들을 열하로 ‘초대‘하는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사실 1780년 열하에서 열린 칠순 잔치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건륭이었고, 판첸의 방문은 그의 칠순 잔치를 위해 활용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열하의 칠순 잔치는 건륭 자신이 이룩한 제국을 표상하는 기념비적 이벤트였다. 그것이 그저 우연이 아니라 건륭이 구상하고 추진한 ‘기획‘의 산물이었다면, 건륭제는 왕조의 의례 규범과는 다른 차원의 대경으로 자신의 칠순 생일을 기념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그럴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 P116
건륭의 칠순 만수절에 진하 특사를 파견하기로 하다
건륭 45년(1780) 정월 초하루, 청에서는 황제의 칠순을 기념하는 조서가 반포되었다. 조선은 외국 가운데 유일하게 이 조서의 반포 대상이 되었다. 황제가 조서를 보낼 때마다 조선에서는 감사의 뜻을 표하는 것이 ‘사대 외교‘의 규칙이었다. 게다가 청은 이 조서를 따로 파견한 칙사가 아니라, 황인점 일행의 귀국 편에 맡겨 보냈다. 이런 경우를 가리켜 ‘순부順付‘라고 하였다. 조서의 순부는 칙사 접대에 뒤따르기 마련인 조선의 행정적·재정적 부담을 덜어주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에 조선으로서는 더더욱 사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처럼 청에 대한 사은의 필요가 생긴 경우에는 어떤 방식을 취하여 사은할 것인지도 문제였다. 오로지 사은만을 위해 따로 사신을 파견할 것인가? 아니면, 조서의 순부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어차피 매년 보내기로 예정되어 있는 동지사 편에 사은의 표문과 방물을 맡겨 보낼 것인가? 전자를 가리켜 별사를 파견한다고 하고, 후자를 가리켜 표문을 ‘겸부兼付‘한다고 한다. - P134
논의 결과, 정조는 삼월 20일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1725~1790)을 진하겸사은사의 정사로, 정원시鄭元始(1735~1782)를 부사로 임명하였다. 서장관 인선은 한 차례 변경을 거쳐 조정진(1732~1792)으로 최종 결정되었다. 이제부터는 금성위 박명원이 이끈 사행을 가리켜 ‘진하 특사‘라고 부르기로 한다. 전례가 없는 특별한 축하 사절이었으니 ‘특사‘라고 불러도 별문제가 없지 않을까 해서이다. 여기에 오늘날 외국에 특사를 파견할 때 국가 최고 지도자의 최측근 인사나 친인척을 임명하는 사례가 종종 있다는 점도 고려하였다. 정사로 임명된 박명원은 정조의 고모부였기에 바로 그런 종류의 특사에 속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1780 년 진하 특사 박명원에게 주어진 주된 임무는 물론 팔월 13일의 칠순 만수절을 축하하는 것이었지만, 공식 명칭이 ‘성절겸사은사‘가 아니라 ‘진하겸사은사進賀兼謝恩使‘였다는 점도 주의를 요한다. 칠순 만수절이라는 아주 특별한 성절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여느 성절에 대한 축하보다 격을 한 단계 높여 ‘진하‘라는 명목을 붙인 것이다. 방물 또한 진하의 사례에 맞추어 성절보다 많이 준비하였다. 한편 진하 표문의 날짜는 칠순 만수절 날짜에 맞춘 ‘건륭 45년 팔월 13일‘이었다. 앞서 서술했듯이, 건륭 44년까지의 성절 표문은 늦은 축하로 전달되었다. 그러나 건륭 45년의 진하 표문만은 진하 특사 파견에 의해 성절 당일에 전달되었다. 1645 년 병공 조치가 시행된 지 135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 P138
그러면 건륭이 칠순 잔치 장소를 열하로 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건륭은 칠순 생일 무렵 자신이 열하에 가 있으면 ‘외번이 모두 모일 수 있다고 했다. 이를 뒤집어 말하자면 베이징에서는 ‘외번‘이 모두 모이기 어렵다는 의미도 된다. 열하와 베이징 사이에는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었는가? 해답의 실마리는 천연두 문제에서 찾을 수 있다. 다섯 번째 꼭지에서 자세히 소개하겠지만, 청의 외번에 속하는 몽골의 왕공 귀족들은 정해진 순서에 따라 돌아가며 베이징을 직접 방문하여 정월 초하루의 하례에 참석하는 의무를 지고 있었다. 그러나 천연두 면역이 없는 왕공 귀족은 감염의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 한 베이징에 올 수 없었다. 한겨울의 베이징은 천연두 감염의 위험이 컸기 때문이다. 이에 건륭제는 천연두 면역이 없는 왕공 귀족을 위하여 매년 연말 베이징으로 오는 대신 팔월 중순 자신의 생일에 맞춰 열하로 오게 하였다. 만리장성 이북 지역은 남쪽보다는 천연두로부터 훨씬 더 안전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베이징은 천연두 면역이 없는 왕공들을 불러들이기에 부담스러운 장소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신장 지역에서 유목하던 두르베트나 토르구트의 왕공들은 당시 천연두 면역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베이징에서는 건륭이 바라는 대로 ‘외번이 모두 모이는‘ 환경을 만들기가 곤란했다. 반면에 열하에서라면 건륭제 자신이 ‘초청‘하고 싶은 ‘특별 하객‘들을 천연두에 대한 염려 없이 모이게 할 수 있었다. -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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